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차-1 경북 안동 일원(2005. 4. 9~10)
1. 안동 봉정사 2. 안동 이천동 석불상(제비원) 3.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4.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과 신세동 임청각 5. 안동 태사묘
6. 안동 도산서원 7. 퇴계종택과 퇴계묘소
7. 퇴계종택과 묘소 영상자료
7. 퇴계종택과 묘소 사진자료
ㅇ 퇴계종택
[퇴계종택 전경]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년-1570년)선생의 종택이다. 정문에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1926년-1929년 사이에 선생의 13대손 하정공이 옛 종택의 규모를 따라 신축하였다.
본래 온혜리에 있는 퇴계선생 태실과 생가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퇴계 문중의 종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인근에 이웃한 집들이 별로 없고 고즈넉하여 정아한 느낌을 준다.
[퇴계종택 솟을대문과 행랑채]
[안에서 본 대문 방향]
[퇴계 종손이 거처하고 있다(마루에 앉아 계시는 분)]
퇴계 이황 선생이 50줄에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 상계에 내려와 이제야 학문에 전념할 수 있음을 노래한 시이다. 상계는 원래 청량산 인근의 온혜동으로, 1850년경에 지금의 위치인 토계동으로 옮겼으며, 80년 전에 소실된 것을 1929년 후손이 복원하였다. 현재 이곳은 종손 이근필 씨가 집을 지키고 있어 관리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건물로, 총 34칸으로 이루어졌다.
[허락을 받고 촬영에 임했다]
[퇴계종택 안채]
[퇴계종택 우측에 있는 추월한수정]
우측에 있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추월한수정은 '가을 달과 찬 물이 함께 하는 정자'라는 의미를 갖는 것인데, 아마도 선생이 '노년을 궁벽진 한촌에 엎드려 만족하며 살았다'는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추월한수정 마루에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란 현판 등이 걸려 있다. '도리를 닦는 학문의 근원이 된 곳'이라는 뜻이니, 이곳 '계상서당'에서 퇴계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처음 본격적으로 길러지기 시작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추월한수정 뒤뜰(매화가 만개해 있다)]
[대문 밖 퇴계천변에 새겨놓은 선생의 자경문]
[퇴계선생의 인품을 나타내듯 퇴계천에 백로가 지키고 있다]
ㅇ 퇴계 묘소
[이황 퇴계 선생의 묘소]
퇴계는 1570년(선조 3년) 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예를 갖춘 성대한 장례를 피하라는 뜻)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한 바와 행적을 간단하게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12월 8일 한서암에서 앉아서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묘소는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 가량 떨어진 토계동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 위에 있다.
문인록에 언급된 바와 같이 선생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은 정부의 방침에 의하여 오늘날의 국장인 예장으로 치루어졌으나 성현의 묘소로서는 초라한 편이다.
퇴계의 유언에 따라 묘비의 앞면에는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라고 써있고, 뒷면에는 선생의 자명과 문인 기고봉이 지은 묘갈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통상 비석을 배치하는 방법과 달리 특이하게 동쪽을 등에 지고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비석의 윗부분에는 좌우대칭의 구름무늬 한가운데 앞면에는 태양이 뒷면에는 반달이 그려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1906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묘소 앞으로는 동자석이 좌우로 자리잡고 있고, 멀리는 망주가 벌려 서 있으며, 더 앞쪽으로 나아가서 문인석이 좌우로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