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온기를 머금는 날 밤, 10년을 훨훨 하다 내게로 온 지인으로부터 제주도에 장기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밤을 샌 아침, 은빛 된 하늘을 보며 답사 길에 올랐다. 동부 산업도로를 따라 도착한 곳은 대천동 사거리 밑쪽 길가 옆.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장과 제주도지사 공동명의로 세워진 장기동 표석비를 발견했다.
표석비를 뒤로하고 숲을 헤치며 안쪽으로 들어서자 대나무 숲과 어우러진 넓은 초원이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됐던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초원 가장자리마다 긴 세월을 보냈을 법한 후박나무들이 무리지어 자라고 있음도, 곳곳에 둠성 둠성 모아져 있는 빌레들과 대나무 왓들도 고스란히 집터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제주의 집 둘레에는 대나무들이 있었다. 바람 많은 제주의 특성상 대나무들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옛 어른들의 지혜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곳이 조선시대 때 국립마목장 제1소장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웃뜨르에 속해 변방으로 취급 받았던 곳이기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표석비에, 300여 년 전부터 화전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잡곡을 재배하며 살았다고 새겨진 내용으로 보아 추측해 보건데 당시 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터전을 잡고 집을 지어 살다보니 마을이 형성되었지 싶다.
이후, 194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이 목장지대의 최적지임을 알고 국립목장으로 건립하고 국가에서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0년 5․16쿠데타 이후에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국립 송당목장의 운명은 끝이 났지만 지금도 일부분 개인이 사들여 송당목장이란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동쪽 1㎞지점에는 이승만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했던 건물이 ‘귀빈사貴賓舍’란 이름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주위에 솟아오른 성불오름과 비치미오름 그리고 민오름 등이 한눈에 잡힌다. 이러한 오름들이 둘러져 있어 바람막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철 마르지 않는 진수내 물이 있어 주민들이 생활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나 보다.
1948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40여 가구에 150여명이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이 없어진 것은 4·3사건 때다. 1948년 11월 22일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주민들은 평대리나 세화리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고, 가족들이 오순도순 생활하며 살았던 둥지는 같은 해 11월 26일 토벌대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곳저곳 피신을 했던 주민들도 많은 고초를 겪었을 뿐 아니라 여러 명이 유명을 달리 했다고 표석비는 설명하고 있다.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어진 장기동 옛터, 주민들이 굽이치며 소박하고 평온하게 살았을 역사의 뒤 안이 눈에 선하다.
이곳에 동굴과 같은 궤가 있다기에 장시간 구석구석 찾아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아쉬움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