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샤프너 감독의 '패튼 대전차군단'(Patton)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70년 작품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7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전쟁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제2기갑사단의 단장으로 '전차 위의 악귀'라 불리며 유럽, 북 아프리카를 압도하며 연합군 승리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조지 패튼 장군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의 군부에 대한 토론이 일 때면, 아이젠하워, 맥아더와 함께 항상 거론될 정도의 위치에 있는 패튼이지만 그의 독선적이고 오만한 성격과 지나칠 정도의 엄격함과 독설로 인해 애국심을 가장한 전쟁광이라는 평가들이 내려지고 합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 대해서도 정확한 고증 없이 패튼 장군의 공적과 성격이 미화되었다는 비난이 만만치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사람은 패튼이 아닌 영화에서는 패튼에 가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최고의 전쟁영웅, 진정한 군인이라 불리는 롬멜 장군의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굳이 인류전쟁사의 백미(?)라 불리는 세계 2차대전사에 박식하지 않더라도, 역사책 속에서 만난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이라는 군인의 이름이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접근전에 있어 최강의 자리를 불허하는 보병부대와 함께 마이스터 정신에 기반한 우월한 과학과 기술력으로 무장한 독일군의 자랑, 기갑부대를 이끌며 '사막의 여우'라는 별칭을 얻은 세계2차대전사의 영웅. 항상 쌍안경을 목에 걸고 다니며 전선을 시찰하는 그의 모습은 이제 군단원수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어 전쟁기념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독일축구를 가리켜 흔히 게르만전차군단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는 유래 역시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상 롬멜의 기갑부대는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병력과 화력을 갖추진 못했습니다. 실제로 독일에서 본대가 건너오기 이전 소수의 병력으로 영국군을 압도한 적이 있구요. 기동성을 이용, 철저히 기습에 의지하는 공격과 상대의 허를 찌르는 위장전술이 그들보다 수배는 많고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서는 영국군을 격침시킬 수 있었던 주요 작전이었습니다. 비록 엘겟다 전투에서 패튼에게 대패하고, 뒤이은 영국군의 압도적 물량에 힘없이 무너지며 나치 독일의 패망과 함께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긴 했지만 그가 보여준 기동전과 화력의 집중은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함께 군사학적으로도 상당한 조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가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사막에서 활약한 지 60여 년이 흐른 지금, 그의 후손들은 한국의 기습작전에 완벽하게 무너지는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사막의 여우'라는 영광된 별칭, 적어도 이 날만큼은 철저한 준비로 '전술에 의한 승리'를 거둔 박성화 감독과 그가 요구한 것을 잘 수행해준 우리 청소년대표팀 선수들에게 넘길만하지 않을까요?
특히 박성화 감독.
국내지도자들의 연이은 성적부진, 그에 따른 해임 등 악순환의 반복 속에 보여준 히딩크 감독의 성공 이후 근본문제에 대한 해결책 없이 그저 국내지도자들을 무능력하고 구시대적 지도자들이라고 몰아가는 이 시기에 그가 밝힌 예상과 그에 대비한 전술이 완전히 들어맞으며 조직력 축구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단순히 독일에게 거둔 사상 첫 승리, 13년 만에 2라운드 진출의 가능성을 보여준 희망이 아닌 축구팬들이 국내지도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할 수 있게 한 기념비적인 승리였다고 생각합니다.
독일과의 경기 이후에 FA컵 관전을 위해 서울에 다녀온다고 이틀 가까이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했었는데, 후추의 분위기를 보고 짐작컨대 다른 축구사이트에서 그 날 대표팀 경기에 대해 뻥축구 논란이 일고 있는 듯 합니다.
과연 독일과 같은 스타일의 팀을 상대로, 그것도 우리는 이번 대회 참가국 중 가장 큰 사이즈(피파 홈페이지에 뜬 김동현의 인터뷰에서 나옵니다)의, 상대에게 상당한 위협과 부담을 주는 투톱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성화 감독이 선택한 전술이 과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상대팀은 박성화 감독이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나왔고 그것에 대비한 것들을 선수들이 잘 수행해냈습니다. 설령 그 결과가 무승부였다고 할지라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독일은 우리를 몰랐습니까? 별다른 준비를 안 했을까요? 오히려 전력노출은 우리가 더 많이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수만 관중 앞에서 TV 중계로 한일전과 수원컵을 치를 때 그들은 평가전마저 비디오 촬영이 싶지 않은 곳에서 해왔다고 그 고충을 박감독은 인터뷰에서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공략했는데, 왜 그들은 우리를 공략하지 못했습니까? 선 수비 후 역습의 전술을 취할 것이라고 대한축구협회에 올라온 인터뷰에서, 현지에 도착한 이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누누이 밝혔습니다. 덕분에 국내 팬들 사이에서조차 그에 대한 찬반논쟁이 분분하지 않았나요?
운에 의한 골이라는 평가들로 우리 스스로의 수준을 낮추지, 우리 선수들의 땀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골. 상대 수비가 충분히 걷어낼 것이라 생각하고 일말의 가능성조차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호진이 그렇게 전력으로 질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조그마한 가능성에도 이호진은 전력을 다했고 골키퍼와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진 대가로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귀중한 선취골을 뽑아냈습니다. 두 번째 골. 이종민에게 공이 연결되기 전에 패널티 에어리어에서 흘러나온 공을 우리편에게 전달해주기 위해 자신보다 훨씬 큰 독일선수와 몸싸움으로 물고늘어지며 결국은 공을 연결하고만, 우리 청소년 대표팀에서 가장 왜소한 김치우의 그 악전고투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런 상황들에서 골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멋진 패스와 감각적인 슈팅이 만들어 내는 골과 투지와 열정으로 만들어 내는 골. 모두 1점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골의 가치는 얼마나 창의적이고 멋지냐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골을 기록했느냐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월드컵 폴란드 전에서 황선홍이 기록한 골을 제가 아는 최고의 골로 꼽는 이유는 이을용의 감각적인 드롭패스, 빈 공간을 정확히 캐치해 논스톱으로 완벽히 연결한 황선홍의 감각 때문이 아닙니다. 홍명보와 유상철의 슈팅으로 우리에게 흐름이 넘어오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도 지난 수년간을 골 때문에 죄인 취급받아온 선수가 일방적인 경기로 전개하는데 쐐기를 박는 선취골을 기록해 월드컵 사상 첫 승, 4강의 시금석을 이뤄냈기 때문입니다.
과연 다음 파라과이 전에서도 우리가 독일전과 같은 양상으로 경기를 풀어나갈까요? 저는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파라과이 전에서도 그와 같은 경기를 전개한다면 우리 축구팬들은 그때 박성화 축구를 뻥축구로, 우리 선수들의 골을 요행에 의한 골이라 평가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봐온 경기와 인터뷰 등을 살펴봤을 때 박성화라는 지도자가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일개 축구팬이 봐도 남미팀을 상대로 극단적 수비전술을 택하는 건 날 잡아드슈하고 제 무덤 파는 격입니다. 더욱이 미국전에서 패했다고 하지만 파라과이가 보여준 개인기량과 전술이행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아마 파라과이 전에서는 지난 수원컵과 비슷한, 거기서 우리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는 메운, 진화된 모습의 대표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카이로로 떠나기 전까지 수원컵과 파주 합숙훈련 기간 중에 박성화 감독이 가장 주안점을 두고 훈련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독일전 승리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던 지구력과 스피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