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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냐 교회냐, 그것이 중요한가?
Ekklēsia or Church, Does It Matter?
Peter Ditzel
대부분의 영어성경의 신약성서에서, “교회”와 “교회들”이라는 단어는 모두 합쳐 백 번 정도 나온다. KJV성경에서 한 곳(행 19:37)을 제외하고는, 이 모든 경우에서 “교회”라고 번역된 것은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ēsia)의 오역이다. 그렇다. 나는 오역이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에클레시아에 대한 의도적인 오역이다. 이런 오역이 너무 광범위한 것이고 의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에클레시아가 의미하는 바가 정말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에서, 나는 당신에게, “교회”라는 단어의 유래와 그 의미를 알려주려 한다. 또한 에클레시아가 무엇을 뜻하며 역사와 성경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에클레시아라는 말씀을 하실 때 무슨 의미로 하신 것인지, 그리고 왜 에클레시아는 “교회”라는 말로 의도적으로 오역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 모든 것이 중요한지를 검토하겠다.
Church
교회
단어의 기원을 연구하는 어원연구가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의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뀌리아꼬스(kuriakos)에서 온 것임을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이 단어는 형용사로서 그 의미는, 주님께 속한 것이나 어떤 식으로든 주님과 관련되었다는 말이다. 뀌리아꼬스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두 번 나온다. 고린도전서 11:20에 “주의 만찬”에서 “주님의”라는 의미로 번역된다. 그리고 계시록 1:10에서는 “주의 날”에서 “주님의”라는 말로 번역된다.
그러면, “주님의”라는 의미를 가진 이 형용사가 어떻게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의 명사 “교회”가 되었을까? 말은 재미있는 것이다. 말은 시대마다 변화된다. 온라인 어원 사전은 뀌리아꼬스가 기독교 예배의 가정에서 300년 이후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http://www.etymonline.com/index.php?search=church&searchmode=none).
그 날짜를 기억해 두라.
이 시기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대로, 그는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재위기간은 주후 306년에서 337년이다. 이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가정 집에서 모였다. 이것은 로마정부의 진노를 촉발했는데, 그 이유는, 얼 케인즈(Earle E. Cairns)가 ‘수세기의 기독교’(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에서 기록한 것처럼, “사적인 종교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밤에 은밀히 모임을 가졌다. 로마 당국자들에게 이것은 국가의 안위를 해치는 반역을 모의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스도인들의 비밀스런 모임은 또한 도덕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이라는 오해를 받게 했다. 공공연한 소문이 그들에 대해 나돌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근친상간의 죄나, 인육을 먹는 자들, 그리고 자연스럽지 않은 행실을 한다는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다른 종교들은 공개장소에서 모임을 가졌으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을지라도 개인의 집에서 모였다. 그렇게 가정에서 사적으로 모이는 바로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았다. 사람들이 자주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가정에서 모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가정에서 모였으며, 이 선택은 그들로 하여금 박해를 당하게 했다.
그러나 그 때 콘스탄티누스가(리키니우스를 따라)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했다. 기독교에게 관용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콘스탄티누스는 은총을 베풀어 교회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생각은, 예배는 공적으로 드리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이교도의 개념인 사물와 장소의 거룩성을 들여왔다”(조안 테일러, 기독교인들과 성소, Joan E. Taylor, Christians and the Holy Places), 308쪽).
기독교의 예배를 위하여 특별한 건물을 세운 것은 콘스탄티누스적 전환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결국 콘스탄티누스 사후, 데살로니가 칙령에 따라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일치를 이끌었다. 이 칙령은 테오도시우스1세, 그라티안, 발렌티안 2세에 의하여 반포되었다. 그것은 “다마수스의 대신관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들)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는 믿음”이 이런 황제들의 치하에서는 백성들의 공식적인 신앙이 되게 했다.
그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우리는 이 법칙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공교회 기독교인들의 신분”이라는 권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어리석은 광인들이라는 우리의 판단에 근거하여, 우리는 그들에게 불명예스런 이름인 이단자라는 이름을 붙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임에는 교회라는 이름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정죄라는 징벌을 받을 것이고, 둘째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우리 권세자들의 처벌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벌 줄 것이다.” 그래서, 이제 판도가 바뀌었다. 박해를 받던 이들은 이제 핍박자들이 되었다. 어쩌면 판세가 바뀌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교도들은 여전히 이제는 그리스도교라는 새 이름 아래서 활개치고 있거나, 그들 스스로를 공교회(Catholic Christianity)라고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칙령에 사용된 단어 몇 개를 주목해 보자. “비밀 집회”(Conventicles)는 법으로 허용되지 않은 비밀집회다. 이 칙령에서 번역되어온 이 단어의 본래 라틴어는 콘킬리아불라(conciliabula)다. 그것은 영어의 “비밀 집회”와 유사한 의미다. 그러므로, 이 칙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모여온 모임을 불법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칙령을 영어로 번역한 것에도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라틴어로 에클레시아룸(ecclesiarum)으로 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에클레시아의 라틴어 파생어다. 그래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를 수용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라고 부를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다 굴복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레오나르 버뎅(Leonard Verduin)은 이런 글을 썼다: “그렇게 해서, 콘스탄티누스적 변화가 완전히 뒤덮기 전에, 비밀집회를 주관하거나 참석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다”(The Anatomy of A Hybrid, 99). 잘 정리된 문서에 의하면, 제도화된 국가교회에 굴복하지 않은 신실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적으로 그리고 불법적으로 수세기 동안 모임을 가졌다. 이런 비밀 모임에 관하여, 버뎅은 그의 다른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회심자에게 요구되는 것 중의 하나는… 그들이 교회 건물이라고 부르는 돌무더기, 즉, 코물루스 라피둠(cumulus lapidum)에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The Reformers and Their Stepchildren, 167).
이런 주교를 따르는 사람들, 곧 공교회 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공적인 교회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이 건물들을, 내가 지적한 것처럼, 뀌리아꼬스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는 “주님의 것”이란 뜻이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한 가지 생각을 간략하게 표현하는 방식인데, 이 건물들이 주님의 집 또는 뀌리아께 오이끼아(kuriakē oikia)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누스가 이교도의 개념을 계속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건물 그 자체가 거룩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뀌리아꼬스 혹은 교회는 거룩한 건물이 되었다.
계속 나아가기 전에,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고 싶다: 예수님이 세우신 에클레시아는 목수의 아들로서 주님이 지으신 건물이었는가,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이 부르신 사람들이었는가? 수 년 동안, “교회”라는 단어는 다른 의미를 가지며 발전해왔다. 긴 역사를 훑어보기보다는, 나는 매우 신뢰할만한 두 개의 사전을 인용함으로써 이 다른 의미를 보일 것이다. 하나는 미국의 사전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사전이다.
메리암-웹스터 대학생 사전 11판에서는 “교회”(church)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공적인 특히 기독교 예배를 위한 건물
2. 종교단체의 성직자나 공직관료
3. 대문자로, 종교를 가진 신자들의 단체나 조직, a. 전체 기독교인들, b. [교단] <장로교회> c. 회중
4. 공적인 예배(일요일마다 교회에 간다)
5. 성직<교회를 가능한 경력으로 여겼다>
콜린스(Collins) 영어사전에서는 “교회”(church)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공적인 예배, 특히 기독교 예배를 위해 계획된 건물
2. 공공 예배 시간
3. 평신도와 구별되는 성직자
4. (보통 대문자로) 정치적 또는 사회적 영향력으로서의 종교의 제도화된 형태: 교회와 국가의 갈등
5. (보통 대문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총합
6. (보통 대문자로) 특정한 기독교 교단이나 신자들의 모임
7. (보통 대문자로) 기독교
8. (영국에서) 영국 국교회나 이와 유사한 교단의 관습이나 교리
주목할 점은, 이 정의들 중의 많은 수가 건물, 공예배, 성직자, 그리고 제도화된 종교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 중의 어느 것도 성경이 말하는 에클레시아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예수님이 세우신 에클레시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Etymology of Ekklēsia and Use in History
에클레시아의 어원과 역사 속에서의 용례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 116회 나온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그것을 “교회”로 번역했으며 예외는 세 군데뿐이다. 사도행전 19:32와 41에서, “무리”assembly로 번역되었으며, 그것은 데메드리오가 소집한 사람들을 가리킨다(행 19:25 참조). 그리고 39절에서는 “민회” assembly로 번역되었는데, 그 의미는 법률적인 모임이라는 뜻이다.
에클레시아는 합성어다. 첫 부분은 에크(ek)다. 그것은 전치사로서, “밖으로” out of, “밖으로부터” out from, “~로부터” from의 의미다. 두 번째 부분인, 클레시아는 헬라어 단어 칼레오(kaleō)의 파생어다. 칼레오는 동사로서 그 의미는 “부르다” to call는 뜻이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전치사와 동사의 합성어지만, 에클레시아는 그 자체로는 명사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서, 에클레시아는 “밖으로 불러내다” 또는 “밖으로 불러낸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디로부터 또는 어디에서 불러낸 사람들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에서, 에클레시아는 백성 가운데서 민회를 열기 위해 불러모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에클레시아에 대해 설명하기를, 에클레시아는 헬라어로, 소집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로서, 고대 그리스에서, 도시국가에서 시민들의 모임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 뿌리는 호머 시대의 광장에서 유래하는데,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테네 에클레시아는, 가장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인데, 이미 드라코의 시대(주전 621년경)에 기능을 하고 있었다. 솔론이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주전 594년 경), 에클레시아는 18세 이상의 남성 시민들의 모임과 같은 의미를 지녔는데, 그 모임에서는 정치에 대한 최종 조정을 했으며, 공공 법정에서 호소하는 것을 들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아르콘(주요 집정관)의 선출에 참여할 수 있었고, 개인들에게 특별한 권리를 부여하기도 했다.
주전 4, 5세기 아테네에서는, 프리타네이스(prytaneis)라는, 불레(the Boule, 의회)의 위원회가 민회(에클레시아)를 소집하여, 십 년에 네 차례 정례 모임을 가졌고, 특별한 경우에도 모임을 가졌다. 집정관의 확정 외에도, 유사한 과정과 방식과 절차에 대한 논의, 의제의 선정 등을 프리타네이스가 맡았다. 제안은 불레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에클레시아는 새로운 일을 주도할 수 없었다. 모든 구성원의 열린 토론이 있을 후에, 투표가 실시되고, 보통 그것은 거수로 결정했으며, 대부분의 경우는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이런 종류의 모임은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국가에 있었으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까지 그 기능을 계속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치하에서는 그들의 권한이 점차 약해졌다.
(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177746/Ecclesia)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말은, 에클레시아가 단지 모임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훌륭한 시작이지며 “교회”라는 말보다는 낫지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그 의미가 어떤 것에서부터 부르심을 받은 모임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그것은 공동체로부터 소집되거나 부름을 받은 민회였다.
Ekklēsia in the Septuagint
칠십인역에서의 에클레시아
에클레시아는 때때로 칠십인역(셉투아징트, 약어로는 LXX)이라고 부르는 구약성경의 헬라어역의 번역자들에게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에클레시아는 종종 이스라엘 회중이나 모임에 사용되었으며, 다른 종류의 모임에도 사용되었다. 칠십인역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곳은 신명기 9:10인데, 거기서는 다음과 같이 “총회 assembly”로 번역되었다: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기억해야 할 점은,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불러냄을 받았으며 하나님 앞에 소집되고 부름을 받은 총회였다. 에클레시아를 역사적 헬라어에서 사용되는 방식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성경이었던 칠십인역에서처럼, 예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실 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같은 방식으로, 사도행전 7:38에서, 스데반은 에클레시아를 사용할 때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총회를 언급했다.
Ekklēsia in the New Testament
신약성서에서의 에클레시아
신약성경에서 첫 번째로 우리가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발견하는 곳은 마태복음 16:18인데,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나는 이미 이 구절에 나오는 베드로/반석의 측면에 관해 논의한 바 있다(http://www.wordofhisgrace.org/rock.htm).
이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신약성서에서 에클레시아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곳은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곳인데, 주님은 자기 에클레시아를 세우시리라(오이코도메소-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집을 세우다”인데, 물론, 여기서는 영적인 의미다)고 하셨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에클레시아가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어디에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또한 살펴본 바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단어를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민회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칠십인역의 번역자들도 종종 에클레시아를 사용할 때 이집트에서 부르심을 받아 시내산의 하나님 앞에 소집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켰다. 이제, 이런 의미와 병행을 이루는 것이 신약성서에 있는지 살펴보자.
선한 목자와 양의 우리에 관한 예수님의 알레고리(비유)에서(요한복음 10장),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절). “부른다”는 헬라어 깔레오(kaleō)에서 온 말이다. 이 비유 전체를 읽으면, 예수님이 주님의 소유인 유대인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양의 우리에서 불러내어 인도하시는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양을 인도하시는 목자시면서 동시에 양의 우리에 들어가고 나오는 문(the Door)이시라는 점을 주목하자.
양의 우리는 민족적 이스라엘과 그 신앙으로서 다른 양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다. 목자는 그들을 다른 양들과 함께 즉, 다른 민족들과 함께 한 우리에 넣으신다.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함께 주님의 에클레시아가 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민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아들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9). “불러낸다”에서 “부르다”는 깔레오(kaleō)며, 밖으로는 에크(ek)인데, 이 두 단어가 합쳐져서 에클레시아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어두움에서 하나님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갈라디아서 5:13에서, 바울이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도리어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여기서 부름을 받았다고 할 때도 깔레오를 사용한다. 이 구절의 문맥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곳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라는 점인데(예를 들어, 이 장의 1~4절을 참조), 그 구절 자체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우리가 이 속박으로부터 자유나 해방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부르신 이”는 깔레오에서 번역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주목할 점: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율법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것은 또 하나의 속박이었다(갈 4:24). 다른 한 편으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둠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죄로부터,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갈라디아서 2:4, 5:1을 참조하라).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으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자유로운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부름을 받았다(갈 4:26). 달리 말하면,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브리서 12:18~24).
우리가 이것을 읽을 때,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히브리서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인데, 그들은 율법 아래에 있던 유대인을 다루시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틀에서 새 언약의 은혜 아래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틀로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저자가 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며, 그들은 율법을 대표하는 시내산에 이른 것이 아니라,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과 수많은 천사들이 있는 곳에 이른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점은, 그들은 “총회와 장자들의 모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총회 general assembly”와 “모임 church”은 같은 것을 부르는 두 가지의 이름이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다. 그러나 저자는 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요한복음 10장의 비유에서 가르치신 것과 같은 것임을 알기를 원했다.
에클레시아는 더 이상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부름 받은 유대인들의 총회가 아니다. 에클레시아는 이제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자유를 받은 부름 받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총회다. 그러므로, 저자는 에클레시아를 “총회 general assembly”, 즉, 빠네귀레이(panēgurei)라고 부른다. 이것도 역시 두 단어의 합성어다: 빤(pan)은 “전체”를 의미하며, 아고라(agora)는 “모임”이나 “총회”(이 단어는 광장이나 시장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거기서 모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를 뜻하는 말이다. 빠네귀레이는 축제의 모임이나 총회를 의미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그런 축제에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국가적으로 배타적인 모임(옛 언약 아래에 있을 때 하던 식으로)에 온 것이 아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에클레시아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의 모임, 또는 축제의 모임인데, 이는 모든 나라들에서 온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으로서 그들은 어둠과 속박에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자유 가운데 모인 자들이다.
Ekklēsia Not Only Local
지역을 넘어서는 에클레시아
우리가 방금 살펴본 흥미 있고 영감을 주는 성경본문이 우리로 하여금 에클레시아에 대한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주기를 나는 희망한다. 신약성경에서 그것이 기본적으로 사용된 것이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와 빛 가운데서 모인 영적이든 축제적이든 모인 사람들로서 모든 국적을 가진 민족을 포함한다. 예수께서 세우신 에클레시아는 모든 신자들로 구성되며, 그것은 지역에 국한되지 않으며 시대에 갇히지도 않는다. 즉, 모든 신자들로서 모든 지역에서 하나님 앞에 항상 모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에클레시아는 지역적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려는 사실에 불편해 할 필요는 없다. 많은 교단들이 지역교회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교단으로는 랜마크침례교(Landmark Baptists)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 외에, 지역교회만을 가리킬 수 없는 몇 개의 성경본문을 살펴보자: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사”(에베소서 1:22),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하늘의 권세자들과 통치자들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이라. 그에게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엡 3:10, 21),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으니, 그는 몸의 구주시라.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처럼, 아내들도 남편들에게 모든 일에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23~25, 27, 29, 32),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18, 24).
마태복음 16:18에 관하여, 랜마크침례교도들은 보통 다음의 둘 중 하나의 입장을 취한다: 1. 예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또는 2. 예수께서는 예루살렘교회를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첫 번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구체적인 단어 에클레시아가 이 구절에서는 단수로 씌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만약 그것이 옳다면, 예수께서는 하나의 지역교회만을 세우신 셈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께서 하나의 지역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의 지역교회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자명하지 않는가?
예수께서는 시내산에서의 에클레시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칠십인역의 성경말씀을 거의 다 잘 알고 계셨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서 단어의 선택이 특별히 흥미 있다: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시편 89:4~5). 칠십인역에서, “세운다”는 오이꼬도메소(oikodomēsō)이며, “모임”은 에클레시아다.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시 22:25-시 22:22와 히 2:12도 보라). 칠십인역에서, “큰 회중(great congregation)”은 에클레시아 메갈레(ekklēsia megalē)다. 문맥을 읽어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적 말씀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에클레시아 메갈레는 단수다.
나아가, 베드로전서 1:1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편지를 다른 다섯 지역으로 보낸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5에서, 베드로가 기록하기를, “너희도 또한 산 돌처럼, 영적인 집으로 세워지며[오이꼬도메이스쎄-집을 짓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영적인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 “영적인 집”은 단수로 쓰여졌다.
Local Manifestations of the Ekklēsia
에클레시아의 지역적 나타남
에클레시아를 모든 그리스도인 신자를 말하는 본문은 성경에 많이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분명히 일차적인 의미기는 하지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전체 에클레시아의 일부에만 말하는 것으로 사용된 성경본문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 8:1)나, “안디옥에 있는 교회”(행 13:1), 그리고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롬 16:1),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 등등이 있으며, 계시록 2장과 3장에서도 일곱 교회가 나온다.
이제 에클레시아가 가지는 이런 지역적 특성에 대한 구체적인 배경을 주목하자: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롬 16:5), “주 안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리고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도 그리하느니라”(고전 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 문안하라”(골 4:15), “또한 사랑을 받는 압비아와 나의 동료 군인인 아킵보에게, 그리고 그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 문안하라”(빌레몬 1:2). 또한 사도행전 8:3을 주목하자: “사울에 관하여라면, 그는 교회를 잔해하고 각 사람의 집에 들어가 남녀를 잡아 감옥에 넣은 자입니다.” 사울은 각 집에 들어가 에클레시아를 파괴했다. 분명히, 그는 가정들에서 에클레시아를 찾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성경구절 중 어느 것도 에클레시아의 지역적 모임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도시나 가정에 있는 에클레시아의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반드시 모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더 살펴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에클레시아가 하나님 앞에 항상 모인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것을 살펴보았다. 그들 중 어떤 부분이 어느 도시나 지역에 있었으며, 그런 동일한 사람들이 집이나 가족에 있었다(헬라어 오이코스는 집이나 가정을 의미한다). 이제, 고린도전서 11:18에서, 우리는 에클레시아가 좀 다르게 사용된 것을 발견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교회에서 모일 때, 나는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일부 그것을 믿는다.” 여기서 우리는 에클레시아가 실제 모임으로 사용된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모인 에클레시아지만, 때때로 우리는 지역 모임을 갖는다. 분명히, 다른 성경본문도, 예를 들어 사도행전 2:42, 46, 고전 11장과 14장에서,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과 같은 본문은 에클레시아를 모임을 가리키거나 모임을 위한 지침을 말한다.
Translation Instructions
번역 지침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세우시고 신약시대를 통해서 발견되는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몸이며 그들은 어두움과 속박에서 부름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자유와 빛을 누리게 하려고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교회”는 뀌리아꼬스에서 온 것이며, 이는 완전히 다른 헬라어 단어라는 점이다. 뀌리아꼬스가 가리키는 것은 거룩하기에 주님의 것으로 간주되는 별도의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교회”라는 단어로 소급해서 읽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모습으로 친숙하게 연관되어 있는가? 그것은 건물과 공적인 예배, 제도화된 종교, 그리고 제도화된 종교의 성직자들이다. 콘스탄티누스 이후로, 국가가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특정하고 거룩한 공공 건물에서 모였다. 시간이 갈수록, 이 건물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제도와 그 성직자와 자연스럽게 깊이 관련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형태를 가진 단어에서조차, 그 의미는 성경에서 “교회”를 정의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교회”라는 단어가 사용된 언어에서는, 그 단어는 실제로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결코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자국어로 된 초기 성경을 접할 수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께서 세우신 것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주게 되는 불상사가 되었다.
어두움과 속박에서 빛과 자유가 있는 주님의 모임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대신에, 그들은 건물과 제도 그리고 성직자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에서도 동일한 상황인데, 그것은 로마에서 깨어져 나오기 전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직자도 왕도 여기에 어떤 미련도 가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국가교회의 권력을 뒷밭침하고 사람들을 무지와 안일에 가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황홀한 상태는 윌리엄 틴데일이 성경을 영어로 새롭고 비공적인 모습으로 번역하였을 때 깨지고 말았다.
틴데일(Tyndale)은, 에클레시아에 대한 올바른 번역으로 “교회”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회중(congregation)”으로 번역했다. 비록 국왕 헨리8세가 처음으로 틴데일의 번역을 불법으로 금지한 것은 그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였지만, 틴데일의 번역본이 대부분 위대한 성경임을 그는 나중에 시인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여왕 메리의 치하에서 박해를 받으면서, 영국의 많은 개신교 학자들은 제네바로 갔으며, 거기서 제네바 성경을 출판했다. 흥미있는 것은, 제네바라는 교회-국가 상황 가운데서 출판되었기에 그랬는지, 제네바 성경은 에클레시아를 “교회”로 바꾸어 번역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1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제네바성경의 거슬리는 부분에 칼빈주의적 여백노트를 만들었고, 다른 번역본을 만들게 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앵글로-가톨릭 주교성경(the Anglo-Catholic Bishop's Bible)이다. 이 성경은,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에클레시아를 “교회”로 번역했으며, 다만 마태복음 16:18에서는 “회중(congregation)”을 사용했다(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6세가 영국의 국왕 제임스1세가 되었을 때, 그는 영국 국교회의 수장도 되었다(국왕 헨리8세 이후로 영국의 모든 군주는 그렇게 해 왔다). 제임스가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종교개혁이 유럽의 신생 국가교회에서 일어난 것과 아울러, 영국에서 더 순수한 교회를 원하는 사람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가톨릭의 영향을 그렇게 많이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을 즉, 스코틀랜드에 있는 장로교인들 중의 몇 사람들과 청교도들,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 그리고 영국에 있는 다른 비순응주의자들(non-conformists)을 골치거리로 여겼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의 국교회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혼합이었음에도, 제임스는 가톨릭에 대한 애정이 없었으며, 특히 영국의 가톨릭 그룹에 의해서 모의되다 실패로 끝난 암살 시도인 화약음모사건(the Gunpowder Plot)이 발각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의 반응은 성경에 대한 다른 번역본 아래 있는 교회를 통일하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더 개신교적인 성경과 주교의 성경 사이에서 타협하려는 것이었다.
1604년에 열린 햄프턴 궁정회의(the Hampton Court Conference)에서, 새로운 성경이 제안된 곳이기도 했는데, 왕은 속임수를 쓰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음을 나타냈다. 그의 논평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우리는 정부가 교회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인정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주교라는 말을 부르며 사용하는 것을 승인합니다. ‘주교가 없으면 왕도 없다’는 격언처럼 말입니다… 나는 본질과 의식에 있어서 하나의 교리, 하나의 치리, 하나의 신앙을 가질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스코틀랜드식 장로정치를 추구한다면, 군주를 하나님과 마귀와 같게 여긴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찾아와 나와 나의 공의회를 비난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여러분 [청교도] 무리라 다 말하고자 하는 바라면, 나는 그들로 하여금 따르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들을 나라에서 쫓아내거나 더 심한 일도 할 것입니다.”
그 결과 국왕과 리처드 뱅크로프트, 영국의 주교(나중에 대주교)가 번역자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제안했다. 그 규칙들 중에는 주교 성경의 본문이 번역가들의 일차적인 가이드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만약 주교성경이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되면, 번역가들은 다른 번역본을 참조할 수 있었다. 즉, 틴데일 성경, 카버다일 성경(the Coverdale Bible), 매튜 성경, 대성경(the Great Bible), 그리고 제네바성경이 그것이다.
다른 규칙은, “교회에서 사용하던 옛 용어들은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어, 교회라는 단어는 회중이나 다른 것으로 번역하지 말아야 한다”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교회”라는 말은 에클레시아에 대한 오역일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 교회를 따르게 하려는 곳으로 잘못 끌고 가려는 의도에서 고의적으로 오역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부름 받은 회중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발전시키려는 그 동안의 생각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Why This Is Important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이 모든 것이 그저 작은 문제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는 실수를 우리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복음 6:63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영은 살리는 것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네가 너희에게 하는 미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시인했다(68절).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게 들린다. 계시록 22:19은 이렇게 말씀한다: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수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 9:26), 그리고,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신실하고자 하는가 아닌가? 다음을 주목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2:23)
우리가 성경에 의도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바꾼다면, 우리가 다른 단어와 바꾸든 아니든, 우리는 그 단어를 바꾸는 것이다. 의미는 중요하다. 예를 들면, 많은 언어에서, 에클레시아는 단순히 음역한다. 라틴어에서 에클레시아(ekklēsia)는 에클레시아(ecclesia)다. 스페인어에서, 에클레시아 (ekklēsia)는 이글레시아(iglesia)다. 프랑스어에서는 에글리즈(église)다. 그러나,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단어들의 의미는 더 이상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는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가 아니다. 이렇게 음역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건물이나 그것을 소유하는 조직, 또는 그 예배를 주관하고 권한을 가진 성직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 경우들에서, 비록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형태적으로는 보존된다 해도, 그 본래 의미는 상실했으며, 그러므로 잘못 인도한다. 그 의미는 잊혀져 버렸다.
결국 그 단어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보존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성령의 뜻이었다. 영어에서 (뀌리아꼬스의 파생어를 사용하는 독일어나 다른 언어들과 같이), “교회(church)”는 에클레시아를 완전히 오해하게 하는 번역이다. “교회(Church)”는 본래 거룩하게 구별된 건물을 의미했으며, 그래서, 주님의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새로운 언약에는 완전히 낯선 개념이다. 새 언약 아래서는 거룩한 장소란 없다(요 4:21, 23, 행 7:48~49). “교회”는 결국 에클레시아라는 신약성서의 의미로부터 훨씬 지나친 것으로서, 거기에는 직임을 가진 사제(성직자라고 부르는 개념인데, 이것 역시 새 언약에는 낯선 것이다)와 그들이 형성하는 교단이나 조직을 포함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비교적 최근의 역사에서 어떤 사람들이 “교회”라는 단어 속에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추가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너무 많은 개념을 담고 있어서, 이것이 에클레시아를 의미하게 하려는 노력은 실제로 희망이 없어 보인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어쨌든 희망이 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결국, “교회”라는 말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사람들의 마음에 너무 깊게 각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바꿀 수 있겠는가? 그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만약 주님이 원하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면, 우리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전에는 몰랐던 에클레시아에 대한 이 글이 의미하는 바를 믿는다면, 이 글은 헛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영어성경을 읽으면서, 최소한 당신의 마음에 “교회”라는 말을 “부름 받은 회중”이라고 바꾸어 읽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내가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이 성경적인 단어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계속해서 당신이 교회에 대하여 갖고 있는 생각을 바꿀 것이고 계속해서 성경에 나오는 다른 많은 교리들을 바꾸어 갈 것이다. 당신은 영어 성경 중에 에클레시아를 “회중assembly”으로 번역한 성경을 갖고 싶을 수도 있다. 이 글의 끝에 그런 성경 몇 개를 제시해 두었다. 어쩌면 당신은 성경 헬라어를 배우려는 무모한 도전을 시도할 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결국 우리의 수가 충분히 많아져 거대 출판사들이 에클레시아에 대한 올바른 번역을 가진 성경을 출판할지?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에클레시아만이 심하게 오역된 유일한 단어라는 말은 아니다. 다른 것도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다음의 글에 그것을 말하겠다. 당신이 할 수 잇는 것은 기도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아니다, 나는 그것이 희망 없는 목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변치 않는다.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마가복음 13:31.
다음의 성경은 에클레시아를 “회중, 총회 assembly”로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 제시된 성경 목록은 그것을 내가 추천하는 것으로 여기지는 말아달라. 이 성경들에 대한 온라인 설명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을 아래에 연결시켜 놓았다. http://www.wordofhisgrace.org/ekklesia3.htm
l Analytical-Literal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 Third Edition
l Apostolic Bible Polyglot
l KJ3 Literal Translation New Testament
l Modern Young's Literal Translation New Testament
l A Non-Ecclesiastical New Testament
l Tyndale's New Testament
l Young's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