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의 씨 / 고동주
가을이 오붓하게 익어가는 어느날 동백의 섬 고향마을을 찾았다.
밭 언덕마다 줄지어 늘어선 동백나무 들은 성장이 둔한 탓으로 어릴 적에 눈에 익은 그대로인 듯하여 더욱 정겹다. 멀리서 보면 녹색의 아름다운 관상 상록수 이고, 가까이 보면 윤기 흐르는 잎사귀마다 햇빛을 하나씩 나누어 간직한 초롱초롱한 눈빛들이다. 그 눈빛 이파리들 사이를 자세히 보면 작은 사과처럼 푸르고 불그레한 볼을 살짝 내민 야무진 동백 열매를 만날 수 있다. 그 열매 속에 간직된 검은 갈색의 씨는 가을이 짙어 지면 두꺼운 껍질을 스스로 깨고 땅에 떨어진다. 그 씨에서 짜낸 동백기름을 옛여인들은 아주 귀히 여겼다.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곱게 단장하고 나서면 여인의 정갈한 품위에 윤기가 흘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옛 멋은 이제 70고개의 할머니들에게나 드물게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을 뿐 흔적을 감춘 지 오래여서 아쉽다. 이처럼 동백의 씨가 상품가치를 상실하게 된데 대해 작은 안달을 해보는 것은 내게 그럴만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연과 만나기 위하여 20대 초반의 시절을 떠올려 본다.
군에 입대하여 두 번째 휴가를 갔을 때로 기억된다. 영하 30도의 추위와 싸우면서 교육에 열중하다가 휴가를 받으면 사병들은 모두들 정다운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고향으로 달리는 발걸음이 가볍고 신이 난다. 나도 그들 틈에 끼여 군용열차를 탔다. 밤을 세워가며 달리는 열차가 남해안에 가까워질수록 나의 마음 속에는 무거운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 졌다. 어릴 때 어버이를 여윈 서러운 외톨이의 고향은 이미 따스한 정이 식은 타향이던 것을……. 그래도 첫 휴가를 고향마을 숙부님 댁에서 묵고 귀대할 적엔 몇푼의 차비를 쥐어주는 숙부님의 손길에 차가운 시선을 꽂던 숙모님의 모습이 확대되어 회상되었을 때 휴가를 출발한 것이 원망스러워 졌다. 그러나 달리는 열차를 되돌릴 수도 없었다. 찻길 뱃길 합하여 하루 밤낮의 여독에 지친 몸으로 그리웠던 섬마을 가장 가까운 혈육의 대문을 두드렸을 때 예상했던 반응보다 더욱 싸늘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면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조카의 문안 인사조차 묵살되는 듯한 숙모님의 모습보다도 한가닥 정의 끈인 숙부님이 장기 출타 중이시라는 충격 때문 이었으리라.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독을 스스로 달래면서 친척집들을 전전 하다가 귀대 일자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귀대할 여비 마련이 문제였다. 나룻배를 타기 위하여 바닷가로 내려오면서 텅빈 호주머니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앞을 가렸다. 나룻배에 오르기는 했으나 큰 섬의 여객선 부두에서 승선을 거절당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귀대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퍼런 바다에 뛰어들어버릴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마냥 즐거워야 할 휴가가 이렇게 낭패스럽게 까지 될 줄은 몰랐다.
아쉬운 배웅의 눈길 대신 외면의 설움…….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저 먼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 어머니!" 하고 소리쳐보고 싶었다. 나룻배는 나를 포함한 10여 명의 손님을 실은 채 저만치 떠나고 있었다
그때 마을 뒷산 언덕에서 "오빠!" 하고 울부짖으며 천방지축 뛰어 내려오는 열세 살의 어린 사촌 여동생 모습이 젖은 시선에 어렴풋이 나타났다. 나룻배 노를 젖던 사공은 다시 뱃머리를 돌려주었다.
위태롭게 뛰어내려오는 그 아이도 나와 비슷한 처지인 조실부모한 고아로서 일곱 살 때부터 숙모님의 시중을 들어 가냘픈 손마디가 거칠었고 총명한 까만 눈은 학교의 문턱마저 까맣게 잊고 사는 불쌍한 아이였다. 오빠가 귀대하는 날 아침 숙모님을 대신하여 동리 아주머니 들을 찾아다니며 동백의 씨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팔아 갚겠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애원했었다. 어렵게 빈 몇푼의 돈을 손에 꼭 쥐고 뱃머리를 향하여 달렸던 것이다. 눈물범벅이 된 어린 동생은 따스한 형제의 정을 건네주고는 바위에 주저 앉아 외로운 오빠의 처지와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겹쳐가며 파도처럼 흐느꼈다. 가슴깊이 와닿는 갸륵한 정의 전율을 느끼며 터지는 설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두 고아의 가엾은 눈물을 보고 나룻배의 일행도 모두들 측은해 눈시울을 적셨다. 바다 저쪽 하얀 갈매기도 같이 울어주었다. 다시는 휴가를 나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이렇게 나의 낭패를 모면케한 동백의 씨로 하여 동백나무에 까지 정겨움이 더하게 되었고 그 동백을 볼 때마다 여동생의 따스한 정과도 만나게 된다.
동백꽃의 아름다움과 사철 변함없는 그 잎의 윤기와 그 열매의 야무진 껍질과 그 속의 씨. 그 씨의 은혜를 입고 아찔한 고비를 이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동백처럼 살지 못하고 허술하고 꺼칠하고 밋밋하게 살아온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지금부터라도 그 동백의 씨 하나를 마음밭에 묻어 사철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과 눈부신 윤기와 야무진 열매를 주렁주 달수 있도록 가꾸어 보리라.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차가운 갈바람 속에서도 붉은 빛의 꽃을 빚어내는 강인한 아름다움을 배우리라. 그리고 여동생의 따스한 정의 씨도 부지런히 심어야 겠다.
첫댓글 이 글을 대하니 지난해 2월 통영에서 만난 고동주 수필가님이 겹쳐집니다. 통영시장이 되어 계시던 고동주 작가님... 동백처럼 살고자 하셨던 의지가 있었기에 지금 시장이 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통영시장! 시민들에게 이웃처럼 느껴지는 시장님이시겠군요.
수필을 쓰시는 시장님! 멋지십니다.
그분의 삶도 동백처럼 강인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네요.
그 마음씨 고운 여동생도 지금은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이다지도 아름다운 글을 쓰신분이 시장이 되셨으니 틀림없이 훌륭한 시정을 만드시리라 믿습니다. 차분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수필한편에 마음이 녹아 내리는군요. 아름다운 수필쓰기, 선율이 넘치는 수필쓰기를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하는..
가끔 안부를 전해오고. 행사때마다 축전을 보내오고.
황송스럽게도 여류작가증 저를 제일 친하다고 말씀하시는.ㅎㅎ
특히,
해마다 꼭꼭 구독도 잊지않으시는 겸손하신 고동주작가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제주도는 벌써 동백이 피었더군요. 시댁 마당의 핀 동백으 요리조리보며 관찰하였더랍니다. 윤기 흐르는 잎사귀마다 햇빛을 하나씩 나누어 간직한 초롱초롱한 눈빛들이다. 가슴을 치는 표현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가슴 찡 하게 읽었습니다.
강인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담은 글을 쓰시는 작가님을 시장으로 맞으신 통영시민들 행복할 것입니다.
가슴 저미던 아픔도 추억할 수 있고, 드러냄으로 치유가 되는 힘을 가진 문학이 수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이가 함께 하는 통영분들 행복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