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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이가 글을 그렇게 잘 썼다고 할 수는 없지. 술은 좀 하는 편이었지만.”
전혜린에 대해 할머니는 늘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자기보다 유명해진 후배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유치진 선생 밑에서 연극을 시작했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잠깐
영화배우로 활동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절대로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말해주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
떡갈나무 낙엽들이 맹렬히 떨어지던, 일본 열도 동쪽에서 지진이 일어나 태평양 연안에 강력한 해일이 발생한 날. 나는 영상자료원에 있는 정환에게
전화를 했다.
“나야.”
“웬 일이야?”
“영화 좀 찾아줄 수 있을까?”
“제목 알아?
감독 이름이라도.”
“아니, 배우 이름만 알아. 아마 5, 60년대 영화일 거야. 배우 이름은 최인숙.”
“최인숙?
최인숙이 누구야?”
“어……우리 이모.”
정환은 열흘이 지나서야 영화를 찾았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이거 찾느라고 먼지를 얼마나 들이마셨는지 목이 다 잠기려고 그래. 필름 상태가 안 좋으니까 감안해서 봐.”
그는
생색을 냈다.
“이게 무슨 영화사의 걸작도 아니고……그래도 찾았으니 다행이지 뭐야.”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으로
침투한 국군 특수부대의 활약을 다룬 것이었다. 특수부대의 리더는 허장강이었는데 이 부대는 인민군에게 사로잡힌 미군 대령을 구하는 것이 그
임무였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그 미군 대령을 취조하는 임무를 맡은(아아, 왜 하필 이런 역을 맡으셨어요.) 악랄한 인민군 여군 소좌였다.
“너네 이모 왜 안 나와?”
“글쎄, 동명이인인가? 안 나오시네.”
화면 속의 최인숙은 젊었다. 젊고
표독스러웠다. 젊고 표독스럽고 아름다웠다. 주로 어두운 벙커에서 촬영된 화면이어서 그녀의 얼굴에는 빛과 어둠이 강렬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강하게 조여맨 허리띠 때문에 인민군복 아래 가려진 가슴이 강조되었다. 최인숙은 일종의 팜므파탈로, 처음에는 미군 장교를 고문하다가 나중에는
은근히 유혹하는, 외손주가 친구와 같이 보기에 별로 적당치 않은 역이었다. 다행히 정환은 곧 흥미를 잃고 할 일이 있다며 시사실을 나갔다.
화면 속의 최인숙은 미군 장교에게 연합군의 상륙 지점을 털어놓으라고 협박하면서 만약 순순히 분다면 아주 근사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꼬드기기도 했다. 미군 장교는 고문과 유혹을 이기지 못해 인천상륙작전의 중대 비밀을 토설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허장강이 이끄는 특공대가 수류탄으로 문을 폭파하며 벙커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막아서는 인민군의 군관과 병사들을 존 웨인처럼 멋지게
쏘아죽였다. 탕, 타타탕. 한 차례의 격렬한 총격전이 그치자 인민군 중에서는 오직 최인숙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있었다. 풀려난 미군 장교는
바닥에 쓰러진 최인숙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대원들에게 “그 여자를 죽여!”(Kill the bitch)라고 명령하고는 다친 다리를 끌며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