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여러분 한 주일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또 한 주간을 시작하며 한 주간을 준비하는 오늘,
정리를 하든, 계획을 하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 입니다.
행복한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정리해 봐야겠습니다.
‘잘 지냈냐?’고 하는 안부 인사 또는 ‘지난 한 주간 행복하셨어요?’ 또는 ‘더 행복하시라’하는 이런 질문에서, 사실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답한다 해도
정말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잘 이해하고 있고 새기면서 잘 살고 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 하십니다.
배움은 내가 모른다고 할 때 이루어집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라 표현했던 수많은 군중에게 참행복에 대해서 말씀 하십니다.
가르침과 보냄에 대해서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시니
당대에 내노라 하는 사람들, 몰랐지만 안다고 아는 척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잘 가르쳐 주시려고 자신을 철부지라고 말씀하시고 낮추십니다.
‘철부지’, ‘철없는 사람’이라고 할 때 여기서 ‘철’은 지혜를 말합니다.
어떤 지혜이냐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철부지 입니다.
넘어지고 상처받고 또 상처받고 주저앉은 사람들이 철부지 입니다.
그들은 이제는 그걸로 충분치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진정한 행복을 가르치실 때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듣고 새기면서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참된 방법을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한 주간을 잘 살았다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갔던 독서 말씀대로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필립보서 2장에서
오히려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그분은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의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섬기는 모습으로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행복하게 하겠다. 하고 말씀 하십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헤아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멍에를 멜 수 있도록 ‘내 멍에를 메고 배워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엄청남 힘을 주신 멍에.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행복의 방법은 첫째,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겸손이 가지고 온 사랑 만이 진정한 사랑이고 그 사랑이 감사함으로 이어지고 그 감사함은 다시 겸손으로 이어집니다.
감사한 삶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이제 철부지들은 더 이상 철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를 먼저 섬기시고 있는 분을 경험 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 차례 입니다.
겸손하기 보다는 여러 가지 계산법으로 세상 일을 꿈꾸고 있다면
영의 삶으로 사는 입장에서 볼 때 육으로 사는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으로 살지 않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말 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셉의원의 선우 경식(요셉) 원장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카톨릭의대를 졸업했고 능력이 출중했기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보니 선우 원장님 눈에 들어온 것은 치료는 커녕 굶어 죽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요셉의원을 운영하게 됐습니다.
그분은 겸손하게 사는 방법으로 살았습니다.
그러했기에 늘 부족했지만 늘 채워졌습니다.
겸손은 감사함으로 이어졌고 감사함은 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분은 선종하실 때 무척 행복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잘 새겨야 겠습니다.
나에게로 오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중이 아니라 지금,
하느님께 곁을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신부님의 강론의도와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