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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가입은 초기에 했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총신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으로 Th.M.과정 4학기에 재학중이고, "박형룡과 화란개혁주의 신학의 관계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갈무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팔공산 자락 아래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에 소재한 박사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논문을 쓰면서 박형룡 박사님에 대해서 참 많은 것을 배웠고, 그리고 그분의 인격과 학문적 열정앞에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이런 저런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 본 것입니다. 아울러 박형룡 박사님의 신학이나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열정을 가르쳐 주시고 고취시켜 주셨던 은사들 중 한 분이신 김길성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래의 글은 제가 만든 까페 개혁교회의 신앙과 삶(cafe.daum.net/parkhyungnong)에 올려져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릴 적 부터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의 이름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두 분은 우리 교단의 신학적 기둥이라고 칭송하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제가 중 3때 처음 읽게 된 신학책도 박윤선 박사의 <계시록 주석>이었습니다. 그때는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때인데도 부지런히 읽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1981년에 전도해서 교회 데려갔던 친구가 요한계시록을 읽고는 순 엉터리이다고 비난을 하면서 교회를 안나오자 이에 충격을 받고 요한계시록 연구에 몰입한 것이지요.
아무튼 20대에 이르러서 박형룡 박사에 대하여 비판하는 소리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대원에 입학한 후에는 그에 대하여 비판하는 여러 글들도 접하게 되었습니다.주로 본 교단 밖의 신학자들이 쓴 글로서 박형룡 박사에 대한 아주 부정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 바리새주의자다, 그는 교회 분열의 주범이다. 그는 근본주의 신학으로서 신학의 고사 내지는 동결을 귀결시켰다, 혹은 그의 신학이랄 것이 없이 표절의 신학자다는 식의 글들 말입니다.
이런식의 글들 때문에 사실 공정하게 평가를 해야 할 후학들 조차도 잘못 물이 드는 경향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단의 일각에서는 박형룡은 비난이나 비판을 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본 교단에 속한 목회자들이나 신학도들의 책임도 있다고 봅니다.
좀 더 학문적으로 객관적으로 역사적 정황을 살피고 박형룡 박사의 신학의 정체성이 도대체 무엇인지, 공과를 밝히는 작업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의 탄생 100주년을 무렵해서 본 교단에서도 박형룡 박사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 작업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실로 나온 것이 박용규 편집,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총신대), 그리고 신학지남,1997년 가을 특집,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등의 저서입니다. 특히 장동민 박사의 학위논문은 초기 박형룡 박사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발굴해 낸 기여도 크다고 봅니다.
누구가 되었던지 간에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에서 그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고서야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보수적인 장로교 교단의 목회자로서 본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추구하는 중에 박형룡 박사의 신학 형성 과정과 교의신학을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땐가 부터 멀리서만 알았던 그의 생애와 신학 속에 첨벙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태어난 압록강변의 벽동의 한 궁벽진 마을에서 술 좋아해서 늘 집안에 빚이 끊이지 않았던 아버지를 두었던 소년 박형룡, 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서 160km를 걸어서 서해안에 있는 선천 신성 중학교를 찾아갔던 10대 소년 박형룡, 선교사의 도움과 고학으로 신성중학교와 숭실전문을 졸업했던 박형룡, "천의 검"이란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시키는 설교를 했다가 목표 일경에 끌려가서 9개월간의 옥고 끝에 떠난 중국 유학, 그리고 미국에서의 4년 간의 신학 수업 기간,
그의 학업기를 추적해 가보면 그는 소위 빈손으로 학업을 이루어 낸 의지의 인물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는 자수성가형의 인물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마스터했고, 주당 40시간에 가까운 수업을 소화해 내었고, 박사과정은 1년도 채 안걸려서 마치면서도 최우등으로 졸업을 했다고 하니 참으로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열성적인 연구자였던 가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구 프린스톤에서 만나서 사제의 관계를 맺은 존 메이천은 박형룡을 자신이 알고 있는 동양 학생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학생이라고 평가하였고,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환경이 좋아도 그만큼 성실하게 살지 않아서 문제인 후학들-당연히 저를 포함해서-이 많으니 말입니다.
요즘 국가가 직접 나서서 과거 청산을 해 보겠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한 말씀하지요. 숭실전문 상급반 학생이었던 박형룡은 기미년 삼일 독립 운동때 만세를 불렀다가 평양 경찰서에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숭전 졸업후에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띤 설교를 했다가 9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또한 1930년대 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에 항의하는 데모를 할 때에도 교수들 중 유일하게 박형룡은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표현한대로 한국의 거물급 신학자들 가운데는 박형룡 박사가 유일무이하게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그를 향해 신바리새주의자라고 비난하던 김재준 같은 이들이 조선신학교를 세우고 "황국신민교육"을 운운할 때 말입니다. 또한 같이 만주에 있으면서도 박윤선 박사는 꼭 한 번 신사에 절을 한 적이 있어서 평생을 뼈를 깎는 회개를 하였다고 합니다.
박형룡 박사는 정통 칼빈주의를 보수하는 것을 생의 과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현대적 연구 방식을 수용하는 자들을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일에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김재준과의 신학적 논쟁 때문에 분명 기장,예장의 분열이 있었고, WCC 때문에 일어난 논쟁 때문에 합동, 통합이 분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천주교 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고 양보하며 타협해서 '하나의 조직'으로 남아있는 것이 능사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박아론 박사도 인정하였다시피 박형룡 박사는 학자였지 행정가는 못되는 분이었습니다. 능수능란한 사기꾼 브로커에게 속아서 3천만환을 떼인 사건이 대표적이지요. 그렇다고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공금을 유용하거나 착복한 것은 아니지요. 또한 박정희 시절 3선 개헌 찬성에 서명했다고 비난도 받지요, 물론 저도 이런 부분들은 결코 존경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존경한다고 해서 모든 약점이나 허물까지 존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의 탄압시절을 거치고 민족동란을 경험한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독재가 일제시대보다는 낫게 느껴졌겠지요. 더욱이 그가 교장으로 있던 총신은 문교부의 학력 인정도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절이지요. 결코 두둔하거나 비호하려는 발언이 아니라 그의 삶의 정황을 살펴 보면 -우리가 그 길을 따라 가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흔히 풍문으로만 들으면 박형룡 박사는 굉장히 남을 비판하는 것을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즉 사석이고 공석이고 가리지 아니하고 자신의 반대자나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오징어 씹듯이 씹어 댔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박형룡 박사의 삶을 연구하면서 너무나 놀란 것 중의 하나는 그분이나 박윤선 박사는 남앞에서 다른 사람 비난하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기로 유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박형룡 박사는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조차 깎듯이 경대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구가 당신을 이렇게 욕합디다' 해도 '허허 그래요' 하고 지나갈 뿐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사상에 대한 비판의 글은 단호하게 쓰셨지요. 그는 변증학자요, 진리의 수호자라고 의식하고 살았으니 말입니다. 이런 점이 존경할만한 점 중의 하나이지요. 인격적인 고결함, 절제된 언어생활, 흐트러짐이 없는 언어생활. . . 아마도 그래서인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도 81세로 소천하기까지 건강한 삶을 사셨던가 봅니다. 마지막 죽는 무렵까지 독서를 하실 뿐 만 아니라 책 교정 작업도 하였다 하니 젊은 시절부터 자기 절제의 삶을 산 덕인줄 압니다. 그리고 그는 가정예배시 찬송가를 꼭 10장씩 불렀다고 하니 참 누가 흉내낼 수 있는 경건의 열정까요? 저나 이글을 읽는 분들의 가정에서도 가히 따라가기 쉽지 않은 열정아닐까요? 이것이 박형룡 박사가 어린 시절부터 익힌 소위 청교도 개혁주의 신앙의 일면인 것입니다.
박박사의 장점 중 하나는 성실한 연구, 그리고 끊임없는 연구 자세입니다. 저는 그의 신학 작업을 추적하면서 그가 만년에 이르기까지 신학 저서들을 부지런히 읽고 소화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만들어 놓은 강의안을 가지고 울겨먹던 그 시절에 박박사는 바쁜 와중에도 끊임없이 강의안을 수정하고 증보해 나갔으니 이것도 존경할만한 자세이지요. 신대원 마지막 학기(1994년 2학기)때 -지금은 은퇴하신지 수 년이나 되었는데-어떤 교수님이 자신의 강의안을 들어보이면서 이것이 얼마나 오래전에 만든 강의안인지 아느냐고 그 강의안의 고구성(antiquity)를 자랑할 때에, 한 짓궂은 학생이 손을 들고 '교수님, 그 강의안에는 최근 자료도 들어가 있나요?'라고 질문하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온고이지신을 학의 원리로 여겼던 옛 사람들에 비해서 박박사는 적어도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는 자료들에 대해서는 - 자신의 신학적인 틀과 정체성이라는 가위날로 잘라가면서 읽었지만- 부지런히 읽었다고 하는 것을 저는 그의 저작전집 연구 속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확인을 했습니다. 교의신학을 집필하던 1940년대에는 벌코프, 하지 부자, 워필드, 스트롱, 제임스 오르의 책들을 부지런히 읽고 술이부작의 강의안을 만드셨고, 1954-5년에 걸쳐 세계 신학교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베르까워, 헤르만 훅스마, 존 머리, 코넬리우스 반틸, 올리버 버스웰, R. B. 카이퍼와 H. 카이퍼등의 글들을 부지런히 읽고 증보해 나갔습니다. 그 최종 결실을 우리는 1964년-1973년 어간에 출간된 <교의신학>(7권) 전질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실한 삶을 살고도 만 80세가 되던 날에 이런 시조를 쓰셨다고 하네요.
한숭홍, <한국신학사상의 흐름(하)>(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1996), 103
80평생 회고하니 한탄할일 한이없다.
집에서는 불고했고
나라일도 한것없네 교회위해 무엇했나
허송세월 뿐이로다
산곡에 생긴몸이 바다건너 학을닦고
신사성직 받은것은 천은막대 하건만도
이룬것은 유야무야 신전인전 부끄러워
- 1977년 5월 15일 주일 음3월28일 -
이것이 바로 대가의 모습이 아닐런지요. 김길성 교수님이 역설하신대로 우리의 대선배인 박형룡 박사의 신학을 깊고 넓게 잘 이해하고 발전적으로 계승함이 좋을 것입니다. 박박사님의 열정적인 보수 신앙과 열정적인 연구 활동을 본받아서 우리는 더 많은 좋은 자료들을 잘 활용하여서 21세기 한국 교회에 지로적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너무나 감동적입니다...후학으로서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네요...분발하겠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이상웅 목사님을 여기서도 만나는 군요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