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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초고] 남북의 두 풍경이 던지는 경고ㅡ'에너지 무임승차'를 끝내고 분산형 자립의 백년대계로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여러 AI
최근 전 세계 지정학적 격변의 틈새에서 북한이 이례적인 경제 활기를 띠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평양 거리에 등장한 수입차와 배달 앱, 밤하늘을 밝힌 위성사진의 조도 변화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화려한 지표의 이면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본질적인 변화는 따로 있다. 국가의 공식 송배전망이 완전히 무너진 혹독한 환경 속에서, 북한 주민들이 장마당을 통해 스스로 중국산 초저가 태양광 패널을 구입해 구축한 '밑바닥에서부터의 분산형 에너지 자급자족' 생태계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인용한 국내 연구기관의 탈북민 대상 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북한의 가구별 태양광 보급률은 이미 46%(약 288만 대)에 이른다. 다만 이 수치를 곧이곧대로 '자립의 성공'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같은 조사는 가구용 태양광이 북한 전체 발전량의 0.6%, 가구 전기소비량의 7%가량을 충당하는 데 그치며, 용도 역시 대부분 TV 시청과 휴대폰 충전 등 최소한의 통신·조명에 머문다고 지적한다. 즉 이것은 국가가 전기를 주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린 주민들이 벌인 눈물겨운 생존 투쟁이지, 본받아야 할 성공 모델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숫자가 새삼 뼈아픈 이유가 있다. 같은 반도, 같은 좁은 국토 위에서 국가 붕괴라는 최악의 조건에 내몰렸던 주민들조차 절반에 가까운 가구가 스스로 전기를 마련해낸 반면,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 인프라를 가진 남한의 대기업들은 이 최소한의 자구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국가의 송전망에 전적으로 기대어 왔다는 사실이다. "국토가 좁아 기업 차원의 자체 조달은 불가능하다"는 통념은, 바로 그 좁은 국토의 절반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 문명과 전력 인프라를 자랑하는 대한민국(남한)의 풍경은 어떠한가. 글로벌 시가총액을 다투는 초일류 대기업들과 첨단 IT 기업들은 오히려 국가가 값싸게 공급하는 전력과 초고압 송전 인프라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온실 속 화초'의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강요된 자립을 이뤄내는 동안, 남한의 에너지 대량 소비 기업들은 국가 시스템에 기생하며 스스로 에너지를 조달하고 책임져야 할 '자립의 체질'을 기를 기회를 끊임없이 유예해 왔다.
이제 이 왜곡된 에너지 공급 구조와 국토 계획의 모순은 임계점에 도달했다. 에너지 폭증 시대에 분산 수급과 자급자족은 단순한 전력망 관리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백년대계의 핵심 과제다.
국민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기업의 '에너지 무임승차'
그동안 한국의 대형 제조업과 첨단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고 품질 좋은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이 '값싼 산업용 전기'는 결코 하늘에서 거저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전력공사의 수십조 원에 달하는 누적 적자와 부채, 그리고 전력 생산과 송전 과정에서 오랜 세월 묵묵히 감내해온 지방 주민들의 눈물겨운 희생으로 메워진 결과물이다.
소상공인과 일반 가계가 높은 요금을 감당하며 교차 보조를 해주는 사이, 대기업들은 원가 이하의 전기를 당연한 권리처럼 누리며 자체적인 에너지 효율 개선이나 친환경 전력망 구축 투자에는 소홀했다. 공장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다. 천문학적인 전력 소요가 필요한 대형 공장들은 공장 문앞까지 대용량 전기를 배달해 주는 송전선로의 구축 책임을 오롯이 국가와 공공에 떠넘겨 왔다.
발전소에서 대용량 소비처까지 초고압 송전탑을 세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극심한 사회적 갈등과 토지 황폐화, 그리고 송전선로 건설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과 공공의 몫으로 남았다. 기업은 그저 스위치만 켜면 돌아가는 시스템 위에 무임승차해 온 것이다.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가 보여주는 설계 수명의 한계
이 기형적인 국가 의존적 모델의 결정판이 바로 정부와 대기업이 추진 중인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다. 사업이 완공되는 시점에 이 단지 하나가 요구하는 전력은 무려 10GW(기가와트)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원자력 발전소 7~8기를 동시에 가동해 오직 이 공장들만을 위해 송전해야 하는 비현실적인 규모다.
정부와 한전은 이 무시무시한 전력을 대주기 위해 동해안의 원전과 호남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소로부터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초고압 송전선로(HVDC)를 용인 내륙까지 연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는 또다시 선로가 지나가는 강원도와 충청도 등 수많은 지방 자치단체와 주민들에게 '밀양 송전탑 사태'와 같은 일방적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는 일이다.
동시에 발전소와 소비처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멀어짐에 따라 공중으로 사라지는 송전 손실과 계통 불안정 리스크 역시 전력망 전체가 고스란히 짊어져야 한다. 대기업들이 오직 인재 채용과 수도권 집중의 이점만을 고집하는 바람에, 국가 전체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공간적 비용이 끝없이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발상의 전환ㅡ신규 투자부터 적용할 형질변경과 분산형 거점 이전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백년대계를 위한 과감하고 합리적인 발상의 전환을 단행해야 한다. 대형 제조 대기업들이 자립 의지 없이 국가의 전력 수급 계획을 쥐락펴락하게 놔둘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소비하는 자가 스스로 조달하고 책임진다'는 수혜자 부담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이미 착공에 들어간 용인 클러스터를 하루아침에 되돌리자는 것은 현실성 없는 주장이다. 다만 앞으로 신규로 확정되는 증설 라인과 차기 클러스터, 그리고 앞으로 허가될 대형 데이터센터부터는 지금과는 다른 원칙을 적용할 수 있고, 또 적용해야 한다. 오히려 이것이 경제적·국토계획적으로 훨씬 영리한 고부가가치 공간 전환의 기회다.
* 수도권 부지의 스마트 고부가가치화 (형질변경):
이미 확보된 대규모 부지는 초고전력·초다소비 형태의 대규모 제조 공장(Fab) 대신, 전력 소비가 제조업의 수백분의 일에 불과하면서도 우수 인재들의 선호도가 높은 기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가령 연구개발(R&D) 센터, 반도체 설계(팹리스) 허브, AI 소프트웨어 및 바이오 융합 단지로 형질을 변경해 고밀 개발하는 것이 맞다. 대기업 입장에서도 토지의 부가가치를 극대화하고 인재 확보의 이점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길이다.
* 신규 생산 라인의 분산에너지 거점 배치:
막대한 전기와 물이 필요한 신규 생산 공장(Fab)은 동해안의 원전 인근이나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풍부하여 전력이 남아도는 호남 등 분산에너지 수급이 용이한 지방 거점으로 배치해야 한다. 발전소 바로 옆에 공장을 짓는 '비하인드 더 미터(Behind-the-Meter)' 직결 방식을 택하면 대규모 초고압 송전탑을 새로 건설할 필요가 없으며, 송전 손실을 제로(0)에 가깝게 줄일 수 있어 기업과 국가 모두에게 천문학적인 비용 절감을 가져다준다.
또한, 재생에너지 여유 지역으로 생산 라인을 배치할 경우 글로벌 시장의 가장 강력한 무역 장벽으로 부상한 RE100(재생에너지 100%)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달성할 수 있다. 이는 향후 100년 동안 우리 제조업의 글로벌 수출 경쟁력을 담보하는 유일한 열쇠이기도 하다.
방치되어 온 또 하나의 잠재력ㅡ영농형 태양광
분산형 자립을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짚어야 할 자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영농형 태양광이다. 농지 위에 작물을 재배하면서 그 위 구조물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발전과 영농을 병행하는 이 방식은, 국토가 좁고 일조량이 풍부한 한국의 지리적 조건에 특히 잘 맞는 잠재력을 지녔다. 그런데도 그동안 이 잠재력은 지자체마다 제각각인 이격거리 규제와 농지 전용을 우려한 「농지법」의 경직성에 가로막혀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해왔다.
다행히 최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2026년 5월 국회 본회의에서 「영농형 태양광 발전사업의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실경작자 중심의 제도적 틀이 처음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수준이다. 실경작자 요건과 면적 제한, 부재지주에 대한 영농경력 제한 등 난개발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가 함께 논의되는 것은 타당하지만, 그만큼 확산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북한의 사례가 다시 한번 시사점을 준다. 북한 주민들이 국가의 무력함 속에서 가구 단위로 태양광을 자력으로 조달했다면, 한국은 국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제도적 정비를 통해 농촌의 유휴 상부공간을 정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기업의 '수혜자 부담' 원칙과 마찬가지로, 농지 위 분산 발전 역시 '햇빛소득'이라는 이름으로 농가에 새로운 수익원을 돌려주면서 동시에 국가 전체의 분산 공급 기반을 넓히는 일석이조의 자산이다. 대기업발 초고압 송전망 확충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미 존재하는 농지라는 국토 자산을 분산 에너지원으로 온전히 되살리는 일에도 정책적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미국 빅테크가 보여주는 '수혜자 부담'의 실제 모습ㅡ사막의 태양광과 배터리
이러한 대안은 결코 허황된 이상론이 아니다. 글로벌 IT 트렌드를 선도하는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이 자급자족과 분산형 조달의 원칙을, 그것도 가장 각박한 입지 조건인 사막 지대에서 행동으로 증명하고 있다.
구글은 개발사 인터섹트 파워, 사모펀드 TPG 라이즈 클라이밋과 손잡고 태양광·풍력·배터리 저장장치를 데이터센터와 한 부지에 묶어 짓는 '산업단지형' 프로젝트에 20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텍사스에서는 토탈에너지스와 15년간 1GW 규모의 태양광 전력구매계약(PPA)을 체결해 위치토·머스탱크릭 발전단지의 전력을 직접 공급받기로 했고, 미네소타에서는 엑셀 에너지와 함께 1.4GW의 풍력과 200MW의 태양광에 더해, 최대 100시간까지 방전이 가능한 폼 에너지의 장주기 배터리 300MW(30GWh)를 결합한 계약을 발표했다. 아마존 역시 태양광과 저장장치를 결합한 프로젝트를 15건, 총 2.3GW 규모로 운영 중이며, 마이크로소프트는 한화큐셀과 8년간 12GW 규모의 태양광 공급 계약을 맺었다.
특히 주목할 곳은 애리조나와 네바다다. 두 주는 저렴한 부지, 낮은 자연재해 위험, 확장되는 재생에너지 여건을 앞세워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신규 입지로 각광받고 있다. 네바다 토노파의 한 데이터센터는 태양광과 배터리 저장장치만으로 아예 송전망에서 완전히 독립한 '오프그리드' 방식을 택했고, 버크셔 해서웨이 에너지는 네바다주 처칠 카운티에 400MW급 태양광 발전소와 400MW급 배터리 저장장치를 나란히 짓고 있다.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미국 내 신규 발전 설비의 송전망 접속 대기 기간이 4~5년까지 늘어난 상황에서, 발전소·배터리와 데이터센터를 아예 한 부지에 묶어 짓는 '비하인드 더 미터' 방식은 송전망 접속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가동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실질적 해법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송전망을 깔아주기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발전원과 저장장치를 확보해 사업 속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들이 증명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의 정상적인 규칙이다.
물론 국토가 넓어 사막에 발전소를 통째로 지을 수 있는 미국과, 산지가 많고 이미 개발이 끝난 국토를 가진 한국이 똑같은 방식을 택할 수는 없다. 다만 원칙은 다르지 않다. 조달의 책임을 소비자가 진다는 원칙 아래, 미국은 광활한 사막의 태양광과 배터리로, 한국은 앞서 살펴본 동해안·호남의 분산에너지 거점과 농지 위 영농형 태양광으로 각자의 국토 조건에 맞는 답을 찾으면 된다.
국토와 에너지 백년대계를 향한 제언
"에너지를 소비하는 공간이 곧 에너지를 생산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 단순하고 명료한 물리적 법칙은 국토계획과 도시공학이 지켜야 할 가장 위대한 진리다. 전력 생산지인 지방은 황폐화되고, 전력을 소비하는 수도권은 비대해지는 이 극단적인 부조화와 왜곡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좀먹는 일이다.
북한 주민들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일궈낸 강제된 분산형 자립의 에너지는, 온실 속에서 안락하게 혜택을 누리며 국가의 송배전망 마비 리스크를 외면하고 있는 남한의 대기업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장과 다름없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대기업은 개발독재 시절의 중앙집중식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규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거나 대형 데이터센터를 허가할 때 '자체 분산형 에너지 조달 비율 의무화'와 같은 제도적 빗장을 걸어야 하고, 동시에 이제 막 제도의 문턱을 넘은 영농형 태양광을 농촌 소득과 분산 발전을 잇는 실질적 축으로 키워내야 한다.
단기적인 매몰비용에 집착해 파국이 예견된 중앙집중 모델을 신규 사업에까지 끝까지 고집할 것이 아니라, 공간의 형질변경과 분산 배치, 그리고 농지의 재발견을 통한 대전환의 카드를 꺼내 들어야 할 골든타임이다. 에너지 자립과 국토의 효율적 분산 배치를 동시에 달성하는 이 위대한 이정표야말로, 우리 후손들에게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국토를 물려줄 수 있는 진정한 백년대계의 시작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