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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主式會社 드림 원문보기 글쓴이: 권술룡
좋은 글 함께 읽고자 올립니다
**제8회 세계생태공동체 순례
-두번째 떠난 녹색혁명의 나라 쿠바,열정의 라틴문화 체험-
에 함께한 황대권선생(야생초편지 저자, 생태마을 운동)의 쿠바 여행기 <아! 쿠바> (녹색평론 3,4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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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쿠바
“나는 나의 동료 70명을 살해한 비열한 독재자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멸시해라. 나는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역사가 나를 용서할 것이다.”
1953년 27살의 열혈 청년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의 산티아고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마지막에 했던 말이다. 아바나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폭정에 시달리는 조국의 정치현실을 어떻게든 변혁하고 싶었던 그는 비슷한 열정을 품은 젊은 동지들을 끌어 모아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병영을 습격한다. 당연히 실패하고 말았고 동지들은 처참하게 살해되고 만다. 카스트로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법정에까지 서서 “역사가 나를 용서할 것이다” (History Will Absolve Me)라는 유명한 연설문을 남긴다.
1982년 겨울,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의 폭압적인 정치현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나는 미국 중부의 한 시골대학에서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부지런히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당시 제3세계 혁명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당연히 라틴아메리카 서고에 자주 갔었고 방학이 되자 니카라구아 혁명과 쿠바혁명에 관한 서적들을 한 아름 들고 난방도 잘 안 되는 자취방에 틀어박혀 이들과 함께 겨울을 보냈다. 가장 먼저 읽은 책이 부피가 얇은 바로 이 책 “역사가 나를 용서할 것이다”였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정치가들을 종횡무진으로 인용하며 혁명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그의 언변과 지식에 나는 그만 압도당하고 만다. 그것이 단지 ‘이론’이 아니라 목숨을 건 ‘실천’에 대한 변론이었다는 사실과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승리하고 말았다는 것에서 나는 무한한 격려와 위안을 얻었다. 그 겨울의 독서가 결국 나의 유학생활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그로부터 26년의 세월이 흐른 뒤 상상 속의 나라 쿠바를 다녀오게 되었다. 그 사이 파란만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개인사를 겪으면서 나는 비폭력평화주의자 또는 생태주의자로 바뀌었지만 한 때의 쿠바는 내 젊은날의 양산박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90년 이후에 쿠바에서 일어난 극적인 변화가 없었다면 굳이 힘들게 시간을 내어 쿠바를 방문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쿠바의 유기농업혁명이었다. 전세계가 식량안전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시점에 가난한 제3세계의 나라가 국가적 차원에서 유기농업으로의 전환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두고 ‘독재의 위력’ 또는 ‘사회주의의 성과’로 말을 하지만 자본주의고 사회주의고 간에 그와 같은 규모의 성공을 일구어낸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쿠바는 진정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지고 세계화가 일반화되면서 여행의 자유도 한껏 확장된 이즈음이다. 쿠바와 한국은 아직 국교가 성립되어 있지 않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쿠바를 방문하고 돌아와 이런저런 방문기를 남겨놓고 있는 터였다. 마침 대전 대동사회복지관 관장을 하고 계신 권술룡 선생님께서 쿠바를 가자고 손짓을 해왔다. 선생님께서는 몇 해 전부터 사람들을 끌어 모아 일반 여행사로서는 잘 갈 수 없는 지역을 선정하여 ‘세계생태공동체순례’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하고 계셨다. 나와는 생명평화결사를 함께 하면서 자주 얼굴을 뵙는 처지였다. 여기저기 매인 곳이 많은 형편이었지만 선생님 표현대로 “이 참에 성냥불을 확! 그어대듯이” 결정하고 말았다.
약속한 날 인천공항에 가보니 모두 26명이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기다리고들 있었다. 주취 측의 취지나 성향으로 보아 아주 생뚱맞은 사람은 적어도 없어 보였다. 말하자면 나름대로 사회주의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하긴 지나놓고 보니까 하는 말이지만 도대체 ‘사회주의’라는 말이 무엇이관데 그토록 반대를 하고 사람을 죽여 왔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냥 이국적인 관광지였다는 느낌만이 강하게 남아있다. 서울에서 캐나다의 뱅쿠버, 토론토를 거쳐 아바나까지 가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아바나 공항은 마치 우리나라의 초여름 날씨였다. 공기는 쾌적했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공항청사를 나오자 우리를 반기고 있는 최신형 가비오따(GAVIOTA) 버스 앞에 인상 좋은 중년의 사나이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쿠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완연한 서울말씨였다. 이 사람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왔다는 그 양반? 일행을 모두 태운 후 차안에서 가이드가 자기소개를 한다. 이름은 펠리페 이슬라 뿌뽀. 쿠바공산당원으로 외무성 소속. 한국인이 사장으로 있는 쿠세코여행사(CUSEKO Travel)의 가이드. 76년 북조선으로 유학을 가 2년 동안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한 뒤 84년에서 94년 까지 북한주재 쿠바대사관에서 근무, 다시 98년에는 한국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공부를 하는 등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한반도 전문가이다. 어째서 남한말이 그리 유창하냐고 했더니 98년 이후로는 북조선과 전혀 만날 일이 없었고 오히려 남한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빈번해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단다. 대머리가 벗겨진 게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여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52세라고 한다. 나는 대뜸 “그럼 1956년생?” 하고 들이댔더니 곧바로 “황대권씨는 1955년생!” 하고 맞받아치는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사회주의 나라 관광가이드라고 하지만 26명이나 되는 관광객의 인적사항을 다 꿰고 있단 말인가?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중에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서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인적사항을 조사하고는 나의 특이한 경력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친사회주의적 인사 정도로 지레 짐작을 하고 나름대로 배려를 하는 눈치였다. 얼핏 23년 전 안기부에서의 그 악몽이 떠올랐지만 단체여행이라는 특성을 위안삼아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바나
우리는 아바나 시내에서 자동차로 20여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옥시덴탈 미라마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이 자리한 곳은 각국의 대사관과 호텔, 고급주택 등이 즐비한 동네로 LA로 치자면 비버리 힐즈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쿠바에 특권층이 사는 특별한 동네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며 지금은 그것이 고스란히 외화벌이 관광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말레콘이라고 부르는 시원한 해안도로를 따라 십여 분을 달리니 아바나 구시가지가 나타난다. 버스는 아름다운 쁘라도 거리를 지나 ‘까삐딸리오’라고 부르는 미국의 국회의사당을 꼭 닮은 건물 앞에 섰다. 방금 달려온 이 코스는 과연 아바나가 세계의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음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아바나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말레콘만큼 멋진 해안도로를 본 적이 없다고 한 입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멋지다’고 한 표현에는 풍경 뿐 아니라 그 풍경을 배경으로 해서 벌어지는 온갖 일까지 다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도로를 따라 늘어선 역사적 건축물은 물론이고 출렁이는 파도를 온 몸으로 느껴볼 수 있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방파제하며 낙천적인 쿠바인들의 구김 없는 몸짓까지. 말레콘이 끝나는 지점에서 구시가지로 들어가기까지 1Km 남짓한 중앙보도는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로마시대 궁중에서나 보았음직한 황홀한 대리석 보도 위로 가난한 쿠바인민들이 하품을 하며 앉아 있었다. 그리곤 바로 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가 이어진다.
말레콘을 따라가다가 보면 중간쯤에 미국이익대표부를 사이에 두고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비교적 큰 건물인 7층짜리 미국대표부 앞에 요란한 광고판이 몇 개 서있다. 스페인어로 써 있지만 누가 봐도 미국을 조롱하는 문구임을 알 수 있다. 하나에는 “제국주의자여, 우리는 그대가 두렵지 않다!”라고 쓰여 있고, 또 하나에는 부시대통령의 얼굴 옆에 히틀러와 뱀파이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무리 카스트로가 강심장이라지만 강대국의 대사관이나 다름없는 건물 앞에 저런 무례한 광고판을 세워 놓아도 좋은 것일까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광고전쟁은 미국이 먼저 도발했다. 2004년 무렵에 미국은 대표부 건물 상단에 전광판을 설치해 놓고 거기에 쿠바의 내정을 간섭하는 선전문구를 게시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정치범을 석방하라든지, 혹은 쿠바인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이 살고 싶은 정치체제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든지 하는 식이다. 쿠바당국이 항의를 해도 모르쇠로 일관하자 그런 식의 ‘유치한’ 광고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재미난 현상만 보더라도 미국이 쿠바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표부 건물의 옆에는 마치 설치 미술가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기이한 형태의 광장이 있다. 건물의 지척에 수백 개의 흰 게양대가 빽빽이 서 있고 그 끝에는 검은 깃발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광장 한 쪽 끝에 쿠바의 ‘수호신’인 호세 마르띠가 한 어린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손을 들어 미국대표부를 마치 찌르듯이 겨냥하고 있는 동상이 서 있다. 일주일 동안 가는 곳마다 호세 마르띠의 동상을 보았지만 이 동상만큼 기개가 넘쳐나고 완벽한 형태를 갖춘 동상을 보지 못했다. 가이드를 통해 들어본 대략의 사연은 아래와 같다. 먼저 깃대와 깃발은 미국대표부의 전광판을 가려주는 효과를 노린 것이며, 하나하나의 검은 깃발은 혁명 이후 끊임없이 도발을 감행한 미국에 의해 숨진 쿠바인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호세 마르띠가 안고 있는 아이는 8년 전 엄마와 함께 마이애미행 보트를 탔다가 엄마는 죽고 아이만 살아남아 아이에게 망명권을 주느니 마느니 하면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엘리안 곤잘레스(당시 6세)였다. 미국의 쿠바사회는 이 사건을 반카스트로 운동의 획기적인 계기로 삼으려고 했으나 생부가 쿠바에 살고 있는 관계로 미국 내 여론을 어쩌지 못하고 아이를 다시 쿠바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 광장은 말하자면 미국과 쿠바가 벌이는 가상전쟁이 선전전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현장인 셈이다.
까삐딸리오 인근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후 일행은 길 건너에 있는 ‘엘 플로리디타’라는 빠로 가서 ‘환상적’인 살사음악과 럼주 칵테일을 맛보러 갔다. 소설가 헤밍웨이가 와서는 무얼 마셨고 무슨 유명한 사람이 자주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단체관광객들이 으레 찾아가는 이런 빠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행과 어울려 그 맛을 알 듯 모를듯한 칵테일을 한 잔 마시고 나는 몰래 빠져나와 혼자 어두운 아바나 골목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시각은 밤 10시. 이미 대부분의 상점과 술집들이 문을 닫았지만 늦은 시간까지 풍악을 울려대는 빠들이 골목마다 한 두 개씩은 있었다. 대부분 문을 열어 놓거나 노천에서 연주하므로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얼마든지 멈춰 서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한 밤중 식민지 시절 지어놓은 육중한 석조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골목에서 감상하는 쿠바음악은 또 다른 환상을 자아냈다. 어느 골목에선가 한 묘령의 쿠바 아가씨가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였으나 눈인사만 나누고 그냥 지나쳤다. 구시가지는 국제적인 관광지인지라 공안들이 곳곳에 서 있어 매매춘 행위는 극도로 조심스러운 듯 했다. 어두침침한 골목길을 얼추 1시간은 돌아다닌 것 같은데 전혀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후로 1주일 동안 쿠바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바 쿠바사회는 적어도 관광객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안경찰이 자주 눈에 띄긴 했지만 사람들 자체가 순박하고 호의적이었다.
바라데로
아침에 호텔을 출발하여 한인 애니깽 후손이 많이 산다는 도시 마탄사스를 지나 외국인 관광특구인 바라데로로 갔다. 그런데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웬 허름한 기차역으로 가더니 관광열차라며 타라고 한다. 일명 허쉬열차라고 부르는 이 열차는 초콜렛 재벌 허쉬가 이 일대에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면서 건설한 것이라는데 선로 위를 달린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낡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 낡은 열차 안에 여행 중 가장 잊지 못할 광란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칸 짜리 열차의 한 칸에 모두 자리하고 앉은 가운데 열정의 쿠바 살사밴드가 운행 내내 흥을 돋구었던 것이다. 럼주와 쿠바시가가 한 바퀴 돌자 궁뎅이를 들썩이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서 열차를 전형적인 한국 관광버스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이 살사인지 막춤인지 모르겠다만 육감적인 흑인 여가수와 짝을 지어 춤을 춘 사람들은 찢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이시어, 이 열정, 이 자유가 정녕 사회주의 맞습니까? 아니면 외화벌이를 위한 치열한 서비스 정신의 발현입니까?”
다시 버스를 갈아탄 일행은 바라데로라고 불리는 손가락 형태의 사구로 이루어진 관광특구로 들어갔다. 해변 곳곳에 특급 호텔이 즐비했고 해안의 모래와 바닷물의 색깔은 그야말로 세계 최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가이드에 의하면 이 일대에만 50개의 호텔이 있단다. 물론 쿠바 현지인은 출입할 수가 없으며 쿠바인민페소의 24배나 되는 전환화폐(CUC)만이 통용가능한 외국인 전용 리조트이다. 우리는 그 가운데 A급에 속한다는 ‘솔 팔메라스’라는 매머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 외부에 상점이나 휴흥지가 없다보니 모든 것이 호텔 안에서 가능하도록 온갖 시설이 다 되어 있었다. 다른 것은 일반 호텔과 다름없는데 이 호텔이 맘에 드는 것은 술과 음료를 무제한 공급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주당들이 몰려가면 아마도 적자나지 않을까 싶다.
오토바이를 빌려서 바라데로를 한 바퀴 돌아보니 더 이상 구경할 것도 할 일도 없었다. 물론 할 일이야 해변에 누워 늘어지게 쉬거나 비싼 요금을 물고 수상 스포츠를 해보는 것이지만 그런 이유로 쿠바에 온 것이 아닌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몇몇 악동끼가 있는 일행과 함께 오토바이를 몰고 바라데로 인근의 현지인 마을로 정탐을 나갔다. 특구를 벗어나자마자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읍 정도 규모라고 할까. 딱히 갈 데가 없어 외곽의 농장 언저리에서 사진을 찍으며 얼쩡거리고 있자니 오토바이를 탄 한 사나이가 나타나서는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쿠바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틀림없이 관광객을 상대로 돈을 벌고자 하는 삐끼라고 하더니 영락없었다. 그 사나이 말로는 자기가 바다가재 요리를 할 줄 안다면서 자기 집을 구경시켜준단다. 어쨌든 서민이 사는 집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무조건 그를 따라갔다. 한 10분을 포장도 안 된 시골을 길을 울퉁불퉁 달려 가는데 길가에 웬 비닐 쓰레기가 그리 많은지 악취와 먼지가 말도 못했다. 겨우겨우 도착한 곳은 새로이 주택이 들어서고 있는 다소 황량한 마을 외곽지대였다. 웬 쓰레기가 이렇게 많냐고 물으니, 쓰레기 수거차가 오질 않아 주민들이 마구 버려서 그렇단다. 아, 쓰레기차가 오건말건 분리수거하여 한곳에 모아만 두어도 이렇게 꼴사납지는 않을텐데... 사나이의 집은 너무도 단촐했다. 시멘트 블록으로 엉성하게 지은 네모 공간 안에 방 하나, 부엌 겸 거실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도 실내에는 TV와 냉장고 등 기본적인 가구는 다 갖추고 있었다. 사나이는 오자마자 냉장고를 열더니 바다가재 4마리를 꺼내어 기름에 튀기기 시작했다. 식재료를 미리 준비해 둔 것으로 보아 그는 바라데로 인근에서 이런 식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듯 했다. 요리를 하는 동안 나는 카메라를 들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낡고 무너졌지만 한 때 꽤 잘 나갔던 마을공동체였다는 것을 마을 가운데의 잘 다듬어진 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네거리 한 귀퉁이에서 조그만 부스를 열고 한 사내가 고기를 잘라 팔고 있었다. 아마도 인근 농장에서 목축업을 하면서 이렇게 길거리에 나와 주민들에게 파는 모양이었다. 이 궁벽한 시골에도 주민 스스로의 필요에 의한 유무상통이 어김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금 아래쪽에 있는 인민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의 체육수업이 한창이었다. 세계 어딜 가나 아이들의 노는 모습은 다 똑 같다. 천진난만과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철망으로 된 담벼락 근처에서 앳된 처녀 선생이 여학생 여섯을 앞에 세워놓고 합창을 지도하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이 얼굴을 들이대고 바라보니 수줍은 듯 갑자기 목소리가 움츠러든다. 저 아이들이 여기서 교육받고 자라면 ‘사회주의형 인간’이 되는가? 적어도 지금까지 길거리에서 만난 쿠바 어른들을 생각해 보면 그럴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마을정탐을 마치고 사나이의 집에 들어서니 조그만 식탁 위에 먹음직스런 바다가재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카리브해의 싱싱한 바다가재를 이런 식으로 먹게 되다니! 기름에 갓 튀겨진 바다가재를 한 입에 베어무는 순간 탱~ 하고 이빨이 튕겨져 나왔다. 마치 생고무를 씹듯 살집이 탱탱했다. 그렇다고 육질이 질기다는 것은 아니다. 사나이 말을 들어보니 주변에 바다가재를 잡는 어부 친구가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아무 부재료도 없이 바다가재로만 배를 채우고 나서 얼마를 줄까하고 물었더니 전환화폐로 20페소만 달란다. 4명이니까 일인당 5페소, 즉 한국 돈 5천 원 정도로 싱싱한 카리브 바다가재를 실컷 맛본 셈이다. 바다가재를 맛있게는 먹었으나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외화를 벌기 위해 이중경제를 실시하다 보니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이런 일탈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그가 바다가재 두어 마리만 팔면 일반 노동자의 한 달 치 월급보다 많은 돈을 만지게 된다. 도 닦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얼마나 될까? 우스갯말로 쿠바에는 크게 해먹는 사람은 없어도 전 인민이 조금씩은 다 해먹는다는 얘기도 있다. “카스트로 의장님, 당신도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요? 이 이중경제를 언제까지 끌고 가실 겁니까? 석유가 펑펑 쏟아져서 경제가 좋아질 때까지요? 아니면 전 인민이 두 개의 통장을 마련할 때까지요?”
혁명박물관
오후에는 내내 혁명박물관을 둘러보았다. 혁명 전에 독재자 바티스타가 대통령궁으로 쓰던 건물을 전시실로 개조하였는데 전시수준이 게릴라 사령부답게 소박하였다. 입구에서 출구로 나올 때까지 쿠바 혁명의 주요 장면들이 설명과 함께 흑백사진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것도 많았지만 그곳에서 처음 듣는 얘기도 많았다. 예컨대 몬카다병영 습격시 원래 계획된 인원이 다 투입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전날 밤에 병영 밖의 농가에서 합숙을 한 뒤 캄캄한 새벽에 차를 나누어 타고 가는데 중간에 있는 차 한 대가 전날 심정에 변화를 일으켜 산티아고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실이 잘 전해지지 않은데다 어둔 새벽인지라 뒤에 있는 차량들이 모두 그 차를 따라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영 공격을 통해 실제로 죽은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이 포로로 잡혔으나 군인들의 원한에 찬 폭력과 고문에 의해 그렇게 많이 죽었다는 것이다. 카스트로가 변변찮은 무기를 가지고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른 것은 워낙에 바티스타가 인기가 안 좋아 일단 쳐들어가면 군인들이 동조해 줄줄 알았다나.
피그만 침입사건(1961년)은 거꾸로 미국이 벌인 무모한 도박이었다. 1959년에 카스트로가 혁명을 성공시킬 당시만 해도 그것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쿠바공산당마저도 카스트로를 멀게 느꼈으니까.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지독하게 말 안 듣게 생긴 카스트로 정권을 어떻게 해서든 다시 끌어내리고자했다. 사실 혁명 직후 쿠바의 경제와 사회는 거의 90% 미국에 의존해 있었으므로 미국이 조금만 압력을 넣으면 바로 무너질 줄 알았다. 그러나 위태위태한 혁명정부는 무너지지 않았다. 미국은 쿠바민중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단결심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카스트로는 혁명을 원치 않는 사람은 누구든 외국으로 나가라고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당시에 갓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전부터 조심스럽게 추진해왔던 쿠바침공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혁명을 피해 도망간 천여 명의 불만분자들을 훈련시켜 미국 함정에 태워서 아바나에서 멀리 떨어진 피그만에 전격적으로 침공한 것이다. 미국 역시 반란군이 영토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으면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카스트로를 쓰러뜨릴 것으로 보았다. 들고는 일어났는데 그 창끝이 카스트로가 아니라 미제국주의로 향해졌다. 카스트로는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단 이틀만에 제압하고 만다. 망신살만 산 케네디였으나 뒤이어 벌어진 후루시초프와의 일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일약 국제정치의 스타가 되었다. 당시에 케네디는 쿠바가 자꾸 소련쪽으로 기울어지자 카스트로를 직접만나 설득해 볼 양으로 은밀히 만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약속한 날 며칠 전에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카스트로는 “잘못하다간 사람들이 날 의심하겠는걸” 하며 상당기간 입조심을 했다고 한다.
나라의 크기나 무력으로 보아 쿠바는 미국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시쳇말로 하면 한주먹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미국은 눈엣가시와 같은 쿠바를 코 앞에 두고 반세기 가까이 애만 끓이고 있을까? 펠리페씨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사실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쿠바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미국이 침공을 강행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나라를 내어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내어 준 그 순간부터 우리는 ‘전인민항쟁’에 돌입할 것입니다. 우리는 쿠바에 있는 미국인들을 매일 10-20명씩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게릴라 투쟁에 들어가는 거지요. 미국이 물러설 때까지.”
생태공동체 라스테라스
아바나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무려 다섯 시간을 달려 생태공동체 라스테라스라는 곳을 방문했다. 쿠바에서는 운전수가 3시간 정도 일하면 의무적으로 1시간을 쉬어야 한다고 한다. 일정이 바쁜 우리는 기사양반에게 약간의 ‘와이로’를 멕이고 계속 달렸다. 쿠바에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고 깊은 생태공동체가 있다니? 하며 의아한 마음을 지닌 채 갔다. 깊은 산속이었는데 입구에 조그만 접대소를 지어놓고 여러 가지 시설이용에 대한 설명해 주었다. 대충 보니 우리나라의 ‘자연 휴양림’ 개념이 아닌가 싶었다. 게시판에 적힌 숙소안내를 보니 이용료가 만만치 않았다. 방갈로가 하루에 11만원, 우리 원두막하고 똑같이 생긴 집이 하루 2만5천원 이었다. 거기에 계곡수영장, 캠핑장, 생태탐험, 레스토랑, 카페, 상점 등 관광객을 위한 기본적인 시설은 다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생태공동체적인 요소가 있긴 했다. 1968년부터 산에 계단을 만들어가며 나무를 심기 시작해서 지금은 수풀이 상당히 우거진 상태인데 1985년에 UN에 의해 생태보존지역으로 지정받았다고 한다. 구 소련 멸망 후 이 지역을 생태관광 단지로 만들어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게 우리의 자연휴양림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마을이 있다는 곳으로 들어가니 선경이 아닐까 싶은 멋진 경치가 펼쳐지고 큰 호수 주위로 아파트 비슷한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1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하니 깊은 산속에 굉장히 큰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쿠바정부는 94년부터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전국에 이런 식의 ‘생태공동체’를 여러 개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원래는 산간 지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화전민들을 끌어 모아 하나의 커다란 계획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전략촌’이라고 해서 산간 오지의 소수민족들을 모두 소개하고 집단촌을 만든 일이 있는데 이 경우는 생태관광을 위해 집단촌을 만들었으니 ‘생태적 전략촌’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건물들은 별로 생태적이지 않은 콘크리트 조립이었지만 주민들은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국가가 인프라를 다 만들어주었지만 이른바 ‘공동체적 산림관리’ (Community Forest Management)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겠다. 주 수입원은 관광객으로부터 나오는 돈이고 농사는 따로 짓지 않는다. 내게는 이 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듯 싶었다. 산속의 경작지 확보 문제라든지, 산림관리와 관광안내 외에 농사를 위한 잉여노동력 확보가 어렵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산속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빈둥빈둥 노는 사람들을 보니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지속가능한 발전모델이라고는 하지만 만에 하나 쿠바의 대외관계가 단절되어 관광객이 오지 않을 경우 이 공동체는 꼼짝없이 굶어야만 한다.
장애인 학교와 알레이다 게바라
모두 두 군데의 장애인 시설을 둘러보았는데 과연 사회주의 복지시설답게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장애인을 국가가 맡아준다는 것은 사실 개인으로선 엄청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등급에 따라 집에서 출퇴근 하는 사람도 있고 전적으로 시설에 남아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곳에 있는 의사와 봉사원들의 태도로 보아 장애인 가족들은 정말 안심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비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인도 캘커타에서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장애인의 집이 떠올랐다. 전세계에서 기부하는 돈을 가지고 수도회가 운영하는 그곳은 장애인들을 수용만 할 뿐 재활을 위해 별다른 노력은 않고 있었다. 열악한 시설과 인력 때문이라고는 짐작하지만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보는 장애 아이들을 보면서 저렇게 수용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 쿠바의 장애인 시설에서는 모든 장애인들에게 아주 적극적인 재활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있었다. 펠리페씨에 의하면 쿠바는 고난의 시기에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예산지원을 결코 줄이지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방문한 시설에서 체 게바라의 친딸 알레이다 게바라를 만났다. 현직 소아과 의사로서 장애인 학교 후원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회봉사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커다란 교실에 둘러 앉아 알레이다 여사의 연설을 들었다. 아버지 체의 눈매를 고스란히 간직한 그녀는 아버지가 살다간 공산주의 혁명가의 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꽤 긴 시간의 연설이었다. 사회주의와 관련하여 그녀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이었다. 형편이 어렵더라도 남에게 구차하게 빌어먹기보다 존엄있게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쿠바를 무너뜨리기 위해 매년 5500만 달러를 써가며 갖은 짓을 다하는데 쿠바인들이 거기에 대항하는 길이 정신력 밖에 더 있느냐며 인민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지려는 경향에 대해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관광사업으로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매매춘이 생겨났는데 인간의 존엄을 내팽개친 매매춘의 존재는 혁명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새로운 세대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본주의 침투와 끊임없이 싸우면서 인민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진솔하고 소박한 얘기를 듣고 모두들, 특히 여성분들, 감명을 받은 나머지 사인공세를 펼치느라 한동안 장내가 어수선했다. 특히 마지막에 혁명영웅의 딸로 쿠바에 살면서 특별대우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알레이다는 겸연쩍게 웃으며 쿠바에 그런 것은 없다며 “인민들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왔는데 그 보다 더 큰 특권이 어디 있는가?”라고 되묻는데서 모두들 뻑 가고 말았다. 일행중 한 분이 가지고 있던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간)을 들이대고 친필 사인을 요구하자 여사는 저자를 살펴보고는 사인하기를 거부했다. 진실을 왜곡한 전기라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체 게바라에 대한 글과 전기가 하도 많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때론 진실하고는 거리가 먼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어 이 참에 아바나에 ‘체 게바라연구소’를 세워서 옥석을 가리는 작업을 하는 한편 생전에 고인이 쓴 글들을 묶어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단다.
나는 특별히 다큐 제작을 염두에 두고 카메라 앞에서 알레이다 여사와 짧은 대담을 가졌다.
“여사님, 오늘날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는 몇 나라 안 남았는데 과연 사회주의의 미래는 있습니까?”
나는 체 게바라의 적통인 그녀가 사회주의 미래에 대해 과연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듣고 싶었다.
“사회주의의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지금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저 엄청난 문제들을 보세요. 지금의 자본주의가 그렇게 해놓았는데 과연 자본주의에 문제해결 능력이 있습니까? 저는 사회주의만이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회주의 외에 다른 대안은 없습니까?”
“현재로선 없다고 봅니다.”
“저는 공동체주의자로서 국가가 모든 것을 다 관리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국가가 다 해주게 되면 주민들의 자발성이 약화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회주의 사회이지만 다양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좋은 얘기입니다. 우리도 그 문제에 대해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도시농업
쿠바의 마지막 날은 온전히 도시농업을 위해 할애되었다. 하루 종일 농장 두 군데와 관련기관 두 군데를 돌아다녔다. 도시농업의 실태라든가 방법 등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에 많은 보고서가 제출되었으므로 굳이 여기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겨우 며칠간 현지에서 보고 들은 것을 다 기록해 봐야 기존의 보고서를 능가할 수는 없다. 대신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정보는 밝혀 두어야겠다. 아직까지 국내에 소개된 쿠바도시농업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상세한 보고는 도쿄 산업노동국 농림수산부 직원인 요시다 타로가 쓴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지 싶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쿠바에 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만큼 대단한 열정과 집념을 가지고 쓴 책이다. 미천한 경험으로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요시다씨의 책은 쿠바의 상황을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예컨대 ‘생태도시’ ‘생태전략’ 운운 했지만 과연 쿠바인민들의 생태적 의식수준으로 보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아직 녹지가 많고 오염이 덜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천민자본주의가 횡행하는 제3세계 국가와 비교하여 확실히 다른 점은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여전히 ‘제3세계적 혼돈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제3세계적 혼돈성이란 제3세계가 타율적 근대화를 겪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체계를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말한다. 아바나항과 인근 해안가, 그리고 아바나시를 관통하는 알멘다레스강의 심각한 오염은 제3세계 대도시의 일반적인 모습 그대로다. 특히나 ‘생태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먹고사는 생태보존지구의 아파트 쓰레기통에 쓰레기들이 전혀 분리되지 않은 채 마구 뒤섞여 있는 것을 보고는 기함을 했다. 그러나 쿠바가 일반 제3세계 국가로서는 엄두도 내질 못할 ‘생태전략’을 내걸고 열악한 재정상태와 여건 속에서나마 꾸준히 노력하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였다. 다음에 참고가 되는 자료는 2003년 5월21일부터 6월1일 사이에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제5회 세계유기농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한국유기농업연수단의 보고서이다. 이것은 유기농선진국으로서의 쿠바의 사례를 참고삼아 한국농업의 방향전환을 위한 정책제안의 성격이 짙은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 쿠바 유기농의 특징과 교훈점이 거의 빠짐없이 다 들어있다. 또 하나 참고가 되는 자료는 당시에 쿠바유기농을 참관하고 돌아온 (사)흙살림이 정부로부터 프로젝트 지원을 받아 약2년 동안 흙살림 포장에서 쿠바식 ‘오가니포니크’ 방법으로 각종 채소를 재배하여 한국에서의 적용가능성을 실험한 보고서가 있다. 이는 구체적 농법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
앞서 방문한 인사들의 보고서에 특별히 더 보탤 것은 없지만 필자 나름의 소회를 몇 가지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쿠바유기농의 성공적 신화에 대한 환상이다. 사회주의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밑도 끝도 없이 “야 쿠바는 100% 유기농을 한다더라”하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한다. 여기서 100%란 도시농업을 말하는 것이지 쿠바농업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농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방의 농지에서는 여전히 관행농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통계 수치가 들쭉날쭉하여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쿠바전체를 볼 때 유기농업이 20%는 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수치도 경이적인 수준이다. 아무리 선진국이래야 3%를 넘긴 나라가 별로 없다(한국은 0.2% 수준). 그러나 도시농업의 메카라고 불리는 아바나시를 일주일 동안 돌아다녀도 정해진 탐방코스 때문인지 몰라도 기대한 만큼의 텃밭 또는 농장을 보지 못했다. 손바닥만한 땅만 있어도 무언가 심어먹는 인구압박 국가에서 온 필자의 눈에는 여전히 노는 땅과 공터가 너무 많았다.
두번째는 쿠바유기농에 대한 근거 없는 폄하이다. “가난한 제3세계 나라에서 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어?” “주인인 소련이 망하구선 어쩔 수 없이 몸부림치다보니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 “독재국가에서 국가가 시키면 해야지.” 이렇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쿠바로 가서 확인해 보기를 권유한다. 쿠바의 유기농은 자본주의 농업선진국들이 집단으로 몰려와서 배워갈 정도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 실제로 그들은 자연생태계의 원리와 전통농법을 과학적으로 접목하여 쿠바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용했다. 유기농 비중이 몇 퍼센트라는 통계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국가의 전행정력과 군인, 과학자, 자원봉사자, 인민들의 피땀어린 노력들이 촘촘히 얽혀있음을 알 수 있다. 생산에서 연구개발, 유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의 기관들이 서로 유기적 협조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론 국가가 토지나 농업기술전수 등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기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지만 성과의 대부분은 지역(community)과 협동조합(cooperatives), 개인 등이 주도해서 이루어내었다. 그리고 이 삼자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인류의 미래
그렇다면 쿠바의 유기농 실험은 인류의 미래인가? 그렇다. 쿠바의 유기농 실험은 인류문명의 미래를 위해 너무도 소중한 경험이다. 단순히 농업이 중요하다는 차원에서의 얘기가 아니다. 쿠바의 실험이 어느날 갑자기 석유공급이 중단되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 인류는 석유에너지 공급 중단이라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미지의 재앙을 품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나라들은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 속에서 석유확보에만 열을 올리고 있지 석유공급중단이라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그것을 미리 경험한 나라가 쿠바이다. 소련붕괴 이전 쿠바는 소련의 석유에너지에 의지한 사회주의 강국이었다. 나라의 규모에 걸맞지 않은 국제적 영향력을 과시하며 그것이 모두 사회주의의 위력인양 으스대었다. 그러나 소련이라는 에너지원이 사라지자 쿠바는 사회주의 천국에서 사회주의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코앞의 미국은 이를 카스트로체제 몰락의 호기로 생각하고 30년 넘게 해오던 경제봉쇄의 올가미를 더욱 세게 조여 왔다. 이 전대미문의 위기를 남에게 손 하나 벌리지 않고 극복해낸 것이 가지고 있는 부존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역순환유기농업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쿠바의 유기농혁명은 인류문명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쿠바의 길이 모범답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여파로 봐야겠지만 여전히 ‘생산력주의’의 폐단이 남아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와의 효율성 경쟁으로 넘어가기 쉬운 요소이다. 또 하나는 문명의 미래를 이야기하기에는 생명철학 또는 생명사상이 아직 취약하다는 것이다. 쿠바가 세계유일의 유기농선진국이 된 데에는 세계자본주의체제가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직시하고 생명의 연대와 반전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워낙에 수세적인 상황에서 혁명이 진행되다 보니 평화에 대한 비전이 몹시 빈약하다는 것이다. 쿠바는 오랫동안 미국 주도하는 세계평화를 해치는 파괴자로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소련 붕괴이후 군대의 파견보다는 교사나 의사의 파견 등 인도주의적 자원봉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몸짓만큼이나 세계평화를 위해 쿠바가 내적으로 또는 내면적으로 좀 더 많은 것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쿠바는 여전히 가난한 제3세계 국가이다. 여전히 미국의 경제봉쇄와 유형무형의 정치군사적 위협 앞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럼에도 쿠바인들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당당하게 뚜벅뚜벅 가고 있다. 많은 서구 관광객들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사회주의 체제를 보고 싶어’ 쿠바를 찾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누가 착각하고 있는지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주의’의 존속이 아니라 인류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을 것인가를 눈여겨 봐야할 것이다.
2008년 2월 바우 황대권(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 bau100@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