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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삼곡사~석굴암터~보토현~형제봉(462.7m)~청담샘~일선사~잊혀진 절터~대성문~(회귀)~영취사~정릉 절터 1, 2, 3, 4~정릉버스 종점]18년 8월 11일
* 구간 :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삼곡사~석굴암터~보토현~형제봉(462.7m)~청담샘~일선사~잊혀진 절터~대성문~(회귀)~영취사~정릉 절터 1, 2, 3, 4~정릉버스 종점
* 일시 : 2018년 8월 11일(토)
* 모임장소 및 시각 :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 입구 오전 9시 30분
* 날 씨 : 맑음(최고 영상 36도 최저 영상 27도)
* 동반자 : 홀로산행
* 산행거리 : 8.5km
* 산행지 도착시각 :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 입구 오전 9시 30분
* 산행후 하산시각 :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정릉버스종점 오후 3시
* 산행시간 : 약 5시간 30분(식사 및 사진촬영시간 포함)
여름 내내 영상 35도를 넘는 폭염과 열대야, 가뭄이 계속되고 있으며, 한반도 주변을 에워싼 고기압이 태풍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올해 여름 발생한 태풍 12개 모두가 한반도를 빗겨갔습니다.
기상청 중기예보에 따르면 앞으로도 35도 안팎의 폭염과 가뭄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기상청은 우리나라는 현재 제주·남부는 이미 아열대기후로 올해 수준 폭염이 일상화 될것이며, 100년간 1.4도 오른 한반도가 금세기말엔 4.7도 상승전망하여 폭염일수도 10일에서 35일로 지구촌 날씨 양극화, 가속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또한 여름은 더운만큼 겨울 역시 추워져, 폭염, 재난지정해 관리해야 하며, 이상기후 취약계층 고려한 영향예보도 6월부터 시범운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지구의 급격한 이상 기후 및 환경 변화는 우리 인간이 자초한 것이기에 앞으로의 지구 미래가 더욱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한편 저는 무더위에 계속 켜대는 에어콘 때문에 몸이 이상하여 한여름 대자연 바람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이에 예전 6~90년대에 정깊은 이모님들께서 사셔 수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정릉이 그립기도 하여 폭염속 북한산을 오릅니다.
역시 북한산을 오르니 청명한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예전 친지들과의 산행, 정릉 이모님 가족들과 함께 한 봄맞이 겸 빨래터를 찾은 계곡에서 즐거웠던 추억들이 떠오르며, 100년만에 찾아왔다는 폭염도 멀리 사라지게 합니다.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35]북한산 형제봉능선 ~ 정릉길
600년 풍수논쟁 중심지 형제봉(462.7m)에서 NLL을 보다
오랜 장마로 마음도 비에 젖은 날, 잠시 비 그치고 구름만 낮게 깔렸기에 첫사랑 만나러 가는 남정네처럼 가슴 두근거리며 배낭을 멘다. 경복궁역 3번 출구를 나와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 마시며 국민대방향 버스를 기다린다. 1020번 버스는 자문 밖(우리 어려서는 이렇게 불렀다. 자하문 밖)을 지나 지금은 고급 주택지가 된 평창동을 지나간다. 이 곳 개울가에 그득했던 능금나무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한입 깨물면 입보다 눈이 먼저 시어서 실눈이 되게 했던 추억의 열매 능금. 조지서(造紙署) 장인들의 후예가 남아 장판지를 만드는 집들이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개울가 동네는 이제 마음속의 풍경으로 남았다.
버스가 북악터널을 지나 국민대 맞은편에 닿는다. 길을 건너 대학 정문에서 북악터널 방향으로 되돌아가면 공영주차장이 있다. 오늘의 코스는 이곳 주차장을 지나 잠시 나아가면 북악터널 앞 100m쯤 되는 위치에서 출발이다. 청학사, 약수암, 삼곡사 굿당, 여래사를 알리는 안내판을 만나는 곳이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간 곳에서 길을 왼쪽으로 꺾어 언덕길로 오른다. 지금은 정릉에서 평창동으로 가는 길이 북악터널로 연결되지만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이 고갯길로 넘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고갯길 이름이 보토현(補土峴)이었다.
이 고갯길을 잠시 오르면 삼곡사 굿당을 만난다. 몇 십 년 전까지는 일반 사찰(寺刹)이었다 하는데 이제는 무속인들의 굿당으로 바뀌었다. 잠시 들러 보자. 굿당 뒤 바위에는 범을 타고 앉은 북한산 산신도(山神圖), 칠성도(七星圖), 독성도(獨聖圖)가 채색으로 그려져 있고 150여 년 전 이 절에 시주했던 양주 조정섭(趙定燮) 진사의 소박한 발원문이 음각되어 있다.(졸고 ‘이야기가 있는 길 20’ 참조) 지금은 무속에 관심 있는 이들만 찾아보는 곳이지만 언젠가는 민속자료로 가치를 인정받을 유산들이다.
정릉∼평창동 고갯길 ‘보토현’의 추억 삼곡사를 나와 보토현을 오른다. 초입에는 예전 군사보호지역 때 설치했던 철조망이 제거되지 않았고 거기에 무시무시하게 써 놓았던 출입금지 표지판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잠시 후 정비된 길이 나타나면서 깔끔하게 설치한 화장실도 만나고 성북구에서 설치한 북악하늘길 안내판과 함께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도 세워져 있다. 형제봉 1,575m, 하늘교 920m. 북악하늘 길은 옛 보토현 길을 이용해 길을 연결한 것이다.
오르는 길은 둥근 나무 계단으로 다듬어 놓아 오르기 편하다. 누군가 바위에 써 놓은 당굴샘, 등선대, 석굴암이란 글씨를 만난다. 아직도 남아 있는 철 펜스 안에는 ‘애림’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愛林인가 보다. 아 언제 적 구호였던가? 60년, 70년대 구호였으리라. 다가가 보니 다 지워진 페인트 글씨가 ‘나무를 사랑합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 이런 발버둥거림이 오늘날 우리 산을 푸르게 하였었구나. 식목일이 오면 공부 하루 쉬고 선생님이 나누어 주신 묘목을 들고 학교 가까운 산에 심었던 그런 까마득히 잊혀졌던 일들…
잠시 뒤 조그만 절터를 만난다. 석굴암(石窟庵)터이다. 아마도 그리 머지않은 때에 세워졌다가 공비 김신조 사건 이후 폐사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지역이 1968년 1월 그날 31명 공비 중 일부가 탈출로로 택했던 김신조 루트였기 때문이다. 절터에는 눈여겨보아야 할 세 가지 흔적이 있다.
첫째는 바위에 새긴 작은 마애불이다. 솜씨 없는 동네 아저씨가 망치로 돌을 다듬어 모신 것 같은 민불(民佛)인데 손에는 여의주(如意珠)처럼 보이는 약함을 들고 계시다.
또 하나 보아야 할 것은 바위에 뚫려 있는 작은 네모 구멍이다. 이 절에 인연 맺었을 누군가의 사리(舍利: 주검을 다비하고 수습한 구슬같은 고형물)를 모신 사리공(舍利孔)이다. 물욕 많은 누군가가 마개를 열고 사리함을 가져갔나 보다. 사리공만 덩그마니 열려 있다.
마지막으로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석굴암이란 절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굴이 하나 있는데 마치 멧돼지가 나올 것 같다. 그 어둠 속에 불을 비추면 벽면 끝에 벽화가 남아 있다. 불상은 아니고 신장(神將)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 빈 절터를 지키다 지치셨는가, 많이 퇴락했다.
이윽고 고갯마루에 닿는다. 보토현은 장의동(藏義洞:지금의 평창동, 세검정 초등학교 자리에 신라시대 절 장의사가 있었기에 붙은 지명)과 사을한리(沙乙閑里: 지금의 정릉)를 잇는 고개였다. 이 고개는 조선이 한양천도 하면서부터 중요하게 여겼던 고개였다. 풍수(風水)로 볼 때 북한산의 기운이 형제봉과 보토현을 거쳐 한양으로 이어지니 사람으로 치면 목(項)에 해당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보토현으로 사람들이 다녀 고개가 훼손되니 대안을 세워야 했다. 연산군 때 조치사항을 보자.
1503년(연산군 9년) 11월에는 이 길을 통행금지시켰다. “사을한리(沙乙閑里)에서 무계동(武溪洞)까지의 길과 장의동(藏義洞)에서 사을한리까지의 길에 사람들 통행을 금하라.”(自沙乙閑里至武溪洞路及自藏義洞至沙乙閑里路, 禁人通行). 무계동은 무계정사가 있던 지금의 창의문 밖 부암동이다. 과연 연산군답게 백성은 염두에 두지 않는 일처리 방식이었다. 한편 1773년(영조 49년) 구선행이 올린 상소문 기록도 있다.
1968년 김신조 탈출로에 있는 ‘석굴암’ “형제봉 아래(보토현)는 오랫동안 나뭇군 길로 통하여 모래와 흙이 흘러내려서 언덕이 점점 허물어지게 되었으니, 그 외면(外面)에 새로이 흙을 보충하여 떼를 입히고 나무를 심어서 곡성(曲城) 밑까지 연접하게 하고 이어서 산책(山柵)을 만든다면, 높이 솟은 절벽이 되니 누가 감히 쉽게 오르겠습니까? (至於兄弟峰以下, 則久通樵路, 以致沙土流下, 崖岸漸圯, 從其外面, 添補新土, 被莎植木, 接連於曲城下, 仍成山柵, 則斗絶懸崖, 誰敢容易攀登?) 통행금지보다는 흙을 보충하고 떼를 입히고 나무를 심자는 제안이다. 같은 문제를 대하는 시각에도 이런 차이가 있었다.
보토현 마루에 서 있는 이정표에는 형제봉 1215m를 알리고 있다. 이제부터 능선길이다. 잠시 후 북한산 둘레길과 교차한다. 평창동에서 정릉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이곳으로 지나가는 것이다. 둘레길 안내판에 친절하게 쓰여 있는 지혜의 글이 재미있다. ‘나는 광고지를 읽지 않는다. 갖고 싶은 것들로 내 모든 시간을 소모할 테니까 Franz kafka’. 아 이 분은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아예 눈감는 것으로 답을 찾았구나.
북한산 기운이 굽이치는 수도 서울의 목(項) 길은 서서히 바윗길로 바뀐다. 위험구간은 없으나 아기자기한 암릉을 지나가는 길이 재미있다. 그 옛날 여학생 손이라도 자연스레 잡아주고 싶었던 날 왔던 길이다. 큼지막한 바위에 누군가가 은석바위라고 써 놓았다. 잠시 후 오른쪽 숲속에 조그만 절이 보인다. 오래 된 절은 아닌데 고즈넉하다.
이 능선길을 지나다가 목마르면 들려 가는 곳이다. 절 이름도 달리 붙여 놓지 않아 알기 어려운데 대흥사다. 여러 날 전 스님은 출타하셨는지 절 마당은 고요하고 낙숫물에 젖은 흰 고무신이 절을 지키고 있다. 산 쪽 방향으로 계단이 이어져 있어 궁금해 올라가 본다. 산신각은 없고 정성드리는 바위뿐이다. 내려오는 길 바위에 어느 애타는 영혼이 발원문을 적어 놓았다. 山神靈任 合意同心 祝願成(산신령님 합의동심 축원성: 산신령님 뜻 합하고 마음 모으니 소원 이루어 주소서). 기도하는 대상은 달라도 이 땅에 사는 영혼들은 못 이룬 일들이 너무도 많은가 보다. 시원한 샘물 한 잔 마시고 돌아 나온다. 형제봉까지는 700m 남았다.
능선길에는 만일에 대비해 119 위치표지목이 서 있다. 이곳 고도는 해발 422m, 급할 때 연락할 공원사무소는 02-909-0497이라고 친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윽고 형제봉 중 아래쪽 아우봉을 오른다. 바위채송화가 수줍게 꽃을 피웠다. 구름 속 아우봉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시원스레 트인다. 아쉬운 것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보현봉이 제 모습을 감춘 채 구름 사이에서 언 듯 고개를 내밀 뿐이다. 북악능선에 있는 팔각정도 희미하게 출몰한다. 조선시절 이 길 형제봉능선은 중요한 능선이었다. 지금도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북악산 너머로 비죽이 서울을 내려다보는 봉우리가 보인다. 보현봉(普賢峰)이다.
삼각산 정기(精氣)가 인수봉, 백운대, 망경봉에서 일어난 후 주능선을 타고 내려 와 다시 한 번 솟구친 곳이 보현봉이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내달리면 문수봉, 가사봉을 지나 한 줄기는 의상봉 능선을 이루고 서쪽으로 달린 한 줄기는 비봉능선을 형성한 후 한강까지 나지막한 산줄기를 만들며 달린다. 그러나 조선의 왕실이나 지도층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산줄기는 보현봉에서 남으로 벋어내려 형제봉능선, 보토현, 구준봉(狗蹲峰)을 이루는 서울의 목줄기와 여기에서 이어져 서울을 품에 감싸는 내사산(內四山: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타락산-낙산)이었다. 태조의 한양천도 때부터 이 산줄기를 살폈으며 경복궁을 백악산 아래 자리잡은 후에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세종 15년(1433년) 음력 7월에는 경복궁터가 명당이냐 아니냐로 한 여름을 달구었다. 문제의 발단은 풍수사 최양선이었다. 보현봉에서 형제봉능선을 타고 내려온 정맥(正脈)은 서쪽으로 달려 백악산(북악산)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달려 승문원(承文院)자리로 곧바로 이어진다는 주장이었다. 승문원자리는 당시 북촌 양덕방으로 지금의 계동, 원서동 지역이다. 이 줄기는 북악산 동쪽 성벽을 따라 내려가다가 창덕궁 종묘를 자리하게 한 응봉 줄기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 왕실과 지도층의 최대 관심 지역 논란이 결론 없이 계속되자 세종은 영의정 황희 정승에게 영(令)을 내린다. 직접 산에 올라 보고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70 노구의 황희 정승은 하연, 정인지 등 5명과 함께 이틀 만에 보현봉과 백악산에 올라 산줄기를 살핀다. 그래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세종이 직접 백악산에 올라 살폈다. 당신도 딱 잘라 답을 내기 어려웠다. 다시 영을 내린다. 지리서(풍수책)을 연구해 결론을 내라는 것이었다. 그때 황희 등 학자와 전문가들이 읽고 내린 결론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의룡경(疑龍經), 금낭경(錦囊經), 감룡경(撼龍經), 호순신(胡舜臣의 지리신법)이었다.
그 결론을 보자. 답은 경복궁이 정맥(正脈)이라는 것이다. 요즈음도 때때로 이 문제를 끌어내어 조선이 경복궁을 정궁(正宮)으로 삼았기에 망했다는 이야기를 즐기는 술사(術士)들이 있다.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세종이 직접 백악산 올라 보현봉 지맥 살펴 “경복궁이 앉은 자리는 보현봉에서 부터 내려와서 두 번이나 성봉(풍수적으로 빼어난 봉우리)를 일으키고 종횡으로 솟고 낮추다가 백악(북악)에 이르러 특별히 성봉을 이루어 자리잡으니, 보현봉과 더불어 물에는 물로 응하고 돌에는 돌로 응하니, 자식이 어미를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목멱이 남쪽에 있어서 주객이 서로 응하고 있으니, 이는 곧 백악의 정맥됨이 분명하옵니다.(景福宮坐地, 則自普賢峯而降, 再起星峰, 縱橫起伏, 至白岳特作星峯而住, 與普賢峯坎以坎應, 石以石應, 子不離母, 而木覓在丙方, 主客相應, 是則白嶽之爲正脈明矣)” 사관(史官)은 이 문제의 발단을, 문제를 일으켜 승진의 계제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두 사람의 실명을 소문이라며 거론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런 사람들은 있었다. 요즈음 NLL문제로 대한민국의 한 여름이 간다.
형제봉을 지나면서 600년 전 풍수논쟁이 떠오른다. 이제 앞 쪽 형님봉을 지나 내려오면 정릉 방향과 갈라지는 삼거리에 닿는다. 대성문 1.9km 영불사 0.8km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평탄한 능선길로 직진한다. 이윽고 평창동에서 올라오는 삼거리에 닿는다. 잠시 수고를 마다않고 평창동 방향으로 내려간다. 10분 남짓 내려가면 오른쪽 샛길로 청담샘 가는 길이 갈라진다. 그 안쪽 막다른 길에 청담샘이 있다. 이곳에는 정교하게 남아 있는 축대가 있다. 옛 절터이다. 이곳에 있던 절 이름이 청담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은평뉴타운에서 발견된 기와에 신라적 화엄십찰 청담사 명문이 나왔으니 그 청담사는 아니다. 절터 동쪽으로는 퇴락한 옛 돌층계가 보인다. 보현굴 지나 보현봉으로 이어지던 길이다. 이제는 출입금지로 막혀 있다. 아쉽지만 온 길을 되짚어 삼거리로 돌아간다. 일선사 전 250m 되는 지점이다.
잠시 올라 왼쪽 길 안 일선사에 들린다. 안내판에 일선사 연혁이 적혀 있다.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했고, 고려 때 탄현선사가 중창하고, 무학대사, 함허득통도 거쳐 갔다 한다. 근년에는 고은 시인이 환속하기 전 이곳에서 수행했는데 그때 자신의 법명 일초(一超)와 도선(道詵)국사의 법명에서 한 자씩 뽑아 일선사(一詵寺)라 했다 한다. 지금은 한자가 禪으로 바뀌었다. 창건 당시에는 이곳으로부터 300m 서쪽 보현봉 아래에 보현사로 창건되었다 한다. 지금은 휴식년으로 방문할 수 없는 곳이지만 보현봉이 열려 있을 때는 절터에서 점심을 먹곤 했던 장소였다. 다시 길이 열리면 가보고 싶다. 일선사도 바로 옆에 있는 보현굴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이곳은 보현(普賢)을 떠나서는 무언가가 부족한 곳이다. 지금 보현굴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민초들 솜씨인 북한산 산신과 칠성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믿음을 달리하는 이들에 의해 모두 훼손되었다. 소중한 민속자료를 잃은 것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보현봉과 문수봉의 기운이 이곳에 내려앉은 것인가. 비구니스님들이 다듬어 놓은 도량은 정갈하다.
일선사를 나와 대성문을 향해 오른다. 약 700m 남은 길이다. 나무로 다듬은 층계가 나타나는데 그 오른 쪽 평탄지가 절터이다. 절터로 내려서면 무너진 축대와 깨진 기와편이 밟힌다. 기록에 남지 않았으니 이름도 잊혔다.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제 구름 속에 갇힌 대성문(大城門)으로 오른다. 북한산성 축성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성능스님의 북한지(北漢誌)에는 大成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성 문 가운데서는 가장 큰 문이다. 아마도 형제봉 보토현을 통해 도성과 연결되는 문이어서 크게 지은 듯하다. 문의 홍예(虹霓)가 아름다운데 성돌에는 이 성돌을 쌓은 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石手邊首 金善云(석수변수 김선운)과 禁營監造牌將 張泰興(금영 감조패장 장태흥)이다. 석수의 우두머리 김선운과 금위영 패장(장교) 장태흥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다. 그 곁에는 근래의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도 개발세발 써 놓았고 6.25전쟁 중에 어느 되지 못한 군인이 마구 총질한 흔적도 선명히 남아 있다. 조선 정조 9년(1785년) 북한산성 안찰어사 신기가 올린 보고서에는 그 당시 대성문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문수봉 오른쪽에 문수봉의 암문이 있는데, 지금은 대남문(大南門)이 되었으며, 문선(門扇)의 대접철(大楪鐵)은 탈락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대남문 오른쪽은 보현봉이요, 보현봉 아래에 대성문(大城門)이 있는데 경진년에 영구히 폐쇄(閉鎖)한 뒤부터 문루(門樓)와 처마가 퇴락하였습니다.” 이렇게 퇴락했던 대성문이 우리 시대에 다시 번듯해졌음은 기쁜 일이다. 대성문을 돌아 다시 일선사 앞으로 내려온다. 정릉 방향 갈림길에는 영취사 0.5km, 정릉탐방지원센터 2.2km를 알리고 있다. 영취사로 내려간다.
문화유산 가득한 정릉은 옛 절터골짜기 절 마당에는 고졸한 5층 석탑이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건립한 석탑인데 전문석수가 만든 작품은 아니다. 서울시 문화재 자료 40호라고 내력을 기록해 놓았다. 정갈하게 정돈된 절 분위기가 길손을 편하게 한다. 높은 층계를 오르면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분위기가 편한 절이니 지나는 길 살펴보고 갈 일이다. 내려가는 길은 정릉 방향이다. 잠시 후 영취샘을 지나고 새로 다듬어 놓은 길에는 기와편들이 흩어져 있다. 아마도 이 길 가까이에 잊혀진 절터가 있을 것이다. 곧 약수터 갈림길을 지나면서 삼봉사 200m를 알리는 갈림길을 만난다. 개울을 끼고 양편으로 두 개의 절터가 있다. 이름은 잊혀지고 기와편과 옛 축대의 흔적만 남았다. 119안내목이 서 있는데 08-02번이다.
다시 하산길로 내려온다. 돌무더기와 선덕교를 지나면 또 하나 돌무더기가 나타나는데 잠시 후 화풍정(和風亭) 샘물을 만난다. 여기에서 50여m 아래 우측 쉼터는 또 하나의 절터다. 축대도 기와편도 보기 어렵다. 개울가로 내려가면 비로소 기와편들을 볼 수 있다. 절터의 흔적마저 잊혀진 절터인 셈이다. 그런데 절터는 이곳뿐만이 아니다. 다시 50여m 아래 좌측에 공터 휴게공간이 있는데 그 입구에는 세월에 묻혀 이끼를 가득 키우는 닳고 닳은 돌절구가 절터를 지키고 있다. 빗물이 담겨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정릉 골짜기는 절터골이었다. 기록도 없고 이름도 잊혀진 여러 절터를 만나면서 이곳들이 절터였음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선배들의 손길 발길이 스민 자리는 시간을 넘은 그리움이 있는 곳이니까. 시원하게 떨어지는 청수폭포를 보며 우리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 1020 버스 환승 ~ 국민대 하차 ·지하철 3호선 홍제역 1번 출구 ~ 유진상가 돌아 153 버스 환승 ~ 국민대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 ~ 171 버스 환승 ~ 국민대 하차 ·
지하철 4호선 길음역 3번 출구 ~ 1117외 다수 버스 환승 ~ 국민대 하차 ·우이동/삼양동 방향에서 1166 버스 ~ 국민대 하차
* 걷기코스 국민대 ~ 삼곡사 ~ 석굴암터 ~ 보토현 ~ 형제봉 ~ 청담샘 ~ 일선사 ~ 잊혀진 절터~ 대성문 ~ (회귀) ~ 영취사 ~ 정릉 절터 1, 2, 3, 4 ~ 정릉종점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
cnbnews 제337-338호 박현준⁄ 2013.08.05 14:25:22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1140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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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폭염으로 무더운날씨에 오랜만에 즐거운 산행하셔네요....
더운날씨에 몸 조심 하세요.....
심소장님! 안녕하십니까?
정말 한참만에 폭염속 북한산에 올랐습니다.
넘 더웠지만 무사히 내려왔습니다.
조만간 뵙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