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5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렸던 <춘계 공동 학술대회-한국 근대문헌 장정의 문화사>에 발표했던 졸고 하나 올립니다. <근대서지>에 게재 되었는데, 시중에서 보기 쉽지 않은 책이기도 하고 페친 권모 선생의 읽고 싶다는 부탁도 있고 해서 올립니다. 또 근대기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와 목판화의 만남을 알리고 싶어서이기도 하고요.
글이 좀 길어서 세 번에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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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병현과 김정환의 출판미술>
- 오장환 시집『성벽』판화 삽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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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내 앞에 시집이 한 권 놓여 있다. 오장환의 『성벽城壁』 초판본(도판1). 『刻印-한국목판화 100년전』 전시를 위해 빌려온 책이다. 1937년에 간행되었으니 85년이 되었다. 4,6판형에 27쪽의 얇은 시집인데 1부에 14편 2부에 2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표지는 약 5합 정도 두꺼운 장지 계열 한지에 아무런 인쇄 없이 형압으로 누른 『城壁』이란 한문 제목과 저자의 이름만 엠보싱(가다오시, 型押し-凹凸의 주형 사이에 종이를 넣고 압력을 넣어서 오목 새김한 것)으로 처리했다.
두터운 표지 장지와 얇은 내지 순지의 자연스러운 물성과 가장자리가 환기하는 고졸한 한지의 정취, 절제된 선비적 미감은 이 시집의 시와 함께 책 자체를 돋보이게 만든다. 미니멀한 현대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세련된 장정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치장과 화장이란 속물성을 배제한 최소한의 이미지와 물성으로 구성된 이 장정의 품격은 남다르다. 게다가 내지의 시는 검정색이 아닌 짙은 별색(곤색)으로 인쇄했다. 기존의 시집들과는 달리 저자와 발행인의 독특한 개성이 반영된 시집이자 Artist’s Book도 되는 셈이다.” ---김진하, 『刻印-한국목판화 100년전』 기획 메모, 2022
앞에 인용한 필자의 기획노트 대상인 『성벽』은 「풍림사」에서 간행은 되었지만 엄밀하게는 오장환이 직접 만들다시피 한 자가본이다. 모던 보이이자 휘문고보 시절부터 미술에 심취했던 오장환답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희귀한 책을 좋아해서 비싼 값이라도 그런 책을 많이 수집했다는 오장환이고 보면 자신의 처녀 시집을 독특하고도 멋지게 만들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을 터이다. 실제로 친구인 이봉구의 글에 이런 오장환의 고급진 문화적 취향이 기록되어 있다. “…문학으로 인하여 다 팽개치고 동경으로 드나들며 색깔진 양복과 그 좋아하는 시집 중에 珍本, 호화판, 초판 등을 사들이었고…”(이봉구, 『성벽』(1947)의 재판 후기 중에서) 이는 후일 오장환 본인이 운영한 출판사 「남만서고」에서 같은 해 발간한 오장환 자신의 제2 시집인 『헌사』, 1938년 윤곤강 시집 『만가』, 1939년 김광균의 『와사등』, 1941년 서정주의 『화사집』과 같은 빼어난 시집 장정의 원형적 경험이자 모델이 된다.
즉 책을 좋아해서 종로구 관훈동에 「남만서방南蠻書房」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개업했고 또 고가의 희귀본이나 초판본을 다량 소장한 오장환이고 보면, 자신의 시집을 독특하고도 개성적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음은 당연할 터였다.
그래서인가, 오장환은 자신의 시집에 시각이미지의 삽화를 첨가한다. 1930년대 당시 유명 디자이너이자 무대미술가이고 판화가인 이병현(1911~1950)과 김정환(1912~1976)의 목판화 작품을 그의 시집에 소환한 것이다. 오장환 본인의 뛰어난 문화적 감성과 미적 감각에, 프로페셔널한 디자이너인 이병현과 김정환의 개입으로 표지 및 표제지와 각 장을 구분하는 페이지를 격조 있게 장식했다. 그것도 오장환 본인의 손으로 직접. 역시 앞에서 인용했던 이봉구의 글 다른 구절. “… 『성벽』은 일찌감치 시인부락이 나오던 「중앙인서관」에서 洪九(중앙인서관 洪淳烈대표)형의 주선으로 (오)장환이 마음껏 기분을 내어 版畫를 붙이고, 전문을 푸른 빚깔로 인쇄하여 간행되었고, 이 책이 나오자 그해 8월 15일 밤 우리들의 단골 다방인 미모사에서 마담 강여사의 호의로써 출판기념회를 열고 분에 넘치는 맥주를 마셔가며 밤을 지새었는데…”에서 증명된다. 『성벽』이 한지로 제작된 책이라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제본 할 수밖에 없는 방식인데, 이병현과 김정환의 판화를 시집 표제지와 각 장을 구별하는 간지에 오장환 본인이 직접 풀로 붙이는 호사(?)스러운 취미 노동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이 초판은 100부 한정판을 발행했으니 표제지와 간지로 쓰인 이병현의 <꽃>(도판2)과 <해변>(도판3) 각 100장씩 200장, 간지인 김정환의 <밤>은 100장, 총 300장을 풀로 붙인 것이었다. 오장환의 미감에 당대의 디자이너인 이병현·김정환의 참여는 그야말로 세련된 격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여기서 이병현과 김정환이 어떻게 오장환의 시집에 관여했는지 그 관계를 살펴보자. 그들의 개인사적 인연을 특정한 기록은 없으나, 이 세 명이 모두 휘문고보 동문이라는 점(이병현, 1911년생, 1926년 입학 1931년 졸업 / 김정환, 1912년생, 1930년 입학 1935년 졸업 / 오장환 1918년생, 1931년 입학 1935년 자퇴)이 두드러진다.
당시 휘문고보는 5년제라 선배인 이병현은 몰라도 오장환은 김정환과는 함께 학교를 다녔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휘문고보에는 국어 교사로 정지용이, 미술교사로는 장발이 근무했다. 정지용이 오장환을 자주 자랑했다는 얘기가 있고, 장발이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학장을 하면서 도안과 교수로 이병현을, 이병현이 타계하자 1954년 김정환을 교수로 초빙한 것을 보면 이들의 동문 관계에 대한 끈끈함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뿐만아니라 휘문 제자 윤승욱을 조소과 부교수로, 휘문 교사 시절 동료였던 이재훈을 미학 담당 교수로 초빙했음을 보면, 이들의 학연과 인맥의 속성이 두드러진다.)
미술을 좋아했던 오장환이 동문이자 선후배에, 1930년대 초반 당시 이미 미술과 여러 연극무대 감독을 할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이병현이나 김정환과 어울렸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판화를 200장, 100장씩이나 헌정한 사이라면 그들의 친밀도는 쉽게 반증 된다. 더불어 오장환이 선배 이병현에게 자필로 쓴 헌사(도판4)로 보자면 이들의 친밀함은 더 도드라진다.
“秉玹氏점잔흔 손들의 傳하여 오는 風習엔,계집의 손목을 만져주는 것妓女는 푸른 얼골.근심이 가득-하도다.” --- 丁丑年(1937년) 八月 愚弟 吳章煥
처녀시집 발간에 근심이 가득한 오장환이 자신을 기녀에 비유하면서 이병현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내용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이런 단서로 보면 이병현과 김정환이 어떻게 출판미술과 연결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미 1934년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미카사 서방(三笠書房)」의 『書物』의 표지화와 삽화로 출판미술 경험을 했던 이병현과 김정환이 친구 오장환의 처녀시집에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고. 그리고 이 일은 이후 「남만서방」과 「중앙인서관」의 고급스런 시집 출간이나 제작과도 연결된다고 여겨진다.
오장환과 시인부락과 자오선 동인이자 친구이면서 「중앙인서관」을 자주 드나들던 윤곤강(1911~1949)이 1938년 「동광당서점」에서 자가본으로 출간한 시집 『만가挽歌』(도판5)도 이 『성벽』의 포맷을 인용했다고 여겨진다. 표제지와 각 장 간지에 모두 4점의 목판화를 붙인 것. 『만가』의 서지에는 삽화가 이름이 생략되어서 판화가가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조각도의 구사와 형태감으로 보면 일도일획(一刀一劃)의 각법으로 형상을 표현한 이병현의 판각 방식과 조형적 특성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이 『만가』 (다만 『성벽』의 판화가 복제판화임에 비해, 『만가』의 자주색이나 녹색으로 찍어서 부착한 판화는 원본을 마스터 인쇄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오리지널 목판화도 전문판화 잉크가 아닌 인쇄잉크로 찍었을 터이고, 또 마스터 인쇄도 같은 인쇄잉크를 썼을테니 정밀한 확인을 해야 오리지널 진본인지 마스터 인쇄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의 삽화가를 이병현으로 추정한다(윤곤강이 오장환의 절친이란 점, 『성벽』이 제작되는 과정을 「중앙인서관」을 드나들던 윤곤강이 보았을 것이라는 점, 오장환으로 인해 윤곤강이 이병현과 충분히 친분을 만들어서 작품을 제공 받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 등이 그런 추정의 이유다). 당시 김정환은 일본미술대학 졸업 후 일본의 동보영화사(東寶映畫社)의 미술과 촉탁으로 동경에 거주하고 있어서 윤곤강의 「만가」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