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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게시물은 컴퓨터 검색용으로 만든 것입니다.
스마트폰으로는 수원성에 맞는 의미있는 노래도 들을 수가 없고 가운데
정열한 글씨도 흐트러지듯 분산되어서 읽는 분들의 마음에 산만함을
일으킵니다. 사진속의 웅장한 풍경도 볼 수가 없습니다. 집에 pc
(개인용 컴퓨터)가 없으신 분은 할 수 없지만 있으신
분들은 꼭 컴퓨터로 보시길 바랍니다...
수원화성(水原華城)을 다녀와서!
2018년2월9일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5060" 길동무 동호회에서
길동무 장소로 정한 수원화성을 가려고 오전 08:20분에 집에서 출발
버스로 영주역에 가서 전동차를 타고가다가 청량리역에서 서동탄행으로
환승하여 수원역에 도착하니 집에서 출발한지 두시간 사십분만인 11:00시
7번 출구안에서 쉬다가 대원 모두가 집결하여 도보로 도청앞으로 가서 참석
인원 점검을 해보니 28명 길 건너 성곽길로 진입하여 성곽길 완주를 하고난
시간은 오후 두시가 이 후가 된 시간 예약된 식당에 가서 뒷풀이를
마치고 버스로 수원역에 나와 전철로 집에 돌아오니 저녁
일곱시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의 효심(孝心)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번 못하다니.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는 아버지(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이 늘 마음을 아파했다고 합니다.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 때, 할아버지 영조는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어서 뒤주속에 넣지 않고 무얼 주저하느냐? 어린 왕세손은 울며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아무도 듣지 않자 손수
붓을 들어 세자를 폐하고 서인을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했답니다.
그로부터 8일 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 것만 같았습니다.「저승에서나마 왕생극락하시도록 돌봐드려야지.」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묻힌 부친의 묘를 절 가까이 모셔 조석으로 영가를
위로하기로 결심,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게
됐습니다.「불교에서는 부모님의 은혜를 10가지로 나누지요. 그 첫째는 나를
잉태하여 보호해주시는 은혜요, 둘째는 고통을 참고 나를 낳아주신 은혜,
셋째는 참아 기르느라 고생하신 은혜요,넷째는 쓴 것은 부모가 먹고 단 것은
나에게 주시는 은혜요, 다섯째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뉘어 주시는 은혜요.」
설법을 다 들은 정조는 부친을 위해 절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임금은
먼저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화산으로 부친의 묘를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있는 절 양시터(신라 문성왕 16년에 세운 절)에 부왕의
명복을 기원할 능사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왕은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았습니다. 백성들은 비명에 간 사도세자를
위해 절을 세운다니 너도 나도 시주를 마다하지 많았다.보경스님은 8만량의
시주금으로 4년 만에 절을 완성했습니다.
난성식 전날 밤이었습니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튿날 낙성식장에 친히 거동한 임금은 절 이름을 용주사라
명했습니다.이 절이 바로 지금의 화성군 태안면 송사리에 위치한 조계종
제 2교구 본사 용주사입니다.
정조는 자신에게 부모의 은혜를 새삼 일깨워주고, 용주사를 세우는데 크게
공을 세운 보경스님으로 하여금 용주사를 관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제일 그림 잘 그리는 화공을 찾아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후 다시 경판으로 각을 하여 용주사에 모시게 했으니 이는 지금도 원형
대로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또 임금은 궁에서 쓰던 명나라제 금동 향로와
야월락안도, 우중어옹도, 촌중행사도, 산중별장도, 고주귀범도, 산사삼배도,
강촌심방도, 효천출범도와 용을 정교하게 양각한8면 4각의 청동
향로를 하사했습니다.
임금은 능이 있는 인근 수원에 화성을 쌓아 소경으로 승격시키는 등 비명에
가신 부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습니다. 정조는 기일뿐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용주사를 찾았습니다.
어느 초여름 날이었습니다. 능을 참배하던 정조는 능 앞 소나무에 송충이가
너무 많아 나무들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허허 이럴 수가 내 땅에
사는 송충이로서 어찌 임금의 아버님묘 앞에 있는 소나무 잎을 갉아 먹는단
말이냐. 비명에 가신 것도 가슴 아픈데 너희들까지 이리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임금은 이렇듯 독백하며 송충이를 한 마리를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이 일대에 송충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합니다.지금도 용주사
주변과 용건릉 지역은 송림이 울창하여 장관을 이루며 특히 용주사 주변과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제 10호로 지정돼있습니다.
어느 가을날 용주사로 향하던 임금의 행차가 수원 못 미쳐 군포를 지나
고개 마루를 오르느라 속도가 좀 떨어졌습니다. 가마 안에서 임금은 속이
타는듯 호령을 내렸습니다. 여봐라, 어찌 이리 더디단 말이냐?「언덕을
오르느라 좀 더디옵니다.」부왕을 그리는 정이 몹시 사무쳐 빨리 절에
다다르고 싶었던 왕의 심정을 기려 주민들은 이 고개를 「지지대」
라고 불렀답니다.
참고자료
▼경기도청 도청
▼수원시민헌정비
사도세자(思悼世子)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
(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다. 잘 알 듯이 영조는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했다(각 82세, 52년). 영조는 정성
(貞聖)왕후(1692∼1757)ㆍ정순(貞純)왕후(1745~1805) 등 왕비 2명과
정빈(靖嬪) 이씨(1694~1721)ㆍ영빈(暎嬪) 이씨(1696~1764)ㆍ귀인
조씨ㆍ후궁 문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그 중 5녀는 일찍 사망했다).
첫 아들인 효장(孝章)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
났지만(숙종 45년(1719) 2월 15일) 9세로 요절했다(영조 4년(1728) 11월
16일).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 7년 뒤에 태어났다(영조
11년=1735) 1월 21일). 그때 영조는 41세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국왕의 기쁨은 당연히 매우 컸다. 그는 “삼종(三宗. 효종ㆍ현종ㆍ숙종을
말함-인용자. 이하 같음)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고 말했다.
그런 기쁜 마음은 즉각적인 조처로 반영되었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영조 12년
3월 15일). 원자 정호(定號)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그 결과의 참혹함과 파괴력은 특별했지만,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도 기본적으로는 일반적인 과정을 밟으면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재능
과 총애가 넘쳤지만, 점차 서로의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런 과정을 간략하지만 포괄적으로 서술한 자료는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세자가 처벌되던 날의 기록이다. 거기서는 “세자의 천품과 자질이 탁월해 임금
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天性)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이미 여러 연구들이
분석한대로 이 기록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판단된다.
출처:[思悼世子] - 부왕에게 사사된 비극적 운명의 세자 (인물한국사)
뒤주대왕신(사도세자의 무속 신)
조선시대 영조와 후궁 영빈이씨(瑛嬪李氏) 사이에서 태어나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 莊憲世子)를 신격화한 것이다.
영조는 1762년 윤5월 13일에 창경궁 휘녕전(徽寧殿) 앞뜰에서 사도
세자를 뒤주 속에 넣은 뒤 궁중 한 모퉁이에 방치하여 7일 만에 굶겨
죽였는데, 이 때문에 사도세자에게 뒤주대왕이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그는 왕세자로서 당연히 왕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이었으나 뒤주
안에서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민간에서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신으로 모시고 받들게 된 듯하다.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귀신은 그 원한이 크기 때문에 사람에게 붙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고
보는 무속신앙의 구조에 의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은 일반 서민들이 받게 되는 억울한 감정과
일치하기 때문에 몇몇 왕신들과 함께 민중의 한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신으로서 뒤주대왕신으로 신앙화되었으며, 평안과 재수의 신으로 받들
어지게 되었다.뒤주대왕신은 서울지방의 무속에서 열두거리 중 별상(別相)
거리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서울과 그 주변의 신당에서 모셔지고 있다.
『한국의 무(巫)』(조흥윤, 정음사, 1983)
『조선조(朝鮮朝) 여류문학(女流文學)의 연구(硏究)』
(김용숙,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1979)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헌경왕후(獻敬王后)=>혜경궁 홍씨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도 불리는 장헌세자
(莊獻世子)의 빈(嬪)으로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正祖, 재위
1777~1800)의 생모이다. 생전의 존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혜빈(
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이며 사후의 시호는 헌경(獻敬)이다.
영조 때 영의정 등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의 차녀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조부는 예조판서를 지낸
홍현보(洪鉉輔)이며, 홍낙인(洪樂仁), 홍낙신(洪樂信), 홍낙임
(洪樂任), 홍낙륜(洪樂倫) 등의 남형제가 있었다. 1744년(영조 20)
10세의 나이로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아들인 장헌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1750년(영조 26) 장남인 의소세손
(懿昭世孫, 1750~1752)을 낳았고, 1752년(영조 28) 차남인 정조를
낳았다. 그리고 뒤이어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1814)와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1802)를 낳았다.
하지만 맏아들인 의소세손은 3살 만에 죽었으며, 1749년부터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남편 장헌세자도 1762년(영조 38)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 죽었다. 당시 영조는 장헌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겠다는 명을 내리고 한밤중에 세자빈이던
헌경왕후와 세손인 정조 등을 모두 친정인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
라고 명했다. 그래서 헌경왕후는 장헌세자가 죽은 뒤에야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762년 7월 12일(음력 윤5월 21일)에 영조는 장헌세자가 죽었다는 소식
을 듣고는 그에게 왕세자의 호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헌경왕후에게는 혜빈(惠嬪)이라는 존호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헌경왕후의 부친인 홍봉한(洪鳳漢)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고, 그가 1771년 김귀주(金龜柱) 등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빼앗
기고 도성에서 내쫓겼을 때에도 1년 만에 서용하여 관직을 되찾고 도성
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여 헌경왕후를 배려하였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한 뒤에 혜빈궁(惠嬪宮)의 명칭을 혜경궁(惠慶宮)으로
바꾸었으며, 1783년(정조 7)에는 자희(慈禧)와 효강(孝康)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1795년 회갑을 맞은 헌경왕후는 회고록인 《한중록》을 썼는데,
이 작품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더불어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경왕후는 1816년 1월 13일(순조 15년 12월 15일)에 사망했으며, 경기도
화성의 융릉(隆陵)에 남편인 장헌세자와 함께 합장되었다. 순조는 그녀
에게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부여했으며, 고종 때인 1899년에는
의황후(懿皇后)라는 시호가 부여되었다.
수원화성(水原華城)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
(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
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
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수해와 전란으로 일부 소멸되었고,
현재 6개 시설물(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외 복원이
완료되었다.(남수문 2012년 6월 복원 완료)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
(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
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
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출처: (수원화성 테마관, 수원문화재단)
수원 팔달문(八達門)
팔달문은 조선 후기인 1794년에 세운 수원화성의 남쪽 문으로, 문의 이름은 사방팔방
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성의 4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
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수원화서문(水原 華西門)
보물 제403호.
"문루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지붕".
1796년(정조 20)에 건조되었으며 좌우로 성벽에 이어지는 석축 부분에
홍예문을 열고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다. 그리고 전면에는
또 반원형의 전(塼)으로 쌓은 옹성(甕城)을 두었다.
건축의 계통은 전형적인 2익공(翼工)집으로 외목도리를 받쳤으며 창방(昌枋)
위에는 화반(花盤)을 배치하였다. 또 대량(大樑)에서 측면 기둥에 걸쳐 충량(衝樑)
이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한국에 있는 다른 성곽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구조도 특수하며 이것이 있음으로써
부근 일대의 경관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출처:(두산백과)
수원 장안문(長安門)
하나의 홍예문(虹霓門)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 쪽으로 원형 옹성(甕城)을
갖추었다. 홍예 위로 4개의 누조(漏槽)를 설치하고, 성벽 위에는 안팎에 총구
(銃口)를 갖춘 여장(女墻)을 쌓았다. 홍예 위에는 오성지(五星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5개의 구멍을 갖춘 큰 물통으로, 적이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문 좌우로 성벽이 이어지며, 문에서 53보(步) 되는 곳에
각각 적대(敵臺)가 마련되어 있다.
이 문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성문 형태를 취하였고, 규모나 구조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서울 숭례문과 매우 비슷한, 당당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숭례문에 비해
좀더 새로운 것은 옹성, 적대와 같은 방어 시설을 갖춘 것이 특색이다.
1920년대 수원시 시가지계획사업으로 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1950년 6·25전쟁 때
폭격으로 누각이 소실되었다가, 1978년 문루는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출처:(두산백과)
수원화성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여 적군의 접근 여부를 살피고, 적의 공격 시 방어시설로도
활용되는 곳이다. 공심돈은 돈의 내부를 빈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수원화성에는
서북공심돈, 남공심돈, 동북공심돈 등 3곳의 공심돈이 있다. 공심돈은 화성 중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먼 곳을 관찰할 수 있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지형에 세워져 있다. 또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정면과 밑으로 뚫려 있는 구멍으로 통하여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서북공심돈은 전돌로 벽체를 사각으로 쌓고 외부로 구멍을 내어 바깥 동정을
살피고 백자총 등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내부는 3층으로 사다리로 오르내리
도록 되어 있는데, 다른 성곽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남공심돈
은 남암문의 동치(東稚) 위에 세워져 있으며 대체로 서북공심돈과 같지만 규모가
약간 작다. 동북공심돈은 척후시설이며 서북공심돈과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평지가 아닌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고 사각기둥이 아니라 원통형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는 나선형의 벽돌 계단을 거쳐 꼭대기에 오르게 되어 있다.
출처:(두산백과)
수원 방화수류정 [水原訪花隨柳亭]
"1794년(정조 18)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건립한 동북 각루(角樓)".
방화수류정은 수원 화성의 네 개의 각루 중 동북각루의 이름이다. 이것은 1794년
(정조 18) 수원 화성(華城, 사적 제3호)을 축조할 때 화성의 동북쪽에 군사지휘
소부로 만들었던 각루로,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의 동측 구릉 정상 즉
용연(龍淵) 남측에 불쑥 솟은 바위 언덕인 용두(龍頭) 위에 있다. 각루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인 정명도(程明道)의 시 중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고 하며, 현판의 글씨는 근대의
서예가 김기승(金基昇)이 썼다. 2011년 3월 3일에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고,
수원시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9월 4일 진시(辰時)에 터다지기 공사를 착수하여
10월 4일 묘시(卯時)에 정초를 한 후 기둥을 세웠고, 7일 오시(午時)에 상량하였
으며, 10월 19일에 완공하였다.『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연설(筵說)에는
1795년(정조 19) 2월 14일에 화홍문을 경유하여 방화수류정에 임금과 신하가
거동한 기록이 있고, 1797년(정조 21) 1월 29에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활쏘기를
하고 화성성역의 노고를 치하한 기록이 있다. 방화수류정은 1848년(헌종 14)에
팔달문, 장안문과 함께 중수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
『화성성역의궤』 동북각루내도(東北角樓內圖)와 1907년(강희 1)에 독일인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가 촬영한 사진에 방화수류정에 오르는 계단이
2개소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 계단이 1개소로 되어 있는
것 외에는 대체로 원래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
화성 성곽의 동북쪽 모퉁이에 솟아있는 바위 위에 자리한 방화수류정은 원래
화성의 동북쪽 군사지휘부인 동북각루로 만들었다. 그러나 성곽 아래에 있는
용연 등 경관이 좋은 위치에 자리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군사시설로만 활용
하지 않고 경치를 조망하는 정자의 역할도 겸하였다. 이 건물은 형태가 불규칙
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주변 경관과 어울림이 뛰어난 건물로, 조선시대 정자
건물의 높은 수준을 잘 반영하고 있다. 건물은 2층 구조이며, 평면은 불규칙한
지형과 바위와의 조화를 고려하여 ㄱ자형으로 지었다. 상층은 사방이 트인 누각
으로 세 칸 중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북쪽에 한 칸, 남쪽에 반 칸의 마루를 물리
었다. 또 서쪽의 한 칸은 길게 2칸으로 늘렸다. 특히 용연 방향으로는 작은 쪽마루
툇간을 달아내어 평난간을 둘렀다. 하층 벽체는 아래에 돌을 쌓고 그 위는 전돌로
쌓았으며, 성 바깥쪽으로 총안을 뚫었다. 이 건물은 평면의 형태가 복잡한 만큼
지붕도 단순하지 않다. 팔작지붕을 ㄱ자로 꺾어서 짜고 다시 툇칸이 생기는 부분
마다 작은 지붕을 덧붙여 놓아서 용두 위에 우뚝 솟은 건물의 모습은 동서남북
위치에 따라 각기 달리 보인다. 지붕의 한복판 위에는 절병통을 세웠으며,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를 설치하였다.
주변 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정자의 기능을 고려하여
조영된 동북각루로, 주변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히 사용한 2층 누각 형태의 이 건물은 다른 정자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지형과 지세를 고려한 독특한 평면 및 건물의
형태와 구조는 18세기 정자 건축의 뛰어난
기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화성성역의궤 건축용어집』(경기문화재단, 2007)
『수원성』(김동욱, 대원사, 1989)
문화재청(www.cha.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팔달문
사도세자(思悼世子) 73
김문응:작사
라화랑:작곡
도 미:노래
금이야 옥이야 태자로 봉한 몸이
뒤주안에 죽는구나 불쌍한 사도세자
꽃피는 청춘도 영화도 버리시고
흐느끼며 가실때엔 밤새들도 울었오
♥
궁성은 풍악과 가무로 즐거운밤
뒤주안이 웬말이요 원통한 사도세자
황금에 왕관도 사랑도 버리시고
억울하게 가실때엔 가야금도 울었오.
2018-02-10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