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중학교는 1960년대 초, 6.25전쟁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는 시기에, 남측의 삼덕제지로 인해 수암천이 심하게 오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의 필요성으로, 일강점시 아사이하교가 존재했었다. 북측에는 금성방직이 위치해 있었다. 당시 사회는 실업자로 넘쳐나고, 일본인 2세들이 간간히 있었으나 천민으로 동화되었다. 부유층 일부는 처첩을 두었으며, 남아를 외부에서 낳아 데려오는 사례도 있었다. 안양역 북측에는 1.4후퇴 시 폭파된 기차 바퀴가 널려 있었고, 석탄 하차 지역 주변은 도시 내에서 가장 시커먼 지역이었으며, 석탄가루 먼지가 많았다.
1947년 미군정 시대에 안정호는 안양교육 촉진위원회의 시설 확충을 위해 금 5만원을 기부하고, 안양중학교 설립을 위해 1만 4천 평을 기증했다. 조선빠이루직물공업 안양공장 관리인 徐丙선씨와 서울 곽영근시가 토지 3만 8천 평을 시흥군수 한씨를 통해 기증했다.
미군정 시에 건축된 석조 본관은 교무실과 안양공고가 사용하는 매우 우수한 건축물이었다.
전쟁 후유증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농가가 있었지만, 중학생들은 도시락을 가지고 와 조개탄 난로에 올려 데워 먹는 즐거움이 있었다. 학생들은 버스를 간간히 이용하거나 안양, 의왕, 군포, 수암면 등에서 걸어서 등교했다. 중학생은 주로 초등학교 중위권 이상만 모집했으며, 교육열이 부진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먼 거리 거주자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겨울에는 염색한 검은색 교복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주로 신었으며, 반에서 1~2명은 가죽 부츠를 신었고, 가격은 2불 정도였다. 농촌 학생들은 집에서 농사를 돕는 경우가 많았다.
1959년 서측 목조 2층 교실에서 1학년은 3개 반으로 구성되었고, 고백환 교장은 유능했지만 좌익 경력으로 인해 시골 중학교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홍찬범 영어 교사는 일본식 발음으로 "This is a book"을 가르쳤다. 체육 수업은 제식 훈련과 육상을 주로 했으며, 송구 반도 있었다. 사회 수업에서는 역사 연대표를 두루마리로 그려오는 방학 과제가 있었다. 실과 수업에서는 유리를 동그랗게 잘라 오는 숙제가 주어졌다. 미술 수업에서는 손 그리기를 첫 시간에 했으며, 동양화 전공인 미술 교사는 미술반을 지도해 우수한 학생은 서울예고에 진학할 정도였다. 음악반에는 밴드부가 있었다. 체육 교사는 서초 양재동 출신으로 서울사대 체육과 출신인 권광옥 교사가 있었으며, 매우 낡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송구를 열심히 지도하는 교사도 있었다. 체육 교사 별명은 '0께'로 불렸다.
안양공업고등학교에는 염직과가 특별과정으로 있었으며, 미국 원조로 들어온 실습 시설이 우수했다. 김대규 학생은 휴식 시간에 농구를 열심히 했다. 염색과 우수자는 서울공대 염직과에 무시험으로 입학했고, 김대규는 유명 소설가 이무영의 영향으로 1960년 박두진 시인이 교수로 있는 연세대 국문과에 진학했다. 이후 조병화의 지도를 받았다.
소풍은 도시락과 사이다를 지참하고, 과천향교에 군대식으로 걸어서 구령을 맞추며 다녀왔다.
4.19 혁명 후 사회 불안으로 5.16 혁명이 일어나자, 군 미필 교사는 집에서 대기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삼덕제지는 일본인이 주로 사행천 구거지에 지은 공장으로, 종이 찌꺼기가 수암천에 항상 널려 있었다. 피난민 아주머니는 종이 찌꺼기를 말려 연료로 사용하면서 경부선 철도 동측의 삼각형 움집에 살며, 아픈 아들을 안양중학교에 보냈다. 금성방직 정문 건너편 안양로 노변 후면에는 디자인이 있는 2층 여관이 있었고, 주변에는 소규모 술집이 있어 상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안양로에서 학교로 들어가는 좌측 코너에는 후일 경희대 약대를 졸업하고 개업한 후 안산시로 이전한 이윤희졸업생의 모친이 운영하는 샛별 찐빵집이 있었다. 졸업 앨범이나 반별 단체 사진은 없었다. 윤국노 국회의원(11, 12, 13대 삼선의원)과 유영하 변호사, 22대 국회의원이 안양중학교 출신
모든 공감:
14회원님, 문화영, Charles Lee 및 외 11명
첫댓글 국민학교 6학년때 우리반에 금성방직 공장장 아들인 김동명,과장아들인 김학수,김성웅(나중에 성식으로 개명)
셋이 있었고,동명이 집은 금성방직 사택이었는 데,안양중학교 담을 넘어 들어가 놀았던 기억이 있네.
그당시 TV가 있어서 AFKN방송을 보곤 했지.
어릴때는 안양중학교 운동장가서 자주 놀았지.
59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안양중으로 하려고 원서도 쓰고,사진도 찍고 했는데
우리 담임이었던 이형기 선생님(이수형 형님)이 서울,경기 중에 한곳을 가라고 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울중에 입학했지.
선배중에 김관학 형인 김창학선배는 안양공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 염색과에 입학해서 졸업후
대림동에 있던 영풍산업에 들어가 임원으로 퇴직했네.
나와 같이 이북 피난민이라 어리적에 삼덕제지앞 철도 관사에서 같이 살기도 했네.
옛날생각을 떠올리게 해주어 고맙네.
다음번에는 우리나라 축구선수 레전드인 김용식씨에 대한 얘기를 아는 대로 써 보겠네.
이윤희에 대한 이야기도 한번 해보고.나하고는 특별한 관계였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서 너무 아쉬웠네.
아주좋은 추가이야기 감사하네
옛날을 회상하게 하는 좋은 이야기 잘 들었네
우리 집은 양지말 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냥 안양중학교를 갔네
공부는 뒷전이고 친구들하고 놀러 다닌 것 밖에 생각이 안나고
안양국민학교 츨신들이 영등포 장훈중학교를 간 친구들도 있었네
정말 까마득히 먼~~~~옛날 이야기네
권광옥 선생님의 동생 권 승욱 한선규 선생님의 아들 한 원종
한선규선생님과목???
한문으로 알고 있는데 확실한지는 의문
나도한문으로 기억나네 !
국어선생님 존함?
홍참범은 영어 선생님
수학선생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