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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잉카 출시 직전에 작성한 글인데요,
그대로 그 글만 옮기면 흥미가 덜 하실 듯 해서, 이미지를 추가해 봤습니다.
티바 브랜드로 출시된 넥시의 블레이드라는 면에서 조금 더 특기할 만한 점들이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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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네이밍에 대해
티바의 브랜드명으로 출시되는 최초의 넥시 제품이 되겠네요.
"잉카"는 탁구닷컴과 티바의 우정의 상징이자 또한 넥시 브랜드의 블레이드 제조 노하우를 티바에서 정식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여러 기능적인 면들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겠지만,
'잉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작지 않기 때문에 그 얘기를 먼저 해 보려고 합니다.
잉카 제국이라는 말은 많이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마추피추'라는 고대 유적지 사진도 흔히 보아 오셨을 거라고 생각되구요...
무척 단단하게 보이는 돌들이 마치 빚어서 만들어 꿰어 맞춘 것처럼,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세밀한 돌 벽을 이룬 사진을 보고 누구나 신비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높은 산 속에 감추어져 최근까지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 몇 대 불가사의를 다룰 때마다 거론되지 않을 수 없지요.
잉카 제국은 스페인에 의해 빠른 시간에 무너진 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와 거리도 멀고 심리적으로 역사적 국가로 알려지기 보다는 전설 속의 나라처럼 여겨지는 바람에 그 역사적 실체가 꽤 정확하게 남겨져 있다는 사실 조차 조금 낯설지 않았나 싶습니다. 블레이드 이름으로 <잉카>라는 이름을 선정하면서 그 제국의 멸망에 관련된 인터넷 정보들을 살펴 보니 흥미로운 내용이 참 많았습니다.
잉카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상이한 시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남미 역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저로서는 무엇이 옳은 얘기인지 판단하기 어렵구요, 또 이 에피소드들을 어떤 역사적 진실 규명의 차원으로 다루기 보다는 어떤 측면에서 잉카라는 이름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블레이드 이름으로 선정되게 되었는지를 여러분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정도가 이 글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이 글을 적지는 못 했다는 점을 미리 양해 말씀 드리고 글을 적어 보겠습니다.
즉 정리하면 인터넷 사이트들을 몇 군데 돌아 다니면서 섭렵한 정보를 가지고 잉카 제국의 멸망사를 이야기 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잉카 제국은 과거 안데스 산맥을 근거지로 살아가던 많은 민족들을 정복한 정복 왕조입니다. 높은 산지에 지어진 고대 도시 마추피추도 그러한 정복된 소수 민족 중 하나가 세운 이지요.
(마추피추에 대한 얘기도 흥미로운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적지 않겠습니다.)
잉카 제국의 마지막 왕은 아타왈파 라는 왕인데요,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잉카 제국은 여러 소수 부족, 혹은 국가들을 정복하여 이룬 정복 국가였구요, 아타왈파 왕은 그런 여러 나라를 다스리는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스페인의 한 장군이 소수 군사들을 이끌고 이 아타왈파 왕을 만나러 옵니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미 정복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고 아마 아타왈파 왕도 유럽 군인들의 위세를 듣고 다소 두려워 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당시 유럽 국가,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16세기 무렵 남미 정복 전쟁을 치렀던 국가들에 있어서는 남미는 황금의 나라였습니다. 실제로 안데스 산 속에 황금으로 가득찬 나라가 있다는 엘도라도의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멸망한 잉카 제국으로부터 스페인 군대가 제일 먼저 약탈한 것도 황금이었으므로 이것은 단순한 전설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얘기이기도 하지요.
아타왈파 왕을 만난 스페인의 장군 피사로도 이 황금에 대한 일확천금 욕심으로 눈이 멀었던 것 같습니다.
황금의 땅 안데스 산 속의 나라, 엘도라도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피사로라는 인물도 이러한 황금에 눈이 멀었던 장군으로 보입니다.
피사로에 대해서는 제가 살펴본 인터넷 글들이 서로 서로 조금씩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네요. 역사적으로 분명한 것은 그가 매우 적은 병력으로 잉카 제국을 무너 뜨렸고 그 이후 잉카 제국의 황금을 약탈하여 스페인으로 가져 와 거부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피사로에 의해 거대한 잉카 제국은 무너졌다는 점이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피사로가 굉장히 교활했고 잔인했으며 아타왈파 왕은 너무 무능하고 순진했다는 평가들이 있는데, 그것은 시각에 따라서 여러가지고 평가될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나라를 멸망시켰는데 교활한 책략이 없이 적은 병력으로 그것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다만 아쉬운 것은 그 당시 유럽인들이 이들 남미의 사람들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짐승이나 매 한가지로 여겼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혹한 노예 제도와 살육을 마음껏 저지를 수 있었지요.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피사로 장군이 아타왈파 왕과 만나 전쟁을 치를 당시 가진 병력이 고작 168명의 군인들과 37마리의 말, 그리고 배에서 가지고 나온 몇 문의 대포가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적은 병력으로 어떻게 한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요?
여기서 글을 중단하고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라고 넘기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또 인터넷에서 피사로를 검색해 보실 듯 하네요. 그래서 조금 더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타왈파 왕과 잉카 제국에 대해 좀 적어볼께요.
1526년 당시의 상황으로 한번 들어가 보지요.
당시 스페인의 정복이 이루어지기 전 안데스 산맥 인근에는 많은 부족들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부족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제국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렇게 이룬 제국이 바로 잉카 제국입니다. 잉카 제국의 통치에는 가혹하고 억압적인 권력 체계가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권력 체계의 이면에는 태양신을 섬기는 인신 제사가 활용되었습니다. 고대 제국들의 경우는 황제에게 신적인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서 흔히 황제는 신의 아들, 혹은 신 자체로 숭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형태의 통치 정당성에는 무시무시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자주 활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잉카 제국에는 In ti Ray mi 라는 태양신 제사가 있었는데,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불태우는 의식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전쟁 포로들을 제물 삼아 이런 제사 의식을 진행했지만 정복 전쟁이 끝난 이후 잉카 제국의 인신 제사는 점차 자국 통치민들에게로 확대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황제에게 밉보인 자들이 쉽게 타켓이 되었고 제사를 집행하는 사제들에게는 제물을 고르는 과정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또 선별 과정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은 불과 몇 마리 가축을 뇌물로 바칠 수 없어 자식의 심장을 산 채로 꺼내는 장면을 눈으로 봐야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황 속에서 피사로가 등장합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여러 정황 속에서 정적에게 패하고 해적질이나 해 볼 마음으로 항해를 하다가 배가 고장이 나 육지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잉카 제국에 황금이 많이 있다는 소식에 그곳을 약탈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잉카 제국의 주민들은 일반인에 비해 키가 작고 혈액에 헤모글로빈이 많은 데다 일반인에 비해 2배 이상의 폐활량을 갖추어 고산 지역에서 전투를 잘 치를 수 있는 매우 용맹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금은 많았지만 아직 철기 문화가 없었던 데다가 고산 지대 위주의 경제 형태를 이루어 바퀴를 갖춘 수레라든가, 기마 부대 등 서구적 개념의 전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인신제사를 기반으로 한 잔인한 통치 형태 앞에 억압적으로 다스려 지는 수많은 소수 부족들이 잉카 황제의 통치를 전혀 반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대양을 앞마당 삼아 배를 몰고 해외로 나갔던 스페인 군인들은 매우 탐욕적인 욕망을 가진 사람들로, 황금을 탈취하여 단단히 한 몫 잡아 보겠다는 무자비한 욕심에 쌓여 있었을 뿐 아니라 엄청나게 먼 거리를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면서까지 해양 원정을 해온 노하우와 경험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잔인했고 황금 외에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피사로는 배 안에 있던 몇 문의 대포를 이끌고 170여명의 군인들과 함께 37마리의 말을 끌고 왕궁을 향해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가 대포를 끌고 왕궁을 향해 행진하는 동안 그들을 저지하거나 막아서는 부족은 없었고 가는 곳곳마다 아타왈파 왕에 대한 원성만 자자했다고 합니다. 즉 민심의 이반이 피사로의 행진에 힘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여러 날이 걸려 안데스 산맥에 이어진 숲들을 지나 황궁 앞 호수에 도착한 피사로 일행은 심부름꾼을 보내 스페인 왕의 사절단이 왔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시 이복형제와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난 후(무려 10년 동안 계속된 내전이었고, 어떻게 보면 막 내전을 승리로 이끈 아타왈파 왕은 다소 승리감과 또 전쟁의 피로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타왈파 왕은 온천 도시인 카하마르카에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피사로 일행이 보낸 서신에 대해서 아타왈파 황제는 만날 필요가 없다고 답신을 했습니다.
그 답장을 받은 피사로는 부하들과 상의한 이후 대포를 끌어다가 왕궁을 향해 몇 발을 쏘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야 병사들이 수십척의 작은 배를 타고 호수 가득히 전투 대열로 정열했습니다
피사로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성경과 십자가를 심부름꾼에 들려 다시 왕궁으로 들려 보내면서 "평화를 위해 왔다"라고 하며 (종교적 목적의 방문인 것처럼 위장한 것이지요.) 항구에는 수천 명의 스페인 병사가 공격 시기를 기다린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 다음 날 갑작스런 이 스페인 황금 탐험대를 맞아 황제는 8만여 군대 가운데 5천~7천 여 군사의 호위 가운데 피사로를 접견하였습니다. 아타왈파 왕은 스페인 군대와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한 의도로 대신 몇 명만 데리고 피사로의 일행을 접견합니다. 피사로는 20여명의 부하와 함께 황제를 만납니다.
그런데 평화로운 회담이 진행되어야 할 그 순간에 피사로는 황제를 인질로 붙잡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황제에게 기독교인이 될 것과 스페인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라고 다그쳤다고 합니다. 그 요구에 분노한 황제가 성서를 내던졌을 때 피사로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당시 5천여명~7천여명으로 추산되는 잉카의 병사들은 피사로의 공격 명령에 따라 불을 뿜는 대포 소리에 혼비 백산하여 흩어지고 공포심 속에 몰살 당하다시피 합니다. 그 당시 철기 문화가 없었던 잉카 제국에서는 무기류도 보잘 것 없었지만 처음 보는 동물인 말을 타고 나타난 덩치 큰 스페인 군인들에게 공포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당시 잉카에는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이 그들에게 공포를 불러 오리라는 전설도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은 합리적 병력의 숫자, 혹은 무기의 우세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심리적 요인이 매우 중요하지요. 공포가 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요인이었다고 여러 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피사로는 황제를 볼모로 잡고 엄청난 양의 황금(대략 5톤)을 제국으로부터 받아 냅니다. 그러나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황제도 살해 합니다. 피사로의 승전보를 듣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스페인 사람들이 황금을 찾아 잉카 제국과 마야 문명을 짓 밟으며 남 아메리카 땅을 유린하기 시작했습니다.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스페인으로는 15만 Kg의 금과 740만 Kg 이상의 은이 스페인으로 유입되었다고 합니다. 이 부의 힘에 기반하여 스페인이 유럽 최강의 국가로 급부상하게 되었지요.
사라져 버린 잉카 제국의 유물이 근대사의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마추피츄라는 고대 도시가 발견되면서 부터 였습니다.
문자를 남겨 놓지 않았고 매듭으로만 간단한 의사 소통을 했던(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에 대해서도 잉카의 입장에서 기록된 사료를 발견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래서 이 사건을 보는 시각들도 다양한 것 같습니다.) 잉카 제국의 비애이기도 하지만, 제국 자체가 무너짐으로써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그것을 추억할 수 있는 사람들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첫댓글 잉카 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의 경우에 사용되는 것 같아요.
제가 이 이야기에 흥미를 갖게 된 이유는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시사하는 바가 큰 내용 같습니다.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예~^^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랜드 네이밍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군요. 피터팬도. 잉카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러버 질문 올려도 될는지요? 중진 양핸드 드라이브 전형인데 블레이드는 장지커 슈퍼ZLC입니다.백핸드에 칼리브라S 를 붙였더니 너무 좋습니다. 전면에도 칼리브라S를 사용하면 어떨까 싶어서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칼리브라M도 구입해서 붙여보았는데 전에 아디다스 P7을 써서인지 미디엄보다는 소프트한 러버가 더 편한것 같습니다. 백핸드에 칼리브라S는 많이 추천하는데 포핸드에는 별로 추천글이 안보여서 새벽 3시가 되도록 고민하다 선생님께 댓글로 질문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고견주시면 세이경청 하겠습니다.
예~^^ 칼리브라 S가 포핸드에 맞는지, 현재 라켓의 앞뒷면을 돌려서 써 보세요. 남이 뭐라 하던 자기에게 맞으면 그게 정답이죠~^^
만약 조금 더 스피드를 더하면서 부드러운 러버로 가고 싶다면 에어록 아스트로 S도 한번 시도해 보시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