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이란 인간의 살아가기 위한 지식을 가르치는 중요한 시스템이다. 이러한 교육이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활용될 때는 다른 모습으로 변질된다. 지배자는 사람의 사고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도록 교육을 통해 교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모습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한·중·일간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전쟁 또한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임나일본부설이나 七枝刀 명문에 대한 한·일간의 해석 차이는 역사조차도 각국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들어나가려는 의도 때문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보여주는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노력 역시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단지 역사교육에서 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슬로건을 내걸고 그것을 국민에게 인식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교육을 하기 위한 도구가 학교에서 신문, 방송, 인터넷 등으로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정권이 요구하는 이념을 대중에게 전파시키려는 노력은 같다. 이렇게 정치적 목적에 따라 교육을 이용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세계의 모든 국가는 좋은 이념의 전파든 나쁜 이념의 전파든 간에 모두 교육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도 새로운 정권을 세우면서 과거 불교의 이념을 불식시키고 새로운 이념인 유교 특히 주자학을 전파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시하였던 정책은 교육이었다. 조선정부는 國初부터 忠과 孝 등의 유교이념을 잘 표현하고 있는 '小學'이나 '三綱行實圖'를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이념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교육기관이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초기에 국가 교육기관인 향교를 전국에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세종은 향교에서 경서를 가르치기 전에 소학을 가르치라고 할만큼(한국의 향교/97) 향교를 통하여 유교이념을 보급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아 초기부터 교육정책은 삐거덕거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육정책의 실패는 다른 교육기관의 발생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도학적道學的 목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서원이다. 서원의 발생 원인은 공교육기관인 향교와는 다르고 그 교육의 목표도 달랐다. 서원은 철저하게 주자학의 근본원리인 修己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서원은 초기에는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은 17세기를 기점으로 보수화하여 결국 고종 6년 서원철폐를 당하고 조선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처럼 교육시설도 역시 사회의 요구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따라서 교육시설도 사회·정치의 변화에 따라 같이 변화해간다. 다음 장에서는 사회·정치의 변화가 교육시설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에 따라 교육시설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관학인 향교의 변천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여왔다.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와 같이 유교의 이념을 전파하려는 의도에 의하여 학교가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고려시대 전 시기를 통하여 유교 교육이 행해져 왔음은 분명하다.(고려시대 사람들 이야기/28-37쪽 참조) 고려사 인종 20년(1142)에 "시험에 응시하는 지방 학생들은 계수관이 향교의 도회(매년 여름 지방에서 치른 인재를 뽑는 모임)에서 증명을 해주도록 했다."는 기록에서 향교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인종 5년(1127)에 전국의 주에 향학을 세우도록 조서를 내린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이미 향교와 비슷한 교육기관이 설립되어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설립된 향교가 무신집권기와 몽고간섭기에 제대로 운영이 되지 못하다가 고려 말 지방관과 유생의 노력으로 그 기능이 회복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왕조가 세워진 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기본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에 전도되었던 민중의 사고를 바꾸기 위해서는 유교이념보급에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는 왕조가 시작하자마자(1392년/태조 1) 각 도의 안렴사(按廉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興廢로써 지방관 고과(考課)의 기준을 삼는다."고 할 정도로 향교의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 329개의 고을에 향교가 건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향교의 급속한 보급은 고려시대의 향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고려 인종 때 교동, 태안, 보안등의 속현까지도 향교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는 이미 전국에 향교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려시대사람들 이야기/31쪽)
조선시대의 관학의 체계는 중앙에 성균관을 두고 서울에 4학과 지방의 향교를 두는 체제로 되어있다. 지방의 향교도 관찰사가 있는 곳과 부와 군,현으로 구분하여 규모를 달리하였다. 향교의 기본구조는 제향공간祭享空間과 강학공간講學空間으로 나뉘는데 이것은 향교의 목적이 교육 외에도 성현에 대한 제사기능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중시하는 유교에서 제례는 가장 중요한 규범이므로 관학에서는 강학보다 우선되었다.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배치를 보면 제향공간이 앞으로 나오고 강학공간이 뒤에 배치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향교의 기본배치이다. 그러나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곳에 중요한 건물을 배치하는 개념이 존중되어 제향공간이 뒤에 있고 강학공간이 앞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가 일반적이다. 특이한 경우로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좌우로 병렬배치하는 경우도 있다.(밀양향교, 돌산향교 등)
조선시대 초기부터 국가주도로 각 군, 현에 설치된 향교는 초기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교수의 확보의 문제는 심각하였다. 태종 때부터 큰 읍에는 과거에 합격한 관리를 교수관으로 파견하고 교수가 파견되지 못한 군, 현에는 각 도의 관찰사가 학장을 선발하여 향교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한국의 향교/67쪽)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를 보면 정기시험이 3년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이때 선발되는 인원이 33명이다. 1등인 장원급제하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직책이 종 6품의 관직인데 이것이 도호부에 파견되는 교수의 직급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전체 군, 현의 수가 300여 개소에 달하고 보니 실제적으로 파견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추구하는 급제자가 지방으로 가는 것을 꺼리게 되다보니 급기야는 문신좌천자文臣左遷者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관학은 퇴조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9대 성종 때는 관학의 쇠퇴현상을 놓고 신하들 사이에 큰 논란이 벌어졌고,(조선시대서원연구/12쪽) 11대 중종 때에는 어느 경전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군역을 면하기 위하여 교관직을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고, 13대 명종 조에는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어느 정도 학식이 있는 사람을 학장으로 명하는 정책이 제시되기도 하였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향교) 관학의 퇴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향교에서의 교육을 기피하게 만들었다. 즉 조선조 초기부터 교육기관으로서 향교의 역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수 차례의 관학 진흥책을 펼쳤지만 실패하고 결국 영조 때에 이르러 <속대전>에서 향교의 모든 교관은 없어지게 됨으로서 공식적으로 교관을 포기하게 되었다.(상기서/향교) 이로서 공식적으로 향교에서 교육의 기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교육의 기능을 다시 살리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왔다. 조선 후기에 들어 지방관에 의하여 교육기능을 진작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였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향교의 부속으로 양사재養士齋를 운영하는데 흥학재興學齋, 육영재育英齋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기관은 별도의 자산으로 운영되고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서 향교내 또는 향교와 가까운 곳에 건립하였다. 이것도 경제적인 문제와 지방관의 관심부족으로 사라져갔다. 이후에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것이 사마재이다. 사마재는 서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초시합격자 즉 진사나 생원들의 교육장소로 이용되었다. 사마재는 초시합격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양사재보다는 상급교육기관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도 얼마 되지 않아 진사와 생원의 모임처로 전락하고 말았다.(한국의 향교/100쪽)
교육의 기능이 사라진 향교는 제향기능과 민간교화기능을 중심으로 활동해나갔다. 향교는 음력 2월과 8월 첫 번째 정일丁日 열리는 석전釋奠이라는 제향기능을 중심으로 향촌사회에서 양반가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문묘에 제사를 드리는 석전은 유교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지방관이 초헌관으로 참석하고 석전이 끝나면 지방유림의 여론을 지방관에게 전달하거나 석전이 끝난 뒤 교임 등을 선출하기 때문에 향촌에서는 가장 큰 집회행사였다.(한국의 향교/96쪽) 따라서 향교는 지방의 유림에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할 수 있는 자리이므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사족들이 향교를 중심으로 향약을 통해 지방을 장악하였고, 인재를 추천하는 향사례鄕射禮나 학덕이 높은 사람을 모시고 잔치를 베푸는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통하여 일반인들을 교화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기능에도 불구하고 향교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향교가 교육기능을 하지 못하고 제례중심의 공간으로 변화되자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되게 되었다. 가장 많은 폐단은 교생을 돈을 받고 파는 행위이다. 향교의 교생은 초기에는 양반 양인의 구분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은 양인 자제이상이면 모두가 향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고려시대의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려시대 사람이야기/37쪽) 향교의 교생수는 읍의 크기에 따라 제한되어 있었다. 향교의 교생이 되면 군역이 면제되고 과거에도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등 특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므로 향교의 교생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이 있었다. 당시 양반들은 군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군역의 대상이었던 양인들이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 돈과 신역身役을 제공하고 향교에 적을 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부정이 행해진 것은 향교가 많은 돈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제공한 토지로는 집을 새로 짓는다든지 할 때 필요한 돈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돈과 노동력이 필요한 향교의 처지와 양인의 욕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부정인 것이다.
이러한 정원 외의 교생을 액외교생額外校生이라고 하는데 많을 경우에는 정원의 수십 배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액외교생은 노역 면제의 특권 때문에 향교에 상주하면서 노역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교생이 되는 경우도 있고 원납願納이라는 명목으로 거금을 내고 액외교생으로 등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와 양반가문의 보수화로 인해 초기에 구분이 없었던 동재와 서재 학생의 구분도 생겼다. 동재에는 양반자제인 유생이 기거하였고 서재에는 평민으로서 額內校生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액외교생의 증가는 국가재정에 큰 문제가 됨으로서 모든 교생에게 시험을 치루어 합격하지 못하면 군역에 포함시키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돈을 내고 시험을 보지 않는 사람이 증가하자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도 가난한 사람의 구제에 필요한 재정확보를 위하여 공식적으로 면강첩(免講帖)을 발행하는 등 국가에서 주도하여 면강첩을 발행함으로써 시험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원납이나 면강첩은 후기 향교 재정수입에 큰 몫을 하였다.(한국의 향교/79-81쪽)
서원의 발생
서원의 성립을 이해하려면 서원의 의미와 문묘종사운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원이라는 명칭은 당나라 때 궁중에 설치되어 서적을 편찬하고 보관하던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현을 모시고 공부를 하던 서원은 송나라 때 사대부들이 글방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던 것에서 비롯된다. 송나라는 서원의 역량이 커지자 나라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려 장려하였다. 당시 유명하였던 서원은 수양서원 陽書院, 석고서원石鼓書院,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이 유명하였는데 특히 주희가 강론하던 백록동서원이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한국의 서원/7쪽) 우리나라의 서원이라는 명칭은 세종 2년에 이미 보인다. 김제의 정곤, 광주의 최보민, 평양의 강우량 등이 사사로이 서원을 세워 생도를 교육한 공로로 포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초에서부터 서원의 제도에 대하여는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또한 강학공간 없이 사묘만 건축되어 서원으로 불린 것도 있다. 경상도 단성에 문익점을 배향하기 위한 사우는 몇 년 뒤인 1461년(세조 7)에 道川書院으로 불리게 된다.(서원/열화당/340쪽) 이처럼 초기에는 사우만 있거나 강학공간만 있어도 서원으로 불리고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발생된 관학의 퇴조는 사대부들로 하여금 사숙인 서당과 서재에서 수학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서원/열화당/341) 이러한 현상은 당시 사회·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서원의 발생을 초래하였다. 서원의 건립에 결정적인 역할은 한 것은 사림이다. 사림은 조선의 역성혁명에 동조하지 않았던 은둔계층의 학맥을 이어받은 사람들로서 개인적인 연계로 맥을 잇고 있다가 15세기 들어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훈구세력에 대하여 도덕정치를 무기로 권력독점을 비판하며 정치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사림의 요구에 대하여 훈구세력은 몇 차례의 사화士禍를 일으키며 탄압하게 되었다. 이러한 탄압으로 향촌에 은거하며 공부를 가르치던 것이 점점 발전되어 서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림은 도학정치의 실현방안의 일환으로 교학진흥책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小學의 장려, 존현尊賢, 사우지도師友之道의 확립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후에 세워지는 서원의 설립의 기본 방향과도 일치한다.(조선시대서원연구/17)
사림이 내세운 이념을 살펴보면 첫째 소학은 孝悌忠信과 유교의 기본덕목에 대한 지침서로서 유교의 도덕적·실천적인 내용을 강조하는 수신서修身書로서 중요한 것이고, 尊賢은 도학을 밝히는데 기여한 위인을 배향하여 사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존현의 주장은 문묘종사文廟從祀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본다면 문묘종사운동은 자신들의 스승을 문묘에 배향함으로써 학문적 정통성을 인정받아 사림의 학문 위상과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사림의 꾸준한 문묘종사운동을 통하여 정치적으로 큰 관련이 없는 1517년(중종 12) 정몽주가 우선 문묘에 종사되게 되었고, 그 후 1610년(광해군 2)에 동방오현으로 불리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종사하게 함으로서 사림의 사상적 정당성과 정치적 입지를 확립하게 된다. 師友之道의 의미는 학문을 매개로 한 사제지간의 형성 즉 학파의 형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자학의 도통성道統說이 사제상전師弟相傳의 계통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제상전은 사원건축에서 있어 존립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스승이 어떠한 분이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자신의 학문적 위상과도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제상전의 논거는 후대 붕당정치에 이르러는 사원에 모신 분에 따라 정파를 가름하는 척도가 되게 되는 폐단을 낳고 말았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제사와 교육공간을 같이 가졌진 것을 서원으로 부른다는 점에서 최초의 서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1542년(중종 37)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주세붕은 백운동서원을 세우면서 그 뜻을 "가르침은 尊賢에서부터 비롯되므로 이에 祠廟를 세워 덕을 높이고 서원을 두어 배움을 도타이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조선시대 서원연구/26쪽) 주세붕은 서원을 건립하면서 서원에 대한 재정적 기반까지 마련함으로서 서원의 운영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주세붕은 백운동서원의 건립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백운동서원에서 강론까지 하면서 새로 새운 서원이 정착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으로 이곳 출신이 유생이 과거에 많이 급제함으로써 다른 곳에 모범이 되었다.
서원의 설립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퇴계가 명종 3년(1547)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을 요청하면서이다. 퇴계의 사액 요구로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을 받게 되었다. 사액으로 서원은 단순히 사설강학공간으로 머무르지 않고 국가공인 하에 발전 보급되는 단서가 열리게 되었다.(상기서/40쪽) 이러한 국가의 공인을 바탕으로 퇴계는 이 후에도 초기 서원건립에 많이 관여한다. 10여 개소정도의 서원의 건립에 참여하였다. 몇 곳은 배향하는 인물의 선정에도 관여할 만큼 깊게 관여하게 된다. 어쨌든 퇴계의 사액요청 이후로 서원의 건립이 본격화되어 명종 때 모두 22개소의 서원이 건립되게 되고 선조에 이르러서는 63개소나 설립되게 된다.
붕당과 서원의 남설 그리고 서원의 폐철
선조 초기부터 시작된 문묘종사 운동으로 광해군 2년에 오현五賢이 문묘에 배향되게 된다. 이러한 문묘의 배향은 선조 연간에 오현을 배향하며 세워진 서원들에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주었다. 또한 중앙권력층에 사림이 주류를 이루면서 향촌에서도 세족우위에서 사림우위로 급격히 변화되어간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사림 근거지로서의 서원도 향촌에서의 위상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서원의 위상상승으로 인한 서원의 정치적 활용가능성을 일찍 눈치 챈 광해군 때의 집권세력인 북인은 상대적으로 학문적 정통성이 떨어지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북인계열의 스승인 남명 조식의 문묘종사운동을 하면서 조식을 배향하는 서원의 건립을 추진한다. 북인세력은 남명 조식을 배향하는 여러 서원을 설립할 뿐 아니라 남인의 본거지인 안동, 예안지역에 자파의 인물의 배향을 추진함으로서 서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즉 광해군시절부터 서원은 정통성 부여와 정파세력의 확장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인조반정이후 새롭게 집권세력이 된 서인은 율곡과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를 추진하였다. 이후로부터 문묘종사운동은 집권세력의 정치운동으로 일상화되었다. (상기서 189쪽)
17세기 후반이후 본격적인 붕당정치시기에 들어서면서 서원의 정치적 역할은 더욱 증대되었다. 서원에 종사된 인물을 중심으로 붕당이 연계됨으로 인하여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서원을 경쟁적으로 설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숙종 조에 극에 달한다. 숙종 때는 남인과 서인이 교차하여 집권하는 시기로서 이 때 세워진 서원의 수는 무려 166개소에 달하고 그 중에서 사액된 서원만도 131개소에 이른다.(상기서197쪽) 효종 이후 새롭게 분당한 노론과 소론이 연산지역을 놓고 자파의 서원을 설립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서원 변질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조선시대 호서사족연구/141-151)
이 당시 새롭게 보이는 서원의 특징은 학문적 업적에 따른 배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붕당정치의 격화로 정쟁의 희생자에 대한 신원伸寃을 위한 서원의 건립이 성행하면서 학문적 성과와는 전혀 관계없는 서원이 등장한 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새로운 서원설립의 경향으로는 임진란 이후 새롭게 자리 잡게 된 동족세력同族勢力들은 이러한 추세를 등에 업고 그들의 조상을 모시기 위한 서원 즉 문중서원門中書院을 설립하는 예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한국의 경기지역 서원/25쪽) 이러한 경우 우선 사묘를 세우고 부설로 자제교육을 위한 서당을 부설하였다가 기회를 보아 서원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즉 당쟁으로 서원의 남설이 잦아지자 그 틈을 보아 동족세력 기반의 중심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서원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서원의 남설은 강학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제사중심으로 변질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서원과 사묘를 혼동하고 동일시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서원/343쪽)
서원의 남설에 의한 폐해는 단순히 남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서원과 향교에 적을 두어 역을 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늘어남으로서 속오군을 충원시키기 힘들 정도로 폐단이 심하여졌으며, 향약을 만들어 지역을 지배하는 거점으로 서원의 성격이 변질되어 갔다.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느낀 조선정부는 서원의 남설에 대한 제재制裁을 시작하였다. 서원 남설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는 선조 때부터 있었다. 선조, 효종, 현종 때에도 서원의 남설을 금지하고 훼철하는 시도는 있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서원의 훼철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서원이 많이 지어진 숙종 때이다. 숙종 말인 숙종 39년 민진원의 상소로 남설된 서원을 보고하게 한 후 1719년(숙종 45년) 일부를 훼철시켰다. 서원 남설의 문제에 대하여 영조는 더욱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탕평책의 일환으로 영조는 즉위하는 해부터 서원철폐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재위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철폐하였다. 영조시절에 혁파된 원우가 300여 곳이 된다고 하니 당시의 서원의 남설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정조도 서원 남설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정조 이후의 서원의 건립은 거의 전무하게 된다. 이것은 정조이후 정권이 노론 중심의 세도정치로 변화되면서 서원을 통한 정치적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워 졌기 때문으로 추정한다.(서원/344쪽)
* 영조이후 서원의 설립이 줄어들었다는 견해에 대하여 다른 의견도 있다. 학문적이나 당파적 목적에서 서원의 설립은 줄어들었지만 문중門中에서 문중서원으로 만든 경우는 계속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해준은 박사학위 논문에서 영조 이후 관찬에 나타나지 않지만 실재 향촌사회에서 서원으로 기능하였던 105개의 서원, 사우를 파악하여 이를 문중서원으로 지칭하고 국가의 통제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설되었던 서원으로 추정하고 있다.(한국의 경기지역 서원/27쪽)
서원의 본격적인 훼철은 조선말기 고종이 등극하면서 이루어진다. 흥선대원군은 사회폐단의 온상이자 왕권의 절대적인 위협세력인 서원을 철폐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하는 해에 서원과 사우에 대한 조사를 하여 이듬해인 1865년 노론계의 중심세력지이면서 가장 병폐가 컸던 청주의 만동묘를 철폐하였다. 그리고 1868년 미사액서원을 철폐시키고 서원에 소속되어있는 유생을 병적에 귀속시키고 서원의 관리를 지방수령에게 관장하게 하는 령을 내렸다. 그 후 1871년 47개소의 사액서원만을 남기고 모든 서원을 철폐하기 이르렀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하여 강제로 훼철된 서원 중에서 상당수는 대원군의 실각 이후 다시 세워졌다.
향교 건축과 서원 건축의 차이
향교는 관학으로서 발생하였고 서원은 사학으로 발생하였다. 향교와 서원은 기본적인 구조에서는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이것은 교육시설이라는 것과 유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현에 대한 제례기능이 같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은 향교가 관학기관으로 배향하는 인물이 공자, 사대성인, 십철, 동방 16현 등인데 비하여 서원은 서원의 학맥을 대표하는 한사람만을 배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서원은 학맥과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원의 설립위치는 배향한 인물과 관련이 있는 장소에 세워진다. 태어나거나 성장한 곳,(소수서원,영천 임고서원/정몽주, 함양 남계서원/정여창, 밀양 예림서원/김종직) 유배지, 관리로 재임하던 곳(정읍 무성서원/최치원), 후학을 양성하던 곳(예안 도산서원/이황, 산청 덕천서원/조식, 장성 필암서원/김인후), 묘소가 있는 곳(파주 자운서원/이이, 용인 충렬서원/정몽주) 등 대부분이 배향한 인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즉 서원은 철저하게 학맥에 의하여 존립의 근거를 가진다.
또 다른 차이점은 향교는 관학으로서 관리의 편이성을 고려하여 관아근처에 설립되는 반면에 서원은 인격수양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수려한 경관이 있는 곳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향교건축은 우선 도, 부, 군·현 등과 같이 향교가 소속되어 있는 행정단위에 의하여 규모가 달라지지만 서원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건축의 장식에서도 관학과 사학의 차이를 보인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이 위치하고 있고, 관의 건물이므로 포작계의 건물로 구성되고 모든 건물에 최소한 모로단청 이상의 단청을 한다. 그러나 서원은 대부분의 사당은 단청을 올리지만 강학공간은 검박하게 짓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은 심신을 도야하는 수기처修己處로서의 역할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서원과 향교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배향공간을 강조하는가 강학공간을 강조하는가 이다. 서원은 후기에 들어 배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기는 하였지만 초기에 있어서는 강학이 주목적이었다.(조선시대 서원연구/44-46쪽 참조) 따라서 서원과 향교는 배치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 향교를 대표하는 것은 서울에 있는 성균관이다. 성균관은 향교가 보여주어야 할 기본을 정확하게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균관의 배치를 보면 앞에 배향공간을 배치하고 뒤에 강학공간을 배치함으로써 향교가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향교는 뒤에 대성전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지형이 대부분 경사지형이어서 향교도 경사지에 지을 수밖에 없는 특성에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강학공간이 뒤로 갈 때 강학공간이 높은 곳에 위치함으로서 시각적 우위를 점하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배향공간이 위로 위치하게 된 것이다. 성균관 이외에 평지에 지어지는 향교들을 나주향교처럼 배향공간이 전면에 위치하게 된다. 배향공간의 강조는 건물의 격에서도 나타난다. 대성전의 건물은 일반 다른 건물에 비하여 격이 높다. 나주향교를 보면 대성전은 주심포양식으로 지어진 반면에 기타의 건물은 익공으로 지어지고 대성전이 익공으로 지어진 경우도 대성전과 기타의 건물과는 그 격을 달리하여 표현하고 있다.
또한 배향공간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배향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 공자와 4성인을 모신 대성전 외에 다른 사람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건물이 대성전 좌우에 지는데, 이 건물을 東 ·西 라고 부른다. 각 읍의 크기에 따라 배향하는 사람이 달라지는데 강릉, 전주, 경주, 상주 등 관찰사가 머무는 큰 읍에서는 大設位를 하고, 부, 목, 도호부 등에는 中設位, 군·현 등에는 小設位를 하였다. 대설위는 대성전에 공자, 4성, 10철, 송조 6현의 위패를 모시고 동·서무에 공문 72현, 한당 22현, 우리나라 18현을 모신다. 중설위는 대성전에 공자와 4성, 10철, 송조 6현을 모시고 동·서무에 우리나라 18현을 모신다. 소설위는 대성전에 공자와 4성, 송조 4현(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을 모시고 동·서무에 우리나라 18현을 모신다. 이러할 경우 건물의 규모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건물의 배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서원은 대부분 한 분만을 모신다. 후대에 추가 배향이 되어 많은 사람을 보시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시작은 대부분 한사람이었다. 이러한 한 원칙이 나중에 변질이 되어 높은 벼슬을 하였거나 충절을 지킨 사람도 배향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원칙적으로 학문적 스승을 모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당의 규모가 매우 작다. 대부분 3칸 이내의 규모로 끝나고 동무나 서무와 같은 시설이 없으므로 배향공간은 매우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근본적으로 배향공간이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규모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평지에 세워지는 서원의 경우도 배향공간이 뒷부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강학공간의 경우도 근본적으로 수학하는 인원에 많은 차이를 보인다. 서원의 경우 초기에는 10명 정도가 기본이었다가 후대에 오면서 인원이 증가하여 서른 명 내외가 되었다. 숙종 대에는 사액서원의 경우 20명, 문묘에 종사된 선현의 서원인 경우 30명 미사액서원의 경우 15명으로 정해졌다.(서원/348쪽) 그러나 향교의 경우는 교생수가 도읍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우선 <경국대전>에 교생의 수는 부·대도호부·목에는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으로 규정되어 있다.(신편 경국대전/214쪽) 그러므로 강학공간의 크기가 일반 서원에 비하여 현저하게 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군·현 향교의 재사齋舍는 그리 크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향교가 임진란 이후 지어지면 재사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크기가 줄어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서원에서 강학공간의 중요성은 초기에 지어진 대부분의 서원들이 강학의 요체인 강당을 중심으로 전면 좌우에 재사를 두고 앞에 누문을 둠으로서 강당을 중심으로 공간이 구성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강릉향교의 예를 보면 대성전이 뒤로 갈 경우 대성전을 중심으로 대성전 구역 밖 좌우에 재사건물이 위치하고 강당인 명륜당이 누문의 역할을 하도록 배치되어 대성전을 영역을 중심으로 건물이 감싸고 있는 듯한 배치를 하고 있다. 이것은 대성전을 감싸듯 함으로서 대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서원의 경우 후대 앞에 외삼문 형식이 생기고 그 외삼문이 누문樓門의 형식을 한 경우는 내부 강당이 앞으로 전진 배치되고 재사가 강당 뒤로 배치되어 사묘를 감싸는 듯한 배치가 된다. 서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16세기에 이루어진 강학을 중요시하는 배치는 후대 배향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사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게된다. 17세기 중반을 넘어서면 강학기능을 위한 건물이 줄어들고 제향을 위한 공간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서원/348쪽) 이러한 경향이 점점 심화되면서 후기의 서원은 그야말로 제향중심로 바뀌어 간다. 사우와 강당만이 있는 서원이 많아지고 극단적으로 祠宇만 있는 서원도 출현한다. 이것은 제향의 기능이 강조되면서 사원과 祠宇의 차이가 없어지면 생긴 혼란이다.
또 다른 서원 건축의 특징은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하고 그 경치를 즐기기 위해서 樓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이 이루어지는 것은 경치를 즐기며 호연지기浩然之氣(별첨설명참조)를 배양하기 위함이다. 즉 주변의 입지조건이 심성도야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자연을 즐기는 누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경개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성과도 크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한국의 서원/21쪽) 이러한 주변환경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 속에서 만물의 이치를 찾고자 하는 성리학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학문의 연마도 자연 경관 속에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다. 이러한 개념은 주자가 무이정사武夷精舍에서 보여주었다.(상기서/101쪽) 이러한 영향을 받아 이이는 고산구곡高山九曲을 만들었고 송시열은 화양구곡華陽九曲을 만들어 즐겼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이 성리학에서 자연환경은 심신도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서원의 위치를 선정할 때 주변의 경관도 중요한 고려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서원과 향교의 부속시설
서원과 향교의 부속시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교생들의 교육 지원 시설이고 두 번째는 제례 지원시설이다. 교육지원시설로는 고직사庫直舍 장경각 등이 있고 제례지원지설로는 제기고祭器庫,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다.
교육지원시설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장경각이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지역사회의 도서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따라서 책을 보관하는 장경각은 필수였다. 장경각은 장판각, 장서각 등으로도 불리기도 하는데 서원이나 향교에서 필요한 도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일부 서원에서는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경우 장판각 또는 장판고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규모가 큰 서원의 경우는 장경각과 장판각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재정이 뒷받침이 되는 서원의 경우는 단순한 서책의 보관뿐만 아니라 서적의 간행, 수집 보관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서원이 향촌 문화의 중심으로서 출판사와 도서관의 기능을 겸한 것이다.(서원/354쪽)
고직사는 향교에서는 교직사校直舍로 불린다. 이곳은 서원이나 향교의 관리 시설을 겸하고 있다. 고직사는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식사준비 또는 제사의 음식준비, 물품보관 등을 하는 곳으로 일반집과 구조가 같다. 제기고는 서원에는 거의 없고 향교에 있다. 이것은 서원의 제례가 단일 인물을 배향하기 때문에 사용되는 제기가 그리 많지 않아 별도의 보관 장소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향교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제례인 석전釋奠은 많은 사람에게 한꺼번에 제를 올리기 때문에 제기의 종류와 수량이 많고 절차가 복잡하여 별도의 창고에 보관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향교에는 제기고와 제례를 준비하기 위한 전사청이라는 시설이 별도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큰 향교에는 다른 향교에서는 볼 수 없는 계성사啓聖祠라는 시설이 있다. 계성사는 도호부 정도가 되는 큰 읍 이상의 향교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계성사는 5대 성인(공자,맹자,증자,자사,안자)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이 사당은 1701년 성균관의 대성전 서북쪽에 세운 것을 시작으로 1739년 영조가 모든 도와 큰 고을에 세우라는 명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 건축의 역사/기문당/김동욱
한국의 전통건축/장경호/문예출판사
한국 건축사/주남철/고려대학출판부
서원/안장현, 이상해/열화당
한국의 서원/최완기/대원사
한국의 향교/김호일/대원사
조선시대 서원연구/정만조/집문당
한국의 경기지역 서원/경기대학교/국학자료원
한국의 건축문화재 1,3,5,7,8,9/기문당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이정우/중앙인문사
고려시대사람들 이야기/박용운,이정신/신서원
신편 경국대전/윤국일 역/신서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향교, 서원
인터넷파스칼백과사전/포털사이트 야후
* 문묘에 배향되는 聖人명단
孔子, 四聖(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孔門十哲(민손閔損,염경冉耕,염옹冉雍,재여宰予,단목사端木賜,염구冉求,중유仲由,언언言偃,복상卜商,전손사,顓孫師), 宋朝六賢(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소옹邵雍,장재張載,주희朱熹) 東國十八賢(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조헌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
* 浩然之氣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한 도덕적 에너지. 맹자가 말한 것으로 이상적 기상(氣象)을 뜻한다. 《맹자(孟子)》 <공손추편(公孫丑篇)>에 나오는 것으로, 사람 몸에는 물적 생명요소인 기와 생명력·정신·심령을 의미하는 기가 있어 매우 크고 강하며 곧게 기름으로써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 기를 통일적 의지와 상호보충되는 도덕적 실천의 문제로 보고, 그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도에 맞는 의(義)가 안에서 모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가에서는 이를 실천적 자기수양의 실현으로 삼고 이상을 추구하려는 사상으로 승화시켰다. 후에 존양설(存養說), 문천상(文天祥)의 정기(正氣)로 발전하였다.
* 만동묘(萬東廟)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明)나라 신종(神宗)을 위하여 세운 사당(祠堂). 1704년(숙종 30)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세워졌으며 지금은 묘비만 남아 있다. 인조 때 민정중(閔鼎重)이 베이징[北京(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毅宗) 친필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글을 받아 와서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었다. 송시열은 화양동 절벽에 이 글을 새겨 놓고 암자를 지었으며, 송시열이 죽은 뒤 그의 뜻에 따라 권상하(權尙夏) 등이 부근의 유생(儒生)들과 함께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을 지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토(田土)·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는 묘를 중수하고 면세전 20결(結)을 주었으며, 1809년(순조 9)에는 묘를 다시 지었다. 1844년(현종 10)에는 정식으로 봄·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묘는 유생들의 소굴이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도 더욱 심하게 되었으므로 1865년(고종 2) 대원군은 조정에서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 지내므로, 개인적으로 제사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1873년(고종 10) 대원군이 물러나자, 전국의 유생들이 만동묘 부활을 상소하여 1874년에 부활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다시 철거되었다.
* 사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乙巳士禍)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화는 원래 가해측인 훈신·척신계열에서는 <난>으로 규정하였으나 피해측인 사림계열은 정론을 펴던 현사(賢士)들이 죄없이 화를 당한 것이라고 하여 <사림의 화>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림계가 정치적으로 우세해진 선조(宣祖) 초부터는 <사화>라는 용어로 규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정치가 일단 종식된 뒤부터는 정치적인 분쟁과 축출이 있어도 그것을 사화라고 지칭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