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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입장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서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하고, 이 복음의 진리로 중세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이신칭의에 죄인의 구원과 교회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보았으며, 이신칭의를 기독교 신앙을 굳게 떠받치는 주축으로 간주하였다. 종교개혁의 유산을 받은 교회들은 이신칭의의 복음에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종교개혁의 칭의론에 대한 많은 비판과 반론이 제기되면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일부 신학자들은 중세 교회를 개혁한 칭의론이 한국교회를 타락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신칭의에 대한 신대원 교수들의 입장을 밝힘과 동시에 개혁신학이 가르쳐온 전통적인 칭의론이 성경에 충실한 교리라는 사실을 천명하고자 한다.
1. 우리 모든 교수들은 칼빈이 확립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규정한 전통적인 칭의론이 성경에 충실한 교리라고 확신하며 그 근본 입장을 따른다.
2. 이신칭의는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으로 성취된 복음의 핵심이다.
이신칭의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제시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 이신칭의인 것이다. 하나님은 죄 없는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율법의 저주를 받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죄인들을 의롭다하실 뿐 아니라, 자신도 의로우실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확립하셨다(롬 3:25-26).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의로움 덕분에 불의한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3.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내리신 법적인 판결이다.
칭의(의롭다 하심)는 근본적으로 법정적 개념이다. “의롭다 하다”는 표현이 칠십인역 구약과 바울 서신에서 법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신 25:1; 롬 8:33-34). 법정에서 판사가 피고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의 법정에서 하나님이 죄인에게 내리시는 판결은 죄인을 실제적으로 의롭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것이다(롬 3:22-2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항;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60문답;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11.2.). 하나님의 칭의 선언은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포함한다. 소극적인 면은 죄인의 죄를 사하시고 무죄 선언을 하시는 것이고, 적극적인 면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법적으로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롬 5:12-21; 고전 1:30; 고후 5:21; 빌 3: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항; 하이델베르크 60문답). 그 결과 우리가 죄를 용서받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에 힘입어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4. 칭의의 근거는 우리 안에 전혀 없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의로움에 있다.
의가 전혀 없는 불의한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루신 의로움만이 칭의의 유일한 근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고, 그 의를 우리 자신의 의로 여겨주신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의로운 자로 서게 되는 것이다.
5. 칭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하여 확정적으로 내려진 판결이기에 유보된 것일 수 없고, 성화에 따라 완성되는 것일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가하신 그리스도의 의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것이므로 우리의 성화 여부에 따라 결코 변할 수 없다. 우리의 칭의 또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한 것이라서 변화될 수 없다. 일부 신학자들은 칭의가 마지막 심판에서 신자의 성화에 근거하여 완성된다는 유보적인 칭의론을 주장한다. 그런 주장은 칭의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하여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롬 3:24). 이 땅에서 이룬 신자의 성화는 항상 불완전하기에 칭의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공로나 근거가 될 수 없다(웨스트민스터 16장 5항;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62문답, 114문답). 신자가 이 땅에서 아무리 탁월한 거룩함의 경지에 이르렀을지라도 그 경건을 의지해서 한순간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 의로움은 심히 불완전하고 죄로 오염되어있기 때문이다. 오직 온전한 의로움만이 죄인을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한다(『기독교 강요』, 3.14.12). 따라서 칼빈에 따르면, 거룩함은 칭의의 열매로 반드시 나타나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칭의의 근거나 전제조건이 될 수는 없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완전한 의로움에 근거하여 확정적으로 내려진 것이기에 완전하며, 영원히 변개될 수 없다(롬 8:1, 30, 33-39; 웨스트민스터 대교리 문답 77).
6. 신자는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지만 그 믿음조차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될 수 없다.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므로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 그 선물을 받을 뿐이다(롬 3:24, 30; 갈 2:16; 3:24). 하나님이 칭의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때 믿음의 그릇에 담아 주시는데, 그 그릇마저 성령의 은혜로 만들어 주신다. 믿음은 칭의를 받는 수단에 불과하다. 만약 믿음이 칭의의 근거라면 믿음이 또 하나의 행함이나 공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의로움만을 칭의의 유일한 근거로 바라보는 데 있다(롬 3:21-26; 4:1-8; 갈 2:16;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61). 성부 하나님이 친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믿음을 수단으로 삼아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7.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동시에 거룩하게 된다. 종교개혁의 칭의론에 대한 가장 큰 비난은 이신칭의가 신자를 방종과 나태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칼빈과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가장 우려하고 경계한 것이 칭의론이 그런 식으로 남용되는 위험이었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반드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쳐왔다. 칼빈이 주장한 대로,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칭의와 성화를 동시적으로 체험한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다(칼빈, 『기독교 강요』, 3.11.1; 3.16.1.). 따라서 성화 없이 칭의만 있을 수는 없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이렇게 반문한다. “감사치도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을 계속 살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음란한 자, 우상 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욕하는 자, 강도질하는 자나 그와 같은 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87).
8. 구원의 다양한 측면들, 즉 중생과 회심, 칭의와 성화, 양자됨과 성령의 내주, 견인과 영화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로 긴밀하게 연합되어있다.
구원의 다양한 측면들은 은혜의 황금 사슬로 엮어져 있다. 이 황금 사슬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사랑에 닻을 내리고 있고 하나님의 전능한 손에 붙잡혀 있기에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며 의롭다 하신 이를 반드시 거룩하게 하며 영화롭게 하신다(롬 8:30).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누구도 저지할 수 없다. 우리 안에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 구원을 완성하신다.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우리 구원을 인치시고 보증하신다(고후 1:22, 엡4:30). 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 양자 됨, 성령의 내주, 성화, 소망 가운데 인내함(견인), 영화가 모두 칭의의 선물에서 흘러나오는 특권과 은혜이다. 이런 점에서 칭의는 구원의 모든 요소를 힘차게 떠받치고 있는 은혜의 반석이다.
9.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죄에서 돌이킨 회심과 거룩하게 사는 성화가 없이 칭의만 홀로 분리되어있을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것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개인에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모든 다른 구원하시는 은혜들을 동반하며,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하였다(11장 2항).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동시에 성령으로 거듭나고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아들의 형상으로 성화되어간다. 물론 이 땅에서 신자가 완전한 성화에 이르지는 못하기에(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42), 자신이 이룬 거룩함으로 인해 우월의식이나 교만에 빠질 수 없고 항상 겸손히 칭의의 은혜를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참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라면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회개와 성화의 열매를 점점 더 풍성히 맺어가야 한다. 이 거룩함의 열매는 칭의의 전제 조건이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열매이다. 야고보 사도가 말했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26).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신자를 방종에 빠지게 한다는 비난을 잠재우는 가장 강력한 변론은 이 교리를 신봉하는 이들이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럴 때 고귀한 종교개혁의 유산이 길이 계승되며 빛나게 될 것이다.
칭의론은 개혁교회를 태동시켰을 뿐 아니라 지난 500년 동안 개혁교회를 굳건히 지탱해온 진리이다. 이 교리가 바르게 전파될 때마다 교회가 생명력으로 왕성해지고 건강하게 성장하였다. 개혁교회에서 칭의 교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구원 메시지의 심장이며 심오한 영성의 바탕이고 복음의 젖줄이며 고통당하는 양심의 위안이다. 오늘날 진정한 부흥을 고대하는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이신칭의의 복음이 바르게 전파되는 것이다.
첫댓글
(1)
대부분 동의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곧 믿으면 바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중간에 과정이 있는데 그런 과정없이 바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칭의와 성화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경우도 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곧 "믿음"과 "의롭다함을 받음" 사이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 - [그리스도와의 연합] - [의롭다함을 받음]의 순서입니다.
(2)
제가 능동순종주장에 관한 글을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두 분의 교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전에
예수님께서 율법준수로 획득하신 의 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쓰신 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능동순종교리를 주장하는 두 분에게
(1) 예수님께서 율법준수로 획득하신 의 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아서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는 것인지
(2)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로 획득하신 의 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인지
질문을 했는데 한 분은 모르시겠다 하셨고 다른 한 분은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능동순종주장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하여 언제 의롭다함을 받는지 모르고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전에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이 전부라면
저는 능동순종 주장은 칼빈의 가르침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3)
위에서 말씀드린 [믿음] - [그리스도와의 연합] - [의롭다함을 받음]의 순서에 대해 더 말씀드립니다.
제 생각에,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이에는 죄사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를 씻어야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 [죄사함] - [그리스도와의 연합] - [의롭다함을 받음] 의 순서가 됩니다.
제가 세례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데, 바로 이 부분입니다.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4)
개역한글 갈 3:27절과 비교해 보세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느니라)
[믿음] [죄사함] [그리스도와의 연합] [의롭다함을 받음]의 순서와는 다릅니다.
개역한글에는 그리스도와 합하기 전,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합한다는 것은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이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의롭다함을 받고) 세례를 받아 또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이 됩니다.
개역개정 갈 3:27절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인데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느니라) 라는 의미입니다.
[믿음] [죄사함] [그리스도와의 연합] [의롭다함을 받음]의 순서와 잘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갈 3:27절을, 개역개정이 바르게 번역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얻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믿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5)
저는 이 부분을 말씀드리는 것인데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모르시는 분들이
곧 믿음으로(어떤 과정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이해하시는 분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라 하며 반론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답답합니다.
@이지끼을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함이 님이 말하는 세례과정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풍부한 은총속에 포함되어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구원론입니다. 예전부터 여러글에서 지꾸 태클을 거시는 것은 님이 생각하는 체계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기때문이라 보여집니다.
몇달전 님이 세례에 대해 책을 읽고 공부하셨다길래 무슨 책을 보았느냐고 질문했지만 답변을 피하셨고 이번에는 어디 소속이냐고 물었더니 회피하시네요.세례에 대한 다른 주장으로 회원들 괴롭게 하지마시고 질문에 답을 해 보세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가르치듯이 댓글을 달지 마세요. 이미 세례에 대한 다른 주장을 계속 하시므로 긴 문장으로 댓글다셔도 그 내용에 식상하여 읽고 싶은 마음이 솔직하게 안생기네요.
@이지끼을 아니, 개혁신학의 '가나다'도 모르시는 분이 신학 논문 읽고 잘못됐다고 말해 봐야 헛웃음만 날 뿐입니다. 이제 어린아이 같은 투정은 그만 부리시고, 조용히 앉아서 선조들 책을 열심히 읽으면서 기초부터 다시 배우고 오십시오. 이제는 부끄러움을 느끼실 때도 되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의식을 말하십니다ㅡ
@애통하는 마음 강제로 입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반론에 귀를 기울여보고 최대한 답변을 해서 설득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인 줄 압니다.
@애통하는 마음 글쎄요. 모든 사람이 이 일에 매달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미 저나 사계 님이 계속 답변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달려든다면 이지끼을 님이 감당치 못하실 겁니다. 사실 지금도 벅차서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계신 듯합니다.
지난 번에 그만하면 좋겠다 하셔서 그만 하려고 했었지만
계속 저를 소환하는 글들이 올라 와서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 댓글로 세례에 관하여는 그만할까 합니다.
여러분들도 제가 그만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번에 알게 된 것을 말씀드리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계님께서 저의 갈 3:27절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William Hendriksen의 주석을 제시하셨습니다.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IK/97
저는 처음 저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생각했는데
한글로 번역된 글에 as many 란 말도 있는 것을 보고
윌리암 헨드릭슨이 NKJV을 본문으로 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윌리암 헨드릭슨의 책을 주문해서 받고 살펴 보았는데
윌리암 헨드릭슨은 RSV 또는 AV ( KJV 의 AV)를 본문으로 쓴 것 같습니다.
그런데 NKJV, RSV, AV의 번역은 다 같습니다.
For as many of you as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윌리암 헨드릭슨은 이 말씀에 (union with)이라는 말을 추가했습니다.
그래서 For as many of you as were baptized into (union with) Christ have put on Christ 라고
성경본문을 썼습니다.
제가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의 갈3:27절 번역이 다르다고 말씀드렸는데
윌리암 헨드릭슨이 사용한 성경본문은 개역개정 번역의 의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윌리암 헨드릭슨은 개역개정번역을 성경본문으로 선택하고
개역개정 갈3:27절에 대한 주석을 쓴 셈입니다.
그런데 이 주석을 한글로 번역하신 분은
번역하면서 성경본문으로 개역한글 갈 3:27절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한글로 번역된 윌리암 헨드릭슨의 주석을 보시는 분들은
윌리암 헨드릭슨이 개역한글번역에 대한 주석을 쓴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속이고, 속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들이 그동안 많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주장이 지방교회의 주장과 같다는 말씀도 하시는데
저의 주장은 윌리암 헨드릭슨의 (영어)주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윌리암 헨드릭슨이 지방교회 사람이라면 저도 그렇습니다.
@이지끼을 여전히 보고 싶은 것만 보시는군요. 저는 이지끼을 님과 토론한 덧글에서, 세례가 주는 은혜는 표와 인으로서 은혜라고 줄곧 말씀드렸습니다. 이지끼을 님은 이에 반대하시며 세례는 중생의 은혜를 주신다고 주장하셨습니다. 헨드릭슨 목사님이 지금 세례를 표와 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보이십니까 안 보이십니까?
"The apostle is speaking, therefore, not about the merely outward administration of baptism, as if some magical healing power adhered to it, but about [the sign and seal] in conjunction with that which is signified and sealed."
그리고 최소한 이지끼을 님이 세례 중생론의 근거로 삼으시는 막 16:16, 행 2:38 등의 본문을 헨드릭슨 목사님이 어떻게 해석하시는지는 찾아보고 나서, 이지끼을 님의 의견과 헨드릭슨 목사님 의견이 같다고 주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찾아 봐야 헨드릭슨 목사님 의견이 이지끼을 님과 같을 리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닉네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을 골라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시는 것 같네요
그 문장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보시고
그 문장을 이해하셔야죠.
@이지끼을 문맥 안 보고 어떤 사람의 의견 전체를 안 보고, 필요한 것만, 보고 싶은 것만 보신 것이 이제껏 이지끼을 님이 해오신 일입니다. 세례에 대한 헨드릭슨 목사님의 다른 글은 보신 적 있습니까? 그것도 안 보고 저 한 단락만 보고 '내 의견은 헨드릭슨 목사님 의견과 같다'고 주장하신 것은 이지끼을 님입니다.
칼빈과 바빙크 목사님 글도 그렇게 보신 것, 벌써 까먹으셨습니까? 꼭 다시 떠올려 드려야 합니까?
@이지끼을 이찌끼을님은 혹시 지방교회소속이신지요?
@grace 아니라고 밝히셨습니다. 이지끼을 님 글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실 지방교회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궁금할 때 가끔씩 찾아 보기는 하였는데 무엇을 봤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니 저를 그런데 연관시키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닉네임 네 감사합니다. 지방교회가 세례구원론을 주장한다고 들어서 물어보았어요.
@닉네임 님의 글을 보니 William Hendriksen의 글을 이제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William Hendriksen 은 자신의 글에서
All those, then, who by means of their baptism have truly laid aside, in principle, their garment of sin, and have truly been decked with the robe of Christ's righteousness, having thus been buried with him and raised with him, have put on Christ (cf. Rom. 6:3ff.; 13:14; Col. 2:12,13). 라고 합니다.
이 중 by means of their baptism 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세례받으며 자신들 죄의 옷을 벗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다는 말입니다.
정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글도 보라시는데
(cf. Rom. 6:3ff.; 13:14; Col. 2:12,13). 라고 참고해 놓으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억지 부리지 마세요
@닉네임
그리고 저를 "개혁신학의 '가나다'도 모르시는 분"이라고 어제 말씀하셨는데
저는 언제 의롭다함을 받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님은 언제 의롭다함을 받는지 모르셨고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혁신학의 가나다 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의 '가나다'도 모르시는 분"은 제가 아니라 님입니다.
@grace
grace님 저 처음 보십니까?
@이지끼을 넘 예상치못한 주장을 하시니 질문한거고 회원들에 대해 제가 다 알순없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귀한 형제라 샹각해 왔는데 세례에 대해 지방교회와 같은 주장을 펼치시니 질문한 겁니다.(신약학자에게 여쭈니 지방교회주장이고 말이 안된다 하셨습니다.)
@이지끼을 개혁신학의 가나다를 아시는 분이 세례구원론을 주장하십니까? 어떤 개혁신학자가 그런 주장을 합니까?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그냥 우기기 작전으로 바꾸셨습니까?
구원 순서에서 예수님과 연합 지점은 개혁신학자들끼리도 의견이 갈립니다. 이러니 개혁신학의 가나다도 모르신다고 말할 밖에요. 제가 쓴 "레이몬드 목사님에 대한 사계 님의 오해"(https://m.cafe.daum.net/reformedvillage/D4ux/626?)라는 글을 대충만 읽어 보셨어도, 혼자 뭘 다 아는 듯 뽐내며 말씀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더니, 이지끼을 님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제가 헨드릭슨 목사님 주석만 가지고 있었다면, 이지끼을 님의 억지 주장은 벌써 파헤쳐지고도 남았습니다. 자꾸 보고 싶은 것만 보시면 정이철됩니다.
@이지끼을 The evident meaning, therefore, is this: being baptized with water is not sufficient. The sign is valuable, indeed. It is of great importance both as a pictorial representation and as a seal. But the sign should be accompanied by the thing signified: the cleansing work of the Holy Spirit. It is the latter that is absolutely necessary if one is to be saved.
헨드릭슨 목사님의 요한복음 3:5 주석입니다.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하신 일이지, 물 세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례가 표와 인이라는 것은 개혁신학의 기초 중 기초입니다. 그리고 이지끼을 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고백하는 세례"가 바로 표와 인으로서 세례입니다. 그러니까 헨드릭슨 목사님이 이지끼을 님과 생각이 같다는 착각은 이제 그만하시길 바랍니다.
@이지끼을 이렇게 개혁신학의 기초도 모르시면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배워 볼 생각을 못하고, 또 예수님의 능동 순종의 전가에 대해 엉뚱한 글이나 쓰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