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종 (中宗) |
자 낙천(樂天). 휘(諱) 역(懌). 성종의 2남. 연산군(燕山君)의 이복동생.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 비는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제1계비(繼妃)는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제2계비는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는데, 1506년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에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연산군 시대의 폐정(弊政)을 개혁하였으며, 1515년(중종 10) 이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중용하여 그들이 표방하는 왕도정치를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개혁방법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또 조급하게 서둘렀기 때문에 훈구파(勳舊派), 즉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종 자신도 조광조 등의 왕에 대한 지나친 도학적(道學的) 요구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1519년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의 모함에 따라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그 뒤 훈구파의 전횡(專橫)이 자행되었으며, 또 1521년에는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일당이 처형되었다. 1524년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파직, 1525년 유세창(柳世昌)의 모역사건, 1527년 1527년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심정·유자광(柳子光)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 애매한 경빈박씨(敬嬪朴氏)와 복성군(福城君)이 쫓겨나 원사(怨死)하는 등 훈구파 상호 간의 정권쟁탈전이 극심하게 벌어져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1531년 김안로의 재등장으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는데,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한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 형제가 등장하여 1537년(중종 32) 김안로를 숙청하였으나, 이번에는 윤원형 일당의 횡포가 시작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라의 남북에서 외환이 그치지 않아,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三浦倭亂), 1522년 동래(東萊) 염장(鹽場)의 왜변(倭變), 1524년 야인(野人)의 침입, 1525년 왜구(倭寇)의 침입 등이 잇달았다. 특히 삼포왜란 뒤 이 난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종래 쓰시마에서 파견하던 세견선(歲遣船)과 조선정부에서 하사하던 세사미두(歲賜米豆)를 반감하는 동시에 항거왜의 삼포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의 내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그리고 1522년 5월 추자도왜변(楸子島倭變)과 동래염장(東萊鹽場)의 왜변, 1525년 9월 전라도왜변 등이 빈발하고, 중종 말년인 1544년 4월에는 왜선 20여척이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침입하여 인마(人馬)를 약탈하자 조정에서는 기왕의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금지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여연(閭延)·무창(茂昌) 등 4군(四郡)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六鎭) 지대에는 순변사(巡邊使)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義州山城)을 수축하여 북방방어에 노력하였으며, 1524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적극적으로 축출하였다.또한 왜구의 침입이 있을 때 이를 방어 하기 위해 의논을 하던 임시 합좌회의기관인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뒤에 영설(永設) 합좌기관으로 발전하여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기관화되었다. 이밖에도 한때 무학(武學)을 설치하였으며, 또한 편조전(鞭條箭)·벽력포(霹靂砲) 등을 제작하여 외침에 대비하는 등 국방력강화에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불안과 함께 국내의 군사질서가 허물어져 방군수포(放軍收布) 등이 행하여지는 등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의 모순들이 노출되었다. 치세 초기에는 미신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고, 과거제도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향약(鄕約)을 권장하여 백성들의 상조(相助)정신을 고취시켰다. 또, 그 시기에 《소학(小學)》 《이륜행실(二倫行實)》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속록(大典續錄)》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 《삼강행실(三綱行實)》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문속집집람(吏文續集輯覽)》 《대동연주시격(大東聯珠詩格)》 등 다방면에 걸친 문헌이 편찬 ·간행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이와 같은 문화발전을 위한 정책은 거의 정지되었다. 다만, 치세 말기에 군적(軍籍)의 개편과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에 대한 양전(量田)을 실시하였으며, 진(鎭)을 설치하고 성곽을 보수하는 한편, 평안도 여연(閭延) ·무창(茂昌) 등지의 야인을 추방하는 등 국방정책을 추진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저화(楮貨)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1522년 2월에는 악포금단절목(惡布禁斷節目)을 반포하여 악포의 유통을 막고, 두승(斗升)을 새로 만들어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한편,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조하고, 지방의 사실(史實)을 기록하기 위하여 외사관(外史官)을 임명하였으며, 1540년(중종 35) 역대 실록(實錄)을 인쇄하여 이를 사고(史庫)에 보관하게 하였다. 농업과 관계된 과학기술도 발달하였다. 즉 관천기목륜(觀天器目輪)·간의혼상(簡儀渾象)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 2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泥豆錫)·정청(汀靑)의 조작법과 훈금술(燻金術)을 습득해오게 하였으며, 1536년 창덕궁 안에 보루각(報漏閣)을 설치하여 누각(漏刻)에 관한 일을 보게 하였다.1544년 11월 14일 세자인 인종에게 양위하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재위 39년 만에 붕어(崩御)하였다. 중종의 치세에서 처음에는 어진 정치를 펴는 데 상당히 의욕적이었으나, 기묘사화 이후 간신(奸臣)들이 판을 치는 통에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여 볼만한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능은 경기 고양(高陽)으로 하였다가 1562년(명종 17) 광주(廣州)로 이장하고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