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의 개가 있다. 한 마리는 새하얀 모습으로 품종 있는 개와 잡종 개가 오묘하게 뒤섞인 모습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거뭇거뭇한 주둥이에 갈색 털을 가진 잡종견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쯤, 부모님은 언니와 나에게 각각 맡을 강아지를 고르라 하셨고, 나는 검은색 강아지를 품에 안았다. 얘, 개야, 멍멍아라고 마냥 부를 순 없으니 이틀을 고심해서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까만색 수놈이라 ‘깜식이’라 불렀다. 우리집에선 내 것이라 할 것이 잘 없었는데, 둘째 딸로 태어나서 언니가 입은 옷을 물려받거나 부모님이 언니와 같이 쓰라고 사주던 것들뿐이었다. 다리도 짧고 똥오줌도 잘 못 가리는 저 털 뭉탱이가 어찌나 귀여운지 사료를 우걱우걱 먹을 때도 옆에서 쳐다보고 그랬다. 다른 건 몰라도 “깜식아!” 외치면 신난다는 듯이 턱을 척 올리고 꼬리치며 따라왔다. “내가 네 주인이다.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앉아! 바보군 바보. 앉아!” 깜식이는 끝까지 앉아를 못 했고, 내가 앉아할 때마다 오히려 노는 게 신이 났는지 엉덩이를 치켜올리고 흔들어댔다.
어느 날은 깜식이가 몸을 웅크리고 하루 종일 움직이질 않았다. 밥그릇에 있는 사료도 하나도 먹지 않아 옆에 있는 아름이가 깜식이의 밥을 훔쳐 먹고 있었다. 뭐가 문제일까. 말이라도 통하면 원하는 걸 해줄 텐데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개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키가 작아서 2살 터울인 언니 옆에 서있어도 정수리가 어깨까지 밖에 못 갔다. 학교에서도 키 순서로 많이 간 게 앞에서 4번째였다. 그런 꼬맹이가 아픈 개를 끌어안고 걷기 시작했다. 얼마큼 걸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팔에 힘이 없어서 깜식이를 두어 번 정도 내려놓고 팔을 주물렀던 기억이 있다. 동물 병원에 도착해서 있었던 일은 정말 기억이 잘 안 난다. 깜식이 얼굴만 쳐다봤다. 깜식이의 얼굴은 잔뜩 겁을 먹은 게 돈 한 푼도 없이 덜컥 병원에 온 내 표정이랑 똑같았다. 돈도 없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의사 선생님은 큰 문제 아니고 감기라고 하셨다. 약을 먹이고 내일 다시 오라고 하셨다. 깜식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까먹지 않게 만 오천 원, 만 오천 원 읊조렸다. 엄마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내일 병원에 가려면 만 오천원이 필요하고 용돈을 안 받아도 되니 꼭 데려가게 해달라고 했었다. 그러고 두 번을 더 동물 병원까지 깜식이를 안고 갔다. 가는 와중에 육교에서 한 번, 사거리에서 한 번 항상 비슷한 곳에서 팔이 아파 길가에 깜식이를 잠시 내려두고 팔을 주물렀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송파구 석촌동으로 일 년에 두 번씩 성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무덤에 성묘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면 모란 시장을 들러 부모님과 장을 보곤 했다. 번데기도 사고, 젓갈도 사고, 이름 모를 나물들도 사셨다. 가끔 거기서 파는 닭꼬치를 손에 쥐여주시곤 했는데, 내 기억엔 모란시장은 원인 모를 퀴퀴한 냄새랑 붕어 엑기스 삶는 한약 냄새가 났고 아스팔트 바닥이 항상 끈적거렸다. 그래도 모란시장이 좋았던 건 토끼부터 강아지, 병아리 등 귀여운 동물들 천지였다. 그중에 깜식이랑 똑같이 주둥이가 까만 잡종견들이 창살에 갇혀서 있었는데 반가워서 닭꼬치를 들고 쭈그려앉아 쳐다보곤 했었다. 아저씨 몰래 닭꼬치를 입으로 조금 배어내서 창살 사이로 던져주기도 했다. 두 세 마리가 허겁지겁 주둥이를 들이댔지만 닭고기는 창살을 지나 바닥에 뚝 떨어졌다.
모란시장에서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곳은 개고기를 파는 가게들이었다. 걸어도 걸어도 개고기 파는 가게들 밖에 없는 구역이 있었는데, 거기에선 아빠 손을 꽉 잡고 땅만 보고 걸었다. 자판대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담긴 얼굴을 한 개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눈도 귀도 주둥이도 새까맣게 그을려서 이빨을 드러내고 죽어버린 개들이었다. 얼음 땡! 하고 치면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 같은 생생한 죽음이었다. 이빨을 악물고 죽은 얼굴을 가진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닭꼬치를 떼어주고 온 강아지들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 아빠는 아름이와 깜식이를 시골로 보내고 이모네 집에 있는 요크셔테리어를 한 마리 데려올 거라고 했다. 울고불고 생떼도 부렸는데 엄마가 깜식이는 외삼촌네 과수원으로 간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갇혀지내는 것보다 넓은 과수원 밭을 뛰어다니는 게 깜식이한테 더 좋을 거라고 했다. 과수원 사이를 신나게 뛰어다니는 깜식이를 상상하니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짓는 듯해서 더 눈물이 났다. 깜식이와 아름이를 시골로 보내고 이모네가 키우던 요크셔테리어 하늘이가 우리 집으로 왔다. 하늘이에게 “앉아!” 했더니 척하고 앉으면서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깜식이를 시골로 보내고 몇 개월 뒤, 여름휴가로 외삼촌네 과수원에 모든 친척들이 모여서 근처 계곡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계곡에 가는 것보다 깜식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매번 잠들던 고속도로에서도 눈을 뜨고 긴 선으로 늘어지며 창가에 매달린 빛들을 보고 있었다. 깡깡 짖지 않고 왈왈 짖는 엄청 큰 성견이 됐으려나? 떨어진 복숭아를 너무 많이 주워 먹어서 뚱보가 됐으려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을까? 나를 기억할까.
기나긴 걱정처럼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도착하면 항상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일 차선 도로를 자동차 불빛에 의지해서 가다 보면 작은 샛길이 나오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외삼촌 집으로 통하는 길이 나왔다. 아빠는 어떻게 아무런 표시도 없는 샛길을 항상 잘 찾아나갈까 궁금했었다. 비포장도로에 들어서면 차 뒷자리는 움푹 팬 땅으로 인해 심하게 덜컹거렸다. 아, 벌린 악마의 목구멍 속을 탐험하는 자동차 한 대가 한참을 덜컹거리면 저 멀리서 빛이 보였다. 빛 가운데에 우뚝 선 그림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양옆에 개 2-3마리가 월월 짖는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차에서 내려 깜깜한 어둠 속으로 개 짖는 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양볼이 축 처져 침을 흘리는 큰 도사견 한 마리와 그의 새끼 2마리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다른 방향으로 소리 나는 곳을 따라가니, 우리에 외롭게 갇힌 또 다른 잡종견이 사납게 짖다가 사람을 보더니 꼬리를 흔들고 철창을 핥으며 반가워했다. 깜식이가 아니었다. 소리 나는 곳을 둘러봐도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한테 달려가서 깜식이가 없다고 외삼촌한테 물어봐달라고 했고, 엄마는 외삼촌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돌아오셨다. “깜식이는 구미 이모부네 포도밭으로 갔대. 거기서 포도밭을 지키고 있대.”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울었는지 울지 않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울에 사는 우리 집은 언제나 시골에 가장 늦게 도착하는 팀이었다. 그 말은 우리가 도착하면 이미 얼큰하게 취한 친척들이 나와서 우리를 반겼다. 고스톱을 치거나 편육을 깔아 놓고 소주를 마시는 어른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나랑 언니는 소음을 떠나와 과수원 마루에 앉아 별을 보곤 했다. “저쪽으론 가지 마 저긴 무서운 돼지가 있대” 언니가 어둠 속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때 술 냄새를 풍기면서 발이 취한 이모부가 비틀거리며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오셨다. “이모부 포도밭으로 깜식이 갔어요?”라고 묻는 내 질문에 이모부는 갸우뚱했다. “갈색 털 가진 개요. 주둥이 까맣고 귀 쳐진 강아지요.” “아, 얼마 전에 서울에서 온 개? 하도 짖어서 내가 잡았지. 잡아서 할아버지 삶아드렸는데, 고기가 너무 질겨서 얼마 안 먹고 버렸어.” 흐릿한 기억 속에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말은 살아있다. 상처가 되는 말은 소리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상대의 표정, 말투 그리고 그 감정까지 고스란히 남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꿋꿋하게 연명한다.
작은 풀잎에도 이름이 있다고 했다. 살아있는 것엔 이름도 있고 얼굴도 있다. 얼굴이 있는 모든 것은 행복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고 통증도 그리움도 느낀다. 글을 쓰는 지금 내 옆엔 15살이 된 강아지 뽀글이가 있다. 노화가 와서 큰소리도 잘 듣지 못하지만 그 덕에 잘만 잔다. 내가 집에 와도 소리를 못 듣고 꿈을 꾸고 있는 강아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우리가 단 하나의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나는 너의 ‘아파’를 너는 나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빨 6개가 빠져 틀어진 턱, 콧등에 난 검버섯들, 하얗게 탁해진 눈동자.
나는 그 속에서 사람의 얼굴을 본다.
첫댓글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달동네 조그만 교회에서
키우던 복음이 생각이 납니다.
복음이는 젖을 갓 떼어내고 성장과정까지
함께한 아주 잘 생긴 친구였습니다.
달동네가 철거되면서 어쩔 수 없이 주위분에게 맞곁는데
거리에서 복음이 비슷한 친구를 보면
생각이 납니다
이 글을 읽으니 다시 복음이 생각이 나네요.
고기의 얼굴
깜식이와 이모부 얼굴이 오버랩됐는데
섬뜩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 같은 생생한 죽음'
선생님글 읽으며 얻은 임펙트 좋은 글 귀절에 올려 봄니다.
'반어적 표현'은 진한 의미의 귀절이다.
어느날 문뜩이라는 용어를 생각이 나시리라 봅니다.
뒤늦게 육월삼일자 김 담비선생의 글을 접하게 되었읍니다.
나의 글 조회수 올라가 있는것만 보고서 우쭐댄 제 자신이 부끄럽다할 정도로 살아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우리네 살아온 모습 그대로를 대변하는 글귀였읍니다.
강아지얼굴에서 사람의 얼굴이 보임은 정말사랑 그대로 아니면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겠읍니까?
그러나 정을 주었던 깜식이는 다시는 안돌아옴이 세상의 현실이니 모르는 제 삼자에게 깜식이의 삼분의일이라도 정을 나누어 주는 연습을 해보는 일을 시작해 봄이 어떠하겠읍니까!
우리가 몸담고있는 떠나게되면 몸다았던 희망 지원센타의 최종임무 아니겠읍니까?
저도 끝으로 깜식이에게 인사하겠읍니다.
다른 생애에서는 마음편히 잘지내는 일의 연속이길 기원한다.
깜식아!so l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