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콜비츠(Käthe Kollwitz)가 그린 그림에서 두 아이가 어머니의 치마폭을 부여잡고 외치는 소리가 바로 그림의 제목인 'Brot(Bread)!'이다. 그건 빵을 달라고 졸라대는 모습을 넘어 배가 고파 죽겠다는 아이들의 절규, 그리고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없는 엄마의 안타까운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림이 아니겠는가?
빵은 커녕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아이는 기아로 허덕이다 목숨을 잃는다. 프러시아의 산업혁명기와 제1차 세계대전이란 격동기를 거치면서 그 누구보다도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여인들이고, 한 여인으로서 콜비츠는 바로 그러한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살아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림과 판화로 남겼다.
여인들의 한 서린 삶의 모습은 어디 독일에서만 볼 수 있을까? 세계 어느 곳,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녀린 체구에도 불구하고 신을 대리하여 자식을 양육하여야 할 책임을 부여받은 여인들은 똑같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편소설『천둥소리』(김주영, 문이당, 2000) 역시 8.15 해방 시점부터 6.25 전쟁을 치르는 5년간에 걸쳐 길녀라는 한 여인이 갖은 풍상(風霜)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을 맞아 일본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이 자유 민주주의의 맛은 커녕 냄새도 맡아보지 못했으니,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인 족속들과의 피 튀기는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공산화의 가능성을 확신한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키면서 동족간의 이념적 갈등은 이제 너 죽고 나 살자식의 처절한 전장이 되고 말았으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그넘의 이념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아무 죄 없는 이 땅의 여인네들은 속절없이 전장의 한 가운데로 내몰리게 되었다. 경남 함양에서 경북 북부지방에 시집 온 길녀였지만, 뭔 얄궂은 운명인지 신랑은 결혼 후 6개월도 되지 않아 후사도 만들지 못한 채 병사하고 만다. 스무 살의 과부로 시모 박씨와 살아가는 길녀도 필경 여자일 수밖에 없음에 세 명의 남자와 관계를 갖게 되었으니...
작가는 고향에서 자라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재구성했다고 하지만, 신길녀가 만난 세 명의 남자는 서로가 유별나게 다른 배경에 성격 역시 독특하게 설정되어 있는 데다 전쟁을 겪는 양상도 전혀 달랐다. 해서리 일찌기 과부가 된 여인은 비록 여인으로서의 욕정에 이끌려 세 남자와 운명적으로 관계를 맺지만, 백정 출신으로 시가에서 머슴살이를 했던 황점개가 그녀를 아씨라 부르면서 진심 끝까지 상전으로 모신 데 비해, 떠돌이 사기꾼 차병조나 트럭 운전사 지상모에게 길녀는 욕정의 대상일 뿐이었으니...하지만 그녀가 단순히 일회성 관계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 떠난 남자들을 걱정하고 하릴없이 기다리는 순애보적인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게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쉬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소설의 제목인 '천둥소리'는 많은 이야기들의 변곡점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길녀에게 다가오는 큰 사건의 예고이자 새로운 사태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어느 경우이든 길녀에게 천등소리는 다시 허리끈 졸라매고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의 전장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신호라고 봄이 맞을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치달으면서, 길녀가 차병조와의 관계에서 난 아이를 만나러 갖은 고생 끝에 깊은 산중까지 찾아갔지만, 아이의 장래를 위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점개의 처의 말을 듣고 쓸쓸히 돌아서는 모습, 그리고 자신을 평생 진정으로 사모해 왔던 점개가 동료의 총탄에 맞아 죽는 순간 길녀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여보'라는 말이 나지막이 흘러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내에게 해 본 말이었다.
한국소설을 읽으면서 국어 사전을 시도 때도 뒤져 볼 수밖에 없었던 건 최명희 선생의 대하소설『혼불』이후론 처음인 듯한데...지금까지 제법 께나 읽어 왔다고 자부하면서(흐흐흐!) 나도 언젠가 꽤 그럴듯한 소설 한 편 써 봐야지 하곤 했었는데, 김주영 선생의 소설을 읽는 순간 그런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으니...어허! 이야기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