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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글 스크랩 단편소설 - " 허 무 "
바우 추천 0 조회 37 14.02.28 09:2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그날은 정례 산악 행군이 있는 날이었다.

아직은 봄 기운이 남아있는 5월 중순의 어느 날.날씨는 우울한 내 마음과 관계없이 구름 한점없이 한없이 맑았다.부대는 곧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예정되어 있었다.지금 있는 지역에서의 마지막 산악행군.전방에 있는 전투부대가 아니고 최후방 지역에 있는 교육부대인 탓에 말이  좋아 산악행군이지 실상은 등산이나 다름없는 편안한 훈련이었다.행군은 부대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200미터도 채 안될 나지막한 산의 정상으로 해서 이어진 능선을 따라 멀리 8키로 정도 떨어진 산성까지 갔다오면 되었다.시간으론 왕복 대여섯 시간 정도 .휴대장비도 간단했다.칼빈 소총에 혹시 있을지 모를 갈증에 대비해 물을 채운 수통을 단 탄띠 그리고 철모가 전부였다.부대원들은 산악행군이 실시되면 너도 나도 참가하고 싶어했다.17시까진 귀대해야 되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합법적인 부대 탈출 외출이었으니까.

 

행군에는,  사병들은 부대 기능 유지에 필요한 필수 최소 인원만 빼고는 모두 참가하게 되어 있었다.

피교육생들을 총괄 관리하는 자리에 있던 나는 굳이 훈련에 참여 안해도 됐지만 우울한 마음도 날려보낼 겸 선임하사에게 허락을 받고 행군에 참여하기로 했다.부대가 지금 있는 지역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기회인 때문이기도 했다.유월 중순 쯤으로 예정되어 있는 부대이동이 시작되면 집이 서울인 내가 이 지역을 다시 볼 기회가 오기는 그리 쉽지 않을 터였다.

우리나라 제 2의 대도시인 부산.내가 복무하는 부대는 이 도시의 서울로 가는 북쪽 변두리 지역 자그마한 야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부대 앞으론 북으로는 서울 ,남으로는 시내로  향하는 4차선 도로가 일직선으로 곧게 뚫려 있었고 도로 건너 마즌편을 제외한 부대 양 옆으론  산자락을 차지하고 허름한 민가들이 제법 들어서 있었다. 도로 마즌편은 지역이 제법 넓어 부대 옆 보다는 많은 민가들이 보였는데 이  민가들 뒤로는 다시 나즈막한 산이 조금 떨어져 자리하고 있었다.민가와 산 사이에는 농사를 짓는 경작지도 꽤 많이 있는 것이 눈에 뜨였는데 대도시라곤 하지만 변두리 지역인 탓에 아직 농경지가 꽤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이 산은  내가 복무하고 있는 부대 안에서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였는데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서 멀리 보이는 덕분에 이곳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부대 안에 늘 갇혀지내야 하는 생활에 따라 생겨있는 스트레스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산과 민가 사이에 있는 농경지 위 하늘엔 가끔 솔개가 늠름한 모습을 하고 유유히 날고 있는 모습이 보이곤 했는데 거리가 먼 탓에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솔개란 놈이 내 눈에 뜨인 날은 '저놈 또 먹잇감을 ?아 나섰군'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놈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한참을 쳐다보곤 했다.솔개는 이따금 우리 부대가 있는 곳 가까운 데 까지 날아 오기도 했는데  그때는 제법 모습을 잘 볼 수가 있어 그 여유롭고 늠름해 보이는  모습에 절로 부러움과 찬탄을 보내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그리곤 나로 하여금 속으로 혼자 중얼거리게 만들었다.

"너는 새상에 두려울게 아무 것도 없겠군.부럽다.난 제대하고 나면 가족들과 내가 먹고 살아가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험한 세파와 싸워 나가야하는 힘든 삶을 살아가야 되는데.나도 너 같은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복무하는 부대는 교육훈련 부대였다.화학 병과를 가진 군인들이면 장교부터 사병까지 누구나 거쳐가야 되는  부대.나는 2년전 이 부대에서 교육을 마치고 하사로 임관되어 다른 부대에서 잠깐 복무하다 이 부대로 다시 돌아와 복무하고 있었다.군에 처음 입대해서 훈련병으로 논산훈련소에서 6주,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후반기 교육부대에서 4주,하사관학교에서 하사관 후보생으로 8주등 총 18주간 보병 훈련을 받은 기간하고 하사로 임관되어 원주에 있는 포병부대에서 3개월여 복무한 기간을  빼면 교육기간 24주를 포함한 나머지 세월은 전부 이 부대에서 보낸 것이다.그리고  이제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아래 군에서 보내야 했던  내 젊은 20대 초반 3년중  30개월을 뒤로 보내버리고 지긋지긋하기만 한  군 생활이  거의 끝자락에 와 있었다.이번에 제대 특명을 받은 병장,상병 두명을 보면 나도  9월이면 제대 특명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앞으로 길어봤자 4개월 안짝.30개월전 입대 당시 아득해 보이기만 하던 제대가 바로 코 앞에 닥아와 있었다.

 

범죄자들이 아닌 한창 혈기왕성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한다는 이름 아래 모여 생활한다는 것만 다를 뿐 부대 안은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감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부대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했고 그 효력은 제대 특명이 떨어져 민간인 신분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며 유지되었다.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뤄내야 하는 의무- 군 복무라는 의무는 국가의 부름이라는 미명 아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 남성들은 누구나 치뤄내지 않으면 안되는 통과의례이면서 숙명으로 묶어 놓고 있었다.

 

나는 이 통과의례를 이제는 3~4개월 정도만 치르면 끝나는 지점에 와 있었다.

12월 초 한겨울 새벽 4시에  그야말로 깨고 싶지 않은  잠을 마지못해  깨고서  입영열차에 올라야 했던 때가 어느덧  2년반 전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는 것이었다.입대 당일엔 정말이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라도 된 심정이었다.한 여름 복날 주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숙명을 지닌 개들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한없이 비참했었다.그런데 그 지긋지긋하던 군 복무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부대가 멀리 광주지역으로 곧 이동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제대 말년에 한차례 더 고생을 하긴 해야겠지만 힘든 일은 피교육생하고 기간 사병중 쫄병들 몫이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정작 큰 걱정은 집에 있었다.

입대 전에 이미 기울기 시작한 집안 형편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인 아버지로부터 송금이 끊긴 것은 물론 연락 조차 안되는지가 벌써 오래 되었다고 했다.아버지는 월남전이 확대되면서  군무원으로 다니던 미군 부대가 월남전에 투입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월남까지 가시게된 것이었는데 미군이 월남전에서 발을 빼기 시작하면서 소속 부대가 본국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으셨다고 했다.이후 아버지를  월남으로 데리고 간 미군 선임하사가 제대를 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이란으로 가면서 같이 가셨다고 했는데 그 뒤로는 생활비 송금은 커녕 행방 조차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집안 살림은 세살 밑의 큰 여동생이 미장원에 나가 밤 늦게까지 일하며 고생해 번 돈으로 꾸려가고 있었다.학교 다니는 것이 싫다고 스스로 상급학교를 그만두고 배운 미용 기술이 집안 형편이 어려울 때에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이었으나 군에서 그 소식을 듣고 있는 내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내가 제대한다는 것은 여동생이 챙겨야 할 군 입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의미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명문대학이라곤 하지만 고작 1학년을 다니다 입대한  나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가 마련될리도 없었다. 복학도 해야 했다.얼마나 힘들게 들어간 대학인가. 2년반을 투병 생활을 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힘들게 들어간 대학이었다.복학을 못하고 그대로 그만 두면 평생을 두고 한으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그렇다고 아버지가 외면한 가장 역할을  큰 여동생에게  전적으로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제대를 하면 그 역할은 삼남매의 제일 맏이면서 남자인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무엇보다도 여동생이 벌어들이는 수입 자체가 형편 없었다.동생은 동네 미장원에 정식 미용사도 아니고 보조로 일하고 있었다.그 수입으론 내 대학 등록금은 커녕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생활비도  충당하기도 어려웠다.그저 입에 풀칠하는 정도.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막내 여동생 뒷바라지도 문제였다. 최소한 고등학교 까지는 마치게 해줘야 되는데 그것이 이제는 제대후  내가 책임져야 될 몫으로 돌아와 있었다.복학은 불가능 할 것으로 판단되었다.제대후 직접 부딛쳐보고 결정할 일이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상황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대는 코 앞에 거의 다가와 있었지만 제대하는 것이 두렵기조차 했다.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대가.

 

그러나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내게 주어진 몫의 삶을 내게 주어진 여건 아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갈 용기와 자신감도 가지고 있었다.지옥같이 지긋지긋하기만한  군 생활이 내게 유일하게  도움이 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투병 생활을 한데다 원래 대인관계를 두려워하고 좋아하지 않는 내성적이고 유약한 성격인 탓에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채 군에 입대한 나를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강하게 만들어 준 것.' 

이런 마음은 하사관 학교에서 받은 유격 훈련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만들어졌다.100여리를 20키로 완전군장을 하고  반은 졸다싶이 해가며 밤길을 행군하여 도착한 유격장에서 밤낯없이 2주간의 혹독한 유격훈련을 받는 동안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젠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었다.시골 비포장 길에서 중대원 전체가 철조망 통과 기압을 받을 때는  등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돌들이  마구 찔러 들어오고 움푹 파인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흙탕물로 등뒤는 범벅이 되었지만 누운 것이 오히려 편해 좋기만 했었던 적도 있었다.자칫하면 등에 상처가 날 수도 있었지만 요령껏 등을 움직이면서 흙탕물 때문에 오히려 시원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압을 받고 있던  우리 중대원들 모습을  때 마침 지나가던 시외버스 안의 승객들은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그때 기합을 받고 있는 우리들 아니 나를 쳐다보던 그들의 모습은 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그저 신기한 구경꺼리를 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가 겪고있는 고통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그 때 나는 알았다."사람들은 자기 문제가 아닌 남의 문제는 별로 관심이 없이 자기들이 보고 싶은대로만 보게 마련이구나"하는 것을.결국 ,제대후 내가 살아가야 할 내 몫의 삶은 남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나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때 주먹을 불끈쥐며 마음 속으로 수도없이 다짐을 했었다.

 

 <태어남이 선택이 아니기에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어떤 형태의 것으로 주어졌던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 삶의 길이라면  "그래 힘들겠지만 한번 해보자.나보다 힘들게 사는 친구들 수도 없이 많이 봐 왔는데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나'하고.그러나 이때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가고자 원했던  삶의 길로 갈 수 있기는 틀렸고 단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존을 위한 삶을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그리고  태어날 때 대부분 결정되어지게 마련인,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나도 거기에 속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근무하는 학생대대 행정반에서 집합 장소인 연병장까진 그리 멀지 않았다.천천히 걸어도 대략 10여분 정도.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니 집합 시간인 9시까지는 아직 10여분 정도 시간  여유가 있었다.그래도 행정반을 나섰다.피교육생들을 교육장으로 보내놓고 나면 딱히 할 일도 없어 무료하기까지 한 행정반에 있으면서 집합시간을  맞추기 보다는 차라리 연병장까지 천천히 걷는 쪽을 택하는 것이 나을 듯 싶어서였다.

행정반을 나서면 학생대대 전용 작은 연병장이 제일 먼저 나온다.가로 50m 세로 70m정도 크기.피교육생들 학과출장이나 아침 점호용으로 주로 쓰이는 곳이다.행정반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쪽이 폭이 더 좁은데  정면으로 끝나는 곳은 통로가 없는 경사진 인공 둔덕이다.이  인공 둔덕이  끝나는 곳 아래 쪽에  다시 평탄한 지역이 있고 이곳에 내가 이곳 학생대로 오기 전까지 근무했던 군수과와 군수품 창고 그리고 취사장이 자리잡고 있다. 부대가 산자락을 깍고 자리잡은 탓에 통행로가 아닌 곳은 모두 건물이 들어갈 곳만 평탄 작업을 한 때문에  그리 된 것으로 보이는데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이리 조성했을 부대 안은 덕분에 야외 교육장이 있는 부대 뒤 산 쪽으로 올라 갈 수록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어 조망이 아주 좋았다.부대 전체로 보면 중간 쯤에 자리잡고 있는 내가 근무하는 학생대대 건물만 해도 연병장에 나서기만 하면 앞쪽으로 시야가 드넓게 열려 있어  가슴이 탁 트이고 상쾌했다.나는 행정반에서 근무하다가 쉬고 싶을 때면 피로도 풀겸해서 연병장에  나와 멀리 바라보이는 부대 바깥 마즌편 산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 날은 행정반 업무에서 해방까지 되는 날이라 더욱 마음 편하게 부대 앞 먼 산을 바라 보았다. 두팔을 하늘을 향해  브이자로 쭈욱 뻗고 허리를 잔뜩 뒤로 젖힌 채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그리곤 제대 후에 부딛쳐야 될 여러 머리 아픈 문제들을 일단 털어버리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 제대 후의 일은 그때가서 부딛치며 해결하기로 하자.제대 말년이라곤 하지만 아직은 복무 기간도 몇개월 더 남았고 더구나 부대 이전도 곧 시작될테니 우선은 남아있는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보자.군 생활이란게 내 뜻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생활이니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서 내 신상에 변화가 생길지 모르는 일 아닌가?"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참 맑고 깨끗도 했다.대도시라곤 하지만 변두리 지역이라 그런지 공기도 상큼했다.봄의 끝자락이라곤 하지만 아직은 무더위가 ?아오지 않은 계절의 여왕 오월의 중순이 채 안 끝난 어느 날이었다. 코로는 봄의 향기로운 내음이 물씬 들어왔고 나는 그 내음을 온 힘을 다해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때 내 눈에 몸집이 유난히 작아 보이는 새 한마리가 내 눈 높이보다 조금 높은  정도로 하늘을 낮게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저리도 작은 새가 있담.'  나는 기지개를 켜며 심호흡하고 있는  자세 그대로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을 따라 눈을 움직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서 왔지. 뒷산에서 내려왔나?'

새는 이리저리 바쁘게 날아다녔다.

'먹이를 ?으러 온 건가?"

새는 부대 앞 마즌편 산과 농경지 사이 하늘에 보이던  솔개처럼 늠름한  모습이 아니었다. 무슨 새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내  눈앞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갸날프고 힘들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꾸준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것이 먹이를 ?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새끼라도 낳았나?'

가만히 지켜보니 새는 내가 서있는 학생대대 연병장 아래 쪽에  자리잡고 있는 취사장 주변을 주로 맴돌고 있었다.

'먹이를 구하러 온 것이 틀림없군'

취사장 주변을 바쁘게  날아다니던 새는  이윽고 먹이를 구한 것인지 부대 뒷쪽 야외 훈련장이 있는 곳으로 재빠르게 날아가버렸다.

'산에서 먹이 ?으러 내려온 것이 틀림없구먼.그나저나 그 새 참 작기도 하네.어찌 저리 작은 새가 있담 .그래도 먹이를 물어다 줘야 할  새끼가 있는가보네.그렇지 않고서야 저 작고 갸날픈  몸집으로 어찌 저리 바쁘게 날아다닐 수가 있담.만약 솔개 눈에 뜨이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먹이감이 되어 버릴텐데 다행이 오늘은 솔개란 놈이 안보이는구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행군에 참여하는  부대원들이 집합하기로 되어 있는 대연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 연병장은 학생대대 연병장 바른 쪽으로 나있는 부대 안 주도로 아래 쪽에 다시 경사지 형태로 된 인공 둔덕 아래 자리하고 있다.대 연병장 바로 옆 위치 쯤 주도로에서 부대 뒷산을 바라보며 서 있으면 바른 쪽에 취사장,군수과 창고 건물, 왼쪽에 대 연병장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근무하는 학생대대는 군수과와 취사장이 있는 건물 앞 널찍한 마당에서 산쪽으로 보면  경사진 인공 둔덕이 있는 그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된다.대 연병장에서 다시 부대  뒤 산쪽을 바라보고 정면으로 서면 부대장실과 작전과등  부속 행정반이 있는 본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본부 건물,학생대대 건물,군수과 창고 그리고 대연병장을  직사각형 틀안에 집어넣었다고 가정했을 때 모두 각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인 것이다.  산 자락을 깍아 부대를 주둔시킨 것이기에 나름대로 가장 효율적인 배치를 고려하여 설계된 것이겠지만 부대내 건물,연병장 배치가 어떻게 되어있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의무 복무기간을 다 채우면 아무 미련없이 뒤도 안돌아 보고 나가버릴 부대인데 그깐 부대내 건물,연병장 배치가 중요할 일은 없었다.그래도 대대 행정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하루 세번 꼭 이용해야 되는 사병용 식당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 하나는 무척 좋았다.

대 연병장은 야외 교육장 다음으로 큰 면적을 부대 내에서 차지하고 있었는데 야외교육장이 여러 용도로 쪼개어져 사용되는 걸로 비교하면 실제론 대 연병장이 부대 안에서 가장 넒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매주 한번 있는 하기식 외엔 신규 교육생 입,퇴교식 때만 주로 사용될 뿐 대연병장은 늘상 텅비어 있는 채 였지만 이 대연병장이 있어서 부대 안이 널찍하게 시원해 보이는 효과가 있어 그것도 괜찮기는 했다.

 

대연병장엔 행군에 참가하는 병력들이 이미 거의 모인 것 같았다.아마도 내가 거의 꼴찌이지 싶었다.자그마한 새에 정신이 팔려 집합시간에  늦어버린 것이다.나는 구보로 그것도 보행로가 아닌 경사지로 된 둔덕을  가로질러 급하게 뛰어내려갔다.선임하사는 '왜 늦었냐'는 눈짓을 보냈지만 힐난조는 아니었다.부대 자체 훈련이고 안전사고 염려가 없는 단순 산악 행군인 탓에 인솔장교나 선임하사들도 긴장할 일이 없기 때문에 약간 늦은 것 가지고 뭐라고 그럴 마음은 안생겼을 것이다.더구나 늘상 마주하고 지낸지가 교육기간 까지 합치면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으니.

 

행군에 참여하는 병력은  늘상 그렇듯이 대략 5~60명 정도 규모로 보였다.부대는 교육기간 동안만 부대 병력으로 잡히는  교육생들 때문에 편제가  연대 규모였지  부대에 상주하며  복무하는 기간사병은 중대 규모도 채 안되었다.어림잡아 100여명 안팍.이 인원들 중에 부대 유지에 필요한 최소 필수 인원은 행군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래도 명색은 부대원 전체가 움직이는 행사라  행군이 있는 날은 장교,선임하사들이 인솔을 책임졌다.장교와 하사관들은 대부분 각 과를 책임지는 필수 인원들이었기에 행군엔 최소 인원만 참가하는 것이 최대 인원이 참가해야 하는 병들과 다른 점이었다.

 

행군 참가자들의 표정은 한결 같이 밝고 여유로워 보였다.신병 시절 훈련소에서 훈련 받을 때의 긴장된 모습은 전혀 ?아볼 수 없었다.후방 비전투 부대에서의 상례적인 훈련이라서 긴장할 이유가 없어서이기도 그랬을테지만 모처럼만의  합법적인 부대  이탈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덤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면 인솔장교의 묵인아래 산성 막걸리 한잔하는 군률 위반도 허용이 되었으니.

 

행군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병사들은 거의가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제대할 때가 점점 가까워 옴에 따라 나보다 군생활을 많이 한 고참병들이 적어져 있을 뿐 후임병들 대부분이 1년 이상을 같은 부대에서 오며 가며 안면이 생긴 병사들이었다.그 중엔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학생대대로 오기전 까지  본부중대 내무반에서 같이생활을 한 병사들도 꽤 되었다.각과에서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병사들이라 불참하는 인원이 많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1/3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그렇다고 반가울 일은 없었다.마지못해 의무 복무를 하는 사이에 인간적인 정이 오가는 교유는 거의 불가능했다.거기다 하사관 신분인 나는 병들과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었다.병들은 하사관이 될 수 없었다.최고 계급이 하사 바로 밑 병장이고 그것으로 끝이었다.그러니 하사들과는 원천적으로 거리감이 있었다.그것은 하사관들이 장교들에게 느끼는 거리감과도 같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절대 올라갈 수없는 계급.인간들이 자기 영역안엔 아무나 들어 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벽이었다.어느 누구도 나서서 깰 수 없는  벽. 다른게 있다면 하사의 경우 병과 같은 단기 복무이던 직업 군인의 길을 택한 장기 복무이던 병들과 같이 내무반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행군에 참여하러 나온 병사들 중에는 나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는 몇명도 눈에 뜨였다. 정확히는 네명.특별한 인연이래봤자 좋은 쪽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여서 서로 얼굴 보기가 좀 민망했지만 그렇다고 서로 피하고 그럴 일은 아니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해 질 일도 아니었다.제대해서 부대 울타리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싫으나 좋으나 한 울타리 안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지낼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이중 두명은 계급으론 나보다 낮은 병장,상병이지만 군 입대가 빨라 제대 특명을 받아 놓고 제대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병사들이었고 다른 두명은 나보다 최소 1년 이상 입대가 늦은 상병  한명,일병 한명이었다.

 

이 네명중에 일병 계급의 졸병은  내 군생활 중  나한테 유일하게 빳다를 맞은 지독하게 재수없는 병사였다.아무리 졸병이라도 거의 무심하게 '고생들 해서 안됐다' 는 마음으로 대하는  내가 이 병사를 때린 이유는 '이 병사가 자기보다 후임병들을 손댄다'고 하는 소문을 우연히 들어서였다. 고참병도 아니고 군생활 겨우 1년 남짓한 병사가 자기보다 후임병들을 손까지  댄다고 하는 말을 듣고 화가 나사 불러다 '다들 같이 힘들게 고생하는건데 서로 보듬어주지는 못할 망정 왜 손을 대'라며 때린 것인데 이 사건 때문에  '나도 화나면 무섭다'는 소문이 퍼져 본의 아니게 졸병들이 나를 두려워 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어 버린 적이 있다.나는 전혀 바라지도 않았던 결과.

 

상병 게급장을 달고 있는 병사는 모 유명 소설가를 형으로 뒀다고 소문이 나 있었는데 난 이 병사를 참 싫어했다.싫어했다고 해서 계급을 이용해  괴롭히고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냥 속으로만 싫어했다. 내가 보기엔 이 병사, 유명 소설가인 형 덕분에 후방에 있는 이 부대로 배치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본인은 별로 내세울 것도 없어 보이는 친구가 형 하나 잘 뒀다고 으스대는 분위기를 내는 것이 너무 싫었다.인상 자체도 마음에 안들었고.

그런데 이런 병사들은 부대 내에 의외로 많았다.최후방 그것도 교육부대인 탓에 근무가 편한 곳이라 그런지 이 지역에 연고를 둔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고 거기다 집안이 재력이 있거나 사회에서 행세께나 하는 인사를 아버지로 둔 병사들도 꽤 되었다.학력도 높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대학 재학중 입대한 병사들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이 부대로 전입오기전 복무했던 원주에 있는 포병부대 병사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좋은 집안 배경을  갖고 있는 병사들이었다.원주 포병 부대는 내무반원 거의가 전국 각지에서 배치받아 온 병사들이었고 학력도  고졸 이하가 대부분이였다. 대학 재학중에 입대한 병사는  가물에 콩나듯 드물었다.하긴  대학에 다닐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시절이긴 했다.내가 다녔던 공업고등학교는 졸업후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장기로 하는 조건으로 국비 지원을 해주는 제도까지 있었고 거기에 집안 형편이 가난하고 똑똑한  친구들이 대거 몰리던 때였다. 그러니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부모를 만난 행운을 타고난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원주 포병부대에서 복무하는 병사들과  지금 부대에 복무하고 있는 병사들을 비교하여 내린 결론은  지금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병사들 대부분이 자기 부모나 친인척이 가지고 있는 금력,권력등 배경을 이용하여  복무하기 편한 후방 이 부대로 배치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그렇지 않고서야 복무 사병들이 하나같이 부대가 있는 지역 아니면 인근 지역에 자기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싫어한 이 병사도 그중의 한명일 뿐이었지만  유독 티를 내는 것이 보기 싫어 그랬을 뿐이다.물론 개중엔 나처럼 아무런 사회적 배경이 없이 운이 좋아 복무하게 된 경우도 한두명 있는지는 모르겠다.목공,이발병,취사병등의 경우는 학력은 낮았으나 전문 기능이 있어 배치된 것이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이들도  내가 기억하는 한명을 제외하곤 모두 부대가 있는 지역 아니면 인근 지역에 자기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예외적으로 취사병으로 근무하고 있는 일병 한명이 집이 경기도 안양이고 학력도 국졸이었는데 이 친구도 말을 들어보니 운좋게 후방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자세히 까지는 안들어 보았지만 알음알음 연줄을 동원했다는 뉘앙스는 얼마던지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병무비리 이 정도는 약과였다.

나하고 같이 한방을 쓰며 1년을 입시공부했던 중학교 동창 2명은 아예 군에 입대를 안했다.

이 친구들 나보다 건강한 몸을 갖고 있으면서 집에서 출퇴근하며 1년간 근무하면 군필과 마찬가지 혜택을 받는 방위병 제도를 이용해 현역병에서 빠진 것이다.본인이 없으면 집안 생계 유지가 어려운 자원이나 신체가 허약해 현역 복무가 무리일 것으로 판단되는 자원에 한해 현역 복무를 면제헤 주고 집에서 출퇴근하게 해 준 이 제도를 신체는 건강하면서 군에 가기싫은 자원들이 금력,권력을 이용해 현역입대를 피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것인데 나하고 1년간 한방을 쓴 동창 두명이 그 대열에 합류를 한 것이다.그 결과 신검 판정  2을종이던 나 같이 체력이 시원치 않은 자원이 대신 현역으로 입대하는 일이 생겨났고.

 

방위병으로 군복무 의무를 때운 두 동창은 나만 보면 쥐구멍이라도 ?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2년반이나 폐결핵으로 고생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실상 나도 그 친구들 앞에서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론 '너희 같은 비겁한 놈들 때문에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은연중에 그런 생각이 몸 밖으로 들어 났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 친구들 집안 형편이 금전적으로 전혀 여유롭지가 않았다는 것이다.오히려 그 반대였다.한 친구는 부친이 이북 치과의 면허라서 사실상 무면허 의사였고 또 다른 친구는 부친이 밭뙈기 채소 장사를 하고 모친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미제 물건들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형편이었다.당연히 두 동창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누나, 동생등 형제 자매들은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희생을 해가면서 까지 이 동창들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그런데도 현역 입대를 안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무리해서 큰 돈을 만들었던지' 아니면 '큰돈을 안주고도 현역병 징집을 뺄 수 있었던 것인지' 둘 중 하나일텐데 아마 앞쪽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건 현역병 자원인 두 동창이 현역 입대를 안한 이면에는 '관련 공무원의 부정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라는 심증이 있었고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도 않은 너희들이 이럴진데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부모를 둔 자원들은 오죽하겠냐'는 생각이 절로 들게되어 ' 사회에 눈에 보이지 않는 부정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했었다.''

 

병무행정이 이렇게 비리 투성이로 돌아가는게 눈에 빤이 보이는 상황에서 내가 병무비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이 최후방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행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많은 행운을 만나게 되는데 나는 그 행운 중의 하나를 군 생활 중에 만나게 된 것이었고 그 자세한 사연은 이렇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전, 나는 지금 복무하고 있는  이 부대에서 피교육생 신분으로 하사로 임용되기 위한 24주간의 최종 교육을 끝내고 신삥하사가 되어 원주에 있는 사단 포병대대에 배속되었었다.하사로 임용되면서 처음 배치받은 이 부대가  지금 복무하고 있는 부대와 같은  2군 관할이라는 것이 행운의 시작이었는데 동기생중 1등을 한 친구가 3군 관할  부대에 배치된 것을 제외하곤 다른 동기생들 모두가 전방으로 가게 되어있는 1군으로 배치 발령을 받았었으니 나만 달랑 2군에 배치받은 이것도 대단한 행운이라고 봐야된다.포병부대인 그곳에서 3개월 정도 복무하고 있던 중  화학병과 하사 잉여 자원 차출 명령이 사단사령부를 통해 내려왔고  전투부대인 탓에  별 효용가치가 없는 나의 약한 체력이 큰 몫을 해서 내가 전출을 당한 것이니 전화위복성 행운이라고 봐야된다.

 

제대 특명을 받아 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행군에 참가했을 두 친구는 나한테 섭섭한게 좀 있을 것이다.특히 월남전에 참전하고 왔다고 해서 월남병장이라고 불리운 깁병장이 그런 마음이 더 할 것 같은데 그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취사반장이던 박상병은 서운한 감정 보다는 '뭐 이런 인간이 있어'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 같고..

 

월남 병장 김병장이 나한테 서운한 감정을 갖는 것은 계급으론 한 단계 낮은 상병이나  군생활로 선임인 고참병들한테 내무반에서 몰매를 맞을 때 내가 막아주지 않은 것 때문이다.아니 못막아줬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은데 이 친구는 그 서운함이 원망까지 가서 나에게 화플이를 하려고 까지 했었다. 전입해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고참병들이 중대장의 비호아래 계급으로 최선임인 나를 제치고 내무반을 장악하고 있는 속사정을 알리 없었으니 자기가 몰매를 맞고 있는데 수수방관하고 있는 내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도 계급으론 상급자이니 저항을 하면 내무반 수습 핑계를 대고 내가 거들 수도 있었겠으나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는 것을  무슨 수로 나서서 막는다는 말인가.내무반을 장악하고 있는 고참병들의 분위기상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물론 고참병들과 대립을 하며 내무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다툼을 할 수는 있었다.계급으론 내가 내무반 최선임인 입장이었으니 내가 강단있게 나간다면 고참병들도 흔들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중대장의 비호 아래 있는 고참병들을 내가 단독으로 막아서기엔 힘도 능력도 부족했다.무엇보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정당하게 맡겨진 권력을 행사할 정도 성격은 하사관학교 훈련을 받으면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남하고 다툼을 하여 무엇을 쟁취하기 보다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고 혼자 조용히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원래 성격까지 근본적으로 고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고참병들 뒤에는 중대장이 버티고서 그들을 봐주고 있었다.

 

월남병장 김병장이 저녁 점호가 끝나고 고참병들 한테 몰매를 맞은 이유는  정확히는 잘 모른다.또 다른 월남병장 한명은 아무 탈 없이 잘 지내다 얼마전에 제대해 나갔으니 이 친구는 아마도 고참병들 눈에 거슬리는 무슨 행동을 한게 아닌가 싶기는 한데 그게 '대학을 다니다 왔고 체격이 커서 당당해 보이는 것이 고참병들 눈에 좀 거슬린게 아니었나' 하는 막연한 추측만 될 뿐 구체적인 내막은 전혀 모르겠다.하지만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나한테도 군생활이 자기가 조금 빠르다고 티를 내는 행동을 해서 속으로 '이놈봐라.전입해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건방지게'라고 나도 생각을 했을 정도이니 아마 고참병들에게는 많이 밉보일 짓을 한게 있기는 한  모양이다.

 

고참병들이 군 생활 경력은 자기들 보다 짧으나 계급은 높은 친구들을 구타하는 행위는 하극상에 해당하는 엄청난 범죄여서 공식적으로 문제가 되면 자칫 군법회의에 넘어 갈 수도 있고 최소한 영창에 갈 수 있기 때문에 본인들도 엄청난 모험을 하는 것이다.그런데도 이들이 이런 행위를 할 수있는 것은  군대라는 곳이 계급이 우선인 특수사회이긴 하지만 의무적으로 복무를 하는 병들 사회에서는 계급보단 군 생활 기간이 많은게 우선인게 거의 불문률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때문에 소정 기간 훈련을 받고 병들 최고 계급인 병장보다 한 계급 높은 하사 계급을 달게되는 경우나 월남전 참전을 한 공으로 일찍 병장 진급을 한 친구들은 계급으론 군 경력이 오래된 고참병들보다  선임이긴 하지만 그 대접을 내무반에서는 제대로 받기가 어려웠다.

 

하사들의 경우 전투병과 부대처럼 하사들이 분대장 역할을 제대로 하는 곳이라면 하사 선후배들이 잔뜩 있기 때문에 설사 군경력이 짧은 신임 하사가 전입해 오더라도 고참병들도 어쩌지를  못하지만 선배하사가 거의 없는 비전투 부대에 배치가 되면 십중팔구는 하극상을 당하게 되고 당하면서도 문제삼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그러니 월남 병장의 경우는 하사들보다 사정이 나빴다.하사들은 그 계급을 달기까지 교육훈련이 얼마나 고된가 하는 것이 병들 사회에서도 잘 알려져 있고  병들은 결코 진급이 안되는 계급이어서 일종의 경외감이라도 있게 마련이지만  월남 병장은 단지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진급을 빨리 한 것이어서 진급할 자리가 없어 병장 진급을 못한 상병 고참병들에겐 오히려 반감이 더 생길 일일수도 있었다.그래도 월남전에서 실전에 투입되어 베트공과 실제로 생사를 걸고 싸웠다면 계급으로 낮은 고참병들한테 몰매를 맞는 것에 대해 저항을 할 정도의 배짱은 얼마던지 생겨 있을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맞은 걸 보면 이 김병장은 실전에 투입은 안되고 후방에서 편하게 생활하다 귀국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고참병들이 군생활 경력은 적으나 계급으로 최선임인 나를 배제하고 내무반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대장이 내무반 통제권을 내가 아닌 고참병들 한테 넘겨준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중대장은 내가 전입해 올 당시 내무반장이던 고참 병장이 제대를 하자 처음엔 나에게 내무반 통제권을 주려고 했었다.내무반을 통제하려면 공식적인 지시사항을 내무반원들 한테 전달 할 수가 있어야 되는데 이 권력은 중대장으로 부터 나오게 되어 있었다.그러나 중대장은 두번 정도 나에게 일일 결산회의에 참석하게 하고는 그 뒤론 나를 부르지 않았다.그리곤 군생활 경력으로 내무반 최고참인 상병 계급의 한 병사를 본부중대로 발령을 내서 그 병사에게게 지시사항을 전달케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중대장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몰라 굉장히 당황스러웠었다.그러나 그 이유가 고참병들과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은 것이어서 그런게 아닐까'하는 심증이 굳어지면서 '에이! 나는 감히 못건드리니 그냥 참고 지내자'라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었다. 원래 권력 같은 것에 욕심이 있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어진 직책은 수행할 정도의 담력은 하사관 학교 보병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생겨 있은 터여서 계급에 맞는 일을 해야 할 일이 생길 경우에 그것을 감당할 능력은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능력을 써 볼 기회를 중대장은 내게 주지를 않았다.

 

중대장이 나에게 내무반 통제권을 넘겨주려다 고참병들에게 넘겨준 이유는  추측컨데 고참병들의 로비가 제일 큰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싶다.그렇지 않고서야 나에게 통제권을 넘겨주려다 갑자기 마음을 바꿀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아니 굳이 이유를 들자면 나에게도 취약점이 있기는 했다.

나는 계급으로만 내무반 최선임이었을 뿐 고참병들보다 나은 조건이 하나도 없었다.

우선 군생활 경력이 나보다 많은 고참병들이 아직도 내무반원 중 1/3은 되어서 이들을 순리적으로 장악하는데는 애로가 있을 수 있었다.다음이 나의 외형적 신체 조건 그리고 성격이었는데 나는 또래 남자들에 비해 체격이 작은 편에 속했다.중고등학교 시절 항상 앞자리 차지할 정도로 반에서 제일 작은 편에 속했으니 외모에서 저절로 풍기게 되는 위압감 같은 것은 전혀 있을리 없었다.거기다 성격적으로도 내성,소극적이고 유약한 편이어서 중대장이 보기에 내무반 통제권을 가지는 내무반장 자리를 맡기기가 마뜩치 않을 수도 있었다. 계급으로 최선임이라는 것 외엔 무엇하나 자기 마음에 드는 면이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중대장이 내무반 통제권을 나를 배제하고 고참병들에게 넘겨준 결정적 이유는 내무반 권력을 나에게 뺏기기 싫은 고참병들의 로비가 먹혀 들어간 때문이라 생각된다.중대장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계급이 최우선인 군에서 계급을 무시하고 계급이 두단계나 낮은 상병 고참병들한테 내무반 통제권을 넘겨 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에 대해서. 그러다 내린 결론이 '명분보단 실리를 우선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었을까? '

이런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이 중대장이 전역을 하고 후임 중대장이 와서도 똑같은 행태를 되풀이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후임 중대장도 처음엔 내무반 통제권을 나에게 넘겨 주려고 했다가 금방 바꾸어 버렸었다.

당시 전역을 앞두고 있던 전임 중대장은 고참병들의 로비를 받게되자 중대 최선임이라는 조건외엔 아무것도 갖춘게 없는 나와 고참병들을 사이에 놓고 득실을 따져 본 것이 분명하다. 고참병들은 부대가 있는 지역에 연고를 둔 나름대로 잘살고 있는 집안의 자식들이었고 나는 계급이 선임이고 명문대학을 다니다 왔다는 것 외엔 연고지도 아니고 집안조차  별볼 일 없으니 모든 조건이 나보다 좋은  고참병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것이다.결정적으로  부대가 최후방에 있는 교육부대라 전방에 있는  전투부대처럼 분대장 역할을 하는 하사가 꼭 필요할 일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중대장 입장에서는 '내무반 통제권을 나에게 안넘겨 준다고 해서 부대 운영에 지장을 줄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약삭빠른 계산이 얼마던지 가능했을 것이다.부대 소속 기간병들 모두가 교육생들을 지원하는 행정,교육병등이어서 일과 시간에는 각자 자기 몫의 일이 계급에 관계없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군 편제상 분대장 역할을 하게 되어있는 하사라는 계급이 굳이 필요한 부대 운영 시스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무반 통제 권력을 상병 고참병들한테 뺏기고 난 뒤에 연이어 전입해 오는 후배 하사들에게 미안해서 부대 담장을 몰래 넘어가면서 까지 중대장 집에 ?아가 '하사들도 많으니 내무반 통제권을 하사들에게 넘겨 달라'고 해봤지만 중대장은 들어주지 않은 상태로 전역을 해버렸고 후임 중대장도  똑같은 행동을 한걸 보면 고참병들이 나에게 내무반 통제권을 뺐기기 싫어 중대장들을 상대로 얼마나 로비를 많이 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고참병들은 자기들이 졸병 생활을 할 때 부터 내무반 최고참들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위치에 있던 내 통제 를 받는게 싫고 두려웠을지 모른다.계급은 위지만 자기들보다 어쨌던 군 생활 경력이 적은데다 내가 내무반 통제권을 가지면 하사관학교에서 교육받은대로 원리원칙적으로 내무반 운영을 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을테니까.전역해 나간 중대장이나 후임 중대장이나 고참병들에게 내무반 통제권을 넘겨준 뒤 내 눈치를 조금 보기는 했지만 내가 그들에게 해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선임이란 자격 하나만 가지고 내무반 통제권을 넘겨 달라고  계속 요구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권력은 중대장한테서 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가 권력을 주지 않겠다는데 달리 어쩔 방법은 없었다.더구나 나도 권력에 대해서  원래 욕심이 있는 성격도 아니었는데 단지 계급 때문에 주어지는 당연한 자리라 생각해서 맡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정도였으니까.

 

후배 하사들은 '돈이라도 거둬서 중대장에게 줄 생각이 있느냐'는 나의 의견에 모두 고개를 가로 저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겨우 중학교만 마치고 장기복무를 지원한 처지들이라 적은 봉급을 쪼개어 떳떳지 못한 곳에 쓸 여유도 없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계급이 하사고 직업군인이라곤 하지만  집안 좋고 학력 높은 고참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나 쳐지는  자기들  형편 때문에 지레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또 후배 하사들이야 어차피 선임인 내가  있는 탓에 내무반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으니 내 덕분에 고참병들 눈치를 안봐도 되는 지금 처지가 크게 불만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취사반장 박상병은 내가 군수과에서 주부식 업무를 담당할 때 같이 쌀을 빼내 팔아먹자고 강요한 뱃심좋은 병사다.이 친구 말로는 '제대해 나간 내 전임병하고도 계속 그래왔다'는 것이었다.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나로선 전혀 상상도 못해본 일이기도 했지만 부대 안에 있는 쌀을 도대체 어떻게 팔아먹자는 것인지도 이해가 안갔다.그런데 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있었다.취사장과 주부식 창고가 있는 건물은 부대와 민간 지역을 구분지어 놓은 철조망 울타리에서 불과 10여 미터도 채 안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울타리 바로 밖에는 민가 두채와 빌딩식 건물이 한동이 있었다.빌딩식 건물과 민가 사이에는 좁은 통로 비슷한 공간이 있어 우리 군수과 졸병들을 비롯 사병들이  부대 밖으로 잠시 불법 이탈하여 담배를 사거나 술을 사오는 통로로 이용되었는데  나도 후배 하사들과 중대장집을 집으로 만나러 가기 위해 이용을 한적이 있었다.그 때 부대 철조망 울타리 옆에 바짝 붙어있는 두 집을 보면서   '저 두 집은 어떻게 부대 철조망 울타리 옆에 바짝 붙어있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취사반장 박상병과  내 전임병은 이중 한집의 주인과 결탁을 하여 철조망 틈새로 쌀을 빼내 팔아왔던 모양이었다. 또 이 짓은 아주 오래 전부터 주부식 담당 병사와 취사반장을 담당한 병사들이 대를 이어가며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그도 그럴 것이 민가와 경계에 있는 철조망은 이상하게 누가 드나든 것 같이 틈새가 벌어져 있는 형태였는데 주부식 업무를 담당하기 전엔 빌딩식 건물과 민가 사이에 나 있는 빈공간을 이용해  월담들을 해서 술같은 것을 사오는 것이 묵인되는 것을 봐왔던 터여서 ' 혹 사제 음식 같은 걸 사고 파는 것 아닐까 '정도로 생각을 했지 그리로 쌀이 불법 유출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취사반장 박상병이  '쌀 팔아먹는데 협조해달라'는 요구를 거듭하며  거절하는 나를 졸라댈 때의 태도는 협박은 아니라도 '전임병과는 마음이 맞아 잘해 먹었는데 너는 도대체 왜 그래'하는 일종의 힐난조였다.근 2년을 한 중대에서 지내다 보니 내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더니 나 때문에 용돈 벌이가 끊길 상황이 되니까 태도가 돌변해 버린 것이었다.

'정 협조 안할꺼면 취사장으로 내주는 쌀을 정량 다 내놓으라'라는 말로 내게  압박을 가했고 이에 굴복해 어쩔 수 없이  거들어줘 볼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도저히 못할 짓이었다.사병들이 먹을 쌀을 이리저리 가져가는 인간들 때문에 쌀 재고가 모자랄 수밖에 없어 취사장에 부득이 정량을 내줄수는  없었지만 그 와중에 또 쌀을 빼내 밖에다 팔아먹는 것은 내 성격으론 도저히 못할 일이었다.무엇보다 잘못되어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군교도소로 넘어 갈 수도 있는 중대범죄였다.실제로 수송대 유류 담당 사병과 운전병이 짜고 기름을 빼내 팔아먹다가 헌병들한테 걸려 군 교도소에서 6개월간 썩고 나온 일도 얼마전에 있었다,

 

창고에서 쌀을 빼내던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넌덜머리가 나고 마음이 편치 않다.

취사반장 박상병은 그동안 한두번 해 본 짓이 아니라 그런지  달빛이 없는 그믐 날을 쌀을 빼내는 날로 정해 놓고 있었다.창고에 있는 쌀을 '자기 등에 메게 해달라'고 하고는 '창고 밖에 누가 있는가를 살펴 봐 달라'고 한뒤 익숙하게 창고 뒤에 있는 철조망 울타리 있는 곳으로 갔다.그 사이 나는 시야 가까이 있는 초소의 초병이 우리 쪽을 보는가를 망을 봐야했다.미리 연통이 되어 있었던 것인지 부대 철조망옆 민가에서는 이미 사람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둘은 익숙하게 쌀을 넘겨주고 넘겨 받았다.

둘중  한명은 도둑이었고 다른 한명은 장물아비였으며 나는 도둑의 공범이었다.

 

취사반장 박상병은 쌀을 빼내  판 다음날인가 내게 얼마간의 돈을 쥐어 주었다.마음 편치 못한 떳떳지 못한 돈. 요긴하게 쓰일만큼 큰 돈도 아니었다.없는 것 보다는 나았지만 그저 푼돈.  헌 문학서적 몇권 그리고 부대 담과 맞닿아 있는 빌딩식 건물에 있는  다방에 들러 차 몇번 마시고 나니 없어져 버리는 그 정도의 돈이었다.

 이후 '나는죽어도  못하겠으니 취사장에서 알아서 취사병들 끼리 팔아먹던지 마음대로 하라'고 그러고 더 이상 협조를 안해줬는데 다행이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 근무하는 피교육생 관리 학생대대로 발령이 나서 홀가분하게 빠질 수가 있었다.아니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부대원 전체의 주부식을 총괄 관리하는 자리인 것 만으로도 다른 병사들은 많이 부러워했고 떳떳하지 못한 돈이지만 용돈도 생겼었으니까.

 

제대 특명을 받고 마지막으로 행군을 하려고 나와 멀찌감치 서서 나를 흘깃 쳐다보는 표정이 내가 ' 나는 도저히 못하겠으니 너희 취사병들 끼리 알아서 해먹으라'고 한  말을 듣고 있을 때 표정하고 똑 같이 벌레씹은 표정인것을 보면 이 친구 아직도 '뭐 저런 이상한 인간이 있지'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3개월 정도 주부식 업무를 담당하면서 느낀 경험으론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중 가장 첫번째로 중요한 것인 먹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부대 내외의 많은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이를 처리하는데 최말단인 내 의사는 끼어들 틈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그래서  ' 어느 분야이건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연결되는 자리에 있는 한 본인이 아무리 깨끗하게 하려고 해도 절대 그럴 수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되었었다.

 

주부식은 아침,점심,저녁 이렇게 하루에 3번 창고에서 취사장으로 내주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이 과정에서 쌀을 정량대로 내줄 수는 도저히 없게 구조화 되어 있었고.이유는 간단했다.사병들이 먹게 되어 있는 쌀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가져가는 인간들 때문이었다.누군가하면 크던 작던 보급품 관련 권한이 있는  담당 선임하사,과장 , 취사장 관리 권한이 있는 본부중대  선임하사 ,중대장 ,부대 운영에 직접적 권한이 있는  부부대장 이상 영관급 장교 그리고 부대 전체를 감찰할 권한이 있는 보안부대 담당관등 다양하게 많았다. 이외에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은 못했으나  생활이 넉넉지 않은 하사관급 간부들도 다만 뭐라도 줬으면 하는 눈치가 역력해서 외면하기가 참 어려웠다. 

 

보급품 담당 선임 하사는 군수기지창에서 창고장을 하다가 월남에 갔다 온 양반이었는데 사람은 무척 좋았다.다만 행정 능력이 없어 담당 과장 혼자 선임하사 몫까지 일을 다 해야되는 바람에 엄청 힘들어 하는걸 보았는데 이 양반은 쌀을 수령해오는 날 집 앞에다가 차를 대게 하고는 쌀 한가마니를 내리는 대담성을 보였었다.내가 주부식을 담당한 몇개월 동안 딱 한번 뿐이었지만 범죄라는 의식도 없는 것 같았다.보급품 수령 차에서 쌀을 내리면서 '우얄끼고'하는데 '먹고 살려면 하는 수 없지 않노'라는 말로 들렸고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하사관 봉급이래야 뻔한 때 였으니.그래도 군수기지 사령부에서 창고장을 하고 월남까지 갔다온 터라 생활이 그리 쪼들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물욕이 많은 느낌은 안든 양반이었으니 아마 부자라는 소문에 비해 실속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담당 군수과장은 그런 면에서 비교적 깨끗했다.

유류를 제외한 주부식,피복,장비등을 총괄 책임지는 자리였지만 보급품에 대한 사적 물욕은 전혀 보이지를 않았다.어쩌다 닭고기가 특식으로 나올 때 '몇마리 남겨두라'고 하는 정도였고 뭔지 모르지만 자신의 일만 하루 종일 성실하게 열심으로 했는데 당시  가장 큰 일이 코 앞에 닥친 부대 이동이었을테니 아마 그 계획을 세우느라 그리도 바삐 일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부대장에게 잘보일려고 그랬는지 한번은 나에게 '우하사 ,쌀 한가마니만 부대장 차에 실어 관사로 보내라'고 지시를 한 적이 있었는데 알아서 충성하려고 한 이 행동으로 인해  부대장 한테 칭찬을 듣기는 커녕 엄청 혼났는지 부대장실에 불려 갔다온 뒤론 일체 그런 지시가 없었다.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시무룩해 있던 모습을 보고 추측을 해보자면 만약 장교간에도 구타가 있었다면 쪼인트라도 까였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 담당과장이 한번은 과원 전부를 집으로 초청해서 저녁을 먹인 적이 있는데 소령 승진을 눈 앞에 두고 있던 고참 대위였던  과장은  결혼에 한번 실패를하고 재혼을 한 것이라고 알려졌는데도 부인이 엄청 미인이었다.장교라곤 하지만 급여가 형편없는 때여서 그런지 단간 세방에 살고 있었는데도 미인부인을 그것도 재혼인데도 얻은  것을 보면 장교라는 직업군인 신분이  여자들에게 꽤 매력있는 신랑감 자리였던 것 같다.

 

부대장이 깨끗한 양반이었던데 반해 부부대장인 행정부장은 추했다.

중령 계급이나 되는 사람이 사병들이 먹을 쌀에서 한달에 한번 꼭 한가마씩 가지고 갔다.

대령 승진이 안되고 중령으로 게급 정년이 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영관급 고급 장교가 사병이 먹는 쌀을 가지고 가서 자기 가족들 식량으로 쓴다는 것이 너무도 추잡스러워 보였다.

봉급이 생활급에 훨씬 못미쳤던 하사관들이 그러는건 그래도 조금은 이해가 됐으나  고급장교인 사람이 그러는건 도저히 이해가 안됐고 인간적으로 경멸스럽기까지 했다.

 

사병들이 먹을 쌀을 축내는 또 한 곳은 군내의 권력기관인 보안부대였다.

중사 게급장을 단 놈이  한달에 한번씩 지프차를 몰고 와서 당당하게 한가마씩을 가져갔는데 민간검찰로 치면 수사계장급이라던데 사병들이 먹을 쌀을 매달 가져가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것인지 부대에 가져가 나눠 먹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어찌나 밉고 싫던지..그놈 얼굴은 학생대로 옮겨 온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죽일 놈.

 

이렇게 고정적으로 사병들이 먹어야 할 쌀이 축나는 위에  사병들이 먹을 쌀을 실제로 관리하는 최일선 창고 담당 사병과 취사병들의 손에서 또 매일 조금씩 야금 야금  축나고 있었으니 사병들에게 정량 급식이 될가 없었고 이는 부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아니 부식에서는 더 심했다고 볼 수도 있다.닭 한상자,파 몇단쯤 빼낸다고 급식에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것을 문제 삼을 사람도 없었다.

정량이 안되는 급식을 먹으며 군생활을 하는 병사들 자체도 본인이 급식 관련 업무를 담당할 경우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틀림없으니 으례 그러려니 생각하고 지내기 마련이었다.

 

보리쌀은 처치 곤란이었다.

보리쌀만 왕창 내줬다간 자칫 꽁보리밥이 될 수도 있으니 취사장에 내줄 수도 없었다.그렇다고 딱히 처분할 곳도 없어 임시변통으로 쌓여있는 빈 쌀가마니 속에 남는 보리쌀 가마니를 숨겨 두는 방법으로 보직이 바뀔 때 까지 처리하기는 했지만 후임자는 어떻게 처리를 했을지  새삼 궁금하다.

 

3개월 정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부식 업무를 담당하면서 느낀 것은 "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이용, 소위 말하는 부정이란 떳떳지 못한 짓을 해서 재물을 모으는 행위는 그 양이 적건 크건 간에 배포가 있어야 되겠구나"하는 것이었다..

나 같이 마음 여리고 배포가 적은  성격은 부정을 한다는 자체를 떳떳지 못하게 생각하기에 할 생각을 처음부터 안하기도 하지만 주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않아 적극적으로 할 수도 없었다.얼마간의 푼돈이 생겨 주머니 사정이 좀 좋아졌다고는 하나 마음이 편치 않은 것과 비교하면 그리 즐거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간사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인지 막상 피교육생 내무반장으로 보직이 변경될 때는 아쉬움이 있기는 했다.떳떳한 돈은 아니지만 다만 몇푼이라도 주머니에 있는 것이 없는 것 보단 나았기 때문이다.더구나 기울어진 집안 형편 탓에 집에서는 용돈 한푼 갖다 쓸 수 없는 처지였었으니. 그렇지만  배포있게 부정을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닌 다음에야 마음조려 가면서 챙기게 되는  떳떳지 못한 몇푼의 돈을 탐내는 것보단 차라리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나 같이 부정을 저지르는 행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저지르지도 못하는 성격엔 더 좋은 것 같았다.

 

부대옆 빌딩에 있는 다방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기가 막히게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한명 있었다. 이 아가씨가 내 눈에 뜨인건  순전히 우연이라고 보기엔 미심쩍은 점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한달에 한번 실시되는 민방위 훈련이 계기가 되었었다.

방위 훈련이 실시되는 날이면 우리군수과 소속 병사들은  하던 업무를 중단하고  방독면까지 휴대한 단독군장으로 군수과  뒤 도로 쪽에 있는 부대 안 방공호에서 공습 해제 싸이렌이 울릴 때 까지 긴장하며 대기를 하고 있어야 했는데 이때 다방이 있는 빌딩 부대 쪽에 나있는 창문으로  한눈에 봐도 빼어나게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신기한 표정을 하고서 우리 현역 군인들의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도 예쁜 모습에 "저 아가씨 누구냐?"라고 옆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졸병들에게 물어보니 '그 빌딩에 있는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첫눈에 이 아가씨한테 반해 정기 외출이나 외박이 있는 날이면 꼭 이 다방에 들렀었다.나중에  이름까지  알게 된 이 아가씨를 나는 꽤 좋아했는데 내성적인 성격 탓에 겉으로 표현은 못했고 그녀도 나를 손님 이상의 감정으로 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다만 내가 자기를 좋아해서 다방에 드나든다는 정도는 충분히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미스 조라고 불리운 이 아가씨는 내가 다방에 갈 때 마다 꼭 내 앞자리에 앉아 차를 같이 마셔주곤 했다.그렇지만 그뿐 나에 대해 알고 싶어하거나 자기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하려고 하질 않았다.차를 다 마시고 나면 원래 자기 자리인 카운터로 가거나 다른 손님이 있는 자리로 가서 나에게 하듯 같이 차를 마시곤 했는데 나는 그것이 못내 서운했었다.한번은 너무도 나에게 무심한 그녀에게 자존심이 상해서 '내가 이래봬도 명문대학을 다니다 입대했다'고 성격에도 안맞는 자랑까지 해봤지만 그녀는 무반응이었다.

그런 그녀가 내게 딱 한번  자기 속내를 들어내 보인 적이 있었다.

그날도 오랜만의 외출이 허락된 날이라 외출,외박이 있을 때면  늘상 그랬듯이 그녀가 있는 다방에 들렸는데 그날따라 내 앞에 꽤 오래 앉아 있었다.그러고 있던 중  카운터의 전화벨이 울렸고 가서 전화를 받는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한참을 뭔가를 심각하게 듣기만 하더니 통화를 끝내고 내 앞에 앉아선 느닷없이 '나하고 어디 멀리 도망갈래?' 그러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반갑기 보단 화부터 치밀었었다.그녀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생각해 볼 사이도 없었다.군인 신분인 나에게 도망을 가자는건 탈영을 하라는 이야기인데 그동안 나한테 자기 속내를 한번도 안들어내 보이던 여자가 처음 속내를 들어내 보여 말한  한마디가 '탈영하라'는 뜻의 '어디 멀리 도망갈테냐'라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나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20초반 한참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 몇년을 온갖 힘든 훈련,내무생활을  참고 견뎌가며  군생활을 하는 것은 그러지를 않으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고 같이 멀리 도망을 가자고 그러는  그녀가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나에게 대한 태도로 봐서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차고 넘쳐서 그런 것은 분명 아니었다.통화를 끝내자 마자 나에게 그런 말을 한걸로 봐서는 뭔가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서 한창 고생을 해야하는 20초반 같은  나이 또래의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육체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때이면서 어디 강제로 구속된 생활을 할 일도 없으니  특별한 이유가 없는한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는 그야말로 인생의 황금기인 때이다.그런 그녀가 나에게 '같이 멀리 도망가자'라는 말을 한 것은 그녀가 처해 있는 환경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었지만 '뭔가 헤어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었다. 세상의 흐름 특히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로 군 입대를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녀가 혹시 소설에 나오는 '기둥서방이란 이름의 깡패들한테  얽매어 있는 그런 부류의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들어 갑자기 그녀가 무서워져서 그 이후론 저절로 발길을 끊게 되었다.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내 인생을 망치는 모험을 할 정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런 무모한 열정이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그리고 내 책임하에 부양해야 할 가족들인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내가 제대하기를 목이 빠져라고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외면해선 안되었다.정상적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난 뒤의  삶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떳떳하게 헤쳐 나갈 수 있지만 중범죄에 해당하는 탈영은 스스로의 인생을 망치는 행위 외에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을 터였다.

 

내가 피교육생들을 지도 ,관리하는 학생대대 최선임  내무반장으로 발령이 난 이유는 전임 선임하사와 내무반장들이 피교육생들로 부터 금품을 수수한게 소원수리를 통해 적발이 되어서였다.

부대장이 청렴한 분으로 부대 내에 알려진 것과 관계없이 아래 부하들이 자기 자리에서 주어진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을 저지른 케이스인데 이걸보면 '윗물이 맑아야 아랫 물도 맑다'는 속담은 전혀 안맞는다.

'윗물이 맑아도 아랫 물은 아랫 물대로 흐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로 보면 되는데 실제로 학생대대로 발령나기 전까지 내가 담당했던 주부식 관리업무에서도 부정은 늘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부정은 결국 사람의 문제이지 자리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부대장은 하사인 나 이외에 본부중대에 근무하고 있던 상병 2명,일병 1명을 같이 발령을 냈는데 이 병사들은 군생활 경력이 1년을 겨우 넘긴 터여서 객관적인 자격으론  피교육생 내무반장으로 부적격이었다.그런데도 이들을 발령 낸 이유는 아무래도 '집안이 재력이 있거나 유력인사 자제여서 부정을 저지를 염려가 없는 병사'라는 판단을 한  때문인 것 같았다.부대장은 본인은 청렴한데도 불구하고 아래 부하가 부정을 저지른 것에 얼마나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발령이었는데  자기 휘하의 부하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 상급부대에 알려지면 지휘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부대장 입장에서는 피교육생 지도 능력 보다는 부정을 안저지를 병사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여 부대 최고 지휘관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가를 잘 알 것 같기도 했다.

부대장은  휘하 기간 사병들 인원이 많지 않은 탓에 웬만한 기간사병 인적사항은 거의 알고 있은 것이 틀림없다.그중에 하사들은 또 몇명 되지도 않았으니 나에 대해서는 이미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경우 하사들중 이번에 금품수수로 전보된 하사 다음으로 선임이었는데다가 평소에 부대장이 눈여겨 봤을 요인이 많았다.하사들 중에 학력,학벌이 제일 좋았고 얼마전에 치른 한자 소양 평가에서도 최고점을 받았었기 때문이다.무엇보다도 부정을 저지를  소지가 많은 군수과에 근무할 때의 평이 워낙 좋았던 것을 참작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반면 나와 같이 발령이 난 병사들은 '군 생활 경력이 아닌 부정을 안저지를 것'이라는거에 중점을 두고 선발한 것이었다.세명 모두가 하나같이 집안이 힘깨나 쓴다고 부대 내에 알려진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상병 두명중 한명은  아버지가 모 방송국의 지방 방송국장이었고 다른 한명은  매형이 경찰고위 간부라고 내게 과시를 했었다.부친은 건축 사업을 크게 한다고 했고.일병인 다른 한명은 집이 부대 가까운 곳에서 있어서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부친이 자개농 사업을 제법 크게하고 있었다.

 

이 세명의 병사중에 내가 가장 부러워한 병사는  매형이 경찰고위 간부라고 자랑한 친구였다.다른 두 병사한테는  '태어날 때 부모 잘 만난 행운을 타고 난 것 외에는 나보다 잘 난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당당할 수가 있었으나 이 병사는 내가 시험도 못봐 본 국립S대 재학중에 입대를 한 것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객관적으로 볼 때 나에게 아무것도 뒤질 것이 없는 그런 조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제대와 동시에 복학도 못하고 생업을 찾아 나서야 될지도 모르는 나하고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인 집안 배경 그리고 나은 학벌을 가지고 있었다.그렇다고 기가 죽지는 않았다. 속으로 한없이 부러워는 했으나 어차피 내 인생에 도움이 될 일도 없는 친구에게 기가 죽어봤자 나만 손해보는 일이었으니까.그 병사는 그 병사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나는 내 삶을 살아내면 되는 일이었다.몇달 뒤로 닥아온 제대 후의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내게 주어진 삶의 몫이 그 정도일진대 그것을 비관하고 남을 부러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내게 주어진 삶을 그저 열심히 살아 낼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 병사도 본부중대에 같이 있을 때 고참병들한테 한번 몰매를 맞은 적이 있다. 그 까닭은 아무래도 졸병 주제에  고참병들을 너무 안중에 없어 보이는 행동을 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이 병사는 막강한 집안 배경 덕분인지 이등병을 달고 갓 전입온 졸병 시절부터 부대장실 당번병 보직을 맡아 근무했다.최말단 졸병때 부터 내무반 온갖 궂은 일을 다해야 되는 졸병 노릇을 전혀 안하는 생활을 한 것인데 이것이 고참병들의 눈에는 무지무지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게다가 내가 보기에도 고참병들을 어려워 하는 행동을 전혀 안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좋은 집안에 태어난 덕에 졸병 생활 편하게 하고 고참병도 안중에 없는 행동을 한다'는데 고참병들 의견이 모아져 '한번 혼대주자'고 작당을 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고참병들에게 집단 몰매를 맞은 두명은 똑같이 고참병들의 눈에 거슬린 행동을 한 공통점이 있어 보였는데 고참병들은 자기들보다 군대 생활을 덜한 친구들이 자기들  권위를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 차원에서  이 두명을 시범적으로 몰매를 때린 것이 아닌가 싶다

 

중앙방송국 지역 방송국장을 아버지로 둔 병사를 나는 부러워하기 보다는 경멸을 하는 쪽이었다. 

부모 하나 잘 만난 덕에 아무 노력도 안하고 대충대충 편하게 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좋은 삶의 여건을 만들어 놓고 있는 부모를 만나는 행운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내가 그런 여건을 못 갖춘 부모를 만났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스스로 노력하여 삶을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 좋은 집안 배경을 갖고 있으면 그 배경을 기반으로 하여 나는 하늘도 날아다닐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고 노력을 하며 살 것 같은데 이 친구는 별 볼일 없는 후기 대학을 다니다 입대를 했다.한마디로 본인은 스스로 아무 노력도 안하고  잘나가는 자기 아버지에게 기대어 사는 느낌이 들어보여 그것으로 경멸의 표정을 보내곤 했다.

'병신 새끼.운좋게 부모 잘 만나 태어난 덕분에 편히 잘먹고 지내면서 거들먹거리기는.'뭐 이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뒷받침해 줄 수 있는부모를  만난다는 것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너무나 잘 알기에 경멸하는 마음 한켠엔  한없이 부러운 마음이 자리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열상으로 제일 아래였던 일병 계급의 병사는 부대 근처에 자기 본가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개농 사업을 하고 있어서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 같았다.그런 아버지의 재력이 부대장과 어떤 연줄을 맺어 놓은 것이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피교육생 내무반장으로 발탁이 된 것은 아무튼 본인의 능력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이 병사는  서열이 제일 낮은 졸병인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자기 위치에 맞게 현명하게 처신을 잘해서 이런 병사라면 누구나 수하로 두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집안이 여유가 있는데도 대학에 적을 안둔 상태에서 군 입대를 한 것이 의아했지만 본인이 무슨 사연인지 이야기하기를 꺼려해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었다. 

 

 

행군 참여 인원에 대한 인원 점검이 끝나자 인솔 지휘관은 출발 명령을 내렸다.

하사 이하 사병들은 대오를 갖추고 연병장을 출발하여 부대 뒷산 쪽으로 나 있는 후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러나 훈련병들처럼  군기잡힌 행렬은 아니었다.대오를 이탈만 하지 않았을 뿐 다들 편한 자세로 천천히 움직였다.인솔장교도 각 중대 선임하사 누구도 행군 행렬을  재촉하지 않았다.부대 밖으로 나가면 어차피 흩어질 행렬이었고 낙오없이 집결지에 모였다가 다시 낙오없이 귀대하면 되는 훈련이었다. 부대 귀대 시간인 오후 5시까진 부대 밖으로 나서서는 순간부터 부터 제한적인 자유가 허용된 것이나 다름없었다.행군 대열은 연병장과 군수과 창고 건물 사이로 나있는 부대 안 주도로를 통해 부대 제일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야외교장 쪽으로 움직였다.부대 정문으로 부터  야외 교장까지 연결되어 있는 주 통로는 야외 교장이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심해서 우리 행군 대열은 부대 안에서 이미 산 정상을 향해 등산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렇지만 그리 힘이 드는 정도의 경사는 아니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걷기보단 약간 굽히면 되는 그런 정도 .

부대 후문은 야외교장이 끝나는 부대 맨 끝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후문을  통해 부대 밖으로 나가려면 야외교장을 꼭 거칠 수 밖에 없었다.야외교장엔 개스 실습장.발연기 실습장.제독 트레라 시험장 그리고  화염방사기 사격장이 있는데 우리 행군 대열은 이중에 화염방사기 사격장이 있는 곳의 넓은 개활지를 통해 후문으로 나가게 행군 코스가 예정되어 있었다.  화염방사기 사격장은 화염방사기가 워낙 강력한 화염을 뿜어내기 때문에  사격시 표적 역할을 하면서 화염이 번지는 것을 막아주는  콘크리트 방벽 외엔 아무것도 없게 꽤 넒은 면적을 개활지로 만들어 놓았다.화재 염려에 대한 방비 때문이었는데 때문에  넓은 개활지엔 나무등 큰 식물은 살 수가 없게 늘 제거되었다.화재 염려가 없는  키작은 잡초들만이 겨우 자랄 수가 있었는데 이도 사격 훈련이  있기 전에는 미리 제거를 하는 탓에 사격장 안은 늘 황량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게 아니었다.우리가 화염방사기 사격장에 도착했을 때는 눈앞에 지금까지 전혀 못보던 장관이 펼쳐 있었다.황량하기 그지없던  넓은 사격장 안이 온통 푸른 풀들로 뒤덮여 있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눈이 휘둥그레져 풀들을 쳐다보던 나는 처음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 의문은 곧 풀렸다.부대 이동이 예정되어 있어 얼마전 부터 교육훈련이 중단되어 있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도 그렇지 훈련 중단된지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풀이 무성하게 자랄 수가 있담?"

 나는 자연의 놀라운 복원력에 새삼 놀라며  사격장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화염방사기 사격장을 이동 통로로 이용하여 부대원들이 대규모로 이동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분기에 한번 있는 정례 산악 행군과 1년에 한번 있는 소총 실탄 사격 연습때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후문에 있는 초소에 경비를 서는 병사들이 오가는 통로로 이용될 뿐이었다.

때문에 사격장 개활지에는 초병들이 오며가며 만들어진 가르마처럼 가느다란 길 외에는 길이 없었다.이 길만으로는  오늘처럼 부대원들이 대규모로 움직일 때는 이동이 불가능했다.당연히 길은 아니지만 걷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풀들이 무성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었다.문제될 일은 마무것도 없었다.짧은 기간 동안에 마음껏 자란 풀들이  행군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걸림돌이 된다면 제거하고서라도 지나가야했다.다행이 풀들의 키는 크지 않았고  우리는 군화를 신고 있었다.풀들의  키 높이는 기껏해야 군화 발목을 조금 웃도는 정도였다.따로 제거작업을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밟고 지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얼마간 풀들을  밟으며 걸었을까,갑자기 군화 밑에 뭔가 물컹거리는게 밟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가느다랗게 무슨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뭐지? 이곳에 뭔가 살고 있을리가 없을텐데.설사 쥐 같은 것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발자국 소리에 놀라 벌써 도망가버렸을텐데"

나는 의아한 마음을 품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발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도대체 무엇이 밟힌 것인가 확인을 위해 군화발로 풀섶을 헤쳐보았다.

 

<오!그런데 하느님 맙소사! 거기에는 조금전 학생대대 연병장에서 보았던 것이 틀림없는 작은 새가 내 군화발에  무참히 밟혀 죽어 있었다. 아직 솜털도 채 벗지 못한 모습의 새끼 세마리를 보듬어 안은 모습을 하고 둥지 안에서 함께. > 끝.(201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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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게 된 배경*

 

1974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전 군생활 하던 시절, 산악행군을 간 날이었습니다.위 글에 쓰여 있듯이 화염방사기 사격장을 가로 질러 가다가 풀섶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논 어미 새와 새끼새를 무참히밟아 죽인 적이 있습니다.풀이 제법 자라있는 상태여서 보이지를 않은 때문이었는데 화염방사기 사격장이어서 무엇이던  불에 타버릴 수 있는 특급 위험 지역인  그곳에 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았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됐지만 아무튼 그때의 충격은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타인에 의해 참 허무하게도 무너져버리는구나"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어미새는 혼자 살려면 분명 달아날 수 있었을텐데 새끼 새와 함께 죽음을 같이 한 모습인 것이 더 가슴이 아팠습니다.일개 새 한마리도 새끼에 대한 보호본능으로 자기 목숨까지 희생을 하는 그 모습은 제대후 내가 살아내야 할 힘든 삶도 자칫하면 이처럼 허무하게 무너져버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동시에 했었구요.

그 당시 학생대대에서 피교육생 내무반장을  하면서 다소 여유로운 밤시간을 습작을 한답시고  끄적거릴 때였는데 이 충격을 '허무'라는 제목으로 글로 써보려고 노력했으나 완성시킬 능력 ,시간이 다 안되었었습니다.그로부터 많은 시간을 생존을 위한 직장생활 그리고 퇴직후 그림 공부하는데 보내버리고 우연히 글 쓸 여건이 마련된 작년부터 짬을 내어 잡문이랍시고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40년전 겪었던 가슴 아픈 일을 다시 한번 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미흡하나마 글로 만들어 본 것이 위 결과물입니다.글의 내용이 '허무'라는 주제를 풀어나가는데 어느 정도 부합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군생활 동안 이런저런 많은 일을 참고 겪어가는 과정이 결국은 제대 후의 삶을 떳떳한 자격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인데 그 과정중에 고의는 아니었고 일개 날짐슴이었지만  무고한 생명을 빼았았다는 것이  너무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 아팠고 허무했었습니다.

 

"나는 앞으로의 삶을 떳떳하게 살아가기 위해 힘들게 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고 어미새도 새끼와 함게 살아가기 위해 둥지를 틀고  있었던 것인데 고의는 아니었지만 나는 가해자가 되어 무고한 생명을 빼았았고 그때 느낀 그 허무한 마음"

이것을 표현하려고 한 것인데 잘 되었는가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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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02.28 09:24

    첫댓글 소설이랍시고 한편 써봤는데 한번 읽어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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