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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충전소♥대명 원문보기 글쓴이: DMpastor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제임스 패커 지음/ 정옥배 옮김
두란노/2002년 10월/312쪽/12,000원
▣ 저 자 제임스 패커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우리 시대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 청교도의 깊은 영성을 이어받은 그는 날카로운 지성으로 철저하게 성경적 원리를 찾아 현대 삶에 적용하는 작업을 통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는 1926년 영국 글로스터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입학,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다가 후에 신학으로 바꾸었다. 당시 17세기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과 라일 감독, 리차드 백스터의 저서와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의 설교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52년 26세 때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그후 신학을 명쾌하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1979년부터 캐나다 밴쿠버의 리젠트 칼리지에서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을 가르쳤으며 지금은 반 은퇴하여 비상근하고 있다. ‘현대의 고전’이라 불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IVP) 외 『성령을 아는 지식』(홍성사)등 여러 권의 역작을 저술하였다.
▣ 역 자 정옥배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퓰러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바울과 새 관점』(두란노),『하나님을 아는 지식』(IVP),『미션 퍼스펙티브』(예수전도단)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 Short Summary
‘현대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저자인 우리 시대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이 책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특히 오늘날에 있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필요성,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써야할 묵상과 누려야할 기쁨의 중요성,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화와 변혁을 통해 성경에 근거한 내, 외적 교회 개혁의 주체적인 사명을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하여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 차 례
1부 기초 다지기 - 기본과 방향
1장 위험 신학자는 작업중: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2장 하나님의 계획: 신앙생활의 기본 방향
3장 하나님과 만남: 신앙생활의 기본 관계
2부 길 떠나기 - 쾌락과 사치
4장 온천탕 종교: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 기독교
5장 지뢰밭 인생: 여가와 사치를 즐기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
3부 길 걷기 - 변화와 성숙
6장 인도: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7장 기쁨: 우리가 누려야할 기쁨은 무엇인가
8장 성경과 성화: 성경은 우리가 거룩해지도록 어떻게 돕는가
9장 변화의 자취: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4부 걸림돌 걷어내기 - 치유와 갱신
10장 허약함: 육체적인 회복과 치유
11장 실망, 절망, 우울증: 괴로운 마음을 만지시는 예수님
12장 너 자신을 알라: 정체성과 자아상
13장 권능의 길: 성령을 진지하게 구함
14장 두 마음, 심각함, 균형, 죽음: 믿음의 삶에 대한 명상
15장 교회 개혁: 외적 재정립과 내적 갱신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제임스 패커 지음/ 정옥배 옮김
두란노/2002년 10월/312쪽/12,000원
1부 기초 다지기 - 기본과 방향
1장 위험! 신학자는 작업 중: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신학’은 헬라어 단어인 테오스(theos)와 로고스(logos)에서 나왔으며, 하나님에 대한 진술에 표현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God-thoughts)을 의미한다. 좋은 신학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신중하고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내리는 결정은 원칙에 근거하여(무작정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이루어지며(외적인 압력이나 위협 때문이 아니라), 주로 하나님과 정의에 대한 사랑 때문에(두려움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신학은 위험한 것인가? 거짓된 원리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면 그 자체로는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신학을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위험이 존재한다. 물론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존재하는 위험이 더 크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신학적 토론은 언제나 그 경건의 길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한다.
2장 하나님의 계획: 신앙생활의 기본방향
오늘날 사람들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 같다. 지난 세기동안 우리는 열전 두 번과 냉전 한 번을 겪었으며, 핵무기, 인종차별, 종족주의, 폭력과 고문, 테러, 온갖 종류의 세뇌가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은 예견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세상은 조물주를 잊은 사람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생명을 만드셨으며 그분만이 우리에게 인생의 의미를 말해 주실 수 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깨달으려면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성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이 우리 삶에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인간의 종교심을 뛰어넘어 더 철저하고 믿을만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여호와가 다스리신다”는 우리가 직면해야하는 첫 번째 근본 진리이다. 세계사의 결정적인 요소와 세계사를 주관하는 목적, 그리고 세계사를 해석하는 열쇠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성경 메시지의 기초이며 그리스도인 믿음의 토대이다. 그 토대 위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루는 “선”은 하나님 자녀들이 당장 편안하고 안락해진다는 것이 아닌, 궁극적으로 그들이 거룩해지며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역경이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일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당신 자신을 위하고 높이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된 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온갖 반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첫째, 예배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린다. 둘째, 그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광을 돌린다. 셋째, 그분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영광을 돌린다. 넷째,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다섯째,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영광을 돌린다. 여섯째, 우리의 죄에 대한 그분의 의로운 정죄에 굴복함으로 영광을 돌린다. 일곱째,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위대하시게 하려고 애씀으로 영광을 돌린다.
3장 하나님과 만남: 신앙생활의 기본 관계
이사야 6장을 통해 우리는 이사야가 환상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holiness)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는 첫 번째 자질은 주되심(Lordship) 즉 주권(sovereignty)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엄청난 힘을 준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는 두 번째 자질은, 위대함(Greatness)이다. 각 천사가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경의와 근신을 표현하는 동작이며, 두 날개로 또한 천사의 발을 가린 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드러나게 나서지 않고 삼가는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는 세 번째 자질은, 가까이 계심(Nearness), 편재함(Omnipresence in Manifestation) 곧 어디서나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영광’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명백히 드러나도록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는 네 번째 자질은, 정결함(Purity)이다. 이사야는 처음으로 위선적인 체제순응자인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았으며 수치심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정결함은 그를 도덕적 현실주의자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는 다섯 번째 자질은, 자비(Mercy),곧 이사야가 죄를 고백했을 때 정결하고 깨끗하게 했던 자비이다.
오늘날 사역자들조차도 이사야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린다. 이럴 때 우리도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거룩함을 제대로 깨닫는 성전 체험을 해야 한다. 이사야에게서 우리는 그의 네 가지 잘못을 찾을 수 있다. 우리도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첫 번째 잘못은 하나님을 길들여진 분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잘못은 선지자로나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잘못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느 정도 깨달았을 때,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정을 나누지 못할 뿐 아니라(사실이었다) 영원히 내버려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네 번째 잘못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성공하리라고 기대한 것이었다. 결론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고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성, 그리스도 속죄의 객관적 타당성, 믿음을 주사 죄사함을 확신하게 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개인적으로 인식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현재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해서 자신의 중심이나 메시지나 사역이 잘못되었다고 추정하면 안 된다. 넷째, 개인적인 경배와 찬송과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의 주된 버팀줄이 되어야 한다.
2부 길 떠나기 - 쾌락과 사치
4장 온천탕 종교: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 기독교
현대 서구 문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온천탕’이 상징하는 것은 안락하고 편안한 삶에 대한 현대 서구인들의 과도한 집착을 적절히 잘 표현해 준다. 현대와 같은 물질주의적인 시대는 휴가, 휴일, 여행, 스포츠, 대중놀이, 레저산업들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온천탕은 이런 것을 대변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그러면 온천탕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온천탕 종교에 대한 세가지 진술을 정리하자면,
①온천탕 종교는 대체로 옳다는 것이다. 그렇다해도 심리적으로는 틀렸다. 쾌락과 위안과 행복을 추구하면 영락없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역설적 진리 때문이다.
②온천탕 종교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자기부인을 거부하는 자기 중심성과 하나님의 훈련 프로그램을 거부하는 행복주의(eudaemonism)가 둘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③온천탕 종교는 우리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좋은 것과 편안한 것을 마음에 품고 추구하는 즐거움이 온천탕 종교의 핵심이다.
오늘날 온천탕 종교는 그리스도인 삶에 다양한 증후군을 가져왔다. 그리스도인의 이혼과 재혼율이 엄청나게 급등한 것, 성적 탈선에 탐닉하는 것, 표적과 기사와 환상과 예언과 기적을 찾는 과열된 초자연주의, TV와 라디오 설교나 자유주의적 설교에서 끊임없이 진정제를 찾는 것, 반지성주의적 감상주의나 종교적 마약인 정서적 도취감을 의도적으로 개발하는 것, 일상생활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치를 받아들이는 것 등이다. 하나님의 치료책으로는 첫째, 인생을 두 세상 즉 이생과 내세라는 견지에서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소망을 삶을 변화시키는 동기로 삼아야 한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만성병을 앓았으나 날마다 30분간 내세에 대해 묵상을 통해 그를 기다리는 영광을 단계적으로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자신 안에 마지막 한 방울의 에너지와 열심까지도 예배와 봉사와 거룩함의 길을 가는데 사용하려고 다짐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길 때 인간에게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힘이 부여된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5장 지뢰밭 인생: 여가와 사치를 즐기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서구는 풍요로워졌다. 하나님은 현대 서구 교회처럼, 교회가 여가와 생활방식 문제에 신경쓰다가 더 세속화되는 것을 금하신다. 세속적 개념을 성경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대항문화 세력이 되려는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 함정에 빠졌거나, 지뢰를 밟고 있는 것이다. 여가나 생활방식과 관련해서 우리는 세 가지 분명한 문제가 있는데 모두 신학적, 도덕적, 신앙적인 면에서 광범위한 함축을 지니고 있다. 직면하는 문제로는 첫 번째로 우상숭배(idolatry), 곧 거짓 신들을 섬기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쾌락주의(hedonism)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자 미덕이며,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봉사라고 말한다. 세 번째 문제는 실용주의(utilitarianism)이다. 어떤 것의 가치는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얼마나 유용하고 생산적인가에서 발견된다는 견해이다.
일하라는 명령은 여가와 즐거움, 보물 등에 대한 하나님 명령의 틀을 형성한다. 일하는 것은 인류가 지닌 하나님 형상의 한 측면이다. 어떤 일을 하건, 해야하건 종, 군인, 명령대로 사는 모든 신하들의 경우처럼 창의적인 집중력과 최선의 능력을 다해 그 일을 수행해야 한다. 일터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훈련하고 드러내는 장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란 성실함과 자원을 책임지는 청지기 의식, 이타적 동정심과 충성심, 황금률의 시행, 탁월함에 대한 열정, 인내 있게 꾸준히 선을 행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일은 어떤 종류이든 생존이나 돈 버는 것, 개인적 또는 직업상 진보 등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수단 이상의 것이다.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모든 여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지혜롭게 사용하면 “휴식, 기분전환, 기쁨,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제공한다. 여가는 사람들이 인간 특유 가치들을 회복하고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가족간 유대를 강화하고 세상과 자연을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여가는 온전함, 감사,자기표현, 자기성취, 창의력, 개인성장, 성취감등을 가져올 수 있다. 하나님이 칠일마다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키라고 지시한 것은 끝없는 수고를 중단하고 쉬는 시간을 가져서 원기를 회복할 뿐 아니라, 예배를 드림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절반의 여가’시간인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 잔치는 원기를 회복하고 경축하는 친교 장소이며 상징이었다. 잔치는 매우 적절한 여가활동이며 분명 장려할 만한 것이다. 더불어 적극적 의미에서 우리가 가진 청지기적 특권과 책임을 의식하면 하나님과 사람과 아름다움과 고상한 모든 것에 가장 가까워지는 여가활동을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좋은 것을 추구하느라 최선의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것을 추구하느라 좋은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3부 길 걷기 - 변화와 성숙
6장 인도: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지난 150년 이상 그리스도인의 의사결정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쓸 때 생각과 지혜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일이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당면한 문제에 대해 지혜에 입각한 판단을 내리기보다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인도 방식을 바라게 되었다. 그 원인으로는 첫째,그리스도인 마음에 밀어닥치는 오늘날 세속 문화의 반지성적이고 감정 지향적이며 단기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다. 둘째, 흠모할만한 겸손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에 입각한 판단이 아니라 통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비합리적인 것을 행하기 원하신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넷째,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대상이기 때문에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할 때마다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을 수 있다고 멋대로 공상하는 것 때문이다. 그런 공상은 어린아이과 같은 믿음으로 유치한 이기주의를 반영하는 듯하다. 다섯째, 성경이야기에서 직접적인 계시로 인도받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인도가 보통 이런 식으로 주어진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도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성경적으로 접근하면 두 종류의 문제를 다 피할 수 있다.
1.‘내가 하나님을 위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라
2. 성경의 지시들을 살펴보라. 특히 잠언과 야고보서를 읽어보라.
3. 성경에 나오는 경건함의 본을 따르라.
4. 지혜가 최선의 행동 방향을 판단하도록 하라.
5.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내시는 신호들을 유의하라.
6. 바울이 하나님 뜻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키’신다고, 안전하고 한결같이 지켜 보 호하신다고 말한 신적인 평강을 유지하라.
7. 환경이 가진 한계를 관찰하라.
8. 결정을 내릴만한 적절한 때가 될 때까지 하나님이 인도를 보류하실 수도 있음을 각오하라.
9. 하나님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어떤 것을 하라고 지시하고는, 그것을 좋아하도록 가르치실 수 있다.
10. 설사 부적당한 결정을 내렸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라.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때, 우리는 자신이 최대의 적이 되어 이중으로 낭패를 보곤 한다. 예언, 내적 음성,‘양털’ 또는 성경을 아무데나 펴는 것 등을 통해 인도를 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이런 오해의 마법에 걸려 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는 특정한 경험이 하나도 없으면, 우리는 아직 인도를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충동이 마음을 압박하면 그것을 ‘내가 받은 인도’라고 환호하며 그것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다 무시해 버리는 ‘전통적인’견해에 사로잡혀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가르침(교훈함)으로서 인도하신다. 그분은 어떻게 가르치시는가? 우리 환경을 조성하시거나 그분 말씀을 이해하고 상황에 적용하는 지혜의 은사를 주심으로 교훈하신다. 하나님은 보통 섭리와 교훈을 통해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인도는, 날마다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에게 열려진 최선의 과정을 결정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안을 심사숙고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도 거룩하도록 부르신다는 이것이 성경적 인도의 정수이다. 오늘날 우리 삶에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성령을 통해서만 실제로 성경에서 인도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뜻을 알고자할 때 공동체의 중요성 역시 강조해야 한다.
7장 기쁨: 우리가 누려야할 기쁨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하나님은 사람들이 기쁨을 누리도록 계획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기쁨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삼위일체가 누리던 함께하는 기쁨을 인간도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를 향한 사랑, 곧 성부를 향한 성자의 사랑을 반영하는 그 사랑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발견한다. 하지만 자기 숭배, 위반, 불신, 완악 등의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기쁨에서 분리시켜서 영원히 불경한 세계에 처하게 한다. 이제 멈춰서 자문해보라. 기쁨이 내 삶의 중심이며 나는 끊임없이 기뻐하고 있는가? 기쁨은 만족스러운 삶의 핵심이다. 그것은 또한 믿을 수 있는 진정한 기독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흔들어놓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핍박이 있었을 때, 압력을 받으면서도 강한 모습을 보인 것은 언제나 기쁨에 찬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낙심하기를 거부하고 끈질기게 참은 사람들도 기쁨에 찬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강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기쁨을 연구해야 한다.
기쁨(Joy)과 기뻐하라(Rejoice)는 빌립보서의 핵심이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기뻐하는 첫 번째 상황은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의 적대감을 경험케하는 상황이었다. 바울은 경쟁자들이 바라던대로 맥이 축 처져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행을 곱씹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비참하게 느끼기를 거부했다. 바울의 본보기에서 우리는 심지어 그런때에도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대로 반응할 필요는 없다. 지금 깨닫는 것보다 더,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기쁨을 주는 사실에 마음을 집중시킨다면,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려는 사람들의 적대감이 아무리 커도, 그들의 영향이 아무리 강해도,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리 적어도, 그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된다. 바울이 기뻐하는 두 번째 상황은 훨씬 더 놀랍다. 그것은 순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그는 “나의 죽음이 너희가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일을 일으키고 완성한다면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쁨의 능력으로 그는 죽음도 삶도 거리낌없이 직면한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의 본을 보이며 그 기쁨을 명령한다. 네 가지 기쁨의 원천에 비추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구원받는 것이 어떻게 믿는 사람들 마음에 꺼지지 않는 기쁨을 가져다주는지 살펴보자. 기쁨의 첫 번째 원천은 사랑받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기쁨의 두 번째 원천은 자신의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든 언제나 그럴 수 있다. 상황과 경험이 유쾌하든 유쾌하지 못하든,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일들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Purpose)은 그가 부르신 자들이 성육신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변화되는 것이다. 기쁨의 세 번째 원천은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에서 그는 지금 자신이 소유한, 아니 사실 그를 소유한 그리스도의 구원이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를 지니고 있음을 찬양한다. 기쁨의 네 번째 원천은 값어치 있는 것을 주는 것이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전심을 다해 이 선한 일을 하는데 힘쓰는 사람은 바울처럼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육십년 전에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 가정과 가까이 지냈었다. 영적으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세를 입었다. 그들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심장병으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딸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류머티스열로 십대 때 죽었다. 아들 하나는 심한 정신지체아라서 시설에 수용되어야 했다. 어머니는 재혼했으나 중년기에 암으로 죽었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은 얼마동안 혼자 살았는데, 관절염으로 불구가 되어 완전히 두문불출하고 살았다. 그를 방문했을 때, 아무 불평도 자기 연민도 없이 그리스도안에서 온화하고도 명랑한 기쁨을 간직하고 있던 그의 모습은 지금 추억해보아도 나에게 청량제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민23:10)라는 발람의 말을 들을 때 나는 그를 생각한다. 나는 그 안에서 기쁨의 능력을 보았으며, 그것은 하나의 계시였다. 나는 기쁨의 능력이 복음의 일부임을 찬양한다.
8장 성경과 성화: 성경은 우리가 거룩해지도록 어떻게 돕는가
오늘날 도처 교회에서는 성화를 소홀히 여기고 있으며, 특히 복음주의권에서는 그 영광이 퇴색하고 있다. 과거에 종교개혁 전통에 입각한 영어권 설교자들(청교도들과 특별히 18세기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우리의 거룩함이 요구하는 것,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끊임없이 설명했다. 그들은 어떤 수단과 훈련을 통해 그분이 우리 안에서 중대한 변화를 이루시는지, 어떻게 거룩함이 우리의 확신과 기쁨과 하나님께 쓰임받을 자질을 증가시키는지 지적했다. 한때 복음주의자들의 두드러진 표시였던 거룩함에 대한 관심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 왜 이런 슬픈 상황이 벌어졌는가? 서너가지 요인이 합해져서 상황을 악화시킨 것같다. 그것은, 관심사라는 요인과, 혼동이라는 요인그리고 마지막으로 반발이라는 요인에 근거한다.
1984년 Keep in the Step with the Spirit(「성령을 아는 지식」,홍성사)에서 나는 성화에 대한 다음 사항들을 단언하거나 암시해 놓았다.
1.성화의 배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신칭의이다.
2.성화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다.
3.성화를 이루는 주체는 성령으로, 그분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기쁨과 찬양을 적극 바라고 그것을 위해 일하도록 하신다.
4.성화의 형태는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내주하는 죄와의 싸움이다.
5.우리 거룩함의 규칙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그렇다면 성화에 성경의 권위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첫째, 성경은 성화의 본질이 하나님의 역사인 ‘복음의 비밀’임을 보여준다. 둘째, 성경은 성화의 기준을 보여 준다. 셋째, 성경은 우리에게 성화의 필요성을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거룩함의 필요성은 성경에 계시된 구원을 확신하는 조건에서도 알 수 있다.
성경은 거룩함의 필요성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지는 수단을 알려준다. 성경이 우리의 성화를 위해 사용하시는 주요 수단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보이스가 설명하듯이 섭리와 기도, 그리스도인의 교제, 교회 예배는 “진리를 시사하거나 어떤 진리를 인식(‘진리를 찬양’이라고 말해도 되겠다)하는데 사용될 때”에만 성화의 수단이다. 성화의 방식,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일”을 이루는 방식은 내용이 선할 뿐 아니라, 행해지는 방법과 동기도 선해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겸손함, 인간애, 양심적임, 동정심 같은 자질들로 세상에 감동을 주지 못한다. 무엇보다 우리 삶에서 그 막힌 길을 다시 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성화에 대해 하시는 말씀, 즉 요한복음 17장 17절에 나오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는 방식에 대해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은혜가 주어지기 바란다.
9장 변화의 자취: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할 때 그리스도가 주시는 관계적(relational) 변화인 칭의와 죄사함과 양자됨을 찬미하면서, 진정한(real) 변화인 생각과 성품의 변화는 간과한다. 사실, 영적 훈련, 영적 전쟁, 영적 마음가짐, 자기부인, 자기검토, 죄를 억제하는 것 등은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들이다. 성화(sanctification)가 이 분야를 포괄하는 총칭이다. 성화란 성령의 권능으로 실천하는 헌신과 회개이며, 변혁(transformation)이란 우리가 그 일에 착수할 때 일어나는 사실을 인식하는 출발점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transformation)라고 바울은 썼다(롬 12:2). 베드로가 그리스도인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 1:4)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를 도덕적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울이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는 새로운 행동 유형,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그 결과이다(갈 5:22-23). 주권적으로 신적인 변화를 이루는 분이신 성령은 우리가 일시적으로 무관심과 냉담과 노골적인 잘못에 빠져도, 우리를 계속 성화시키고 변화시킨다.
믿음과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은 변혁을 진전시킨다. 믿음은 보는 눈, 듣는 귀, 껴안는 팔, 움직이는 발이다. 이것들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며 하나되어 교제하게 한다. 회개와 순종 가운데 사는 것은 변혁을 진전시킨다. 회개와 순종 가운데 살면 우리는 점점 더 한결같고 유혹에 빨리 저항하게 된다. 의존과 기대 가운데 사는 것은 변혁을 진전시킨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도록 부름받았는지 확인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기대하며 도움을 받고, 다음 과업으로 넘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도움에 감사하며 되돌아보는 것이다. 굴복과 꾸준함 가운데 사는 것은 변혁을 진전시킨다. 삶의 고통과 슬픔의 경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전보다 더 예수님을 닮아갈 것이다. 찬송과 헌신 가운데 사는 것은 변혁을 진전시킨다. 모든 참된 헌신의 중심은 찬송이다. 교제와 봉사의 삶을 사는 것 역시 변혁을 진전시킨다. 어떤 활동을 하든 다른 사람의 선을 추구하여 사랑의 근육을 강화시키는 것이 헌신된 삶이다. 그 길을 가도록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우리를 자극하시고 그 길을 따라 행하는 것이 옳다고 확증시키시면, 칼뱅이 말했듯이,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4부 걸림돌 걷어내기-치유와 갱신
10장 허약함: 육체적인 회복과 치유
허약함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는 아프지 않는 꿈을 좇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건강에 몰두하고 있으며, 육체의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픈 신자들이 의사 손길을 빌든 말든 믿음을 통해 치유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것은 정당한가? 그것을 성경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하지만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능력이 지금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계시던 시절과 똑같이 초자연적 치유가 풍성하게 일어나는 것은 그분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목적이다. 둘째, 구원이 육체와 영혼을 모두 포괄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실제로 속죄를 받을 때 육체가 치유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하는 것과 언제 그것을 주실까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셋째, 믿음이 없거나 하나님의 선물을 구하지 않을 때 축복을 놓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약 시대 믿음 있는 지도자들이라 해도 누구나 치유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바울 자신은 치유되지 않는 “육체에 가시”를 지니고 살았다. 그는 주님이시며 치유자이신 그리스도께 그것을 제해 달라고 세 번에 걸쳐 기도했다고 말한다(고후 12:7-9). 하지만 그가 바라던 치유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배운 것에서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는, 기적적인 치유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알았을 때만 특별히 기적적인 치유를 베풀었다. 둘째는, 우리를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괴로움들과 함께 고질적 고통과 약함을 들어 우리 삶을 다듬으시는 조각칼로 사용하신다. 셋째는, 아플 때 행동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의사에게 가거나 약물을 사용하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주님께 가서 우리 질병에 대해 그분이 어떤 도전이나 책망이나 격려를 해주실 지 물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에 대해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한다.
11장 실망, 절망, 우울증: 괴로운 마음을 만지시는 예수님
성경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비탄에 빠진 근본원인을 예수님은 무엇으로 보셨는가? 그분은 두 가지 원인 때문에 생긴 불신이라고 보았다. 첫째, 그들은 너무 당황해하고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생각을 못했다. 그들은 실망에서 비탄으로, 비탄을 통해 절망으로, 그리고 절망을 통해 가장 흔한 현대병인 우울증으로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둘째, 그들은 성경을 너무 몰랐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필요하게 당혹스러워하고 상처를 받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성경을 풀어주셨다.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한 뒤 예수님은 당신의 임재를 계시하셨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예수님은 신비한 방식으로 자신의 임재를 알리신다. 뭔가를 말하거나 보거나 읽거나 기억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임재하심을 알게 되었으며, 치유가 완성되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에, 우리의 상처를 엠마오 도상의 치유로 가져가는 것이 참된 부활절 신앙이다. 어떻게 가져가는가? 첫째, 예수님이 날마다 우리에게 권하듯이, 그분께 우리 고민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고통은 구원하시는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목적과 연관되어 있음을 성경에서 배우는 것이다. 셋째, 물과 불처럼 느껴지는 것을 지나갈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길이 끝날 때까지 함께 머무심을 확신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응답하실 것이다. 신자들도 실망이 절망으로 이끌려 결국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을 도우려면 의학, 심리학, 사회학, 영적 분야의 광범위한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정신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는 우울증 가운데는 직접적으로 영적인 요소들 때문에 발생한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신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 주요 치료책이다.
12장 너 자신을 알라: 정체성과 자아상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기를 아는 지식을 지혜의 시작으로 보았던 헬라 철학자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말이다. 20세기 현대 심리학에서는, 우리는 자신에 대한 개념이나 이미지(영웅, 희생자, 반역자, 조력자 무엇이든)를 가지고 있으며, 의식적으로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자아상과 관련한 사랑의 네 가지 요소, 곧 칭찬과 격려와 관심과 도움을 보여주지 않으면 엄청난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말한다. 낮은 자아상과 거기에 뒤따라오는 자신의 무가치성은 마치 짙은 색안경과도 같아서, 그 안경을 통해 자신을 다른 사람과 연관해서 보는 것이다. 첫째, 낮은 자아상은 억압되고 충동적이며 강박적인 여러 가지 행동을 낳는다. 둘째, 낮은 자아상은 복음의 메시지를 전심으로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는 자신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상담자-헬퍼-교사(성령)가 마음에 인치고 새겨 놓은 성경 진리(말씀)와 분리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자아상과 정체감을 가지고 있든 이 점에서는 모두 같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참으로 자신을 알기 시작할 때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첫째,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늘 아버지와 우리와의 망쳐진 관계를 변화시키는지 알게 된다. 신약 전체에서 사도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 중심이다. 과거에는 자기 과신이나 자기 절망이나 교만이나 자존감이 우리 자아상을 형성했더라도, ‘구속받고 고침받고 회복되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아들로 받아들여진 지금은 자신에 대해 전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행동의 습관들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처럼 사고의 습관들도 변화되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지닌 우리의 망쳐진 본성을 변화시키시는지 알게 된다. 이것 역시 사도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 부분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이러한 성향들을 심어 넣으신 성령은 이제 우리 안에 내주하사 날마다 그런 성향들을 발휘하게 하신다. 우리는 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영국의 기차역들은 빅토리아풍 벽돌이나 돌로 된 견고한 구조물로, 마치 영원토록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대서양 공항들의 양쪽은 끊임없이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계속 재건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 있는 신적 역사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기적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데, 우리 자아상은 이제부터 그러한 정체성을 표현해야만 한다. 새로운 자아상은 삼중적인 것이다. 첫째,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는 자신을 상속자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새로운 자아상의 첫 번째 층은 이와 같은 영광을 온전히 상속하는 것에 대한 기쁨, 놀람, 기대, 특권의식이다. 둘째, 이생과 관련하여 우리는 자신을 여행자로 보아야 한다. 우리 새로운 자아상의 두 번째 층은 어디에 가든 그곳을 임시로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각각의 상황을 통과하면서 즐기는 여행자 의식이다. 셋째, 세상이 끌어당기는 힘, 죄의 선동, 사단의 배회와 관련하여, 우리는 자신을 투사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새로운 자아상의 세 번째 층은 온갖 종류의 악과 유쾌하지는 않지만 피할 수 없는 투쟁에 헌신하겠다는 의식이다. 넷째, 다른 사람들, 특히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서, 우리는 자신을 돌보는 사람(carers), 짐을 지는 사람(bearers), 나누는 사람(sharers)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새로운 자아상의 네 번째 층은 가족과 교회와 우리가 속한 더 넓은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꼭 드리고 또한 쓰임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우리의 새로운 자아상을 구체화시키는 4중적인 기독교적 실제이다.
13장 권능의 길: 성령을 진지하게 구함
지난 두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권능(Power)에 매우 관심을 기울였다. 성령은 권능으로 오신다. 신약에서 이 권능은 다양한 방식, 곧 정해진 과업들을 수행하고 시험을 극복하는 능력, 설교와 증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능력, 기적과 치유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통로 역할을 하는 능력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확신 가운데 나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여섯 가지 논지를 다룰 것이다.
1.초자연적인 것을 강조하고 그와 관련해 그리스도인들의 기대를 고양시키는 것은 옳다.
2.능력 있고 유용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은 옳다.
3.필요한 순간 다른 사람의 삶에 신적 능력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옳다.
4.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 전도의 열매를 맺기 원하는 것은 옳다.
5.의를 위해, 도덕적 승리를 위해, 나쁜 버릇에서 해방되기 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신적 권능을 받고자 하는 것은 옳다.
6.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에 응답하는 사랑으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 신적인 권능을 받고자 하는 것은 옳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우리 자신을 열어 놓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깊은 곳까지 흘러 들어가게 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하나님의 권능이 시행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권능 시나리오’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 몇 가지 말하겠다. 권능 시나리오란 하나님이 우리의 약함 안에서 그분의 강함을 온전케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점을 더 많이 인식할수록 더 좋을 것이다. 바울과 그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세 번에 걸쳐 그는 가시가 그에게서 떠나기를 기도했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네 지속적인 약함 안에서 내 강함을 온전케 하여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 곧 네 사역이 끝나거나 적어도 네 사역이 축소되고 약화되며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피하도록 해 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네 사역은 권능과 강함 가운데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계속 약함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 너는 살아 있는 한 평생 육체의 가시를 지니고 살 것이다. 하지만 내 강함은 네 약함 안에서 온전하게 될 것이다” 내가 믿기로 당신과 내 삶에서도 계속 반복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다. 주님은 “내 강함으로 너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으며, 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네가 그것을 감당하도록 강하게 하겠다”고 대답하신다.
14장 두 마음, 진지함, 균형, 죽음: 믿음의 삶에 대한 몇 가지 명상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은 말씀 안에 계시된 무엇이든 참되다고 믿는다.” 야고보가 “두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때 그것은 기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불신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소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하면서 시련 받을 때 도와주신다는 말씀은 신뢰하지 못하는 두 마음에 대해 야고보는 뭐라고 대답하는가? 물론 한마음을 갖는 것,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전부 다 믿으며,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언제나 그분의 선하심을 기쁘게 신뢰하며, 일관되게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애쓰는 것, 그것이 참된 마음의 정결함이며, 그것만이 믿음의 삶다운 삶이다.
특정한 사람이 구원받았는가 아닌가, 회심했는가 안 했는가, 신자인가 아닌가 등은 복음주의 집단에서 필요한 질문이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가?” “사람들이 진지해졌는가”하고 묻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 역시 좋은 질문법이다. 월버포스(Wilberforce), 해나 모어(Hannah More)등 오래 전에 살았던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사람들이 진지해졌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참 의미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경, 복음, 자신의 죄성과 죄책, 지금 내리는 선택에 따라 좋든 나쁘든 결정되는 영원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꾸준한 진지함은 제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한 표시이다. 나와 당신은 진지한가?
균형은 성공적인 줄타기의 비결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언제나 우편으로나 좌편으로 떨어질 수 있듯이,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정책을 구상하거나 어떤 행동을 계획할 때마다 두 가지 극단적인 불균형을 피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균형을 이루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 일을 그다지 잘하지 못한다. 하나의 치우침은 정반대의 치우침을 낳는다. 균형을 추구하지도, 균형을 발견하지도 못한다. 이렇게 인간의 반발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균형을 이루고, 세상과 완전히 다르게 살면서도 세상에 참여할 수 있을까? 적어도 한번 시도나 해 보자!
오늘날 세상에서 죽음은 잘 언급되지 않는 말이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 것이며 모든 사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만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그들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1.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분리되는 외적 표시로서, 죄에 대한 창조주의 심판이다. 2.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망의 아픔이 없어졌다. 은혜가 임했으며, 이제 그들이 죽는 날은 구세주와 만나는 날이다. 3.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언제 그들을 위해 오실지 모르므로, 한시라도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지혜이다. 4.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은 “날마다 마지막 날처럼 살라”[토마스 켄(Thomas Kenn)]는 것이다. 다시말해, “하나님 앞에서 늘 회계하라(accounts)”는 것이다. 5. 잘 죽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부르심받은 선한 일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님은 그분을 섬기는 우리가 잘 죽을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5장 교회 개혁: 외적 재정립과 내적 갱신
개혁(reformation)이라는 단어가 나의 마음에는 마술과도 같다. 개혁이라고 하면, 수많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영웅적인 16세기가 생각날 것이다. 마틴 루터, 존 칼뱅, 존 녹스,윌리암 틴테일, 토마스 크랜머 등이 목숨을 걸었던 그 진리들이 여전히 귀중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이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에 간직되어 있는 지혜의 보물은 우리가 오늘날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고 크며, 진리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사심 없는 증거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신앙으로 살다가 그들과 같은 신앙으로 죽고 싶다.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라!
교회의 교리와 질서를 재형성한 16세기의 대격변은 믿음과 헌신의 내적 갱신에 대한 외적인 측면이었다. 개혁과 갱신 또는 부흥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성경에 보면 보통 개혁이라고 부르는 놀라운 영적 운동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 운동들은 부도덕과 우상숭배가 타파되는 등 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또한 내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그들이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려고 열심을 다한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역대하의 경건한 왕, 에스라, 느헤미야 등 구약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교회 개혁이 교리와 예배 의식을 바로잡을 뿐 아니라 믿음과 예배를 다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충해주고 이 관점을 확증해 주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이다. 영적 운동들이 보여주는 양상은 서로 다르지만, 언제나 외적으로 깨끗하고 모양을 재정비하여 개혁하는 요소와 내적으로 믿음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하는 요소가 함께 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개혁의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교회마다 문제점과 필요가 다르겠지만, 다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개혁시키러 임하신다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실상을 몇 가지 열거하는 것으로 질문에 답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개혁의 역사가 나타난다면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의식하게 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개혁의 역사가 나타난다면 오늘날 교회는 영원한 문제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개혁의 역사가 나타난다면 오늘날 교회는, 종교에서나 종교성을 개발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모든 관심사보다 앞설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개혁의 역사가 나타난다면 오늘날 교회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깊은 회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사함과 정결케하심에 대한 깊은 감사,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깊은 열망에서 생겨나는 거룩함에 대한 사랑이 일어날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의 개혁의 역사가 나타난다면 교회에 대한 관심이 생겨날 것이다. 여섯째, 하나님의 개혁의 역사가 나타난다면 오늘날 교회는, 죄에서 의로 변화되든, 소극성에서 적극성으로 변화되든, 어떤 변화든지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말한 것을 이제 다섯 가지로 요약하겠다.
1. 개혁은 신적 방문이다. 이것이 스가랴 선지자의 메시지였다.
2. 개혁은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3. 개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속 수행해야 할 과제이다.
4. 개혁은 끊임없이 복음 전도가 흘러 넘치는 것이다.
5. 개혁은 언제나 회개와 함께 시작된다.
성경은 개혁에 대해 그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취하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개혁을 촉진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개혁이 일어날 때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해야 한다. 그분의 백성인 우리가 이같이 총체적 의미에서 교회 개혁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하나님이 들을 귀와 볼 눈과 반응할 마음과 행동할 의지를 주시기를 바란다. 그분은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격려하시고 개혁하시고 마침내 영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보좌에 앉아 계신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