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교육>이 마련해 준 연재의 첫마당입니다. 선생님과 제가 서신으로 대화하는 형식의 연재를 제안 받았을 때, 저는 한 번 튕겨보는(?) 기척도 없이 응낙하고 말았습니다. 작년 '변방의 사색'이라는 제목으로 오죽잖은 글들을 연재하면서 글쓰기의 고통을 호되게 겪은 뒤끝이었는데, 그렇게 마음이 쉽게 돌아선 것은 무엇 때문인지, 저도 의아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서신 교환이라는 형식이 미더워서였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그랬던 건 무엇보다 상대가 선생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전교조 해직교사 시절 전국국어교사모임 건설에 참여했고, <우리교육> 편집장을 거쳐 '하자센터'와 '성미산학교'까지, 경계를 가로지르는 선생님의 교육적 실천과 거기에 깃든 자유로움은 제겐 늘 경이의 대상이었습니다. 선생님이야말로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노마드'(유목민)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길어 올린 선생님의 글들을 읽고 배우면서 때로는 저와 선생님의 생각의 차이를 재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선생님과 공교육에 뿌리내리기 위해 애쓰는 저와의 처지의 차이일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드높은 탐구열과 늘 변죽만 울리고 마는 저 사이의 열정의 온도차일지도 모릅니다. 모쪼록, 올 한해 선생님께 제가 많이 배우고, 독자들도 풍부한 사색의 거리를 얻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과의 첫 번째 대화를 선생님께서 지난 2005년 <우리교육>에 연재하신 '하자에서 교육을 생각하다'에 대한 잡감(雜感)으로 시작해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아요.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이명박 씨와 인수위가 퍼질러 놓은 어지러운 것들 중에 몇 가지만 짚어보고, '이명박 치하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골치 아픈(?) 화두에 대한 선생님의 답을 청해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우선 제 이야기를 몇 마디 드려 볼게요.
2.
작년 10월 무렵, 이명박 씨가 발표한 교육 공약 자료를 읽고 나서 저는 직관적으로 몹시 불쾌했습니다. A4 다섯 장 분량의 기자 회견문에 담긴 그의 교육 비전에는 강남 학부모들, 혹은 그들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주류들의 한국 공교육에 대한 조소와 모멸이 담겨 있는 것으로 저는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이명박 씨의 교육 비전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그 많은 평범한 아이들을 사실상 '없는 존재'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명박 씨의 교육 정책은 말하자면, 자기 아이들은 자신들처럼 사회 꼭지점에 있어야 하고, 나머지 다수는 지금과 같이 그들 밑에서 엎드려 주어야한다는 우리 사회 주류들의 반교육적 탐욕을 제도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씨는 이를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겠다'고 하니 이건 대체 무슨 뜻인지, 어디 안드로메다에서 우주선을 타고 온 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이명박 씨의 교육 정책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지요. 그러나 저는 그 비판이 좀더 근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원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지금처럼’ 살겠다는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를테면, 이명박 씨의 교육정책에 깃든 언어의 타락을 지적하는 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들의 입시 정책을 ‘대학 자율’이라는 말로 표현했을 때 그것은 ‘자율’이라는 설레는 단어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율이란 대학이 마땅히 져야 할 사회적 책무, 공공적 양심, 이런 귀찮은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제 이기심을 양껏 실현할 마당을 열어준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명박 씨는 이 ‘자율’이라는 단어를 통해 대학 입시 자율화로 인해 야기될 파괴적인 결과를 멋지게 감춰버렸습니다. 조지 부시가 지난 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기업들을 부양하고 가난한 이들의 복지를 축소하는 감세 정책을 '세금 구제'라는 표현으로 위장했는데, 가난한 이들이 이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그런데 이것은 지배 세력이 언어를 통해 세상을 운용하는 얄팍한 조삼모사(朝三暮四)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진실에 대한 감각의 퇴화와 타락한 세계에 대한 무력한 굴종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율’이라는 단어의 타락한 쓰임새를 이제는 별로 문제 삼지 않듯이, 이 땅 대다수 사람들은 우리 교육의 변화에 대한 기대를 거의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 어떤 정책을 내와도, 이런 상태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패배감이 뚜렷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자기도취에 젖어 홀로 살아남고자 애쓰는 태도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함께’ 비를 맞는 연대의 기쁨은 이제 먼 기억이 되어갑니다.
우리 사회에서, 상위 5%에게만 배분될 자원이 있다면, 자신이 반드시 거기에 해당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30%는 될 겁니다. 인구 10만밖에 되지 않는 밀양시에서 매년 십수억의 세금으로 서울의 학원 강사를 데려와 밤늦게까지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공립형 학원이 만들어질 무렵, 제가 일하는 전교조 밀양지회에서 이를 막아내기 위해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거기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상당수 시민들이 자기 자녀가 그 제도의 혜택을 볼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상위 5%'에 대한 욕망을 단호히 거절할 만한, 다른 삶에 대한 욕구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체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저것들과 상관없어’라는 적응에의 포기, 그리고 거기에 깃든 제 삶에 대한 애착과 자기 존엄에 대한 감각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어쨌든, 이명박씨가 집권한 5년 동안 그들이 예고하는 정책이 현실화된다면, 이 교육체제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더욱 가속화될 것 같고, 그래서 대안 교육의 외연 또한 넓어질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홈스쿨링이 활성화된 것은 미국 공립학교에 만연한 범죄와 유색인종들과의 혼거, 자유주의적 교육관으로부터 제 아이들을 도피시키려는 기독교 백인 상류층들의 힘이 컸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마이클 애플, <미국 교육개혁, 옳은 길로 가고 있나?>) 아마도, 우리나라의 대안 학교들도 이명박 정부 시절 더욱 가속화될 공교육 탈출의 흐름과 거기에 일정 정도 깃들어 있을 이기적 탐욕 속에서 곤란한 처지에 직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3.
선생님. 한창 논란이 되었던 영어 몰입 교육을 둘러싼 인수위의 행태들은 웃기 괴로운 에피소드를 많이 남겼지요. 아이들도 인수위원장 이경숙 씨가 벌인 ‘어린지, 후렌들리’ 코미디는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상식의 시선으로 봤을 때 이것은 정신 나간 이들의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몇년전, 복거일 씨 같은 이들이 바람을 잡고, <조선일보>가 부추긴 영어공용화 논쟁부터 저는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어 몰입 교육은 지금 인수위가 한발 빼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아시다시피 이미 각 시․도 교육청에는 어엿한 정책으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인수위가 이번처럼 선거 승리 이후의 최면에 젖어 성급하게 보따리를 풀지 않고 시차를 조절하고 더 다듬어서 세상에 내놓았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선생님,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영어 열풍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도 아니지만 저는 거기에 깃든 노예근성이, 이제 그것을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이 집단적 침묵이 두려운 것입니다. 재일(在日)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가 쓴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 실린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라는 에세이를 혹시 읽어보셨는지요. 그는 일본에서 영어란 단순히 하나의 외국어가 아니라 ‘강자에 대한 선망’이 착종된 하나의 세계관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늘 궁금했던 것이 각급 교육청이 영어가 공용어인 인도나 필리핀 출신을 고용하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우수한 원어민 교사를 확보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흑인 원어민 교사 또한 저는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영어 교육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주는 사례일 겁니다.
선생님도 국어 교사이셨고 저 또한 지금 국어를 가르치지만, 언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유롭고 너그러운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영어를 '공포의 기제'로 받아들이고 '생존을 위한 도구'로 받아들입니다.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꽃피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어 교육을 통해 아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강자에 대한 선망과 자기 존재에 대한 열등감을 선취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약자들-비(非) 서구, 비(非) 백인 세계-에 대한 더욱 강화된 모멸로 드러나겠지요.
이렇듯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영어를 가르치는 것 자체가 반교육의 극치인데, 지금은 어디서건 서너살부터 영어를 가르친다고 난리입니다. 저 또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처지라 이런 흐름들에서 깊은 좌절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제는 엄청난 세금을 들여서 공교육에서 영어를 크게 진흥시킬 모양입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합니다만 저는 공교육에서 영어의 비중은 지금보다 훨씬 후퇴한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등 교육에서 외국어는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배우게 해서도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언어는 실체에 대한 표상에 불과하지만, 또한 하나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학습은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시간대가 늦으면 늦을수록 아동은 언어라는 표상보다는 실체와 더 가깝게 지내게 되고, 실체에 대한 육화된 감각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는 또한 하나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늦게 습득하면 습득할수록 그것의 진수를 분별할 지성을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그런 의미에서 저는 어린이들에게 철학이나 종교를 가르치는 것도 반대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추세는 지금 인수위가 내놓은 영어 몰입교육의 가능 여부와 무관하게 되돌이키기 어려워 보입니다. ‘어린지, 후렌들리’로 상징되는 아주 천박하고 속물적인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4.
선생님, 선생님은 차분한 대화를 원하셨을지도 모르는데, 초장부터 이렇게 흥분하게 됩니다. 결국, 저는 이명박 체제 하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을 표현한 것일 터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람다움’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 이 시절을 통과하면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어떻게 세차게 허물어져갈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한 것입니다.
선생님. 언제까지 우리는 세상에 떠밀려 요동치듯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 ‘정권 교체기’를 보내는 선생님의 심경은 어떠하신지, 궁금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밀양에서 이계삼 올림.
<이계삼 선생님께>
오랜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교육』 덕분에 뜻밖의 만남이 이루어지는군요. 그간 사적인 소통은 없었지만, 이런저런 매체에 실린 선생님 글은 많이 읽었습니다. 『우리교육』에 연재하신 꼭지의 제목이 ‘변방의 사색’이었던가요? 누가 붙인 건지 모르겠지만, 선생님 글에 어울리는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수자, 약자, 소외된 자들의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내가 중심부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왕성한 글쓰기는 소통하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과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요? 저는 요즘 글을 쓰는 게 점점 힘이 드는군요. 나이가 들면서 글쓰기 노동을 할 힘도 약해지는 것 같고, 깊이 있는 깨달음도 없으니 절실하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것 같아요. 대안교육 언저리에서 일한 경험을 해석하고 나누는 일은 의무라고 생각하여 억지로라도 힘을 내어 쓰지만, 그 이외의 것들은 가급적 피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제안에 응한 것은 무엇보다 서신을 주고받는 방식의 글쓰기가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편지라면 좀 설익은 생각도 쉽게 드러내어 토론에 부칠 수 있을 것 같고, 정서적 소통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글쓰기의 괴로움을 많이 덜 수 있겠지요. 또 선생님과 토론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선생님의 표현대로라면 저는 공교육의 경계를 넘은 사람이고, 선생님은 그 안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일터를 옮겼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생각에서 이러한 차이를 읽어 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정권 교체기’를 어떤 심경으로 보내는지 물으셨지요? 저는 잘 지냅니다. 말하고 보니 좀 썰렁하네요. 제 주위에는 텔레비전, 신문을 안 본다는 사람도 있고, 밥맛도 입맛도 없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에 비하면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워낙 오래전부터 예고된 상황이기도 하거니와 현실 정치권에 대한 기대를 접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당도,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겠습니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흐름을 대신할 대안적 기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대안적 기획을 내세우는 정당이 다수표를 얻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요? 김종철 선생의 말을 빌리겠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선거판에서 경제성장의 계속적인 추구가 가져올 궁극적인 파국을 환기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가능성이 단 1%라도 있을 수 있을까. 대통령 선거든, 지방의회 선거든, 모든 입후보자의 가장 전형적인 약속은 언제나 높은 경제성장과 소득의 증대이다.”
그렇다고 제가 ‘그 놈이 그 놈’ 하는 식으로 정당 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차이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권력과 결합하면 아주 큰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의 결과는 재앙이지요. 어느 정파보다 이명박 정권은 노골적으로 그리고 아주 빠른 속도로 개발과 성장을 추구할 것입니다. 10년 동안 이룬 작은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복지의 확대’나 ‘남북 관계 개선’을 뭉개버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장관 인선을 보니 그럴 가능성이 꽤 높아 보입니다.) 요즘 이명박 씨의 행보를 보면 약자 편을 드는 시늉도 번거롭게 여길 것 같더군요.
그렇지만 이런 차이는 문자 그대로 ‘작은’ 차이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평가해야겠지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크기에 비하면 작아 보입니다. 지금의 정치 지형과 제도에서는 결코 대안적 기획이 나올 수 없습니다. 지난 10년의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배운 것이죠. 저는 ‘비판적 지지의 망령’과 ‘사표 방지의 함정’에 빠져 김대중과 노무현에 표를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진국, 국가경쟁력, 경제 발전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평화를 정착시킬 것과 약자에게 조금은 따뜻한 정책을 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요. 너무 후하게 점수를 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들이 할 만큼 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현실 정치판에서 풀기에는 너무 근본적인 것들이지요.
이명박 씨의 대선공약이나 인수위에서 내 놓는 정책안들은 사실 새로운 것은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전부터 그쪽에서 늘 하던 이야기들이니까요. 그것들에 대한 이쪽의 비판도 이미 여러 경로로 나와 있으니, 구체적인 정책들에 대해 제가 더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영어 몰입교육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으니 저도 조금 보태겠습니다.
최근에 나온 『한겨레 21』에는 표지에 ‘입시에서 영어를 빼라’는 말을 큼직하게 넣었더군요. 선생님도 읽어 보셨지요? 정말 그러면 좋겠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영어에 대한 다양한 요구가 있을 것이고, 그 제안이 그런 모든 요구를 다 만족시켜 주지는 않겠지만, 영어가 양산해 내는 온갖 폐해를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확실하게 없애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분명 저쪽에서는 이렇게 하면 영어를 열심히 배우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가진 실용적 가치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공부를 위해서든 일을 위해서든 여행을 위해서든 영어를 꼭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 자기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배워 효율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고등학교까지 배워야 할 최소한의 선을 정하고 그 기준을 통과하도록 하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 정말 고급 영어가 필요한 사람은 대학이나 사회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주면 되겠지요.
우리 사회가 영어 광풍에 휘말리게 된 데는 무엇보다 영어를 유력한 성공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집단의 힘이 작용한 것이겠지요. 유학이든, 해외연수든, 고액 사교육이든, 영어를 배우기에 유리한 계층에서 영어의 가치를 엄청나게 부풀려 놓았지요. 영어 시장에 줄을 대고 있는 집단이 이에 편승합니다. 그들은 주로 학부모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경쟁력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교육 관료들이 이에 질세라 나섭니다.
이번 인수위의 영어몰입교육 파동을 보면 이런 현상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일단 인수위는 한건 터트리고 비난 여론이 일자 ‘아니면 말고’ 식으로 슬그머니 안을 거둬들였지만 학원가에서는 영어몰입교육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일부 시도교육청에서는 지역의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영어교육 강화 방안을 만들어 발표하고 있습니다. 저쪽이 이 안을 실제로 폐기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미 영어의 값은 또 크게 뛰었지요. 저들이 기대했던 효과는 이미 달성한 것입니다.
제가 일하는 학교는 도시에 있기 때문인지 다른 대안학교에 비해 학부모들이 이런 분위기에 민감한 편입니다. 다른 대안학교에 비해 영어 수업의 양이 많은 편인데도 학부모들은 크게 불안해합니다. 일부 학부모는 영어 과외를 시켜야 하는지 고민한다고 들었습니다. 대안학교라고 무풍지대가 될 수는 없지요.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안이 나날이 커가는 게 보입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하지요. 저는 지금과 같은 영어교육은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적으로 영어를 배우다 보면 그 중에서 잘 하는 사람이 많이 나올 것이다. 선의의 교사와 부모들이 이런 가정을 비판 없이 받아들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영어를 배우게 해서 십 퍼센트가 영어를 아주 잘 하게 되면 성공한 교육인가요? 십 퍼센트가 너무 적으면 이십 퍼센트? 그 십 퍼센트 혹은 이십 퍼센트가 국가경쟁력인가요? 그럼 나머지 팔구십 퍼센트는 뭔가요? 이건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엄청난 폭력입니다.
사실 이러한 가정은 영어교육에 국한되어 있지 않지요. 누구나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보는 저로서는 필수과목으로 가득한 학교는 이 가정에 자기 근거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개인을 국가경쟁력, 지역경쟁력, 학교경쟁력의 도구로 보는 거지요.
경쟁을 위한 영어교육은 진정한 의미의 영어교육에도 적대적이라는 것도 지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고미숙 선생의 말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를 배우는 것 자체는 아주 즐거운 일이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단순히 정보의 습득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건 물고기가 바다를 유영하듯, 그 나라 언어의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외국어를 배울 때는 어린 시절 처음 모국어를 배울 때의 호기심과 초발심으로 충만하게 된다. 아무리 고매한 지식의 소유자라 해도 외국어를 배우는 순간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영어란 그런 즐거움을 몽땅 날려 버리는 가장 ‘엽기적인’ 공부가 되었다.”
대선 결과를 보면서 저는 ‘우리 사회가 파렴치의 도를 넘어 섰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만큼 살기가 팍팍해졌기 때문이겠지만, 부에 대한 집착, 사교육의 창궐,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소비 수준을 보면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소위 ‘실용’이라는 것이 무형의 가치를 무시하고 오로지 ‘돈 벌이’가 되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거라면 정말 앞날이 캄캄하지요. 이러다가는 ‘정의’ ‘평등’ 같은 말은 고어사전에서나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교육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정말 크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경쟁을 위한 공부, 출세를 위한 공부가 결국 배움의 즐거움을 철저하게 파괴한다는 사실 아닐까요? 며칠 전에 읽은 책에 인상적인 글이 있었습니다.
한 유대인 재단사가 미국 남부의 어느 도시로 이사를 했다. 백인우월주의 폭력집단인 K.K.K. 가 이 소식을 듣고 동네 아이들을 선동해서 매일 가게 앞에 가서 모욕적인 욕설을 하라고 시켰다. 첫째 날, 아이들이 나타나자 재단사는 가게 앞으로 나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나에게 욕을 할 때마다 25센터짜리 동전을 주마.” 아이들은 기뻐했다. 다음 날 아이들이 나타났을 때 재단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욕할 때마다 10센트를 주마.” 많은 아이들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다. 셋째 날, 재단사는 아이들에게 5센트를 주었고, 그 다음날에는 1센트를 주었다. 다섯째 날, 아이들이 나타나자 재단사는 말했다. “더는 너희들에게 돈을 주지 않겠다.” 그러자 아이들은 투덜대며 대답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우리도 이제 여기 와서 욕하지 않을 거예요.”
곤경에 처한 재단사가 지혜를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야긴데, 여기서 재단사의 지혜란 결국 외적 보상이 가진 위력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지요. 저는 이 에피소드에서 돈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론 이명박 정권 이전에 이미 이런 흐름이 형성된 것이니 ‘모든 게 이명박 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런 흐름을 제어할 브레이크가 파열되었으니, 인제는 정말 두 눈 크게 뜨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밀양시의 공립형 학원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상위 오 퍼센트를 위한 정책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자신이 그 정책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만들어 낸 우석훈 선생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명주잠자릿과 애벌레를 ‘개미귀신’이라고 하는데, 이 개미귀신은 모래땅에 개미지옥을 파놓고 숨어 있다가 그곳에 미끄러진 개미 같은 작은 곤충을 잡아먹는답니다. 만약 개미지옥에 빠진 곤충들이 힘을 합하면 능히 개미귀신을 물리칠 수 있지만, 곤충들은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한다는 거예요. 그 좋은 자리라는 게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다른 곤충보다 나중에 잡아먹히는 자리라는 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지요.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 상황입니다.
이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가느냐, 이게 우리의 화두일 것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우리에게 주는 뜻밖의 선물은, 이런 걸 선물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상황이 더 암울해짐으로써 우리에게 대안적인 사유와 실천을 요구한다는 것이겠지요. 이미 비싼 수업료를 냈지만,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수업료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몇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여유가 없네요. 영어교육 정책에 대해서는 선생님과 제가 크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많은 토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외국어 교육은 늦을수록 좋다는 주장, 언어는 세계관이라는 주장 같은 것들은 제가 동의하기 어렵군요.
외국어 교육이 늦을수록 좋다는 것은 이 분야의 연구에 문외한이어서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어떤 환경에 있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언어와 민족 혹은 언어와 세계관의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분명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우리말에는 우리 얼이 담겨져 있다’, ‘언어는 곧 세계관이다’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국가와 민족 내부의 차이를 무화하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국가 경쟁력이라는 신화가 개인을 도구화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길게 이야기할 역량도 지면의 여유도 없군요. 고종석 선생의 책을 읽어 보셨는지요? 저는 고종석 선생이 쓴 한국어에 관한 에세이들을 최고로 치는데, 선생님이 괜찮다면 나중에 이것들을 가지고 토론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 ‘자율’이라는 언어의 타락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타락을 한탄하기보다는 ‘자율의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이것도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듯합니다.
『우리교육』이 만들어 준 인연이 선생님한테나 저한테나 사고를 벼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지를 함께 읽으실 독자분들께도 유익한 대화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편지드릴 때까지 평안하십시오. 새학기를 준비하는 와중에 급하게 적었습니다.
<박복선 선생님께>
긴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마치고 얼마 있으면 새 대통령 취임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젠 정말 이명박 시대가 시작되기는 할 모양입니다. 저런 따위의 정부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대기 위해 내 월급에서 꼬박꼬박 몇십만원의 세금을 떼서 바쳐야 할 거라는 사실이 정말 머리가 아팠는데, 이젠 좀 담담합니다. 받아들여야 할 건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쿠데타로 집권한 게 아니라, 다수 유권자의 열망으로 선택된 것이니까요.
이것들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시대의 업보인 모양입니다. 결국 어느 진보정치인의 지적처럼 이명박 시대에는 "운동화 신고 다녀야 할"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지난 노무현 정부 5년 동안에도 저는 평택이며, 새만금이며, 천성산이며, 한미 FTA 때문에 서울이며, 데모하러 참 많이들 다녔는데, 이런 생활은 청산하고 싶었는데, 도리가 없군요.
선생님이 '뜻밖의 선물'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이명박 시대는 역사에 특이한 방식으로 기여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지금껏 위태위태하게 지탱해왔던 어떤 선이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는 그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몰상식과 파렴치한 행보를 보여줄 것이 확실하고, 여러 가지 지표의 변동(이를테면 세계 금융 경제, 석유, 식량, 미국 경제 등등)으로 볼 때 그의 임기 내에 사회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 또한 높아 보입니다. 하긴, 이처럼 '비정상으로 정상을 지탱하는 체제'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결국 몰락과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실'을 흐림 없는 눈으로 응시하고,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역시 선생님께서는 무심결에 쓰신 표현인 것 같지만, '대안적인 사유와 실천'에 대해 많이 기울어있다는 느낌을 받네요.
대안적인 사유, 실천, 이런 것에 저는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예전부터 저는 토론 중에 상대방이 '그러면, 네 대안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지면 기가 죽고 말았지요. 그러나, 대안은 언제나 비판 담론의 성립 요건으로 항상 내장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대안 세계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 예측 능력과 정치공학을 전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간절하고 오랜 연애 관계의 대안이 결국 결혼이듯, 대안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넘어서려고 하는 대상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무르익으면 대안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이를테면, 선생님께서는 제가 자율이라는 언어의 타락을 지적했을 때 '자율의 기술'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맥락을 나름대로는 충분히 짐작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사회에서 자율의 기술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율이라는 언어의 타락은 충분히 이야기되고 있는 것일까요. 타락한 자율에 대해 충분히 비판하고, 공감하지 않은 뒤에 어떻게 이를 넘어서는 '자율의 기술'이 정초될 수 있을까요. 대안의 건설이란, 발상의 전환이나 멋진 아이디어와 같은 기지(機智)가 아니라, 토대와 상부구조 자체의 변혁을 전제로 하는 총체적인 활동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껏 세상을 책망하고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써왔습니다. 그래서 제 가까운 이들로부터 맨날 이런 어두운 이야기 주억거리지 말고 좀 '건설적인' 이야기 하라는 지청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두움을 그렇게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 다 알고 있어'라는 눈빛, 그것은 '교만'(hubris)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교육에 관해서도 저는 마찬가집니다. 열 살이 안 된 아이들에게 왜 '외국어'인 영어를 가르쳐야 하는지, 여기에 대해서 묻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건 하나마나한 이야기라 생각하니까요. 영어 교육의 범위와, 방법론, 평가 체제에 대한 이야기만 열심히들 하고 있습니다.
저는 토박이 언어를 육화하고 외국어를 타자로 분별할 수 있는 지성이 생겨난 뒤에야 외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가치론적으로 옳으며, 그렇기 때문에 방법적으로 효율적일 것이라 믿습니다(언어가 세계관이라는 명제에 대해 선생님은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셨습니다만, 이것은 넉넉한 지면에서 다뤄야 할 주제이기에 오늘은 상론하지 않겠습니다).
헤겔은 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학생들에게 '타문화에 대한 관용'을 배양하기 위한 기제로써 외국어 교육을 권장했다고 하지요. 저는 이것이 옳다고 봅니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견해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번짓수를 잘못 짚은 것으로 따돌려질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고종석 선생의 국어에 관한 에세이는 아마도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이 실린 <감염된 언어>(개마고원)나 <말들의 풍경>(개마고원)이라는 책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책들을 아주 잘 읽었습니다. 그 책들을 저본으로 선생님과 언어교육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선생님과 저는 비슷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 실천적 귀결은 역시 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다름의 결을 잘 찾아낸다면 제게나 독자들에게나 큰 배움이 되겠지요.
새학년에는 3학년 담임을 맡게 되는데,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한동안 호되게 감기를 앓았는데, 이젠 올해 농사 준비를 좀 해야겠습니다. 다음 번 편지 때까지 내내 건강하십시오.(우리교육 2008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