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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전도단체나 교회들이 이 4영리를 많이 이용해 전도를 하고 있다.
필자도 대학시절에 이 전도지를 들고 캠퍼스를 거닐던적이 있었다.
하지만 분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지 잘못되고 왜 그러한지를 알아보자.
<4영리 부분 발췌>
제1원리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2원리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제3원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은 그를 통하여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제4원리 우리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초청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길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며,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그 분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그리스도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지적으로 동의한다든가, 감정적인 경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행위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 그림 두개 나온 후(가운데 의자에 십자가 또는 '나'가 표시되어 있는 그림)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영접하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당신은 바로 이 자리에서 기도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중심에 들어오시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입으로 하는 말보다는 중심의 태도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기도가 당신의 마음에 드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약속하신 대로 당신 안에 들어오실 것입니다.
...(중간 생략)...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중간 생략)...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심을 항상 감사하십시오. (히브리서 13장 5절) 영접한 순간부터 살아계신 그분은 당신 안에 거하시며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속이시지 않습니다.
...(후반부 생략)...
오랜만에 사영리를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 사영리(C.C.C.) 또는 브릿지(네비게이토)를 들고 캠퍼스를 누비며 노방전도를 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네요. 사영리 전체를 옮겨오기에는 분량이 많아, 간략하게 중요한 부분만 발췌를 해 왔습니다.
제대로된 분석을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여러가지 논의해야할 것들이 더 많겠지만, 제 입장에서 볼 때, 몇 가지 문제가 되는 점 등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답변을 해 보겠습니다.
사영리나 브릿지 등 많이 사용되는 복음 전도 방식에 대해서 문제점을 생각해 볼 때는, 크게 두 가지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제시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올바르고 충분한가. 둘째, 해당 복음 전도지 또는 복음 전도 방식이 실제로 전도시 사용되는 '맥락'이 올바르고 충분한가.
1. 사영리가 제시하는 복음의 내용에 대하여
1) 사영리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가 설명되지 않고 있다.(또는 매우 부족하게 설명되어 있다.)
- 복음 전도의 기초는 십자가의 죄용서가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인격적이신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적 맥락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우리 나라와 같은 동양에 비해서 비교적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르게 알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설명이 없이 제1원리에서부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에 대한 놀라운 계획이 있다"라고 제시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하나님의 계획이란 것에 대해 '자의적으로' 즉 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가 아닌 자신의 생각 속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생각 속에 있는 사랑, 자신의 생각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문제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개념과 방식의 사랑과 풍성함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특히 불신자의 생각 속에 있는 개념으로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올바르게 가르쳐 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창조 교리'입니다.
2) 사영리에는 '인간의 타락과 죄'에 대해 매우 빈약하고 오해받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참된 주인이자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 하나님께 '반역'하여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같이 맹렬한 진노'를 받아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된 인간의 처지에 대한 진리인 인간의 타락과 죄에 대한 진리가 바르게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영리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시는데, 죄라는 것 때문에 그 좋은 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빈약한 복음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처지는 이 보다 훨씬 심각하고 절망적이고 끔찍한 결과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3) 사영리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길이 매우 빈약하게 그리고 잘못 소개되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사영리가 바르게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지에 대해 매우 빈약하거나 오해받기 쉬운 전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왜 정말 그리스도여야 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깨닫기에 너무 빈약한 설명입니다.
- 특히, 빈약하거나 오해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가 아니라 '잘못 소개되고 있다'고 한 것은, 믿음 그리고 영접으로 인한 구원 방법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접 기도를 따라하는 것(진심으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영접 기도하는 순간 '진심'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해서, 영접 기도와 구원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4) 영접 기도에 대하여
- 영접 기도는 사영리와 브릿지, 전도 집회 등을 통해 많이 소개되고 있는 소위 '예수 믿는 방법', '기독교인이 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영접 기도는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지 못합니다.
-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흐름 속에 있었던 세 분파를 언급해야 합니다. 1)칼빈주의(개혁주의) 2)알미니안주의 3)펠라기우스주의
(1)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이 '믿음'이란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실 자를 먼저 택하시고 그 사람을 '중생'(거듭남)케 하신 후에, 새 사람이 되면 '하나님을 참되게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먼저 나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결과이자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세요'라고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지만, 인간에게 스스로 '그 믿음을 만들어 내게' 만드는 것이 복음 전도가 아닙니다. 이 내용은 알미니안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를 비교해 보면 좀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2) 알미니안주의는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믿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 받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복음 전도자는 복음 전도의 대상을 향해 여러가지 '인간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 전도 집회에서 격렬한 음악을 사용한다든지, 믿을 사람은 손을 들고 일어나라고 한다든지, 천주교에서 종교적으로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한다든지...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결단'이 곧 믿음인 것처럼 '결단의 표시'를 요구합니다. 영접 기도는 이와 같은 알미니안주의의 구원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영접 기도'라는 형식을 사용해서 사람에게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바른 자세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요청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복음의 내용이 바르고 충분하게 전해질 때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로서만 참되게 인간이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복음 전도자가 '믿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위적인 수단을 사용해서 복음 전도 대상의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을 '불러일으키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복음 전도자요 부흥사인, '찰스 피니'와 '빌리 그레함'이 이와 같은 인위적인 수단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현대적인 복음 전도 방식은 불신자에게 그 문턱을 낮추고 그 의지와 감정을 어떻게든 끌어올려 예수를 '믿게 만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이단은 아니지만, 참된 믿음과 복음을 빈약하고 오해받기 쉽게 소개함으로써 불신자와 신자가 참된 신앙을 분별하지 못하고 매우 약한 신앙을 갖게 만드는 약점이 있습니다.
(3) 펠라기우스주의는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조엘 오스틴 류의 복음 전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믿음'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형통 복음 또는 번영 신학이라 불리는 이와 같은 복음이 아닌 복음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전달되고 있는 현실이 있습니다.
(4)따라서, 우리가 참되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마땅히 전해져야할 복음의 내용이 가감없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감없이'라는 말은 '바르고 충분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올바르지만 부족한 것', '올바르지 않은 것'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사영리는 복음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복음의 내용이 충분하지 않'기에 복음을 오해하게 만들거나 바르게 전달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특히, 영접 기도를 따라함으로써(진심으로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바르게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심으로' 신앙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나 효과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 신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5) 참된 믿음에 대하여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 조차도 근본적으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중생과 믿음이 함께 일어날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반드시 중생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내가 예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참되게 믿었다면, 내가 참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가 믿은 이후의 나의 내면 세계와 외적 세계의 변화를 통해 '검증'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를 믿고 참되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영접 기도를 따라한다거나 전도 집회에서 손을 들고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것으로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내가 참되게 예수를 믿었는지 아닌지에 대해 바르게 검증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거나 오해하게 만듭니다. 참된 믿음은 그 열매(이것도 성경이 제시하는 열매여야지, 인간적인 생각에 의한 열매여서는 안됩니다.)로 검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겠다고 결단할 때의 결단의 '방식'이 그 기준이나 근거가 아닌 것입니다.
2. 사영리류의 복음 전도 방식의 실제적 맥락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 사영리류의 복음 전도 방식의 신학적 기초이자, 그 제시되는 복음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실제 사용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사영리를 들고 전도할 때, 우리는 5분에서 10분 사이에 매우 빈약하고 오해받기 쉬운 방식으로 복음이 전해짐으로 상대방에게 '믿음'을 요청하게 됩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이 사영리에서 제시되는 복음을 듣고 '영접 기도'를 따라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참되게 복음을 알고 참된 믿음이 생긴 것일까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아니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지혜는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매우 빈약하고 부족한 복음 전도를 통해서도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여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음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그것을 올바르고 충분하게 전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알미니주의적 신학에 기초한 사영리류의 복음 전도 방식은 아닐 것입니다.
복음은 5분에서 10분만에 간략하게 전해질 수 있는 '마술 램프의 주문'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신자라도 평생을 이 복음의 깊이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또 죽을 때가지 날마다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이 복음의 깊이이고 넓이인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복음의 내용을 소개한다고 할 때에도 반드시 빠지지 말아야 하는 진리의 뼈대들이 있습니다. 사영리류의 복음 전도는 노방 전도와 같은 매우 짧은 시간에 복음을 '마찰 없이' 전달하기 위해 복음에서 상대방이 '거리낄만한' 내용들을 최대한 축소시켜 '듣기 좋은 메시지'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축소시켜 놓았습니다. 또한, 이런 사영리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할 때에도 하나님의 진노나 인간의 '죄인됨' 등에 대해서는 상당히 순화되고 축소된 말들로 '거리끼지 않도록' 전해집니다.
언급하셨던 것처럼, (제가 이 분을 충분히 다 아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폴 워셔 목사님의 설교도, 개혁주의적인 '믿음'의 맥락을 따르는 칼빈이나 조나단 에드워즈, 로이드 존스 등의 흐름을 따라 설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축소되고 가벼워지며 순화된 '복음'을 전하고 있는 현대 교회를 질타하는 것입니다.
3. 사영리를 그래도 사용해야 하는가?
- 이 질문에는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 가능하면 사영리 등의 방법이 아닌 복음의 진리를 바르고 충분하게 공부하고 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도를 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래도 사영리를 사용해야 한다면, 사영리가 말해주지 않고 있는 복음의 내용들을 충분히 덧붙여 설명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영접 기도는 사용하지 말기를 권합니다. (물론, 영접 기도를 사용한다고 해서,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4. 그 밖에
- 최근에 기독교 사회운동권에서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회심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선한 의도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또한 회심 이나 구원의 맥락을 올바르게 살려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사영리에 대해 질문하신 것이니 이 정도로만 답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젠가 때가 되면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올바른 복음과 복음 전도를 알고자 한다면, 어거스틴-칼빈-에드워즈-로이드 존스/프란시스 쉐퍼 등(또는 이들과 같은 흐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읽으시는 것이 좋겠고, 현대에 유행하는 책자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 많아 분별력을 갖추기 전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구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라서, 충분히 이해가 안되거나 추가적인 설명이 더 필요한 점이 있으면,
더 질문하셔도 좋겠습니다. 물론 반론도 좋습니다.
[출처] 4영리, 사영리 전도방법에 대한 비판과 고찰|작성자 개혁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