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의 종교적 카리스마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생불로 불린 비구니 있을 만큼 수행·지성 겸비
여성 출가자, 역사 기록처럼 사회적 약자로만 볼일 아냐
윤씨, 남성 유교 지식인 사회에서도 정업원 주지 직 유지
남성들에게까지 귀의 대상된 사실 스님의 감화력도 선명
앞선 3회의 지면을 통해 정업원과 비구니 승단을 살펴보는 동안
조선시대의 여성 특히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 의지할 남성을 잃었을 때
출가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물론 사실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모든 여성의 출가가
오로지 그러한 계기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며,
또 그러한 계기에 의한 출가였다 할지라도 출가 여성을
정치적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만 조명할 일도 아닐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인물이 유자환(柳子煥, ?~1467)의 부인 윤씨이다.
유자환의 부인 윤씨는 정업원의 역대 주지 중 한 명이자
단종 비 정순왕후(법명 혜은)의 사형되는 이로서 지난 번 글에서도 언급했던 바 있다.
유자환은 문종 1년(1451)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고,
단종 1년(1453)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 참가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록된 후 세조의 신임을 받으며
도승지와 대사헌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맡았던 문신이었다.
예종 때 ‘남이의 옥’과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주도한 것으로
잘 알려진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이 바로 유자환의 서제(庶弟)
즉 서모(庶母)로부터 본 이복동생이다.(‘성종실록’ 27권),
윤씨는 세종 때의 문신 윤형(尹炯, 1388~1453)의 딸로서
남편인 유자환의 사후 비구니가 되었으며,
성종 4년(1473) 당시에는 정업원의 주지로 재임 중이었음이
‘실록’에 기록되고 있다.(‘성종실록’)
그런데 이 기사들에 씌어진 윤씨의 행적이 눈길을 끈다.
유자환의 졸기에 따르면 윤씨는 “유자환이 살아 있을 때부터
비구니들과 은근히 교류하였고[潛結尼僧], (유자환이) 죽자…
발인하는 날 저녁에 몰래 도망하여 가지 않고,
마침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여러 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여러 승려들[僧]을 면대(面對)하여 경(經)을 받거나
유숙(留宿)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죽은 남편을 위하여 복(福)을 드리는 것”으로 설명하였다.(‘세조실록’)
또 성종 4년의 기록에는 “윤씨는 유자환이 살아 있을 때에도
반목하여 서로 맞지 않아 금슬이 화합하지 아니하여서, …
식자(識者)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아비가 비록
지아비 노릇을 못하더라도 지어미가 어찌 지어미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였다”고 한다.(‘성종실록’)
이로 보건대 윤씨와 유자환의 부부관계는 유자환이 살아있을 때부터
애정 깊은 것은 아니었으되, 그 일차적인 이유에 대하여
당대에도 남편인 유자환이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데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씨 또한 고위직 관리의 딸인 사족 출신 여인이었음에도,
여성에게 점차 보수화되어가는 시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불성실에 대해 관대하지만은 않았던
녹록치 않은 성정의 여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강인한 윤씨의 성정이 결혼생활의 불우함을
종교적 교류와 활동으로 극복하게 하였고,
마침내 남편의 사후 어느 누구의 판단이나 강요가 아닌
오롯이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자신의 출가를 결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개인의 신심과 신념에서 비롯되었을
그 출가의 목표는 마침내 애증어린 남편의 추복을 위한
수행으로까지 이어지며 윤씨의 종교성을 믿음과 실천
모두에서 더욱 깊이 있게 했을 것이다.
성종 대 이후 여성과 불교에 대해 한층 더 불친절해진
남성 유교 지식인 사회는 자신들의 기준에 걸맞지 않은
윤씨 같은 여성이 정업원의 주지라는 사실을 마뜩치 않아 하며
윤씨와 정업원 모두를 탄핵하고 나섰지만,
오히려 그러한 강인한 주체성과 종교적 열망을 지닌 인물이었기에
윤씨는 비구니 승단의 존경을 받으며 당당히
정업원의 주지 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럼으로써 윤씨는 스승인 전 정업원 이씨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자신의 사제(師弟)인 혜은 스님
즉 단종 비 정순왕후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이러한 윤씨의 적극적이고 단호한 신심과 실천은
조선 전기 비구니 스님들이 지니고 있던
종교적 카리스마의 일단을 보여 준다.
윤씨가 스승 이씨로부터 상속받아 사제 혜은에게 물려준
동부 인창방 소재의 가옥과 전답은 사실(師室) 구씨의
기일과 제사를 봉행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세종실록’에 ‘비구니 사실[尼僧師室]’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성균관 생원 유이(柳貽) 등이 상소하였다.
“효령대군은 왕실의 의친(懿親)으로서 사설(邪說)에 빠져서
상문(桑門 : 불교)에 무릎을 꿇고 제자의 예를 공손히 행하며, …
또 나이 든 비구니 ‘사실’이라는 자[老尼號曰師室]가
글을 읽을 줄 안다고 하며 미혹한 이야기[幻化之說]를 만들어
무식한 부녀들을 우롱하고 허탄망령한 경지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에 사족 남성과 여성들[士男士女]이 휩쓸려 귀의하여
모두 ‘효령대군은 생불(生佛)이다.
사실(師室) 비구니 스님도 생불이다’라고 말하며,
남자는 승려[僧]가 되기를 원하고
여인은 비구니[尼]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종실록 4권’)
인용문이 기록된 세종 23년(1441)은 유자환의 처 윤씨가
정업원 주지로 재임한 성종 4년(1473)보다 32년이 앞선 시기이므로
윤씨의 스승 이씨가 그 제사를 모시면서까지 받들었던
사실(師室) 구씨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생각된다.
인용문의 용법으로 볼 때 ‘사실’이라는 호칭도 단순히
이씨의 스승이라는 보통명사적인 의미를 넘어,
당대인 다수가 자신들의 스승이라는 취지로 불렀던
고유명사적인 명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이 글이 효령대군의 불사 행적과 사실 스님의 존재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성과 종교적 감수성을 겸비하며 대중을 사로잡았던
사실 스님의 깊은 감화력과 그에 대한 일반인들의
높은 추앙의 열기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 전기의 비구니 스님들은 남성 유교 지식인들에 의해
씌어진 역사 기록에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마이너한 존재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상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에게까지 귀의의 대상이 되며
정치적으로 가장 높은 신분의 남성인 효령대군과 동렬에서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22년 8월3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