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이동할 권리’를 요구하며 서울 지하철역에서 시위를 벌인 장애인단체에 서울교통공사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사건을 법원이 직권으로 조정 절차에 넘겼다. 조정이란 분쟁 당사자가 대화하고 서로 조정안을 제시해 합의하도록 법원이 도와주는 제도이다.
16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서울중앙지법 민사27단독 김춘수 판사는 지난달 29일 서울교통공사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박경석 공동대표를 비롯한 활동가들을 상대로 약 30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달라고 제기한 소송의 조정 회부를 결정했다. 첫 조정기일은 다음달 3일 열린다.
재판부는 판결보다 원·피고의 합의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할 경우 직권으로 사건을 조정 절차에 넘길 수 있다. 합의로 조정이 성립하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다. 원·피고가 합의하지 못하면 재판부가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을 한다. 이를 어느 한쪽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재판 절차로 되돌아간다.
공사 측은 지난해 11월 소장에서 “피고들은 지난해 1월22일부터 11월12일까지 7차례에 걸쳐 열차 내에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승·하차를 반복해 고의로 열차 운행을 지연시키는 불법행위를 계획·주도·실행했다”고 주장했다. 공사 측에 따르면 전장연의 시위로 열차가 총 6시간27분19초 지연됐으며 민원 544건이 접수됐다. 공사 측은 ‘열차가 계획대로 운행됐다면 받았을 요금’ ‘열차 지연으로 승객에게 환불해준 요금’ ‘임시 열차 운행과 질서유지 지원 인건비’ 등의 손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전장연 측은 지난 4월 준비서면에서 이 소송은 전장연의 시위를 위축시키거나 중단시키려고 남용한 ‘전략적 봉쇄소송’이기 때문에 각하돼야 하며, 전장연이 예측할 수 없는 손해였으므로 배상 책임이 없어 기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서울시가 ‘모든 역사에 엘리베이터 100% 설치’ 약속을 20년간 지키지 않은 것이 시위의 근본적 원인이며 동기라고 지적했다. 역내 휠체어리프트가 추락해 장애인이 사망하는 사고가 이어지자 2002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2015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이 약속했지만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장연 측은 “열차 운행에 일부 차질이 빚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엘리베이터 미설치 역사 21개 중 18개에 대한 설치 예산이 확보되는 등 장애인 이동권 증진에 실질적인 기여가 이뤄졌다”며 “목적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달성하는 데 있었다는 점,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졌다는 점, 동기 역시 장기간 외면받았던 장애인 이동권 문제의 개선에 있었다는 점 등에 비춰 사회 통념상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선 행위라고 볼 수 없으므로 위법하지 않다”고 했다.
전장연은 ‘빈곤 철폐의 날’인 오는 17일 오전 7시30분 서울 광화문역에서 출발해 국회의사당역까지 39차 지하철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전장연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과 장애인 권리 예산 확대를 요구하며 지난해 1월22일부터 이번달까지 38차례 시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