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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인이 먼 고장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사랑하는 아기를 하인에게 맡겼다. 주인은 옷가지와 장난감 등을 많이 주면서 아기를 잘 보살피고 옷을 깨끗이 갈아입힐 것을 당부했다. 얼마 후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하인은 말했다. “주인님, 여기 아기 옷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깨끗하고 닳은 곳 없이 잘 보존돼 있습니다. 아기 장난감도 그대로 잘 있습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아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회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고,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목회의 핵심은 목회 활동이라는 ‘옷’에 둘러싸여 있다. 주인의 아기는 옷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아기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한다.
자기 구원인가, 성도 구원인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신학대학원 학생들에게 입학 동기를 물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교회에서 배우는 성경 지식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체계적인 성경 지식을 얻기 위함이거나, 혹은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기본적으로 목회를 의사나 변호사와 같이 하나의 ‘전문직’(profession)으로 전제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성경은 육법전서나 해부학 서적과 같고, 이를 이해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신학 교육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일종의 전문가가 되어 의대나 법대 출신들이 병원이나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듯이 교회를 운영하고, 클라이언트를 맞이하여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말이다.
목회가 전문 직종의 하나일까?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평신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아야 하고, 설교를 작성해 전달해야 하며, 기도회를 뜨겁게 인도해야 하고, 신앙적 질문을 하면 옳은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대학 교육 이후 특별 훈련을 받아야 하고 특수 관습과 윤리를 지켜야 하며, 개인의 능력에 따라 성공이 좌우되고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목회를 전문직의 일종으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 목회가 여타 전문 직종과 다른 점은, 목사는 의사나 변호사와 달리 하는 일이 자신과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이다. 질병에 걸린 의사가 진료를 하더라도 그 진료가 객관적으로 옳다면 좋은 의사이다. 뒤로 부정한 짓을 하면서도 법정에서 이기게만 한다면 좋은 변호사이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렇지 않다. 설교의 내용과 인격이 다르다면, 결코 좋은 목회자가 아니다. 성도들은 설교를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삶을 본받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설교자의 설교한 내용을 지키고 그의 삶을 보지 않으면 된다고?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만일 그런 목회자가 설교를 잘한다면 성도들은 오히려 말과 삶을 분리시키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고 말씀하신 것을 핑계 삼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 본문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기 위한 일종의 풍자(sarcasm)로서 가슴을 치며 탄식해야 할 말씀이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위로로 삼을 말씀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장(長)이고 목회자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작은 목자이고 성도들은 양떼라고 한다. ‘목사’(牧師)라는 말 자체가 바로 이런 도식을 전제로 한다. 즉 목사직은 성도를 위해 봉사하는 직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목사는 목자이기 전에 한 마리 양이다.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 목자는 목회자가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목자이신 예수님뿐이다. 나 자신이 양떼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섬기는 게 아니라, 먼저 예수님이 길 잃은 양인 나를 위해 섬기셨고 중보 기도하고 계신다. 이 사실을 아는 목사는 자신의 영혼을 먼저 생각한다. 그 후에 그 사랑에 감격해 성도들을 돌보는 것이다. 목회의 제일 목적은 ‘양떼’가 아닌 자신이다.
자신의 영혼에 우선 순위를 둘 때, 그것이 성도들을 올바로 돌보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성도들이 상처를 입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목회자들 사이의 다툼이고, 그 다툼의 깊은 곳에 명예욕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지금까지 만난 대다수의 목사들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었다(전도사 포함).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볼 시간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괴롭고도 긴 여정이기 때문에 성도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이를 회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목사에게 자신을 돌아보도록 충고해 줄 사람이 있는가? 장로가 목사에게 충고하면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고 크게 낙심하거나 적대시하기 때문에 무서워서 말을 못한다. 목사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있는가? 목사의 건강과 능력과 가정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는 많아도, 감히 목사의 명예욕이 없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드물다.
목사의 곁에서 점검해 줘야 할 사람은 바로 사모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모들은 결혼할 때 이미 총각 전도사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인 줄로 믿고 있다. 목회에 성공(?)해서 큰 교회의 목사가 되면 자기 남편에게 능력이 많은 줄 알고,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의롭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줄 안다(전화 통화에서 자기 남편을 부르는 호칭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도 ‘우리 목사님 안 계시는데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자신을 통제할 기제가 없는 목사와 사모가 명예와 이익을 위해 다툴 때, 그러면서 모두 성도와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포장할 때 교회는 가장 큰 상처를 받는다. 교회가 평안히 부흥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목회자가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다.
목사는 어떻게 자신을 돌봐야 하는가? 우선 기도 시간을 분석해 보자. 필자는 목사가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며 기도하는 시간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보다 더 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진실함을 위해, 명예욕과 물욕과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다. 목사만 잘 하면 교회는 평안하다. 설교의 대상도 일차적으로 자신이어야 한다.
도대체 설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법률 조항 다루듯이 분석하고 해석할 수는 없다. 자신이 말씀을 ‘쪼개기’ 전에,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찔러 쪼개고 자신을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던 중에 이를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죄인을 구원하시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감사와 감격에 넘쳐 몇 마디 하는 것이 진짜 설교다. 자신이 먼저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설교는 모두 가짜다.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자격을 갖고, 주 중에 책 몇 권 읽고 남의 설교집을 대충 버무려서 천성적인 말솜씨로 청산유수처럼 늘어놓는 설교는, 청중의 귀만 즐겁게 하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일 뿐이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그 결과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기를 갈구하는 설교가 그립다.
사람 중심인가, 교회 중심인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마 12:7).
목회의 목적은 교회의 부흥보다 한 사람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다. 교회의 부흥과 성도 한 사람이 바로 서는 것, 이 두 가지는 결코 모순 개념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개념이다. 성도가 모여 교회를 이룬 것이고, 교회가 부흥하면 성도 한 사람의 영혼이 잘 된다. 개인으로서 성도, 집단으로서 교회 중에 어느 하나를 배제한 채 다른 하나를 강조하면 안 된다.
공동체 정신을 무시하고 성도 한 사람의 이익만을 소중히 여길 때, 공동체가 무너지고 결국 개인의 영적 유익도 보호받지 못한다. 공동체를 소중히 여긴다는 미명 아래 개인을 무시하는 것도 그 공동체의 정점에 있는 사람(교회의 경우 목회자)의 세속적인 이익에 봉사함을 의미한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성도의 영적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된다. 그와 같이, 교회를 책임지는 목회자가 성도 개인의 영적 유익을 얼마나 생각하느냐가 교회의 건전성을 재는 척도이다. 가장 나쁜 경우는, 성도가 자신의 (세속적) 이익을 위해 교회 사랑하는 일을 멈추고, 목회자는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성도를 한 사람의 실존으로 대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대학과 신학교 그리고 유학을 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목사가 할 일은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말씀을 준비해서 잘 전하는 일인 줄 알았다. 그래서 신학교 시절이나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도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가 무엇이며 또 이를 어떻게 자신과 사회와 교회에 적용시킬까 하는 문제로 씨름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깜짝 놀랐다. 기독교 서점에 교회의 성장과 관련된 책들이 수십 종 번역돼 나와 있는 것이었다. ‘교회 성장학’’급성장하는 세계 10대 교회’, ‘교회 부흥의 비결’, ‘교회 성장의 메가 트렌드’ 등이 그것이다. 이런 선정적 제목을 붙인 책들이 목사들의 서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교회 성장 세미나를 찾아다니는 목회자들의 모습은 목자 없는 양들의 유리 방황하는 그 자체다. 교통 수단이 급속도로 발달해 성도들의 이동이 용이해지고, 신도시 건설로 이주가 일상화된 사회적 현상 때문에 급성장하는 교회들이 많았던 시대적 환경을 생각할 수 있다. 혹은 전통적 교회에서 느끼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대중 매체의 인도에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대중의 천박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니면 미국에서 도입된 경영 기법이 모든 사회 조직을 지배하는데,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혹은 약삭 빠른) 목사가 재빨리 이를 교회 경영에 도입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런 경향은 10여 년이 지나면서도 수그러들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제자 훈련, 열린 예배, 알파 코스, 대각성 전도 집회, 자연적 교회 성장(NCD), 셀그룹, 셀목회, G12, 멘토링 등 이름과 양상을 달리하면서 지속되고 있다. 물론 모두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고, 성령님께서 특별히 지혜를 주셔서 이런 방법을 고안해 낸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일정 부분 교회에도 경영 마인드와 인적 자원 관리 기술이 도입돼야 하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또 이런 방법을 개발하고 열심히 시행해 나가는 목회자들을 낙심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단지 모든 제도와 시스템이 진정으로 성도들의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인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정말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고, 성경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하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게 하는 일꾼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좋다. 그러나 만일 이런 방법론의 강조가 성도들을 교회 성장의 실적물로 취급하는 것이라면, ‘전도단’과 같이 열심이 특심한 그룹을 교회 성장의 전위 부대로 만들어 이용하는 것이라면, 부교역자가 자신의 경건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중간 관리자로 등장시키는 것이라면, 궁극적으로 담임 목사로 하여금 ‘성장’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최고경영자(CEO)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목사가 정말 성도들의 영혼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회 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의 세상적인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감춰진 의도를 하나님밖에 어찌 알겠는가? 이에 대해 몇 가지 시금석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필자도 자유롭지 못한 문제이기에 자신에 대해 늘 점검하는 항목들이다.
첫째, 성도 수와 헌금 액수가 늘어나면서 정규적인 인상분 외에 특별히 대우가 높아지는가, 혹은 그렇게 높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성경은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일에 대해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의 수에 따라 목사의 사례비가 달라지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물론 약간의 ‘품위 유지비’ 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말이다. 구멍가게의 사장은 월세를 걱정해도 대기업 CEO는 수십 억 원의 연봉을 받는 기업 논리와 예수님을 따라가는 목사의 길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큰 차를 타고 으스댈 때 다른 사람의 나귀를 얻어 타신 예수님께 미안하지 않던가? 넓은 평수의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우리 주님이 생각나지 않던가? 매스컴에 얼굴과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실릴 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던 그분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던가? 아니라면 당신은 이미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목사가 아니다. 목회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이런 목회자는 더 크고 좋은 교회에서 청빙을 받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자기 목회지를 떠난다.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는 제안에 뛸 듯이 기뻐하며 따라나선 사사 시대의 한 레위인 같이 말이다.
둘째, 지난 한 주간 동안 대화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부교역자와 성도 심방에 대해 보고받고, 관리 집사와 교회 정수기 점검에 대해 이야기하며, 장로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내년도 예산 편성에 들어가야 할 항목에 대해 부탁하고, 구역장 집사들과 둘러앉아 내년도 사회 봉사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전부라면 그 목회자는 사람 중심이 아닌 교회 중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심방하면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가? 교회 생활하는 데 별 문제가 없는지를 점검하고, 교회에 더욱 충성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고 심방을 마쳤다면, 이 역시 성도들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정 심방을 사용했을 뿐이다. 물론 교회의 최고 책임자로서 목회자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고, 교회의 관리에 대해 지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라면, 성도가 규칙적으로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을 갖고 있는지, 자녀들의 공부와 신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주고 있는지, 남편이 직장에서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는지, 고난의 상황을 말씀으로 이겨나가고 있는지 성도의 실존적 삶과 관련된 문제를 중심으로 대화를 나눌 것이다. 물론 부교역자를 대할 때 다음 세대의 교회를 이끌어 갈 동역자이자 후배로서, 교회의 직원들에게도 피고용인이 아닌 사랑의 관심을 가질 것이다.
셋째, 우리 교회에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가? 교인을 수단으로 삼고 교회의 수적 물질적 성장을 목적으로 삼는 목사에게, 양질(?)의 성도는 VIP이고 돈 없고 힘없는 성도는 자리를 채워주는 숫자에 불과하다. 당연히 교회의 운영은 VIP 고객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이런 과정에서 가난한 성도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가 교회를 등지고 만다. 그러나 사람을 목적으로 삼는 목회자에겐 가난한 사람이나 부요한 사람이나 모두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소중한 존재이며, 동시에 모두 연약한 죄인으로서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이다. 부요한 사람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니, 가난한 사람을 더 대접해야겠다는 ‘당파성’이 차라리 정의로울지도 모른다. 목사도 인간인지라, 맨 앞에 앉아 눈을 반짝이는 순종적인 여집사, 장래성 있는 똑똑한 청년, 교회 청소를 위해 토요일을 희생하는 충성파, 가끔 큰 선물을 해 주는 부자 권사에게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의 정신으로 헌금 안 하고 말 많은 권사의 손 한 번 더 잡아 주고, 지저분한 옷 입고 콧물 흘리는 아이의 머리 한 번 더 쓰다듬고, 일주일에 한 번밖에 안 나오면서 불평만 해대는 남자 성도에게 전화 한 번 더 하도록 하자. 습관이 몸에 배어, 예수님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품을 때까지 말이다.
복음인가, 목회 철학인가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목회의 핵심은 바로 복음을 선포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목회자가 자신을 돌아볼 때 그 핵심은 복음을 확신하고 있는가이고, 교회의 부흥보다 성도의 실존을 먼저 생각한다고 할 때도 복음 안에서 실존을 가리키는 것이다. 과연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증거되는 말씀이 그리스도의 복음인가, 주일마다 설교하는 것이 구원을 얻을 만한 복음인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목회 철학’을 갖고 있다. 설교 메시지의 주요 특색과 강조점, 교회의 비전과 방향, 목회적 정책을 결정하는 원리, 우선적으로 예산을 투입하는 분야와 같은 것을 목회 철학이라 부를 수 있다.
목회 철학과 복음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첫째, 대부분의 경우에 목회 철학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강한 훈련을 중요시하는 제자도, 회개와 성결에 대한 강조, 청교도적 삶, 교회와 목회자의 개혁적인 삶, 성령의 은사와 능력,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사회 봉사와 디아코니아, 사회 참여, 복음의 확산을 목표로 하는 해외 선교, 후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독교 교육, 전통과 대중성의 조화, 살아있는 예배에 대한 강조, 치유 사역, 평신도가 중심이 되는 교회 운영 등이 현재 한국 교회에서 유행하는 목회 철학들이다. 이들은 모두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본다.
둘째, 목회 철학은 한 시대의 상황과 그 시대를 살아온 목회자의 배경과 관계가 있다. 목회자의 성장 환경, 교육적 여건, 영향을 받은 선배, 세상을 보는 안목, 독특한 인생 체험 등을 종합해 자신의 목회 철학을 정립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목회 철학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목회의 일관성과 원칙을 갖기 위해 모든 목회자들이 가져야 하는 것이다. 아니 갖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모든 것들을 한 사람의 목회자와 한 개의 교회가 전부 이룰 수는 없는데, 여러 사람이 여러 모양의 목회 철학을 나눠가짐으로써 한국 교회 전체로 볼 때 균형 잡힌 성숙을 이룰 수 있다. 목회자들은 각자 자신이 보는 성경에 근거해 자신의 능력과 장점과 약점을 고려한 후에 자기만의 목회 철학을 세워야 한다. 역사상 존재했고, 지금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세워 놓은 철학을 바탕으로 포괄적이고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목회 철학이 근거하는 상위법이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바로 성경과 그 성경의 핵심을 요약한 신앙 고백서다. 한 사람의 목회 철학이 갖고 있는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목회 철학이 복음을 넘어설 수는 없다. 목회 철학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복음이 희석되면 안 된다. 한 목회자의 독특성을 강조하다가 복음 자체가 갖는 능력과 포괄성이 제한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목회 철학을 전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목회 철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도 있고 또 변해야 한다. 신앙 고백도 성경과 그 성경을 해석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따라 변하는 것인데, 목회 철학이야 두 말할 것도 없다.
목회 철학이 복음을 능가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목회 철학이 성경과 복음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판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는 우리 교회의 성도가 우리 교회를 너무 높이 평가한 나머지 다른 교회를 폄하하지 않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 성도가 자기 교회 목사를 사랑하고 자긍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도를 넘어 예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담임 목사에게 돌리지 않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때로 어떤 대형 교회의 성도가 자기 목회자를 칭송하는 말을 들을 때, 매스컴을 통해 자기 목회자를 한국 교회의 원로로 높이 띄울 때, 화려한 표지에 선정적인 문구를 단 설교집을 대할 때 분노와 두려움으로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낀다. 복음은 온 데 간 데 없이 전달자만 남아 영광을 받는가! 자동차의 품질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영업 사원의 말솜씨만 남았단 말인가?
두 번째, 목사의 목회 철학을 반대하는 성도가 그 교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교회는 갖가지 배경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당연히 성도들 개개인 사이에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성령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신앙의 색깔도 다르다. 단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믿음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은 아무런 의견 차이도 없이 목사의 말을 맹종한다는 뜻이 아니다. 차이점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주위에 자신의 목회 방법에 동의하는 사람들만 포진시켜선 안 된다. 복음과 목회 철학이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복음의 포괄성과 보편성을 제한하지 않기 위해, 다른 스타일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 반드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두고 있어야 한다. 성도가 목사를 과신하고 맹종할 때, 이를 목회에서 성공의 지표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황급히 옷을 찢고 회개하며 말려야 할 텐데 이를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있으니, 서로 영광을 주고받다가 공멸할까 두렵다. 목회는 자신의 제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른 스타일의 신앙인이 부교역자이면 더욱 좋다. 부교역자는 담임 목사의 목회 철학에 맹종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담임 목회자의 부족을 보충해 줄 동역자이어야 한다. 교회가 통일되지 못하고 혼란이 가중될 수 있는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담임 목사의 마음이 좁아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담임 목사가 회개해야 한다. 그 정도의 협량(狹量)한 졸장부들이 한 교회의 지도자로 있으니 기독교가 욕을 먹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부교역자도 나름의 열심과 스타일로 인기를 얻어 성도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담임 교역자가 된다면,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목회 철학을 전적으로 찬성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친위대로 삼아 똑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인자(二人者) 노릇을 제대로 한 사람이 좋은 일인자(一人者)가 될 수 있다.
세 번째, 목사가 교회를 사임할 때 성도들의 신앙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임할 때나 은퇴할 때, 그 목회자와 성도들의 신앙이 판가름 난다. 목사가 교회를 떠날 때 그와 더불어 많은 성도들이 함께 교회를 그만 두는가, 아니면 더 충성하는가? 목사가 떠난 후에 과거를 회상하며 구관이 명관이라고 푸념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목회자가 전하는 복음에 순종하는가? 목사가 은퇴할 때 많은 성도들은 이제 자신들의 신앙이 주저앉게 되었다고 탄식하며, 목소리가 비슷한 그 목사의 아들이라도 세워 대신하도록 하지는 않는가?
필자에게 신학교 교수니까 이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지 목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점잖게 항의하는 목회자들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일궈 놓은 목회의 열매를 보면서도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꾸짖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양심에 손을 얹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종이 되는 것과 자신을 구속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성도들과 교회를 복음으로 양육하고 돌보는 이 핵심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씌워 주신 금면류관을 벗어 주님 앞에 내려놓으면서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면서….’
출처: 두란노 목화와 신학 (2006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