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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Andrew Warhol1928-1987 팝아트의 선구자. '팝아트의 교황'이라 부른다네요.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하였죠.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 되었으며 그의 작품과 더불어 워홀이라는 인물 자체가 팝을 대표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워홀은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 뉴욕에 정착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 등 상업미술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60년 기존의 상업미술 대신 순수미술로 전환해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 연재만화의 인물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화상’(Self-Portrait_1986) 워홀은 수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병, 달러 지폐,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으로 제작하였는데, 그가 선택한 작품 주제는 대중잡지의 표지나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 있는 것으로 워홀은 그것을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_공장)에서 조수들과 함께 대량 생산하였습니다.
‘베토벤’
‘리즈 테일러’. 얼마 전 하늘의 스타가 되었죠. 다음 달에 2000만 달러에 경매된다고 뉴스에 나왔네요.
‘마릴린 몬로’
‘여덟 명의 엘비스’(Eight Elvises_캔버스_1963). 1억 달러에 거래. 워홀의 그림 중 최고가 기록. 하이고, 엘비스가 여덟 명이기에 망정이지 열 명, 스무 명이었다면 워쨌으까ㅎㅎㅎ
‘LOVE'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허영이 낄 틈 없는 ‘온전한 밥상’ 이주향 | 수원대 교수ㆍ철학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캔버스에 유채, 81.5×114.5㎝,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감자 먹는 사람들’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저 그림이 무서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손이 싫었습니다. 울퉁불퉁 깡마른 농부의 손이. 얼마나 일을 하면 저렇게 될까, 얼마나 가난하면 저렇게 될까? 이상하게 그 그림이 생각난 것은 시끄럽고 소란한 인도의 바라나시에서였습니다. 나는 시바 신 앞에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사람들이 무서웠고, 신새벽 갠지스 강에서 시신을 태우는 사람들이 무서웠습니다. 그 강물을 그대로 떠 마시는 사람들이 무서웠고, 1달러만 달라고 구걸하는 손들이 무서웠습니다. 그 도시, 바라나시에서 나는 불면증이었습니다. 무서워서 잠들지 못했던 거지요. 그 불면의 밤에 그 깡마른 손의 환영을 본 것이었습니다. 며칠을 불면에 시달리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느끼는 무서움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가난을 두려워하고, 나를 잃어버리는 신명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를 잃어버리기 전에는 나를 찾을 수도 없고, 어떤 일을 하건 신명이야말로 나를 구원할 영성의 한 그물코임을 놓쳤던 거지요. 그렇게 내 속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나서야 불면에서 해방되고, 비로소 바라나시의 소란을 활기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아, 다시 한번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주름진 얼굴, 불거진 광대뼈에 가려 있던 농부들의 순한 눈이 들어옵니다. 그들의 눈은 눈망울이라 해도 좋을 만큼 순하디 순한 소의 눈을 닮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또 보입니다. 나무의 뿌리처럼 불거진 심줄의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맛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온전한 식욕이.
먹어도 먹어도 피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식탁이 있습니다. 칼로리를 따지느라 음식의 반 이상을 버려야 하는 밥상, 격식을 차리고 남의 눈치를 살피느라 쓸데없이 많이 차려져 있는 밥상은 풍성한 밥상이 아니라 군살 같은 밥상입니다. 밥을 앞에 두고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외교를 해야 하는 밥상도 온전한 밥상이 아닙니다. 온전한 밥상은 밥상이라 부르기엔 완벽하게 허술한 밥상, 밥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저 밥상입니다. 삶의 허영심이 한 치도 끼어들 수 없는 밥상! 한 톨의 남김도 없이 일용할 양식을 온전히 먹는 사람들, 일용할 양식으로 피를 만들고 살을 만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가난한 식탁 위의 감자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기분 좋게 내주지 않겠습니까? 소박한 나무식탁 하나와 그 둘레에 걸터앉은 사람들로 꽉 차는 그 공간의 중심에 램프 하나. 그 램프를 중심으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린 고흐는 본능적으로 일용할 양식의 힘을 아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을 그리고 싶었다. 그 손은 그들이 땅을 판 손이기도 하다. 농부는 목가적으로 그리는 것보다 그들 특유의 거친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진실하다. 시골에서는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있는, 먼지가 뒤덮인 푸른 옷을 입은 처녀가 숙녀보다 멋지다.” 고흐는 자기 손으로 땅을 파고 김을 매고 열매를 거두어 먹는 농부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고흐는 그들 속에서 그저 황폐하기만한 가난을 본 것이 아니라 군살 없는 삶을 봤으니까요. 그래서 고흐는 땅을 파는 도구가 되어 거칠 대로 거칠어진 손으로 자신들이 거둔 감자를 먹는, 그 한순간의 식탁을 그리기 위해 농부들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50번 그리는 것으로 부족하면 백번, 그래도 부족하면 또 계속!” 그것은 천부적 재능이 없는 자의 노력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것은 오가며 그집 앞을 지나는 남자의 심정일 것입니다. 매료된 마음에 이끌려, 그리고 또 그리는 반복의 행위는 화두를 들고 또 드는 구도자의 행위 같은 거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알겠습니다. 왜 고흐가 저 그림을 가장 사랑했는지를. 고흐가 가장 사랑한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를 가장 잘 드러내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이제 나는 저 그림에 감동해 기꺼이 고백합니다. 화사한 옷도 없고, 아름다운 여인도 없고, 한번 살아보고 싶은 동화 속의 공간도 없지만 저 그림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조지 클라우센 ‘들판의 작은 꽃’ 꽃에 이끌린 소녀의 ‘노란 봄꿈’ 이주향 | 수원대 교수ㆍ철학 조지 클라우센 ‘들판의 작은 꽃’ 1893
이 세상은 매일매일 변하는 주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투자자의 시선으로도 볼 수 있지만, 저렇게 한 송이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소녀의 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작디작은 꽃이 정말 아름답지요? 저 노란 꽃이 아름다운 건 아무래도 소녀의 시선 때문일 겁니다. 꽃에 홀린 소녀의 표정이 아니라면 저 작디작은 꽃이 저렇게 선명하게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꽃을 보는 소녀야말로 노란 꿈을 꾸고 있는 꽃입니다. 저 소녀가 말해주는 것 같지요? 뭔가 아름답고 생명 있는 것에 매료되는 미감은 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감각의 제국엔 나이도, 성별도, 국경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 그림은 김춘수의 ‘꽃’을 연상시키는 그림 아닌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소녀가 꽃에 매혹되어 잊을 수 없는 눈짓을 보내는 순간, 꽃도 소녀에게 매혹되어 모두가 별처럼 빛나는 겁니다. 꽃은 대지가 피워낸 별이고, 꽃에 빠져 있는 소녀는 대지의 별을 보호하려는 것 같습니다. 소중한 것을 보호하려는 소녀의 손짓과 표정에 내 심장이 뛰네요. 저 소녀는 몇 살일까요? 저 소녀는 우리 내면의 소녀란 생각이 듭니다. 생명 있는 것에 매료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소녀가 되는 거라고. 봄입니다, 자연이 생명 있는 것을 도발하는 봄, 봄! 아기의 속살처럼 부드러운 연둣빛 잎사귀에 싸여 봄꽃들이 피어납니다. 노란 꽃, 분홍 꽃, 흰 꽃, 보라 꽃들이 별처럼 피어납니다. 니체가 말했습니다. 봄날의 대지엔 젖과 꿀이 흐르는 것 같다고. 대지의 젖과 꿀이 꽃잎을 물들이고 마침내 소녀의 눈 속에 스민 그림이 저 그림입니다. 봄입니다. 자연이 인간을 도발하는 봄입니다. 담담하게 살려 해도 피부가 햇살에 반응하고, 눈이 나비처럼 피고지고 피는 꽃들을 따라다닙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햇살 좋고 바람 좋은 봄날, 우울하게 방 안에 갇혀 있는 건 봄날의 자연을 모독하는 거라는 생각이 절로 찾아듭니다. 저 그림처럼 아름다운 꽃들이 문득문득 피어나고 문득문득 사라져 망연해질 틈도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들판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에 이끌려 저렇게 한눈을 파는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인지요? 저런 순간이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문이니까요. 그럼에도 왜 우리에게는 끌리는 대로 이끌리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까요? 삶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게 팍팍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며 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꽃이 질 거라고요? 지는 것이 무서워 정 주지 못 하겠다고요? 그거, 아십니까? 영웅이 감동을 주는 건 마지막 순간을 살기 때문이고, 꽃이 아름다운 건 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을 산다는 건 뒤를 남기지 않고 산다는 뜻이고, 진다는 건 온 힘을 다해 피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온전히 피어나면 시들어 죽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충분히 사랑하면 좋은 이별을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이유를 실현하면 집착이 남지 않는 법이니까요. 농촌을 배경으로 자연에 기대 사는 사람들을 그렸던 클라우센 경은 화가로 작위를 받았을 만큼 여유 있는 삶을 살다 간 화가였습니다. 고흐처럼 비극적이지도 않았고, 고갱처럼 옥죄는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장식미술을 했는데, 우연히 아카데믹 화가로 명성이 자자한 에드윈 롱의 집을 장식하다가, 그의 눈에 띄어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거지요. 귀족으로서의 삶을 누리면서도 지지부진해지지 않고 자신을 잘 경영하는 인생들을 보면 삶이 희망적입니다. ● 라라와복래가 조지 클라우센 경(Sir George Clausen, 1852-1944)의 그림 몇 점 더 선보입니다.~~ 지난해 8~9월 예술의 전당에서 ‘영국근대회화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때 클라우센 경의 작품이 울 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듯합니다. 봄날의 아침, 하버스톡 힐 A Spring Morning, Haverstock Hill, 1881
이삭 줍는 사람들 Gleaners, 1882
등불 옆에서의 독서 Reading by Lamplight, 1909
부상당한 천사 The Wounded Angel 후고 짐베르크 후고 짐베르크의 ‘부상당한 천사’,1903, 캔버스에 유채,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핀란드의 국민화가 후고 짐베르크(Hugo Simberg, 1873~1917)는 세기말과 세기 초를 산 상징주의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입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두 가지 캐릭터는 악마와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대개 음울한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부상당한 천사’(상처 입은 천사)는 짐베르크의 대표작으로, 2006년 핀란드의 문화 아이콘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천사는 왜 부상을 당했을까? 저 소년의 눈빛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짐베르크는 상징성이 가득한 이 그림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요청에 다만 “사람마다 자기가 보고자 하는 자신의 내면의 것을 볼 따름”이라고 짧게 대답했을 뿐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첫 전시 도록에 작품 제목 대신 줄 하나 달랑 그어 넣었다는군요. 그래서인지 무언가 강렬히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 듯한 이 그림을 두고 아마란스(Amaranth) 꽃이 생기게 된 사연이 담긴 핀란드 전설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라는 둥 어른들의 지나친 기대에 상처 입은 어린이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그림이라는 둥 갖가지 해석이 떠돕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작품이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긴 하지요... 아무튼 라라와복래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은 이 그림을 더 알고 싶어 여기저기 웹서핑을 해보았지만 궁금증을 채울 정보는 없더군요... 몇 가지 그럴듯하거나 흥미 있는 이야기를 담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어쨌든 그림 감상은 자유!!~~ 그 하나, 핀란드 전설 배경 이야기 눈에 상처를 입고 날개가 꺾인 천사가 마을 어귀 시냇가에 쓰러져 있습니다. 물가에서 놀던 두 아이가 그런 천사를 발견하고 치료하려고 들것에 태워 마을로 데려옵니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은 지고한 존재인 천사가 부상을 입을 수 없다며 천사로 가장한 마녀임에 틀림없다면서 불태워 죽이려고 합니다. 천사는 슬퍼하며 하늘로 되돌아갑니다. 천사의 눈에서 흘러 떨어진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 아마란스로 피어납니다. 이상이 아마란스 꽃에 얽힌 핀란드 전설입니다. 다음 동영상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둘,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이야기 핀란드 화가 후고 짐베르크가 그린 ‘부상당한 천사’는 어린이가 어른들에게 혼났을 때 그들의 기분이 어떤지를 잘 묘사한 그림입니다. 부상당한 천사. 들것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 천사는 지금 머리가 깨져서 흰 천으로 머리를 감쌌습니다. 날개도 꺾여 안쪽으로 휘어져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지만, 천사는 지금 날기는커녕 걷지도 못합니다. 두 명의 어린이가 이 불쌍한 천사를 어디론가 나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으로 보아 그들 역시 천사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오른쪽의 아이는 슬프다 못해 화가 나 있습니다. 제발 우리를 너무 구박하지 마세요,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하는 듯한 표정입니다. 그림의 천사는 이렇듯 어른들로부터 심하게 꾸중을 듣거나 혼이 나 풀이 죽을 대로 죽은 아이의 영혼을 상징합니다. - 이주헌 <그림 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에서 그 셋, 인터넷에 가장 많이 인용된 이야기(글쓴이 미상) “아빠, 왜 천사의 눈을 가리고 가는 거야? 또 왜 저 소년은 불만에 찬 표정인 거야?” 흐음, 그건 말이지... 저 천사에게 자신을 치료해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야. “왜?” 저 천사는 고결해서 자존심도 강하거든. 근데 자신이 평소 도움을 주던 생명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속상할 테니까... “그럼 왜 소년은 화가 난 표정이야?” 소년은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거든. 신이 눈을 가리게 한 이유를. 그것이 천사를 배려하기 위함이란 것을... 그래서 소년은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거야. 추락한 천사들을 도와주는 건 지상에 살고 있는 자신들이란 걸. 자신들은 환한 광명도 우아한 흰 날개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 고결한 천사들이 다쳤을 때 도와주는 건 바로 이름도 없고 더러운 손과 얼굴의 자신들이란 걸 말하고 싶은 거란다. 하지만 신의 명령 때문에 그걸 말할 수는 없어서 조금은 화가 난 것이란다. 아들아, 앞으로 네가 살아갈 세상도 이런 것이란다. 아름다움만이 선은 아니야. 너는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는 선도 찾아내야 하는 거란다. 물론 눈이 가려진 넌 진실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아. 하지만 말야... 네가 세상살이에 추락해버릴 때 너를 도와줄 투박한 손이 찾아온다면, 넌 그 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단다. 세상엔 보이지 않는 선(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지 않는 선(善)이 있을 뿐이니까 말야... 후고 짐베르크의 그림을 더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cybermusee.com/case/cybergallery/pop_gallery.asp?mh=hugosimberg
슬픈 이야기를 그린 ‘행복한 화가’ 화가 김_원_숙 김원숙 ‘신부’, 캔버스에 유채, 45×45cm 김원숙 화백의 많은 작품에서는 슬픔과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얼굴이나 화폭에 외롭고 슬픈 삶의 흔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보는 사람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 작품에도 여인이 불 켜진 방안에 혼자 앉아 있고, 댓돌 위에도 고무신이 한 켤레만 가지런히 놓여 있어 외롭고 슬픕니다. 그런데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 문틈으로 나와 있는 옷자락에 뭔가 사연이 있는 듯 보입니다. 김 화백의 작품에는 이런 암시와 은유가 많은데, 이것이 그의 그림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문틈에 걸린 옷자락은, 신혼 첫날밤 신랑이 신부에 대해 오해를 하고 도망갔다가 몇 십 년 후 돌아와 그때의 오해를 푼다는 '신부 원귀'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잡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신부' 김원숙 화백은 1972년 홍대 미대 재학 중 미국으로 그림 유학을 떠났고, 지금까지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신부' 이야기뿐 아니라, 수로부인, 심청 이야기 등 한국 설화에 바탕을 둔 작품을 많이 그린 이유는, 한국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오직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김 화백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기에, 직접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한국의 설화와 신화를 화폭에 담아 '한국성'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한국성' 속에 인간의 보편적 삶의 모습과 감정을 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9995년 유엔에서 '올해의 예술가'로 선정되었고, 외국 화랑과 미술관에서만 34회의 개인전을 열면서 '세계적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김원숙 ‘집’ 시리즈
김 화백의 작품에는 한국 집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방인의 삶을 살기 때문에 한국에서 살던 집에 대한 향수 때문일 수도 있고, 집이 삶의 바탕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위의 '피리' 역시 그가 즐겨 사용하는 소재인 초가집 안에서 외롭게 보이는 여인이 피리를 불고 있습니다. 그런데 커튼이 반쯤 걷힌 곳에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보입니다. 여인이 가야야 할 길인지, 피리 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길 바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는 "보는 사람의 느낌대로 보면 된다"라고 합니다. 이런 은유가 바로 김원숙 화백 그림의 탁월함이고 매력입니다. 그래서 김원숙 화백의 전시회에 간 애호가들은 그의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봅니다. 김원숙 ‘마음의 집’, 돌석고에 채색, 21×21×23cm, 2005 김원숙 ‘수로부인2’, 캔버스에 유채, 168×122cm, 1990 김원숙 화백이 화가로서 가진 훌륭한 점의 하나는, 쉬지 않고 새로운 표현방법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서양화뿐 아니라 수묵화ㆍ도조ㆍ조각의 세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많지 않은 애호가들을 위해 석판화도 만듭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기생들의 시를 모아 영문으로 발간한 <기생시조 화집>에 삽화도 그렸습니다. 이런 김 화백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그림 그리는 일을 재미있게 생각하기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쉽게 그리는 화가가 아닙니다. "아직도 아침 기도를 드리러 빈방에 들어가는 수도승들처럼, 빈 화실에서 자기와의 춤과 싸움에 임하는" 자세로 정신을 집중시켜 작품을 탄생시키는 그런 화가입니다. 위의 작품에서는 물에 빠진 여인이 빠른 물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 밖으로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손을 뻗으며 발버둥이처도 세상의 험한 물살은 여인을 그렇게 떠나보냅니다. 그것이 세상이라고, 삶은 그렇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화가의 외침이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김원숙 ‘연속 그림’ 시리즈 김원숙 ‘바늘구멍 1, 2’, 나무에 유채, 각 18×18cm, 1992 김원숙 ‘달빛 아래의 길’, 캔버스에 유채, 48×91cm, 1992 김원숙 화백은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들거나, 이야기를 그림으로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화가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 액자 속에 줄거리가 있는 두 점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바늘구멍'처럼 독립된 두 액자에 줄거리가 연결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그가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는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언론인이자 음악인인 아버지가 건네주는 동화책과 소설책을 많이 읽었고, 할머니에게 많은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옛날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는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형제들에게 보여줬다고, 미국 미술평론가 엘레노어 허트니와의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이런 독특한 유년 시절의 경험 때문에 그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했고, 훗날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림 속에 이야기를 담거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그의 작품에 대해 "일기의 형식과 같은 숨김없는 고백체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그림을 본다는 것에 앞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휘트니 채드윅 역시 "김원숙의 그림은 프랑스 표현을 빌려 '그려진 시'라고 할 수 있고, 그림 속의 뜻을 각자의 가슴 속에 새롭게 그려볼 수 있도록 해준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김원숙 ‘강물을 퍼담듯이’, 캔버스에 유채, 168×168㎝, 1992 김 화백 그림의 특징이 잘 나타난 작품입니다. 화폭 속에 눈에 익은 강과 산, 그리고 항아리가 있어 쉽게 공감이 가지만, 여인이 강물을 퍼서 항아리에 담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참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정희성 시인의 절창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떠올리면, 화폭 속에 흐르는 강의 의미와 여인이 강물을 퍼담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구려 앉아 담배나 피우며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김원숙 ‘푸른 강물’, 캔버스에 아크릴릭, 106×125㎝, 1996 이 그림 역시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격동적으로 흐르는 인생의 강물, 빠른 물살이 무서워 강 언덕에 뱃머리를 걸치고 있는 돛단배, 그리고 산 사이로 난 길. 거친 세상 속에서 어디를 향해 어떻게 가야 할지 고뇌하는 많은 사람의 마음속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김 화백이 이런 은유적 작품을 즐겨 그리는 이유는, 자신의 그림이 화가만의 그림이 아니라, 보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그림이 되기를 원해서입니다. 자신의 경험 혹은 주변 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이야기하듯 화폭에 옮긴 후, 보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며, 삶에 대해 같이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김원숙 화백의 이런 '이야기 그림(story base painting)'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독특한 그림형태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쓸쓸하고 슬프고 외로운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행복한 화가'입니다. 원문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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