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시작할 때면 우리 아버지 성촌 양반은 내 뒤편에 앉으셔서 언제나 변함없이 “옥루몽”을 펼쳐 드셨다.
...자식은 나보다 나았으면 좋겠다. 자식은 나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디서 무엇을 하던 당당했으면 좋겠다.
속해있는 사회에서 중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말이다.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자식이 가슴을 펴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저에게 "아버지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아마 앞날에도 영원히 의지 처 이고 멘토 이시며 최고의 조언자 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나보다 자식들이 조금 더 기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내가 사는 보람이요 가치라는 것을 말이다.
- 성 촌 양 반 -
성촌 양반은 우리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성짓골이라는 마을이기 때문에 붙혀진 아버지의 택호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예천군 지보면 에서는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곡상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면내 각 마을을
다니시면서 가을에 추수한 나락을 매입하여 백골장터 윤상 네 정미소에서 쌀로 만들어서 예천에서 서울로 쌀을 공급하는 황상 네 가게로 그 쌀을 매도하는 일이 주 사업이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집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는 길 왼쪽 자장면 집 앞마당에서 전을 펴고 시장 보러 나오면서 들거나 메거나 소에 싣고 온 나락을 매입하셨다. 5일장은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때는 거의 모든 가정들이 장날에 농사지은 곡물을
팔아 옷도 사 입고 공부도 시키고 반찬도 사곤 했다.
장이 서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학교에 갔다 귀가 하면서 아버지에게 들르곤 했다.
언제나 아버지께서는 내가 학교에서 올 때까지 점심식사를 하지 않고 계시다가 나와 함께 자장면을 잡수셨다. 자장면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지금도 중국집에 들르면 그 때 그 맛을 생각하게 된다. 거기서 맛에 취해 정신없이 먹고 있으면 주변에서 보고 있던 어른들이 “어허! 부잣집 아들 왔네!”하곤 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꾀나 잘 살았나 보다.
일요일에는 내가 정미소에 가서 나락을 쌀로 만드는 공정을 지켜보곤 했었다.
정미소 안을 이리저리 살피고 다니면서 나락이 새어나가지 않나, 쌀이 제대로 만들어졌나를
감독(?)하고 다녔었다. 거기서 일하는 일꾼들은 나를 아주 공손하고도 잘 대해 주었다.
나도 힘들게 일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잘 해드리려고 노력을 했었다. 두루마리 빵을 사서 그들과 같이 먹곤 했는데 얼마나
맛이 있었던 지,
지금도 그 때의 추억으로 돌아가 제과점에 가면 두루마리 빵을 사서 먹곤 한다. 중간 중간에 팥을 사이에 두고 말아서 만든 빵을 말한다.
우리 시골집은 ㄱ 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안방을 중심으로 왼쪽을 상방이라 하고 부엌을 지나 아래로 펼쳐있는 방을 아랫방이라 했다. 나는 주로 초등학교 때에는 상방에서 중학교 때는 아랫방에서 공부를 했다. 왜냐하면 나중에 아래채를 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시골에는 낮에는 소먹이 풀을 베어 오거나 실제로 소를 몰고 들판에 나가
소에게 풀을 뜯어 먹게 했었다. 뿐만 아니라 밭에 나가 풀을 뽑기도 하고 모내기를 하는 등
밤이 되어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모임 나가면 우리 친구들이 옛날이야기를 하곤 한다. 여름에 우리는 더워서 낮잠을 자거나 강에가 물놀이를 할 때도 경립이는 상방에서 문을 열고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그때는 사실 그랬다. 점심 먹고 한참 더울 때면 사람들이 오후 2시까지는 더위를 피하곤 했었다. 나는 그 시간을 이용해 공부를
했었다.
저녁이 되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할 때면 우리 아버지 성촌 양반은 내 뒤편에 앉으셔서언제나 변함없이 “옥루몽”을 펼쳐 드셨다.
정말이지 10분도 못되어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버지 주무 세요”하면 아버지께선 “한결같이 내가 언제 자불었나” 하시면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또 한 10분이면 고개를 끄덕이셨다.
자식 공부하게 하려고 낮에 일하시느라 너무나 고단하셨을 텐 대도 참고 이겨 내 실려고 애를 쓰셨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낮에 힘든 농사일 하시고 밤에 자식 공부하는 거 보시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을 까.
아버지께선 항상 이런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우리 경립이 공부할 때 연필로 글씨 쓰는 싸박싸박 싹싹(아버지 표현)하는 소리 들을 때”라고 말이다. 언제나 우리 경립이! 우리 경립이! 하시었다.
이 말 한마디가 나를 얼마나 힘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나를 얼마나 노력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나를 얼마나 잘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부모가 자식에게 이러해라, 저러 해라 , 하지 마라하는 백 마디 말보다 네가 최고다,
잘한다, 자랑한다, 격려하고 믿는 다는 말 한마디가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지금도 아버지로부터 “우리 경립이”라는 말 한번 만 들어 보았으면 좋겠다.
어떤 친구는 “우리는 학교만 갔다 오면 소먹이 풀 뜯어라, 나무해 와라하며 일만 시켰는데, 경립이네 어른은 일하라는 말 보다는 공부하라고 했었지”라고 말한다.
사실이었다. 학교에 갔다 와서 책을 펴들기만 하면 아버지는 그걸로 그만 최고이셨다.
사실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왜 그리 공부를 시키려고 하셨을 까?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을 까? 지식에 대한 굶주림이셨을 까? 남보다 훌륭하게 길러보시려는 욕구셨을 까? 자존심의 표현이셨을 까? 나는 지금도 우리 아버지의 크나크신 마음은 잘 모른다.
다만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자식은 나보다 나았으면 좋겠다. 자식은 나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디서 무엇을 하던 당당했으면 좋겠다. 속해있는 사회에서 중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말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르셨을 것이다.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자식이 가슴을 펴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성촌양반은 살아가시는 데 조금은 남다른 생각을 하신 것 같다.
그 때만 해도 보통의 시골사람들은 논에서는 벼를 키우고 밭에서는 콩이나 보리, 조. 배추 같은 것을 심어 자급자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특용작물인 수박, 참외, 땅콩농사를 많이 하셨다. 같은 땅에서 가능한 많은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재미나는 이야기하나 하고 넘어갈까한다.
땅콩이야기인 데 , 껍질 채로 시장에 파는 것보다 까서 땅콩 알로 파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라고 판단한 당신은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을 모아 땅콩을 깠었다.
사실 저녁 한가한 시간에 시골아줌마, 아가씨들에 소일거리를 제공했었다.
지금도 우리 사촌누나들과 모여 예전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의 땅콩 깔 때 입모습을 생각하며 웃곤 한다. 입술을 옆으로 약간 삐치면서 왼쪽 눈을 윙크하듯이 살짝 감으시면서 까는 모습을 흉내 내기도 한다.
또 하나는 처음에 이야기하였듯이 장사를 하셨다는 것이다. 장사를 하시면서도 경영을 하셨다. 요즈음 말로 이야기하면 많은 고용도 창출했다는 것이다.
구루마를 끄는 소와 인부가 필요하고, 정미소에도 인부가 필요하며, 집에는 집일을 하는 일꾼이 필요했다. 우리 동네나 주변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 같다.
그러던 성촌 양반이 아쉬움을 남긴 것이 하나 있었다.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시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젊었을 때 잘 살아보려고 만주다 장사다 일하랴 몸을 혹사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번 반듯하게 살아보려는 각오가 자신을 돌 볼 기회를 빼앗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운 아버지
저에게 "아버지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아마 앞날에도 영원히 의지 처 이고 멘토 이시며 최고의 조언자 이십니다".
"저의 가정이 지금처럼 평화롭고 복된 것 모두가 아버지께서 닦아 놓으시고 격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자신의 몸이 빠개지시는 줄도 모르고 힘들게 일하시어 자식들 눈 밝히려는 의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저려온다. 나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항상 다짐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나보다 자식들이 조금 더 기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내가 사는 보람이요 가치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사회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희망한다.
고등학교를 입학이후 한 번도 잊지 못한 아버지를 그리며
자식이
첫댓글 인간의 기본이 효다.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열심히 자기일에 최선을 다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사는 모습이 아닐까? 옛날 어린시절 인자하신 성촌아제 어른신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일찍이 상업에 눈을 돌리시고 선구자 역활을 하신 어른으로 나는 어린시절 존경하는분 중에 한분이 셨다. 부모를 효성스럽게하면 자식이 잘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면서도.............효자 경립동생 자랑스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