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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대회에서 발명왕이 됐으니 다음 목표는 슈퍼모델입니다."
12일 대경대에 따르면 슈퍼모델을 꿈꾸는 모델과 2학년 손혜진(20)씨는 최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10 대한민국 세계여성 발명대회에서 '가스레인지 역풍방지를 위한 환기시스템'으로 금상을 차지했다.
손씨의 발명은 가정용 가스레인지 사용 시 발생하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후드에 적용시켜 연기배출을 원활히 이뤄지게 한 것으로, 세계 어디서나 호환 가능하고 모터 과부하를 줄여 전력손실을 줄인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키 178㎝에 늘씬한 몸매의 손씨는 교내발표회 등의 무대에서 보여준 생생한 워킹과 표정, 포즈로 학교에서 이미 유명하다.
모델을 지망하는 그가 발명대회에 참가한 사실과 수상까지 한 결과를 의외로 받아들이며 감탄하는 사람도 생겼다.
손씨는 "발명가인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발명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며 "물로켓을 만들고 모형배 조립하기를 즐겼다."라고 말했다.
발명이 취미였던 그가 모델로 장래 희망을 정한 계기는 중학교 때 우연히 접한 패션화보였다.
그는 "화보에 나오는 모델 언니들을 보면서 모델이 되려고 생각했다"며 "당시엔 체형이 친구들과 비슷했는데 고교 진학 후 체형과 키가 갑자기 커져 그때부터 슈퍼모델의 꿈을 키웠으며 대학도 모델과에 진학했다."라고 설명했다.
손씨는 "이번 수상을 계기로 올가을 독일에서 열리는 국제발명전에 참가해 또 한 번 세계 발명가들과 기량을 겨루겠다."며 "발명도 잘하는 세계적 슈퍼모델이 되고 싶다."라고 야무지게 말했다.
[광고 디자인회사 박서원]
지난해 박서원(31)씨를 한 차례 인터뷰했다. 직원 20여 명인 조그마한 광고회사 대표인 그를 만난 건 순전히 놀라운 창의성 때문이었다. 그가 광고제에 출품한 첫 작품은 국제 5대 메이저 광고제에서 12개의 상을 휩쓸었다. 한국인 역대 최다 수상이다. 1년이 지난 후 그는 다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계 2대 광고제의 최우수상과 본상을 탔다. 2연패 역시 역대 최초다. 알고 보니 그는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그룹 회장의 장남이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이를 철저히 숨기려 했다. 그런 그가 궁금했다. 1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빅앤트 인터내셔널’ 사무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칸막이가 전혀 없는 이곳엔 운동기구와 각종 상장 및 트로피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일터’라기보다는 ‘놀이터’ 같았다. 박서원 대표는 두 시간여 동안 작품 세계와 창의력의 원천, 그리고 방황하던 젊은 시절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끊임없이 믿어주는 아버지에겐 항상 미안해했다.
“학교 다닐 때 성적이 나쁘게 나오면 ‘다음엔 잘할 거지’라고 믿어주셨죠. ‘네’라고 대답하고, 또 공부는 안 했죠. 보통 세 번 거짓말을 하면 양치기 소년인데 아버지는 저를 계속 믿어주셨어요.”
그런 아버지가 요즘엔 트위터로 아들 자랑하느라 열심이다. 아버지는 ㈜두산의 박용만 회장이다.
“‘박용만 회장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요. 제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께 광고제에서 상을 15개 받을 때까지는 절대 트위터에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요. 상을 15개 이상 탄 뒤부터는 굳이 아버지를 말리지 않았어요.”
그는 공부와 담을 쌓은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땐 반에서 53명 중 50등이었다. 싸움도 곧잘 했다. 나이트클럽에 살다시피 했다. 당시 나이트클럽에서 맥주·기본 안주가 5만원이었다. 그런데 한 달 용돈이 5만원이었다. 공부 안 한다고 걱정하는 부모님께 나이트클럽 비용을 달라고 손을 벌릴 순 없었다. 그래서 새벽에 친구와 함께 건설현장에서 벽돌을 날랐다. 이 얘기는 지금까지도 부모님께는 비밀이다.
한 대학교의 경영학과에 갔지만 경영학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성적에 맞춰서 간 것뿐이었다. 강의실에 가는 대신 여행하러 다녔다. 첫 학기에 이어 두 번째 학기도 학사경고를 받자 2000년 도망치듯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시간대 경영대로 옮겼다. 적성을 찾아보려고 매년 전공을 바꿨다. 사회학과·심리학과·기계공학과…. 3년이 또 의미 없이 지나갔다.
“재벌 2세라는 선입견 이 너무 싫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면 일부러 방황했던 것 같다. 경제적 걱정은 안 해도 됐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다.
“난 그냥 그 사람이 좋아서 친해지고 싶은데 그쪽은 나중에 보니 뭔가를 나에게서 바라더라고요. 그렇게 상처가 늘다 보니 자신을 육체적으로 힘들게 하고 싶었어요. ‘화분 속에서 자란 잡초’를 스스로 선택했던 거죠.”
미국에서도 접시닦이, 세차장 직원 등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인생을 바꾼 시각디자인과의 만남은 우연히 찾아왔다. 함께 농구를 하던 일본인 친구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가보니 식음을 전폐하며 종이로 우주선을 만들고 있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던 친구의 프로젝트였다. 꼭 노는 것처럼 보였다. 공부가 노는 것이라니 흥미가 확 당겼다. 다음날로 바로 시각디자인 강의를 들었다.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 26세인 2005년 ‘뉴욕 스쿨오브 비주얼 아트(NSVA)’로 옮겼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미술 공부를 하려니 밤을 새워야 했다. 교수가 내주는 숙제의 10배를 해갔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니 대신 생각하는 힘을 키웠다. 모든 전공과목은 A+였다. 대부분의 교양 수업에서도 A를 받았다. 재학 2학년 때인 2006년 학교에서 제일 잘나가는 4명을 유심히 봐뒀다가 설득해 모았다. 집에서 프로젝트를 하기 시작했다. 학생 작업이라고 하기엔 작품이 너무 좋았다. 수익도 나왔다. 자연스레 빅앤트를 설립했다. 미국 뉴욕에 만들었던 사무실이 서울과 중국 베이징으로 늘었다. 직원은 한국·미국·프랑스·중국인 등 ‘다국적 군단’이다. 그동안 받은 상은 올해까지 35개를 넘어선다.
가장 고민됐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쓸데없는 자신감이 내 재산이에요. 한국 대학에서 자퇴하고, 미국에서도 3년 동안 전공을 못 찾았을 때도 ‘그래도 난 성공할 거다’라는 대책 없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돌아보면 다행이죠. 당시엔 실패로 볼 수 있지만 그 실패가 없었으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테니깐요.”
현재의 성공이 ‘아버지의 후광’ 때문은 아니란다. “두산 작품은 대부분 일반 작품보다 가격이 낮거나 공짜로 해주고 있어요. 내가 좋아서 두산 작품을 해주고 있지요.”
요즘 개인시간의 절반을 학생 가르치는 데 쓴다. 한양대와 중앙대에서 겸임교수로 일주일에 10시간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학생들이 물어요. 디자인에 여러 분야가 있는데 어떤 것을 하는 게 좋으냐고.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일단 해보고 맞지 않으면 그때 바꿔도 늦지 않다고.”
그의 욕심은 끝이 없다. 영화 연출에도 발을 뻗쳤다. 30분짜리 단편 영화다. 시나리오는 직접 쓰고 있다. 꼭 필요한 뭔가가 없어진 사람들의 얘기라고 한다. 사진작가인데 눈먼 사람, 요리사인데 미각을 잃은 사람 등. 가을쯤 촬영에 들어가는 영화에선 배우로도 데뷔한다. 애초엔 디자인·광고를 진짜 잘하는 회사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꿈을 이룬 지금, 목표가 더 커졌다.
“어떤 업무가 주어져도 잘하는 회사, 모든 창조적 작업을 잘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최지영 기자
만큼 놀았다 다양한 경험이 아이디어의 원천
미친 듯 일한다 하루 4시간 취침 … 직원이 가족
박서원 빅앤트 대표는 흔히 말하는 ‘재벌 2세’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와 담을 쌓았지요. 그런 그가 26세라는 늦은 나이에 디자인 공부를 시작해 4~5년 만에 세계 국제광고제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의 창의성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좋은 것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의 신조입니다. 직원 10여 명의 조그마한 조직이 한국의 어느 광고회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는 비결은 이렇습니다.
# 아이디어는 ‘미쳐야’ 나온다
빅앤트 직원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집에 가지 않습니다. 박 대표 자신도 매일 새벽 4시까지 머리를 짜내다가 퇴근합니다. 다음날 오전 10시만 되면 회사에 나옵니다. 박 대표는 “잠은 4시간만 자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박 대표가 “새벽 4시 전에 불 꺼진 게 최근 한 달 동안 두 번”이라고 하자, 옆의 직원이 “한 번인 것 같은데요”하고 끼어듭니다. 이런 노동 강도를 버티는 사람은 정말 그 일에 미쳐서 하는 거겠죠. “광고제 입상이 널리 알려진 후 한 해 4000~5000명이 인턴으로 일하고 싶다고 e-메일을 보내옵니다. 그러면 와서 근무해 보라고 하지요. 하루 일해보곤 다음날 연락도 없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박 대표의 말입니다.
# 정반대의 프로세스(과정)
박 대표는 기존 광고회사의 프로세스를 뒤집었습니다. 작품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단 만들고, 그 작품에 어울리는 광고주는 나중에 찾습니다. 지난해 국제광고제 상을 휩쓸었던 ‘뿌린 대로 거두리라’ 포스터는 그렇게 완성됐습니다. CGV 화장실 광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장실 벽을 광고 매체로 활용해 보면 멋질 텐데’라는 생각으로 광고를 먼저 만들고 CGV를 접촉했습니다. 공동작업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보통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직원이 밤새워서 짜낸 아이디어 시안 200~300여 장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하나하나 함께 토론하며 훑어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빼고, 조금이라도 발전 가능성이 있는 것을 남기면 10여 개가 남는다고 합니다. 이를 박 대표가 신문사의 에디터처럼 이렇게, 저렇게 수정해 보라고 지시합니다.
# 기존과는 다른 조직
창의성은 관계에서 나옵니다. 빅앤트 직원은 거의 24시간 함께 생활합니다. 박 대표가 어느 날 밤 12시쯤 빨리 퇴근하라고 하고 약속 모임에 들렀다가 새벽에 다시 사무실로 왔습니다. “직원들이 집에는 가지 않고 사무실에 모여 맥주를 마시고 있더라”고 합니다. 빅앤트를 처음 만들었던 5명 역시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출신으로 ‘죽을 때까지 함께 가기로 한’ 끈끈한 동창 관계입니다. 이 회사는 일거리가 많아진 후 20여 명이던 직원을 오히려 10여 명으로 줄였습니다. 빠른 의사소통과 민첩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박 대표는 생각이 떠오르면 잊을까 봐 그때그때 적습니다. 아이디어가 막히면 옛날에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 쭉 써본다고 합니다. 그걸 그림으로도 그려봅니다. ‘놀 만큼 놀아본 다양한 경험’이 아이디어의 샘물인 셈이죠.
작품 ‘뿌린 대로 거두리라’
세계 5대 광고제 휩쓸어
박서원 대표는 그동안 저비용으로 기발한 발상을 이용해 광고효과를 극대화하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 지난해 세계 5대 광고제를 휩쓴 작품은 반전 포스터였다. 가로등에 감으면 총구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양으로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같은 개념으로 탱크·수류탄·비행기 버전을 만들어 변주를 줬다.
CGV 영화관 화장실을 장식했던 소주 광고는 기존에 없던 화장실 전면 광고라는 새 영역을 개발했다. 화장실 문을 떼어 내고, 냉장고 문 모양으로 문을 만들어 붙였다. 문을 열고 화장실에 들어가 보면 냉장고 속이다. 소주가 꽉 차 있다. 또 다른 화장실엔 박 대표를 비롯한 빅앤트 직원이 즐겁게 소주를 마시고 있는 사진이 실제 사람 크기로 붙어 있다.
성형외과 엘리베이터에 설치했던 옥외 광고. 미켈란젤로의 명화 ‘천지창조’ 속 신이 아담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갖다 대는 검지를 엘리베이터 버튼 위에 붙여 놓았다. 포스터 아래엔 ‘다시 태어나세요(Be Born Again)’라는 글귀가 써 있다. 성형외과로 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유머.
올해 뉴욕 원쇼 수상 작품은 지난해 8월 서울 논현동 두산건설 사옥의 한 면을 거대한 책장으로 바꿔 놓은 옥외 광고다. 거대한 책장 속에 두산 매거진이 발행하는 보그·GQ·보그걸·얼루어·W 등의 잡지가 진열돼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두산건설 창립 50주년 기념 포스터는 직원들과 함께 한 달 동안 밤을 새우다시피 해 만들었다. 그린 것이 아니라 미니어처를 만들어 사진으로 촬영한 점이 이채롭다.
[얼마전 자살했던 판사의 쪽글]
들어가며
판사…
물론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죠.
세간의 농담으로, 의사는 부인과 자식들이 좋고, 검사는 친인척들이 좋으며, 판사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좋다고 하더라구요.
과연 그럴까요?
판사라고 하여 나름대로의 애환이나 직업병이 없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본론
기본적으로, 판사는 생산적인 직업이 아닙니다.
막말로 이야기 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판사는 만능이 아닙니다.
모든 재판사건에 있어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판사가 아니라 당사자 본인들입니다.
자신들이 가장 잘 알면서, 왜 우리 판사들에게 판단을 하여 달라고 조르는지 재판을 하다보면 참 한심한 생각이 절로 듭니다.
또한,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요, 판사들은 모두 마음 속에 저울을 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민사사건에 있어서는 쌍방 거짓말을 하는 원고와 피고 모두를, 형사사건에 있어서는 유죄라고 강변하는 검사와 무죄라고 우기는 피고인 모두를 의심해야만 하는 직업입니다(오로지 의뢰인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죽 밀고 나가기만 하는 변호사와는 완전히 딴판이죠).
이러한 의심과 마음의 저울이 법정에서만 국한된다면 다행이지만, 사회생활에서, 대인관계에서, 가족관계에서도 홀연 드러나고, 심지어는 아내와 부모님의 말마저 의심하곤 한답니다.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죠.
아울러 판사라는 직업은 원고와 피고, 검사와 피고인 모두를 만족시키는 재판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긴 원고는 당연한 것을 이겼다거나 더 못 이겼다고, 진 피고는 이길 것을 판사의 오판으로 못 이겼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검사와 피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다른 직역과는 달리 판사는 올라가면 갈수록, 즉 승진하면 할수록 업무량이 더 많아지는 참으로 묘한 직업입니다.
대법관의 사무실을 방문해 보세요. 응접실 소파에까지 소송기록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노안으로 침침한 눈을 비비며 대법관들은 밤 새워서 사건기록과 씨름을 합니다.
오직 명예 하나만을 드시기 위하여 고된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감수합니다.
마치며
여러분, 그래도 자녀들을 판사 시키시겠습니까? 전 우리 아이들에 대하여는 판사가 되기를 강권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살기를 바랄 뿐이죠.
그런데 말이죠, 저는 판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해 보니깐 애로와 직업병을 겪기는 하지만, 참으로 보람된 일도 많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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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지금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것은 제가 직접 찾아보고 느껴지는게 많았던 기사스크랩내용을 전부 보여드리는겁니다.
이 기사들이 여러분의 의문점을 전부 충족시키지는 못하겟지만 그냥 묵묵히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올립니다.
첫댓글 한국사회에서 학벌이란게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건 사실..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제 생각을 정리해보게 되는 글이네요. 특히 재벌 2세였음에도 그것을 숨긴 채 자신만의 능력으로 성공하려고 한 박서원 대표의 글이 가장 인상 깊습니다.
박진영의 말이 인상깊네요
수능 잘 못봐서 힘이 없엇는데, 약간이나마 엔돌핀이 돌거 같네요..ㄳ
쓸모있는 상품보다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했다는 그 말... ㅎ
꿈을 찾으면 못할게 없군요..ㅎ
조남호 대표님 드림가이드 보고 인상깊어서 왔는데 다시한번 꿈과 노력의 중요성을 느꼈어요..
좋은 글이네요. 저도 열심히 꿈을 꾸며 살아야겠습니다.
예전에 봤던 글들을 여기서 다시 보네요.ㅋ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정말 깊게 고민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