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수정안] 전쟁을 차단하는 〈한미‘시민’동맹〉을 상상한다 — 재미한인 230만 시대, 동맹의 언어를 바꾸자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2026.05.04.
2025년 9월 4일,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 현대차·LG가 76억 달러를 들여 짓던 배터리 공장에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이 들이닥쳤다. 475명이 구금됐고, 그 중 300여 명이 한국인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한국인 체포'가 아니었다. 동맹국 시민이 동맹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전쟁경제·이민정책·노동구조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같은 시각, 가자지구에서는 민간인 사망자가 또 늘고 있었다. 그 폭탄의 값은 미국 납세자의 세금이었다. 한국은 동맹이라는 이유로 침묵했다. 침묵이 항상 동의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침묵이 계속되면 동의로 읽히기 시작한다.
이 두 장면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동맹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시민은 그 동맹에 어떤 권리를 갖는가.
'한미동맹' 옆에 '한미시민동맹'을 세우자 — 언어 자체가 운동이다
이 글에서 '한미시민동맹'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기존의 '한미동맹'이라는 언어에 대한 의도적인 대구(對句)다.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언어 구조를 빌려, 그 안에 균열을 내는 방식이다.
'한미동맹'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국가·군사·조약을 떠올린다. 거기에 '시민' 한 글자를 끼워 넣는 순간, '동맹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자동으로 발생한다. 설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묻게 된다. "지금 한미동맹은 시민의 동맹이 아니었나?" 이 질문이 곧 운동의 씨앗이다.
'한미동맹'이 위에서 체결된 동맹이라면, '한미시민동맹'은 아래에서 번져가는 동맹이다. 이 대비 구조 자체가 선언문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좋은 운동은 좋은 언어에서 시작한다. 그 언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때, 조직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왜 지금 시민의 통제가 필요한가
많은 한국시민이 한미동맹을 지지한다. 북핵 위협이 실재하는 한, 억지력의 필요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동맹은 점점 전쟁 수행 체계로 기울고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전작권 전환에 공개적으로 제동을 걸고, 한미동맹이 중국 견제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설계되며, 방위비 분담금과 기지 운영비는 수조 원이지만 사용 내역은 거의 공개되지 않는다.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비용을 치르는 것은 시민이다. 세금, 안전, 생명, 노동 모두 시민의 몫이다. 그런데 동맹의 핵심 결정은 시민의 통제 밖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전쟁을 획책하는 동맹을 감시하고, 전쟁을 차단하는 동맹으로 전환시키는 시민의 통제력이다. 이것이 '시민동맹'이 필요한 이유다.
시민동맹은 어떤 모습인가 — 팬덤형 연대가 주류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다. 시민동맹이 기존의 시민단체·연대 조직과 같은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존의 조직적 접근 방식이야말로 '정치적 냄새'를 풍긴다. '한미동맹 감시'라는 말은 즉각 진보 낙인으로 읽히고, '반전운동'은 좌파 프레임으로 소비된다. 이미 동의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집회가 되기 쉽다.
그러나 오늘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팬덤형 연대다. BTS의 글로벌 팬덤 '아미(ARMY)'는 이미 그 가능성을 증명했다. 2020년 미국 대선 당시 아미는 트럼프 털사 유세의 빈 좌석 공작을 조직했고, BLM 운동에 100만 달러를 72시간 안에 모았다. 이것은 정치 조직이 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선언도 없었다. 그냥 연결된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팬덤형 연대가 강력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탈정치성' 때문이다. 입장을 먼저 묻지 않는다. 가입 절차가 없다. 이념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냥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 어느 순간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정치적 냄새가 나지 않는 것 자체가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힘이다. 역사적으로도 가장 강력한 운동들은 처음에 정치운동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한국의 촛불도 처음엔 그냥 나온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팬덤형 연대는 리더가 없어서 탄압할 대상이 없고, 조직이 없어서 유지 비용이 없으며, 소멸했다가 다시 나타나는 복원력이 있다. 들뢰즈가 말한 '리좀형 조직'에 가깝다. 뿌리가 하나인 나무가 아니라, 어디서든 다시 자라나는 잔디 같은 구조다.
재미한인 230만과 K-컬처 팬덤의 만남
한미시민동맹의 토양은 이미 존재한다. 재미한인 230만 명은 미국 정치에서 점점 중요한 유권자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조지아·버지니아·펜실베이니아 등 경합주에서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230만 재미한인이 단일한 정치 블록으로 뭉칠 것이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 세대별·계층별·이념별 스펙트럼이 넓다.
주목할 것은 1.5세대·2세대 한인 청년들이다. 이들은 이미 BLM, 기후운동, AAPI 연대 등에서 조직 경험이 있다.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쓰며, 미국 시민사회와 한국 문화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간다. 이들이 한미시민동맹의 실질적인 첫 번째 층이다.
여기에 더해, K-컬처 팬덤이라는 거대한 감성 네트워크가 있다. BTS를 사랑하는 미국 청년이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라틴계 여성이 한국 사회를 이해하게 되며, 한국 음식에 빠진 흑인 청년이 한국인 노동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흐름. 이것은 누가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연결이 먼저 일어나고, 의제가 그 뒤를 따르는 구조다.
BTS는 이미 2018년 유엔에서 평화의 언어로 세계에 말을 건넸고, 한국 정부의 미래세대와 문화를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로 임명됐다. 아미에게 "BTS의 고향이 전쟁터가 되지 않도록"이라는 프레이밍은 감정적 설득력이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BTS를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 안의 시민을 만나는 것이다. 팬심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회의식이 있는 개인들과 자연스러운 접점을 만드는 것이다.
시민동맹의 조직은 인프라는 조용히, 연결이 먼저
그렇다면 시민동맹은 전혀 조직이 없어도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완전히 무정형이면 에너지가 분산되거나 역이용될 수 있다. 다만 조직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기존 조직은 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팬덤이 움직일 때 올라탈 수 있는 플랫폼, 법률 지원, 언론 대응 창구를 조용히 준비해두는 역할이다. 운동의 방향은 아래에서 결정되고, 조직은 그것이 힘을 잃지 않도록 받쳐주는 구조다.
가령 이것을 단계적으로 그리면 이렇다.
먼저 1~2년은 신뢰 기반 구축이다. 가령 한국과 미국의 시민단체 실무자 간 정기 교류 채널을 열고, 재미한인 청년 중심의 소규모 워킹그룹을 뉴욕·LA·워싱턴 DC에 만든다.
3~4년째에는 단 하나의 구체적 캠페인, 예컨대 방위비 분담금 국회 공개 청문회 요구처럼 한미 양측이 동시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의제에서 공동 행동을 시도한다.
이것은 하나의 그림이다. 실제로는 이런 코스를 밟지 않고 갈 가능성도 크다.
거창한 조직 선언보다, 작은 공동 행동의 성공 경험이 신뢰를 쌓고 그 신뢰가 조직을 키운다. 모든 위대한 연대는 한 번의 공동 서명에서 시작했다.
한미시민동맹이 가져올 변화
시민동맹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어떤 변화가 오는가.
첫째, 전쟁 억제력이 강화된다. 동맹의 군사적 결정은 더 많은 설명과 공론화를 요구받게 되고, 정치권이 전쟁을 선택하기 어려워지며, 전쟁의 문턱은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둘째, 동맹의 투명성이 확대된다. 방위비 사용 내역, 무기 생산·수출 구조, 기지 운영 정보가 시민의 요구에 따라 공개 대상이 된다. 숨겨진 구조가 드러나면 전쟁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 이익의 선택'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셋째, 이민·노동 문제가 개선된다. 조지아 공장의 한국 기술자처럼 전쟁경제 구조 속에서 희생되는 노동 문제를 양국 시민이 공동의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넷째, 동맹의 패러다임이 전환된다. 군사동맹에서 평화를 위한 시민동맹으로, 전쟁 준비 체계에서 전쟁 억제 장치로, 국가 중심 동맹에서 시민 중심 동맹으로.
선언이 아니라 번짐으로
서울의 시민이 말한다. "한반도가 전쟁의 전장이 될 결정에, 우리의 동의가 필요하다." 워싱턴의 시민이 말한다. "우리의 세금으로 굴러가는 전쟁에, 우리의 동의도 없었다." 이 목소리들이 같은 언어로 연결되는 순간, 한미동맹은 전쟁의 전초기지가 아니라 전쟁을 막는 시민의 동맹으로 다시 쓰이기 시작할 것이다.
한미시민동맹은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번져가는 것이 될 것이다. 조직이 운동을 만들기 보다, 연결이 먼저 일어나고, 의제가 그 뒤를 따른다. 조직은 이런 흐름의 결과를 조용히 챙겨주는 역할이다.
맹목적인 동맹이 아니라, 전쟁을 향한 거부가 한미 시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면, 그날부터 한미동맹은 1950년대 군사동맹의 역사가 아니라 21세기 시민이 만든 '평화동맹'의 역사로 다시 시작될 것이다.
전쟁이 동맹의 목적이라면, 시민은 동맹을 거부한다.
평화가 동맹의 목적이라면, 시민이 주도하여 동맹을 만든다. 〈한미'시민'동맹〉이 그 시작이다.
마침 올해 미국 11월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얼마남지 않았지만 무언가 그 나름의 시도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