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절)
기독교가 예수교인가 바울의 기독교인가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교훈으로 말씀하시는데 바울은 교리를
말하기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베드로나 요한 등은 바울의 뒤를 이어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지만 베드로는
바울과 같이 구약으로부터 흐르는 그리스도의 맥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뒤늦게 그 이름만큼이나 반석복음인 베드로 전후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예수의 이미지에서 진리 안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바뀌는 기간이 깁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만 믿고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예린이라 부릅니다.
아닌 건 아니지만 아직도 갈 길이 천리이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목회한 분께도
저는 거침없이 당신은 예린이라고 바로 말해 줍니다. 고생 덜 하라는 배려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필두로 바울서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몸이 믿는 원리가
체화되지 않아서 아무리 이웃사랑을 외쳐도 그건 소귀에 경 읽기일 뿐입니다.
갈라디아교회는 요즘 말로 하이브리드 신앙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강조한 바울을 천사처럼 대접하다가 그만 유대인이 로마 정부로부터
우대를 받는 세상의 풍조를 보고는 슬그머니 하나 둘 할례를 받기 시작한 겁니다.
거짓 선생들은 이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 저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하고 이를
합리화시켰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5:7)하고 호통을 칩니다.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아
의를 얻으려고 하는 순간 그리스도에게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고 맙니다(갈5:4)
지금의 설교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열심히 설명해 놓고는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는 법 정신의 설교가 허다합니다.
대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목사들은 거의 영과 육신의 법을 오가는
하이브리드 신앙입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복음, 그 피로 죄 사함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묻고 싶은 말은 진리 안에 자유를 얻어 본 적이 있냐는 겁니다.
죄로부터 자유와 진리 안에 자유는 전혀 느낌과 부담이 다릅니다. 죄로부터 자유는
양심의 자유겠지만 진리 안에 자유는 영을 좇아 살아가는 성향의 의무를 지게 됩니다.
바울의 자서전과 같은 고린도후서를 소화 흡수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진리로 자유를
얻은 자의 비밀과 영광의 능력을 갖게 될 겁니다. 지금 주님은 육신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영이신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고 자유를 얻어
거울을 봄 같이 주의 영광을 보고 형상을 얻음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습니다(고후3:17-18)
제가 교회를 섬길 때 하이브리드 신자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성경공부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말씀을 지식으로 깨닫고는 나팔을 불지만 몸의 행색은 여전히 외모로 꾸미며
세상의 것을 좇고 있는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기를 참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열심도 있고 헌금도 잘하고 전도도 잘하고 목사에게 대접도 잘 하는데 그만 그리스도를
놓쳐 버리고 자신의 육신의 행함으로 수고하는 모습(계2:4)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손은 발락의 뇌물을 향해 내밀고 있는 발람의 길을 걷는 모습(계2:14) 살았다 하는
이름만 있을 뿐 실상은 죽어 우중충한 내면을 드러내는 모습(계3:1)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심령의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고 육신의 형통에 룰루랄라하는 모습들(계3:17)
이런 유형들이 바로 제 앞에서 알짱거리던 꼴불견이며 또 저의 과거 행적들입니다.
2,000년도 초에 주님과 함께 멍에 매는법과 생명 바꾸는 원리를 터득하고 득의양양
하게 이제 주님께 가는 것이 좋겠다고 방정을 떤 적이 있는데 만약 그랬다면 진리로
자유는 얻었으나 사랑의 종노릇하는 법은 배우지 못해 우스운 이야기로 아버지 집에
그대로 갔다면 사랑의 유치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 되었을 겁니다. 지금도 사랑의
화신에 이르려면 아득한데 그때는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주의 생명이 내 몸에 나타나고
십자가의 도를 짊어질 때마다 주의 생명이 육체에 나타나 암이든 정신병자이든 대놓고
손을 얹든지 기도하든지 했으니 이건 완전히 벌거벗고 칼을 차고 돌아다닌 망나니였죠.
20여년 더 살게 하시고 호된 기합으로 육체의 수고를 하면서 혹독한 추위나 더위에도
싱긋 웃으며 ‘송축해 내 영혼 내 영혼아’ 찬양할 수 있음은 오로지 주의 긍휼입니다.
중국만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온 세계를 사이버로 공략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마귀도
십자가의 도는 뒤로 감추고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물탄 막걸리처럼 혼잡하게
섞고 있습니다(고후2:17) 지금 제 글을 읽고 속이 부글부글하거나 심드렁하신 분은 이미
마귀의 하이브리드 전쟁 속에 빠져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영국국교인 성공회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라고 하지만 실용주의 철학에 의한 번영주의 신앙에
함락이 된 미국교회를 배운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하나님과 세상의 복을 겸하여
받아 누릴 수 있다고 하면 하이브리드 곧 음녀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교수와
대판 논쟁을 하고는 너희는 영어 잘하는 것 외엔 배울 것이 더 없다 하고는 학위 점수
6점을 남기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과연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지는지 그 원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회개가 정말 영이신
주께로 돌아가서 죄와 사망과 자신의 육체의 위신과 체면과 자존심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언제 어디서나 기탄없이 주의 영으로 자신의 믿음을 시인하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이신 아버지를 좇기 위해 주님을 붙잡고 그 동선을 따라 올라가며
탄식하면서 영의 목마름으로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구원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