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밭들 | 피일 남쪽에 있는 들 |
갓골 | 안첨지팔밭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강구정(康衢亭) | 산대리 792번지. 청안이씨(淸安李氏)의 정자. 정와 이운현(李運賢)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70여년 전에 살았다. |
거두발 | 피일 서쪽에 있는 들 |
구부랑 | 피일 앞 들에 물을 대는 보가 멀리까지 구불구불하다 하여 `구부랑' 일명 윤원동(輪院洞). 측량기술이 없던 시절에 물길을 내려고 할 때, 고양이가 눈밭을 지나간 자국을 따라 봇도랑을 냈더니 꾸불꾸불했다는 설이 있다 |
금성(金城) | 새터 동쪽 마을. 병자호란 때 충청도에서 피난해 온 금성공 형령 이지(李地)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 일명 김생, 김신이 |
꽃밭새미 | 산대 서북쪽 논에 있는 큰 샘 |
꾀뜨뱅이꼭데기 | 진등재 서쪽 산마루. 일명 꾀뜨뱅이만디 |
내복장 | 피일 서북쪽 골짜기 |
덕골 | 용딩이 동쪽 골짜기 |
덕산서사(德山書社) | 임진왜란때 서생포(西生浦)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는 등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된 청안인(淸安人) 두촌(杜村) 이팽수(李彭壽)를 추모하고 향사하기 위하여 1924년에 세운 사당 |
도마골 | 임진왜란 당시 원정군으로 온 이여송이 이곳에 머물렀을 때 산의 형세가 앞으로 큰 인물이나 장수가 날 명산이므로 산의 혈맥을 잘랐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골짜기의 형세가 큰 칼로 자른 흔적이 있다. 새터 서쪽 |
도마골못 | 도마골에 있는 못, 일명 도마제(刀馬堤) |
동삿들 | 중말 서쪽에 있는 들 |
두통골 | 중말 서북쪽에 있는 들 |
말바우 | 새터 남쪽 냇가에 있는 바위, 말처럼 생겼다고 일명 두암(斗岩) |
망점재(望岾齋) | 산대 남쪽 무릉산 기슭에 있는 이만석(李萬錫)의 재실 |
멍에배미 | 행촌 북쪽, 지형이 멍에(V자형)처럼 생긴 논 |
면갓 | 구부랑의 서남쪽. 면(面) 소유의 말림갓이 있었던 높이 31m의 산 |
바끝못 | 덕산서사의 바깥쪽에 있는 못 |
바람비알 | 덕산서사의 북쪽. 바람이 매우 심하게 부는 산 |
방축(防築) | 칠평천의 강물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으로 홍수때 안강 주민들의 재난을 예방하였다. |
백정골 | 백 정승의 소유였다고 하는 들. 새터 동쪽 |
불미기골 | 불미기(풀)가 많았던 골짜기. 채방골의 서쪽 |
비미골 | 지형이 범의 꼬리처럼 생긴 골짜기 임명 호미골(虎尾谷). 새터 북쪽 |
산대리미륵불상 | 신라 아달라왕 때 공수자(公輸子)에 의해 조각되었다고 전하는 높이 70㎝의 좌불상. 산대1리 산97번지. 1.5평 정도의 구조물 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 불상에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
삼우정(三友亭) | 헌납(獻納) 이안유(李安柔)를 추모하여 후손들이 세운 정자. 그가 벗삼았던 부싯돌, 뿔잔, 쇠칼의 뜻을 담아 삼우정이라 한다. |
새들 | 수일 동쪽에 있는 들 |
새못안 | 행산골 안쪽에 있는 새로 판 못 |
새미기비알 | 바람비알의 남쪽에 있는 산 |
새터(新基) | 새로 생긴 마을. 안동권씨(安東權氏)와 남양홍씨(南陽洪氏)가 많이 산다. |
서림정(西林亭) | 청안인 덕와 이주빈(李周彬)이 학문을 닦으며 풍월을 즐기던 곳에 후손들이 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 정자 옆에 50평의 연못을 만들었으며 버드나무가 울창하여 경관이 매우 좋다. |
서원말 | 덕산서사가 있는 마을 |
석정(石井) | 약 300년전 홍대명(洪大明)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할 때 장군수(將軍水)라는 돌우물이 있었는데 이 물을 먹고 힘센 장사들이 많이 태어나 못된 짓을 하므로 불안해진 마을 사람들이 의논하여 우물을 메우니 그 뒤엔 장사가 나오지 않아 태평하였다. 일명 광석정(廣石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약 200년 전 대평댁이라는 천석군 부자가 살았는데 지금의 양월2리 뒤에 용두지(龍頭池)라는 못을 막을 때 그 지형을 보아 준 풍수를 불러 `집에 손님이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마님이 부탁하자 `집 앞에 있는 칠성바위를 캐 버리면 된다'고 가르쳐 주어 그 바위 7개를 캐 버리고 나자 그 집은 살림이 망하고 손님도 자연히 오지 않게 되어 그 집 살림이 망하게 되고 자연히 손님도 오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섬배기 | 멍에배미의 서쪽. 논 가운데 돌무더기가 섬처럼 쌓여 있다 |
수졸재(守拙齋) | 청안인 이두경(李斗經)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산대4리에 세운 재실 |
수일(水日,水一) | 구부랑 남쪽에 있던 마을. 물이 가장 맑은 동네라는 뜻. 약 200년전 청안이씨와 설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나 지금은 풍산금속 공장이 있으므로 다른 마을로 이주하였다. |
심밭들 | 피일의 북쪽에 있는 들 |
아리봉들 | 피일의 서쪽에 있는 들 |
아리수일못 | 아릿수일에 있는 못 |
안못 | 덕산서사의 안쪽에 있는 못 |
안정이못 | 안정이라는 사람이 소유했던 못. 도마골 서북쪽 |
안첨지팔밭골 | 안첨지의 팔밭(火田)이 있었던 골짜기. 웃수일 서쪽 |
약물골 | 아릿수일 남쪽. 약물이 났던 골짜기 |
어래산(魚來山) | 노당과 옥산, 기계면 학야의 경계를 이루는 산, 높이 563m로 안강의 진산이다. 산 위에는 기우제를 올리는 단이 있고 어을암(於乙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옛날 해일이 넘쳐 바닷고기가 이 산까지 왔으므로 어래산(魚來山)이라는 전설도 있다. 지금도 산 정상에 조개 껍질들이 발견되는데, 아마도 지반의 융기현상이었을 거라는 추산이다. 일명 어을산(魚乙山), 구피산, 어래산(於來山), 어지어산(於之於山). |
어은정(漁隱亭) | 산대리 394번지. 청안이씨의 정자. 이이초(李彛初)의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여 1970년에 세웠다 |
옥산교(玉山橋) | 피일 앞. 1965년에 건설한 길이 30m의 다리 |
용딩이 | 피일의 동쪽. 지형이 용처럼 생긴 등성이 |
웃수일 | 수일의 윗마을 |
적은내복장 | 내복장의 작은 골짜기 |
죽토정 | 청안인 죽토 이양초(李養初)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 |
중말(中里) | 약 230년전 밀양박씨(密陽朴氏)가 개척하였는데 들 가운데 있는 마을. 산대 동쪽 |
진등재 | 수일 서남쪽의 긴 등성이에 있은 고개. 산대리에서 두류리로 넘는 고개 |
진배미 | 황새배미 위에 있는 긴 논 |
채방골 | 채봉(草殯)을 했다는 골짜기. 갓골의 서쪽 |
큰못안 | 피일의 서쪽. 옥산 큰못 안쪽 골짜기 |
표충각(表忠閣) | 인진왜란때 순절한 이팽수(李彭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때 정려각(旌閭閣)을 세웠다. |
피일(避日) | 수일 서북쪽 마을.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로 피난을 왔으며 피난 중에 식량이 부족하여 피(稷)를 뜯어먹고 연명하였다 하여 `피일'이라 한다. |
행촌(杏村) | 은행나무가 많았던 마을 |
행산골 | 피일 북쪽 골짜기 |
호계사터 | 산대 367번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안동인 매와 권사악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세운 사당인데 고종 금령으로 헐렸다. 권사악은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 등과 문천(汶川)에서 회맹하고 손시(孫時) 최진립(崔震立)과 함께 영천으로 진격, 의병대장 최응수(崔應銖)와 합세하여 성을 탈환하였다. 이 후 대소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고 판관, 첨정을 역임하였고 난이 평정되자 사천현감, 울진현령에 제수되었으나 곧 물러나 이곳에 침류정(沈流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짓고 글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 철종 10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
호동(虎洞) | 마을 앞산이 범의 모양과 같다고 일명 범의골, 비므골. |
홍두깨등 | 바람비알의 북쪽. 지형이 홍두깨처럼 생긴 등성이 |
홍장군미등 | 홍장군의 묘가 있는 등성이. 바람비알 북쪽 |
홍천(洪川) | 산대 북쪽에 있는 마을. 임진왜란 뒤에 안동권씨(安東權氏)와 달성서씨(達城徐氏)가 들어와 정착했다. 마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큰 내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으나 그 때 심었던 개울 가의 나무들이 지금은 고목이 되어 있다. |
화랑너덜 | 꾀드뱅이만디 동쪽에 있는 버덩, 한 쌍의 화랑 무덤과 돌이 많이 흩어져 덮인 비탈 |
화전동(花田洞) | 약 100년전 박토에 목화밭을 일구며 개척한 마을. 늦가을이면 눈송이처럼 흰 목화가 만개하였으므로 일명 화여방(花余坊), 화지미. |
황사골 | 피일의 동쪽에 있는 들 |
황새배미 | 행촌의 서쪽. 지형이 황새 모양으로 생긴 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