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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용현마애불삼존상, 보원사지
개심사, 문수사, 해미읍성. 간월암을 다녀와서!
2019년4월26일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5060" 길동무 동호회에서
장소로 정한 충청남도 서산 꽃나들이를 가기위해 새벽 04:40분에 기상하여
종로3가에 가서 07:00시에 미즈호 관광버스에 승차하여 가다가 서해안고속
도로 행담도휴게소에 들러 조반식사를 겸한 30분간의 휴게시간을 갖고는
목적지를 향해가다 용현암자에 들러 마에불상을 관람하고는 다시 버스로 이동
하여 보원 사지에 들러 폐허가 된 절터에 남아있는 잔해와 출토된 석물들을
관람하고 벚꽃이 지고 지금은 왕벚꽃이 만개했다는 개심사로 이동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ㄷ자 형태의 상왕산(象王山)이 양팔을 벌려 안은 듯한 고풍스런
전각(殿閣)들 사이사이에 왕벚꽃이 만개하여 대자연이 꽃을 반기는 사람들
에게 선물해준 것 같은 진풍경(
행담도휴게소는 서해안 고속 도로를 이용하는 이용객 중 연간 1,000만명
이상이 들러 가는 공간이다. 서해 대교를 이용하는 차량은 상행선과 하행선
양방향 합계 하루 평균 10만 대에 이른다. 행담도휴게소에 근무하는 운영
업체의 직원 수만도 500여 명에 이른다. 행담도휴게소의 음식 코너는
한식·일식·중식·양식을 자유롭게 골라 먹을 수 있는 그린테리아 등 전문 음식
매장이 운영 중이고, 커피 등 식음료 전문점과 고속 도로 휴게소의 전통적인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주유소와 LPG 충전소,
전기 자동차 충전기가 설치되어 있고, 전국 고속 도로 휴게소 중 유일하게
24시간 견인이 가능한 차량 정비소도 운영 중이다. 주차 시설은 휴게소
전·후면 및 지하 주차장을 포함하여 1,600대의 동시 주차가 가능하고 할인
매장 주차장까지 포함하면 2,060대의 동시 주차가 가능하다. 한편 행담도
휴게소에는 충청남도 홍보관과 서해 대교 관리소도 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
국보 제84호. 높이 2.8m.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 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부여로 가던 행로상에 있다. 즉 태안반도에서 서산마애불이 있는 가야산
계곡을 따라 계속 전진하면 부여로 가는 지름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은 예로
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길이었다. 이 옛길의 어귀가 되는 지점에 용현리 마애
여래삼존상이 있는데, 이곳은 산세가 유수하고 천하의 경승지여서 600년
당시 중국 불교 문화의 자극을 받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묵중하고 중후한 체구의 입상인 본존(本尊)은 머리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
(頭光)이 있으며,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는 작다.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는 미소가 있고 눈은 행인형(杏仁形)으로 뜨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
가 없고 법의(法衣)는 두꺼워서 거의 몸이 나타나 있지 않다. 옷주름은 앞에서
U자형이 되고 옷자락에는 Ω형의 주름이 나 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
(施無畏)·여원인(與願印)으로 왼손의 끝 두 손가락을 꼬부리고 있다. 발밑에는
큼직한 복련연화좌(覆蓮蓮華座)가 있고, 광배 중심에는 연꽃이, 둘레에는 화염문
이 양각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협시보살(右脇侍菩薩)은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상호(相好)는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으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
기고 있다. 목에는 짧은 목걸이가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보주(寶珠)를 잡고
있다. 천의는 두 팔을 거쳐 앞에서 U자형으로 늘어졌으나 교차되지는 않았다. 상체
는 나형(裸形)이고 하체의 법의는 발등까지 내려와 있다. 발밑에는 복련연화좌가
있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중심에 연꽃이 있을 뿐 화염문은 없다.
좌협시보살은 통식(通式)에서 벗어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배치하였다.
이 보살상은 두 팔에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전체의 형태는 충분히 볼 수 있다. 머리
에는 관을 썼고 상호는 다른 상들과 같이 원만형(圓滿形)으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상체는 나형이고 목에는 짧은 목걸이를 걸쳤다. 허리 밑으로 내려온 옷자락
에는 고식의 옷주름이 나 있다. 발밑에는 큰 꽃잎으로 나타낸 복련대좌(覆蓮臺座)
가 있다. 머리 뒤에는 큰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그 형식은
우협시보살의 광배 형식과 같다.
이 삼존상은 『법화경』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즉 석가불·미륵보살·제화갈라
보살을 나타낸 것이다.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백제 불교사 내지 사상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조선시대 사찰에 건립된 응진전(應眞殿) 수기삼존불의 가장
오래된 원조로서의 의의가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산 보원사지에 있었던 사찰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 백제시대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쓴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에 따르면, 화엄사·해인사 등에 더불어 신라 10산 10사찰
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지의 면적은 10만 2886㎡이다. 일대의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기와조각 등이 넓게 산재해 있어, 많은
사찰 전각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석조
(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5층석탑(五層石塔)·법인국사보승탑
(法印國師寶乘塔)·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이 출토
되었고, 부근에 백제 때의 마애불로 유명한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
(瑞山磨崖三尊佛像)이 있어, 삼국통일 전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던 것으
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
(鐵造如來坐像)도 이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두산백과)
명산의 일부가 된 아담한 산사
개심사 명부전 앞 왕벚나무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면 봄 산의 싱그러
움과 설렘으로 절집이 술렁인다. 연둣빛이 은은히 감도는 토종 왕벚
꽃이 만발해 참배객의 마음을 흔들고 천지만물의 조화에 푸른 납자
(衲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진풍경이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벚나무가 일본산이라 여겨와서 토종 벚나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개심사 왕벚나무가 순수
자생종이라니 반갑고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말로만 듣던 개심사
연둣빛 벚꽃송이를 바라보았을 때 감개무량했다. 아이 주먹만 한 소담
스러운 하얀 꽃 바탕에 연한 연둣빛이 살짝 오른 그
신선함이 순수하고 처연하다.
어느 해 봄. 봄비에 산벚꽃이 꽃비 되어 경호 연못에 내리니, 물 아래
물고기가 꽃잎 물고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 풍경을 보았다. 선경
그 자체였다. 무심히 바라다본 연못 물 위로 흰 구름 한
조각이 서쪽으로 비끼어 가고 있었다.
새해가 되고 마음은 봄을 향해 내달리지만 아직 꽃샘추위가 남아 있고
동장군은 우리네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한다. 그래도 봄은 멀지 않았다.
자연의 계절뿐만 아니라 인연의 봄도 얼른 왔으면 좋겠다. 마음 씻고
마음 열고 혜안으로 세상을 보리라.
출처:(한국의 미 산책, 2007. 11. 30., 최선호)
하였는지는 알 수 없고, 가람의 배치나 전하는 유물로 보아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도둑들이 극락보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을 불태웠다는 말이 전할 뿐 자세한 연혁은 전
하지 않는다. 1994년 산신각을 세우고, 산신각 앞 낡은
요사를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보전과 심검당·수도당·춘정고 등이 있다.
이 중 극락보전은 고려 말에 지어져 임진왜란 이후 중창된 것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1973년 문화재관리국
에서 조사할 때 금동아미타불상의 복장(腹藏)에서 발원문과 단수의
(短袖衣)·쌀·보리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발원문
에 따르면 이 극락보전은 1346년(고려 충목왕 2)에 조성되어 임진
왜란 때 중건되었다. 3백여 명의 발원자 이름이 적혀 있어 주목된다.
함께 들어 있던 《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과 《의천속장경간기
(義天續藏經刊記)》 등은 국문학사와 인쇄발달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금동삼세불좌상과 관세음보살상·십륙나한상이 모셔져
있고 나한상 사이에 보살상 4구가 있다. 불화로는 1892년(고종 29)
금호(錦湖)가 그린 삼세후불탱화, 1919년 몽화(夢華)가 그린 현왕탱화,
1998년 제작된 지장탱화·신중탱화가 있다. 1774년(영조 50)에 제작
된 지왕시왕도는 현재 수덕사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극락보전에는
이밖에 1892년에 제작된 현판과 1912년 쓰여진
〈문수사불량계기〉가 걸려 있다.
출처:(두산백과)
충남 서산 해미면에 있는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읍성 가운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에요. 해미읍성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조선
성종 임금 때 쌓은 성이에요. 읍성이란 산성과 달리 평야지대에 사람
들이 사는 집을 둘러서 쌓은 성을 말해요. 해미읍성에는 천주교와 관련
한 슬픈 역사가 서려 있어요. 우리나라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천주교는 서학이라고 불리며 학문으로 연구되었어요. 그러다가 차츰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지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백성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어요.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우리나라에서 서양 오랑캐의 종교를 믿다니!” “제사도 모시지 않는
천주교를 금지시켜야 합니다.”선비들은 천주교를 반대하고 나섰고, 나라
에서는 1786년부터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했어요. 그로부터 백 년 가까
이 천주교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어요. 특히 프랑스와 미국의 군함이 강화
도를 침입해 온 일이 있은 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
어요.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인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이 서양의 앞잡이 노릇
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어요.
1866년, 해미읍성에서도 천 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목을 베거나 매달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돌로 쳐 죽
이기도 했어요. 또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기 위해서 구덩이에 산
사람들을 몰아넣고 묻어 버리기도 했어요. “예수와 마리아를 믿지 마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말했어요.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어요. “예수를 버리느니 차라리 죽겠
습니다. 어서 죽이십시오. ”천주교 신자들은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였어요.
살기 위해 종교를 버리거나 도망치지 않았어요. 해미읍성 근처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어요. 해미읍성에서 천 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
들이 죽었지만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은 겨우 70명 정도예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나 신부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갔고, 해미읍성에는 평범한
백성들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해미읍성은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처형
장이 되었던 것이지요. 해미읍성은 서울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 기념관과
함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로 불리고 있어요.
출처:(지도로 배우는 우리나라 우리고장)
간월암(看月庵)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는 작은 섬에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창건한 암자이다. 무학이 이곳에서 달
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간월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작은 암자를 지어 무학사라 부르던 절이 자연 퇴락
되어 폐사된 절터에 1914년 송만공 대사가 다시 세우고 간월암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보낸 어리굴젓이
궁중의 진상품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또한 굴의 풍년
을 기원하는 굴부르기 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시에 간월도리 어리
굴젓 기념탑 앞에서 벌어진다. 법당에는 무학대사를 비롯하여 이곳에서
수도한 고승들의 인물화가 걸려 있다. 이 암자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작은
섬이 되고 물이 빠지면 길이 열린다. 이곳에서 보는 서해의 낙조가 장관을
이루어 관광객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출처:(두산백과)
봄 날은 간다
손로원:작사
박시춘:작곡
백설희: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