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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무엘상 1장 2절, 디모데전서 3장 5절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요, 또 한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표준새번역>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표준새번역>
한번쯤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내 신앙은 현재 어디까지 와 있는걸까?", "믿음을 잘 유지해 오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나의 신앙이 어떻게 보일까?" 여기 오늘 내 신앙의 현재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죄송하게도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가장 잘 발현되는 곳은 사실 '가정'입니다. '가정'에서야말로 우리의 신앙이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니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신앙을 확인해보면 현재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있습니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분들이 많지 않을 거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가정에서 더 많은 실수를 하고, 더 많은 아픔을 주면서, 신앙인으로서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가정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무의식이 기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목회자들 중에서도 긴장이 탁 풀어져,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장소가 '가정'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주변에 친하게 지내는 목회자들 자녀 몇 명이 있는데 그들이 바라보는 부모이자 목사로서, 목사이자 부모에 대한 평가는 참 '극과극'으로 다양했습니다. 긍정적인 평가도, 부정적인 평가도 모두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부모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나서 느낀 점일 것입니다.
저는 가정에서도 꾸며지고, 신경쓰는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장 날 것 그대로의 신앙, 있는 그대로의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장 잘 발현되는 그 맨 얼굴의 신앙의 모습이 결국 우리의 모든 삶에서 흘러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신앙이 바로 모든 삶 속에서도 꾸며지지 않는 신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가식'이 없는 신앙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정 속에서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형제자매가, 우리의 자녀가 바라보는 현재 나의 신앙의 모습이 진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의 신앙과 가정 외에서의 신앙이 다르다면, 우리 신앙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인정받는 신앙이라면, 굳이 가정을 나서면서 꾸밀 필요가 없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신앙이라면 덧 댈 필요도, 추가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잘 유지해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인정받는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가정 밖에서 더 신앙적인 모습을 가지고 보이려고 하는 것도 '외식'입니다. 반대로 가정 밖에서는 둘도 없는 신앙인으로 칭송을 받지만, 가정에만 들어오면 완전히 달라지는 그런 모습 또한 '가식'입니다. 신앙은 결코 가정과 가정 밖을 구분하는 마스크를 따로 나눠 쓰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부터 제대로 시작되는 신앙은 그대로 가정 밖에서도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밖에서 아무리 제대로 시작했다고 자부하는 신앙이라고 하더라도, 그 신앙이 가정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면 그 신앙은 '거짓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교회에서는 '천사'이지만, 가정에만 돌아오면 '악마'가 되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보여주었던 그 해맑은 천사같은 미소가 왜 가정에만 들어오면 악마같은 독침으로 변질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너무 착하고, 친절하고, 따뜻해서 멋진 신앙인이라 인정받았던 집사님이 '가정폭력' 때문에 법정에 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무너져 내렸는지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사실 저도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부터 경계석을 세웁니다. '오늘은 교회에서 너무 열심히 봉사하고 왔으니 피곤합니다. 그러니 쉬고 싶습니다. 아무도 날 건드리지 말고 내버려두세요' 라고 말하며 꾸며진 신앙으로 버텨왔던 하루가 짜증으로 변해버릴 때도 너무 많았음을 인정합니다. 사실 더 신앙적이어야하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가장 가깝다는 핑계로 너무 많은 상처를 주는 것에 익숙해져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랑을 주어도 모자란대 말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신앙의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이 있다면 저에게는 '사무엘서'입니다. 외부에 보여지고 비치는 신앙이 아니라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무엘상 1장을 시작하면서부터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은 한 인물에 대한 소개로 시작됩니다. '엘가나'라는 레위자손의 직계 후손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때문인지 이유는 몰라도 엘가나는 '레위지파'가 아니라 '에브라임지파'인것처럼 보입니다. 사무엘상 1장 1절과 역대상 6장 27절을 비교해보면 충분히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이, 에브라임의 산간지방에 있는 라마다임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로함이고, 할아버지는 엘리후이고, 그 윗대는 도후이고, 그 윗대는 숩이다. <표준새번역, 사무엘상 1장 1절>
그 아들은 엘리압이고, 그 아들은 여로함이고, 그 아들은 엘가나이고, 그 아들은 사무엘이다. <표준새번역, 역대상 6장 27절>
역대상 6장 27절에 등장하는 족보는 레위의 아들 중 둘째였던 고핫의 자손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핫의 후손이 엘가나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여기서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분명 레위지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1장 1절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엘가나가 에브라임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록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의외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사무엘상 1장 2절입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요, 또 한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사무엘상 1장 2절, 표준새번역>
엘가나는 자기 스스로 레위지파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지, 아니면 레위지파로 불릴 수 없는 삶을 살았던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엘가나에 대한 첫 표현이 바로 '두 아내가 있다는 것'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첫 표현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엘가나'라는 사람을 표현하기에 가장 큰 힌트이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레위지파는 '두 아내'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레위지파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지파들도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일부일처제'는 꼭 지켰어야 할 법칙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화 속에 존재하던 '일부다처제'가 슬쩍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럴싸한 이유를 들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이 마치 허락하신 방법인것처럼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제사, 예배를 담당해야 할 레위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레위기 21장에 기록된 제사장으로서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욱 '한 아내'를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결코 두 아내를 두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두 아내의 싸움 속에서 '사무엘'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했다고 하지만, 엘가나는 자식을 보고 싶어 브닌나라는 두번째 아내를 맞아들이게 됩니다. 엘가나 역시 한나처럼 함께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들'을 구했어야 했는데, 그가 선택한 방법은 하나님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엘가나에게 자식을 낳아준 브닌나는 당연히 한나를 업신여겼습니다.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처음 들으시는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러했습니다. 야곱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삭만큼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끝까지 아내 리브가와 함께 하나님이 허락하실 자녀를 기다렸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시니,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다. <창세기 25장 21절, 표준새번역>
엘가나는 브닌나라는 두번째 아내를 구할 것이 아니라 이 이삭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하나님의 방법을 가정에서부터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종 문제들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브닌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한나가 더욱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했기 때문에,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태어난 것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악한 조건으로 선을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자녀를 허락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방법)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의 여종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온 지 십 년이 지난 뒤이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니, 하갈이 임신하였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 <창세기 16장 2~4절, 표준새번역>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그의 뒤에 오는 자손에게도,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창세기 17장 19절, 표준새번역>
(인간적인 방법)라헬은 자기와 야곱 사이에 아이가 없으므로, 언니를 시새우며, 야곱에게 말하였다. "나도 아이 좀 낳게 해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어요." 야곱이 라헬에게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하나님이라도 된단 말이오? 당신이 임신할 수 없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라헬이 말하였다. "나에게 몸종 빌하가 있어요. 빌하와 동침하셔요. 그가 아이를 낳아서 나에게 안겨 주면, 빌하의 몸을 빌려서 나도 당신의 집안을 이어나가겠어요." <창세기 30장 1~3절, 표준새번역>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은 라헬도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라헬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 그가 임신을 하여서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벗겨 주셨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창세기 30장 22~23절, 표준새번역>
하나님은 결코 영원히 태를 닫아두지 않으셨음을 말씀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해야 했던 믿음의 선배들 역시 인간적인 방법으로, 쉬운 방법으로 스스로 발등을 찍는 수많은 일들을 해 왔던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지 못했던 신앙이 얼마나 그들의 발목을 붙들었는지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들이 바로 엘가나에 대한 첫 표현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엘가나가 레위지파이면서도 에브라임지파처럼 보이면서 그 지파가 있는 지역에 살았던 이유도, 제사장이지만 그 직분을 담당하지 않았던 이유도, 모두 설명이 되기 때문입입니다. 그렇게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한나,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신앙은 바로 가정이 형성되는 모든 과정부터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혼과 출산, 육아 등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바로 신앙을 기초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인간적인 방법, 쉬운 방법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럴 때 바로 '거룩'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해야 할 가장 처음이 바로 가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쉽게 간과하는 식사기도의 중요성, 피곤함 때문에 오늘도 그냥 지나간 가정예배의 소중함, 부모가 자녀를 위해 드리는 축복기도, 자녀가 부모를 위하는 사랑의 기도..주일에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가까이 있는 동역자로서의 가정...이 하나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 모두가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디모데전서를 보면 감독과 집사가 되기 위한 조건들이 등장합니다. 그 조건들 중 아주 중요한 조건으로 우선 기록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디모전서 3장 2절 A, 표준새번역>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녀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2절, 표준새번역>
감독과 집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했습니다. 왜 성경은 이것을 강조하겠습니까? 가정이 시작되는 결혼으로부터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쐐기를 박는 한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디모데전서 3장 5절, 표준새번역>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방법으로, 신앙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결코 교회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가장 작은 교회 공동체인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원합니다. 아직 믿지 않는 부모님을 둔 자녀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신앙생활을 잘 해왔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린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에 속해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여러분의 신앙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쉬운 방법, 인간적인 방법을 당연하다는 듯, 귀찮다는 듯, 편하다는 듯 선택하지 마십시오. 그 방법이 신앙에도 도움이 되는듯 당장은 좋아보이지만 결국 신앙에 조금씩 금이 가게 만드는 원흉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야곱이, 엘가나가, 아니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들이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쉬운 방법,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함으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생겼났는지를 우리는 잘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가정은 여러분들의 신앙의 현재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입니다. 오늘 여러분 각자가 속한 가정 속에서 여러분의 신앙을 한 번 살펴 보시고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서부터 학교, 회사, 교회, 어느 곳을 가든지 여러분의 신앙이 변함없이 동일하기를 축복합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두 얼굴인 신앙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가식적이며 외식하는 신앙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 않으시다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신앙!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시길 간절하게 바래봅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신앙이, 더 많은 가정을 살리고, 이 땅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신앙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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