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전후에 미국에 입양된 로벗과는 가끔 테니스도 같이 치고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편이다. 나는 미국사람의 궁금한 점이 있으면 부담없이 물어볼수 있는 몇 안되는 친구중 하나다.
로벗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나는 한국사람과 미국사람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한국사람에 대한 비판적인 부분을 이해시키는데 나름대로 노력하기도 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서 완충지대를 찾게 되어 지금은 우리 가슴속 깊이 담긴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관계로 성장했다.
가감없이 좋은 충고를 해주는 그에게 나는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교회에 나가고 있지만 서로의 신앙생활에 대해 열어 놓고 이야기할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그가 다니는 교회는 내가 다니는 교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편인데도 불구하고 신앙적인 대화를 나눌수 있는 것은 교회의 간판을 떠나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끄럽고 추한 면까지 이야기할수 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물론 한국에서라면 친한 친구와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시간이 돈이라고 눈코 뜰새없이 바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더물고, 시간도 없는 편이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서 받은 느낌은 한국사회도 서서히 산업화사회의 전형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눈에 비친 몇가지 증세를 몇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도 거대도시가 되었기때문에 같은 서울에 살더라도 한쪽 끝과 다른 쪽끝에 사는 사람은 남남이나 다름없었다.
핵가족시대로 접어들어서 자녀를 유아원에 보내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2교대 근무가 늘어났고, 24시간 영업하는 가게도 눈에 띄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먹고, 자고, 일하고, 쉬는 사이클속에 갇혀 있었다.
이 말은 사람과의 만남이 특별한 약속에 의해서나 가능해져서 이전 같이 오늘 얼굴한번 볼까하는 낭만은 사라졌다. 산업사회 이전처럼 갑자기 생각나서 소주 한잔 하자고 하면 원시인 취급당하기 쉽다는 이야기다.
인간관계가 허물어진 산업화 사회에서 외로운 사람이 많아지고 결국 정신질환자가 늘어난다는 사실은 한국사회도 대비해야 할 중요한 사회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게 나에게는 큰 복인 셈이다.
로벗이 10년여 전부터 한국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점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사람들은 새로 누군가를 만나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게 생각한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은 테니스를 얼마나 잘 치는가(우리는 주로 테니스 코트에서 만났으니까) 하는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예를 들면 나보다 잘 치는 사람은 나보다 나은 인간, 나보다 못치는 사람은 나보다 못한 인간 식으로.
그리고 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는가와 얼마나 돈이 많은가에 관심이 많다.
돈이 많은 사람은 나보다 나은 사람, 돈이 없는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 식의 잣대로 사람을 본다.
그리고 나이를 따진다. 몇년생, 무슨띠해서 나이순으로 사람들은 나래비를 세운다.
나이든 사람에게 존경의 표시를 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 말을 하는 것은 존경은 하라고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경은 그 사람의 평소 행동거지를 보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줄을 세워 나이의 많음을 앞세워 다른 사람 위에 서려고 하는 졸장부식 사고에는 강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는 닛산 센트라를 몰고 다닌다.
이 차는 닛산의 승용차중에서 약 1만불전후에 살수 있는 차종이다. 그 다음이 2만불전후하는 알티마이고, 그리고 2만 5천불에서 3만불하는 멕시마가 있다. 한국사람들은 아시겠지만 비지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대체로 좋은 차를 몰고 다닌다. 그래서 차를 보고 이 사람이 돈을 얼마나 버느가를 쉽게 알수 있다.
테니스를 칠때까지는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 나와서 자기가 타는 차를 보고 “흥 알고보니 이런 싸구려 차를 몰고 다니는군.”하는 식의 모멸감을 주기도 한다고…
왜 자기가 타는 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느냐고 볼멘소리로 항의를 했다.
나의 궁색한 대답은 이러했다.
“한국은 유교문화의 뿌리가 깊은 나라다.
유교문화의 본질은 그러하지 않지만 역사가 오래 되다보니 격식과 겉모양만 남게 된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한동안 먹고 살기 어렵다가 갑자기 잘살게 되었다. 원래 잘 살던 사람은 관계가 없지만, 갑자기 잘 살게 된 졸부들은 신분의 상승을 알리기 위해서 겉치장을 중시하다 보니 그게 하나의 풍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래 우리들은 사람을 볼때 무엇을 먼저보는가?
한국 신문에 이런 제목이 있었다.
“외모차별”
이 말이 논리적으로 맞는지 모르겠다.
그 의미는 외모를 보고 사람을 차별한다는 뜻인데, 나는 “외모를 중시하고 속살을 경시하는 ‘간판문화’”라는 제목으로 접근해 보고 싶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 키가 큰지, 퉁보인지 적당 체중인지, 통성명을 하고 나면 어디 김씨인지, 항열이 비슷하면 몇대손인지 등등을 물어본다.
그리고 고향을 이야기하면 여기서부터 학벌을 물어보게 되고 동문이나 아는 사람들도 거명되고, 그 학교출신의 몇몇 유명인사도 들먹이고,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 내지는 인연도 소개된다.
내가 이런 사람이란 것을 알리는 단계를 잘 살펴보면 “내가 이러저러한 사람”이라는 직설적인 방법보다는 나는 “이런 사람과 이런 관계가 있고, 집안은 이러하고, 어떤 회사에서 누구랑 일을 했고, 누구를 만났고 등등”의 나와 관련되는 다른 사람을 알림으로써 나라는 사람을 소개한다.
나라는 사람의 실체를 나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주변물체를 통해서 알린다. 이것이 우리 생활속에 깊이 뿌리박고 았는 간판문화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국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미국사람들도 별반 다른 점이 없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고, 결혼했으면 가족이 어떻게 되고, 취미생활로 이런 것을 즐기고 있다. 계속해서 물어봐도 ‘나는’이란 주어를 벗어나지 않고 말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깊어지면 가슴속에 담긴 것을 풀어놓기 열기 시작한다.
이 점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시엔엔과 팍스 티비에서 엥커를 교환했는데 팍스로 간 법률담당 여성 엥커가 얼굴수술을 하고 등장하는 바람에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아마 변호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문 지식인으로서 자기의 입지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얼굴을 고쳐가면서 방송 일을 해야하는가가 시비거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여자의 외모를 이용하여 시청율을 올리려고 하는 방송국의 발상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공중파 방송의 윤리를 따지기에는 이미 물건너간 상태지만, 인형같은 여자를 앉혀놓고 시청율을 올리려고 하는 소인배적 발상이 이 사회를 보편적 가치관을 망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물론 찬성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심철호라는 방송인을 닮은 대학 친구 하나가 졸업반때 턱수술을 한다고 했다. 아래턱이 튀어나와 주걱턱처럼 생겼기 때문에 갈아내는 수술을 한다고.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외모가 이상하면 열등감이 생기고, 사람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의 권고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미국의 아이 열명중 두세명은 이빨교정을 한다고 철사로 묶어서 일년정도 고생하는 걸 보아 왔다. 이빨이 엉성하고 잘못난 사람들은 웃는걸 꺼리고 말하는것도 꺼리게 된다고 하는데 말을 들어보면 심한 경우나 그렇지, 대부분의 경우 안해도 될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든다. 치과의사들의 상술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가 아닌지.
어쨌거나 미국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상대의 외형적인 것에 대해서도 물어보지만 그와 함께 그가 어떤 인간성의 소유자인지를 살피는데도 소흘히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생활을 하는사람인지가 무슨 차를 몰고 다니고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 신문에 쓴 인물평중에서 눈을 끄는 점은 최근에 읽은 책이나 그 사람이 살면서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실수 또는 다른 사람이 상상조차 못하는 독특한 헤프닝, 최근에 본 영화, 평소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 같은 것을 소개한다.
나는 이런 기사를 보면서 그 사람의 내면을 더 가까이에서 볼수 있어서 좋다. 그냥 몇년도에 출생하여 어떤 학교를 나오고, 어떤 회사에서 일했고,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된 사람은 간판은 알수 있지만 그 사람의 속을 이해하기 어렵다.
성숙한 사회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의 과소나 생김새의 미추나 족보의 장단보다는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을 보고 그 사람의 사람됨을 분별하는 시각이 존중되는 사회 말이다.
경제가 발달하여 잘 살게 되면 정신문화도 그와 함께 성장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돈과 제도는 들여 왔는데 그것을 보는 눈은 아직 옛 그대로의 상투를 쓰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물질이나 간판보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사회적인 공헌도와 인간성의 깊이에 더 무게를 주었는데 지금은 상실하고 말았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