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발간교과서
#배달족역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에 선포한 첫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제7조는 “대한민국은 神의 의사에 의하야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야 인류의 문화급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야 국제련맹에 가입함”이다.(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헌장>, 1919. 4. 11.) 여기서 “神의 意思에 依하야 建國한”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이 무엇인지는 1941년 11월 28일 조소앙(趙素昻)이 작성하여 공포된 <대한민국건국강령>의 다음과 같은 문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의 력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선민이 명명한 바 「수미균평위하면 흥방보태평」하리라 하였다 이는 사회각층 각급이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향유를 균평하게 하여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유하리라 함이니 홍익인간과 리화세계하자는 우리 민족이 지킬 바 최고공리임”(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건국강령>, 1941. 11. 28.)
1919년 4월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은 조소앙과 관련이 깊다. 조소앙은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하였고, 1912년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일본유학을 마친 뒤 조소앙은 1913년 상해로 망명하였고, 상해와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7년 조소앙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가들의 단결을 도모하는 일련의 시도를 하고 있었다. 조소앙은 3•1운동 직후 이동녕 및 이시영과 만주지역 대표로 상해에 도착하였고 곧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참여하였다. 당시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은 물론 <대한민국임시의정원법>과 <대한민국임시헌장>의 기초를 작성했었다.( 한시준, 「조소앙의 삼균주의」『한국사 시민강좌』10, 1992, 99∼100쪽.)
조소앙은 일본유학 중인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기도 했지만, 1912년 무렵에는 완전한 ‘단군민족주의자’로 변해 있었다. 이후 조소앙은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기까지 ‘단군민족주의자’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단군을 ‘국조(國祖)’로, 우리민족을 ‘배달겨레’로 지칭하였으며, 망명 시절에 개천절을 기리는 논설을 여러 건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우리 배달겨레는 단군께서 개천・건국하신 이래 동방에 있어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민족이라고 역설하였다.(정영훈, 「조소앙의 단군민족주의와삼균사상」『단군학연구』38, 2018, 229∼230쪽)
이러한 조소앙이 1919년 4월에 그 초안을 작성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7조에서 “신의 의사에 의하야 건국한”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그 당시 그가 지녔던 민족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위에 인용한 1941년의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 조소앙은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홍익인간과 이화세계하자는 우리 민족이 지킬 바 최고공리”임을 명백히 밝혔다. 즉 조소앙이 1919년 4월에 초안을 마련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헌법에 명시된 “神의 意思에 依하야 建國한”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바로 배달민족의 건국시조인 단군의 건국이념이었던 것이다.
1919년 4월 11일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고 이후 국무총리와 주석 등의 요직을 역임한 이동녕은 “우리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다. 단군왕검의 이 나라 개국이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데, 왜 우리가 종교가 다르다고 단군을 배타적으로 보겠는가. 단군은 우상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 단군왕검의 개국과 이어지는 전통을 이어 독립운동의 맥으로 삼아 지켜나가야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면서 대종교 출신인 신규식, 조완구, 박찬익등과 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대종교 포교와 그 선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거의 모든 요인들이 대종교에 대해, 그 종교적 성격보다는 그 민족적 성격과 그가 미치는 독립운동에서의 역할에 동의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공식적으로 개천절과 어천절 행사를 주관하였고, 각종의 정부 관련 문헌에서 단군을 그 뿌리로 하는 민족주의를 분명하게 천명할 수 있었다.( 이현희, 「제2장 단군인식의 통사적 해석과 향후 과제」『민족사상』1(1), 2007, 63∼69쪽)
1920년대에 들어서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의무교육제를 기본정책으로 천명하고, 그 실행업무로서 우선 교과서 편찬과 서적 간행을 통해 독립적인 교육교재를 발행하며 또 교재를 통일하고자 했다.
교육의 정상적 진행과 교육목표 달성을 위해, 교과서 및 교재의 편찬은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사업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일제가 한말(韓末) 이래로 민족의식을 담은 우리의 역사와 지리 및 국어 교과서는 물론 일반 서적도 불온서적으로 분류하여 철저히 단속 및 압수하고, 그 대신에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까지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교과서를 무상으로 배부하여 식민교육을 조장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국정교과서를 발행하는 사업은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역사교과서로서 『배달족역사』가 발간된 것이다.
'배달족역사'가 발간될 당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다소 혼란스러웠고 또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21년 3월 중순에 상해로온 김승학은 안창호를 통해 프랑스 영사관과 교섭하여 그 이전에 봉쇄되었던 '독립신문사'와 '삼일인쇄소'를 4월 중순에 부활시켰다. 그 이후 김승학이 독립신문사의 사장이 되어, 신문사의 조직을 재편하였는데, 주필은 박은식이 맡았고 편집장은 차리석이 맡았다.
이때 독립신문사의 부차적 사업으로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부설하고 박은식, 조완구, 윤기섭, 김두봉, 정신, 차리석, 백기준 등과 함께 김승학이 책임을 분담하여 교과서를 편찬하기로 했다. 편찬할 때 초등과(初等科) 교과서는 한자(漢字)를 1,500자 이내로 제한하고, 중등과(中等科) 교과서는 한자를 2,500자 이내로 제한하여 사용하도록 시켰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초등과 교과서는 완성되었으나, 경비 문제로 인쇄하지는 못했다고 한다(김승학 저/김병기 정리, 「망명객행적록」『한국독립운동사연구』12, 1998, 427∼431쪽.)
'배달족역사'가 '단군' 혹은 '대종교'와 관련된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에 나타난 ’배달‘ 혹은 ‘배달민족신교사’의 영향을 받아 그 '배달족'의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 자연히 ‘신교’를 다수 언급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혹은 결코 편향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종교들에 대해 인정하고 또 그 역할을 긍정적으로 서술했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대종교의 영향 아래 작성되긴 했지만 '배달족역사'가 종교에 있어서 결코 편향되지 않았음은, 다음의 서술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배달족교과서 근세역tk
.
.
제3장 근세문화
제일과 종교의 문호
문화를 조장함이 종교의 력이 최대하더니 근세에 지하야 종교의 명칭이 심다라 우리 남북강에 재한 자로 론하야도 대종교와 천도교와 대종교와 공자교와 태극교와 도교와 야소교와 천주교와 회회교와 희랍교가 각기 문호를 립하고 화도의 책을 부담하니 취지는 부동하나 사회를 선량케함은 대략 동일하더라 (김헌 편, 「제42과 한청의 역년」『배달족역사』, 대한민국임시정부,1922, 33쪽.)
위의 인용문에서, 근세에 이르러 배달족의 강역 안에 여러 종교가 있고, 그들이 각자 문호를 세우고 즉 포교 및 그 외의 활동하는 여러 통로를 갖추고, 화도(化導) 즉 덕(德)으로 교화하여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데, 각 종교의 취지는 같지 않지만, 사회를 올바로 이끌고 평안케하는 목적과 활동은 대체로 같다고 서술하는 것이다. 대종교의 영향아래 그 서술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배달족이란 역사적 특성에 의해 ‘신교’를 여러 군데에서 서술했을 뿐, 그 종교에 의해 배타적인 서술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사실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은 것은 '대종교'가 철저히 지키는 중요한 원칙이다.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羅喆) 홍암 대종사가1916년 8월 15일 순명조천(殉命朝天) 하면서 유언과 함께 남긴 '밀유(密諭)'에 “다른 교인을 별달리 보지 말라(勿岐視敎外人)”며,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어서는 안된다고 특히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대종교의 영향 아래 작성된 '배달족역사'가 다른 종교에 조금도 배타적이지 않은 서술을 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대종교는 자기 밖의 ‘타(他)’에 대해 결코 배척하거나 배타적이지 않음을 지키는 원칙도 갖고 있다. 위에 언급한 홍암 대종사의 '밀유' 에 “외국 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라(勿異論城外人)”는 부분은, 바로 자기 이외의 민족이나 국가를 배타적으로 배척하지 말라는 원칙을 말한 것이다.
'배달족역사'도 그 서술에서 외국 혹은 배달족 이외의 다른 민족에 대해 ‘자타(自他)’를 구별하는 서술을 했지만, 결코 ‘타(他)’ 를 배척하거나 비하하는 서술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배달족역사' 에서 언급하는 배달족 내부의 사건은 물론 외국이나 타민족에 대한 서술에서도 객관적으로 사실을 서술할 뿐 어떤 편향성을 보이지 않는, 역사 교과서로서의 서술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