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착(無着, 아상가/Asanga, AD 310~390) 보살 이야기>
무착 보살
무착(無着, Asanga)은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중관사상을 펼친 용수(龍樹)로부터 150여년 후인 4~5세기 경(AD 310~390?) 등장해
대승불교의 유식론(唯識論)을 체계화한 불교사상가이다.
무착의 본명은 아상가(阿僧伽/Asanga)이며,
훗날 유식불교(唯識佛敎)를 대성시킨 세친(世親, 320~400?)의 형이고,
간다라 지방(현재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방)의 브라만 집안 출신이다.
처음에는 부파불교시대 소승의 화지부(化地部)에 출가해,
빈두라(賓頭羅, Pindola)를 따라 소승의 공관(空觀)을 닦다가,
뒤에 대승불교 유식파의 개조 마이트레야(Maitreya/미륵)의
가르침을 받아 인간의 심층의식에 기초한 마음작용과
언어활동을 분석 조직한 교설을 발전시켰으며,
대승불교의 모든 경론을 연구해 유식불교를 확립시켰다.
<화엄경>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實從生 無法而不造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 오온실종생 무법이부조)
마음은 마치 화가와 같아서 여러 가지 사물을 (제 마음대로) 그려낸다.
이렇듯 불교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을 중요시했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공부를 강조해 왔다.
심지어 그 마음작용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철학적 체계를 세우기까지 했다.
그것이 중관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유식학파(唯識學派)이고,
그 유식학파를 확립시킨 인물이 무착이다.
유가유식학파 최대 명제를 나타내는 ‘유식(唯識, vijnapti-matrata)’이라는 용어는
마음작용(vijñapti)과 ‘오직(mātrata)’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오직 식(識-마음)만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뜻이다.
이 말은 다시 ‘유식무경(唯識無境)’으로 표현되는데,
“경(境-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데, 오직 식이 경으로서 현현한다.”
혹은 “이들 모든 식은 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식이다.” 등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세친도 이런 유식적 사고를 계승해 자신의 저작인 <유식이십론>에서
‘그것은 유식이다. 무경(無境)으로 현현하기 때문에’ 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식무경(唯識無境)이 “오로지 식만 있고 경은 없다”고
하는 말이지만 결코 외부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외적인 사물들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주변에는 비슷하게 많은 대상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왜 없다고 하는 것일까?
주변에 많은 사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특정한 대상만 마음에 끌리는 경우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대상일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인식의 결과를 가질 수 있다.
A는 좋아하는데, B는 그걸 싫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같은 대상일지라도 인식주관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은,
대상이 그렇게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는 말이다.
이들은 용수를 중심으로 하는 중관불교가
너무 공(空)을 강조한 나머지 모든 입장을 제거하는
허무론에 치우쳐 있기에, 그 약점을 극복하고자
모든 것의 입지 기반으로서 식(識-마음)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것이,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 뿌리들 두고 있으며
그 마음이 변화돼 나타난 것으로 보는
유식현상학(唯識現像學)을 수립했다.
즉, 세계는 우리들 인식의 표상(vijnapti)으로서의 세계일뿐이라는
유식(唯識)을 천명한 것이다.
세계는 우리 마음이 그려낸 표상(表像)일 뿐이다.
외부 대상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언어나 사상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고 그 마음은
다시 심층적인 마음의 씨앗인 아뢰야식에 저장돼 있다가
다시 외부 대상으로 표상된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들은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윤회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우리의 근본식인
아뢰야식을 공으로 비울 때라야만 가능하다.
아뢰야식이 공으로 전환할 때 우리 마음이 정청해져서
그때 가서는 사실 자체, 현상 자체, 사태 자체가 여실하게 보이며,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의 행보를 내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들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마음을 비우게 되면
자연히 모든 욕심에서 떠나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청정해져
사태 자체를 올바로 직시할 수 있으며
거기에 따라 어디 치우침이 없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말로만 지껄일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한 경지에 이르려면 수행이 필요하다.
무착이 미륵보살을 만나는 예에서 보듯이
이들 유식의 구도자들은 피나는 수행을 거쳐 일가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유식학파라는 말 외에, 수행을 강조해서
유가사(瑜伽師 Yogacara), 즉 요가 수행자라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중 미륵(彌勒, Maitreya)이 실존 인물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많으며,
대체로 실존 인물이 아닐 것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다만 유식학파의 교설을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격상시키기 위해
이상적인 보살 중에 한 사람인 미륵보살을 자파(유식학파)로
불러들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는데,
확실한 것은 아직까지는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무착과 세친은 유식학파의 체계를 공고히 다진
실존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개방된 터전에서 인생의 의미를 관조하며
해탈의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내면의 빛을 안겨다주었다.
사실 그들은 실제 보살의 계위에 올랐다고 전해질 정도로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낸 인물들이다.
무착과 세친, 이들은 인도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한
굽타왕조 시대(Gupta dynasty, AD 320~550년경)의 인물들이다.
당시는 산스크리트어가 고도의 문법 체계를 갖춘
공식적인 철학용어로 자리를 잡아서
산스크리트 문헌이 백화난만한 시기였다.
거기에 따라 사상의 자유 또한 확립돼,
여러 사상들이 거침없이 표현되고, 인도 육파철학(六派哲學)이
공고히 체계를 잡았으며, 그 밖의 여러 가지 종교나 철학도
자신들의 사상을 산스크리트어로 정리해 나갔다.
이에 따라 불교도 고도의 철학성을 갖추고 발전하게 됐으니,
중관학파는 용수(龍樹) 이후 여러 논사들이 출현해 발전을 이룩해나갔고,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무착과 세친 형제가 나타나
자신들의 사상을 꽃피우게 된 것이다.
무착(無着)이 대승불교에 귀의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무착은 소승(화지부)의 교리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나머지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을 뵙고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바위가 패어져 구멍이 날 정도로,
부드러운 새의 깃털이 바위를 스쳐 그 바위가 편편하게 될 정도의
오랜 시간 동안 수행을 쌓고서 미륵보살을 만나고자 하지만
그것도 역부족인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무엇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가득해
미륵이 모습을 나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가던 무착은 다 죽어가는 개의 모습을 보게 됐다.
섬찟! 놀라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수많은 벌레들이 우글거리며
상처 난 개에 달라붙어 있는 끔찍한 현장이 전개되고 있었다.
벌레들은 벌써 개의 사지(四肢) 일부를 먹어 악취가 진동했고
감히 쳐다보는 것조차 역겨울 정도였다.
그 순간 무착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원초적인 목소리,
즉 자비의 목소를 듣게 된다.
우선 죽어가는 개를 살리기 위해 벌레들을 떼어놓으려고 하는 찰나,
아차! 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벌레들, 그들이 한갓 미물에 불과할지언정
그들 역시 하나의 생명체 아닌가. 그들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다.
그는 개와 벌래, 그 두 생명들을 하나도 해치지 않고
살리기를 작정하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칼을 구한 다음, 칼로 자신의 넓적다리를 도려내어
그 살을 먹도록 떼 낸 후 개에게 달라붙은 벌레들을 혓바닥으로 핥아 그곳으로 옮겼다.
순간 그 먹고 먹히던 처참한 현장이 사라지고
거기서 찬란한 광명을 발하면서 미륵보살이 현신했다.
“내가 항상 그대 곁에 있었건만 네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나를 보지 못하더니 이제야 나를 보는구나. 내 옷자락을 잡아라.”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무착은 미륵보살을 따라 도솔천에 올라가
그곳에서 대승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그 가르침대로 사유하고
수행한 결과 깨달음을 얻고, 공(空)의 도리를 체득하게 된다.
그 공의 이치에 따라 아무런 것에도 집착함이 없었으므로
무착(無着, Asanga)이라 불리어졌다고 하는 설화가 전한다.
그리하여 실존성이 다소 의문시되는 미륵이 설했다는
미륵의 여러 저술도 사실은 무착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을 정도로
유식학파에서 그의 위치는 확고해, 가히 그 개조라 할 만하다.
그런데 미륵(彌勒, Maitreya)이 가공의 인물이라면,
미륵의 저서로 알려진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변중변론(辨中邊論)>, <금강반야경론송(金剛般若經論頌)>,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도
무착의 저서로 봐야 한다.
그리하여 무착이 편집했다고 전하는 위의 5대부론(五大部論)이
유식학의 가장 핵심적인 논전으로 평가받아
무착은 유가사상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세친(世親), 호법(護法-6세기), 계현(戒賢 7세기) 등의
논사로 계승됐다.
그 외에도 유식설을 조직 체계화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비롯해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ㆍ<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등을 저술해,
대승의 보살로 존칭되고 있다.
실존인물로 보살 칭호를 받는 사람은 마명, 용수, 무착, 세친 정도이다.
무착의 주저 <섭대승론(攝大乘論)>도 가히 유식철학의 개론서라 할 정도로
유식의 주요 개념을 총 망라하고 있을 뿐더러 유식의 가르침이
얼마나 타당성 있는 도리인가를 설득력 있게 전개해내고 있다.
<섭대승론>의 원명 마하야나 상그라하는
대승(大乘)을 포섭한 논(論)이라는 뜻이다.
무착이 중기 대승불교 유가행파 유식설 입장에서
이에 앞선 <반야경>이나 용수(龍樹)의 중관사상, 또는 <해심밀경>,
그리고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대승장엄경론> 등
유식불교 이론들을 받아들여서, 이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조직화한
대승불교 개론서이다.
내용은 근본식(根本識)인 아뢰야식, 유식(唯識)의 이치, 6바라밀행,
보살의 수행계위로서의 십지(十地), 대승계(大乘戒), 삼매의 방법,
보살의 무분별지와 무주처열반 등에 관한 것이다.
<섭대승론>에서는 극락에 태어나고 싶다고 원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은 별시의(別時意)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한다.
‘별시의(別時意)’란 부처님이 게으른 중생을 수행에 전념시키기 위해
실제로는 먼 미래의 별시(別時)에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즉시(卽時)에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결국 부처님의 방편 유인의 설법임을 말한다.
이것은 <섭대승론>이 유식철학의 입장에서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그 후 유가행파의
일관된 견해가 됐다.
현재 <섭대승론>의 산스크리트본은 산일돼 없지만
무착의 저술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6세기 중엽 인도 출신 학승 진제(眞諦)에 의해
<섭대승론>이 한역됨으로써 중국에서는 섭론종(攝論宗)이 생겼다.
그리고 무착이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80게송을 받아왔다는데,
이 게송을 바탕으로 <금강경>을 풀이하여 <금강반야론> 2권을 지었다.
그리고 동생 세친은 형에게서 <금강반야론>을 전해 받고서
이 책의 뜻을 더 밝히기 위해 다시 <금강반야바라밀경론> 3권을 지었다.
이 두 책의 경론을 구별하기 위해서 무착이 지은 것을 <무착론>이라 하고,
세친을 천친(天親)이라고도 부르기에 세친이 지은 것을 <천친론>이라 부른다.
그런데 동생 세친(世親)이 처음에 설일체유부로 출가한 후
소승불교에 심취해 논리적으로 철저한 <구사론>을 지어
인도 전역을 휩쓸고 다니면서 대승을 비방했었는데,
이런 동생을 제도하려다가 병이 난 무착은 대ㆍ소승을 따지지 말고
세속적인 형제로 만나자는 제안을 해 만나게 됐다.
이 자리에서 동생은 형 무착의 놀라운 대승 법문을 듣고는 회심해
대승을 비방했던 혀를 자르려 했고,
이에 형이 “대승을 비방했던 그 혀로 대승을 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해서 대승으로 귀향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그 결과 세친은 유식철학의 근본교설이라 불리는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과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삼자성게(三自性偈)> 등 많은 대승 논서를 짓거나 해석을 가해
유식철학의 체계를 굳건히 다져 유식학을 대성시켰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