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가는 산악회에서 산행후 뒷풀이를 금년 마지막인 관계로 나름 푸짐하게 그리고 의미있게 하자는 취지로 바닷가 산행을 기획했다. 최소한 회는 좀 두툼하게 썰어서 소주와 곁들여 먹는 그런 기회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대전에서는 그리 멀지 않고 고속도로도 연결되는 사천으로 정했다. 통영은 봄에 두루 섭렵한지라 마땅히 갈 데가 없으니 대안은 당연 사천, 옛 삼천포가 적당하다 싶다. 헌데 그 쪽에 갈 만한 산이 있을까 하는 걱정은 순전히 기우였다. 정말 우리 땅은 세상은 좁으나 산은 많다. 어디를 가든 반나절 가뿐하게 올라서 구경하고 놀만한 산은 하나 이상은 있는 것 같다.
와룡산은 그런 범주에 집어 넣기엔 이름부터가 과대포장되어 있다. 바닷가니 용자가 들어갈 수는 있겠지. 바다에서 발생하는 용오름이나 짙은 해무가 낮은 산이래도 명명하는데 전설이나 연유 연상등이 크게 작용할수 있을테니까. 게다가 안동에도 같은 이름의 산이 있다. 높지도 그렇게 크지도 않은. 그래서 처음 산행지를 들었을 때는 서울 마포에 있었던(?)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폭삭 무너진 아파트덕에 그 이름이 회자된 드러누운 소라는 의미인 와우산이나 바닷가기에 와경산 (고래가 누운)정도면 어땠을까 싶었다.
실로 오랜만에 화창함을 짙은 안개로 예고했기에 한껏 부푼 기대처럼 포근한 날씨는 오늘의 산행이 경쾌하고 기분 좋은 걸음이 되게 했다. 써늘한 새벽 기온 때문에 걸쳤던 두툼한 외투는 처음부터 벗고 배낭에 넣은 채로 오름을 시작했다. 이 산의 종주코스는 7시간반이 걸린다는데 우린 겨우 흉내만 내기로 한 산행이었기에 들머리는 백천사로 정해서 민재봉을 경유 이 산의 최정점이자 사천에서 제일 높은 고점인 새섬봉을 밟고 하산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시간이 되는 선두 팀은 천왕봉도 재빨리 갔다 올수도 있다 한다. 시간은 네시간 반이 주어진 만큼 각자 시간대로 행선지를 정하면 되는 것이다. 높이나 거리에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음의 여유때문인지 발걸음이 가볍다. 이런 상태라면 약간의 오버페이스를 하기도해서 도리어 후유증이 더 컸던 적도 있었으니 경적필패요 경산필고 (산을 가벼이 여겨 필히 고생함 ㅎㅎ)라.
아침을 조금 부족한 듯 먹었더니 시장기가 든다. 막걸리 한 잔 생각에 입에 침이 돈다. 하늘을 보니 살짝 현기증이 든다. 반가운 까마귀 하늘을 빙~ 돈다.
별로 힘들이지 않게 자꾸 고개 넘어 하늘이 보인다. 대부분 이 상태면 거의 고개마루라 정상이 멀지 않다. 물론 주위의 산 봉우리와 눈 높이가 비슷해지기에 그런 예상을 하는 것이다. 산을 오른지 한 시간이 채 안되었는데 반을 온 느낌인만큼 날씨도 기온도 산에 오르기엔 적합한 조건이다. 간만의 파란하늘이 좋아서 자꾸 역광이지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게 된다.
드디어 억새밭인걸 보니 거의 다 왔다. 건너편 새섬봉이 먼저 보인다. 바위산이라 더 눈에 띈다. 조금 더 가니 민재봉이다. 정상석은 평이하다. 헌데 민재봉의 한문자가 낯 설다. 재자를 모르겠기에 나중 찾아보니 고개재란다. 하늘 고개라는데 뭔가 걸 맞지 않은 느낌이다. 예전에는 와룡의 최고봉이 바로 이 민재봉이 었는데 십여년 전쯤 국토지리원에서 재측정한 결과 이 산의 최고봉은 바로 다음 목적지인 새섬봉이 되었다. 민재봉이 798m인데 새섬봉은 801m란다. 묘하게 삼천포와 민재봉은 다른 이름의 같은 운명이지 않나 싶다. 한때는 모든 사람들이 사천읍 보다는 삼천포시를 더 많이 말했다. 와룡산하면 분명 민재봉이 최상봉이었다. 하지만 이젠 과거의 영화로 추억에서만 더듬는 이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새섬봉을 보면 이 봉의 이름은 쉽게 잊혀질 것은 너무도 분명해 보이기에 그 이름의 기억은 더욱 희미해질 것 같았다.
민재봉에서의 조망은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정이 뚜렷치않아 사진이 별로 없다. 정상의 인증샷만이 남을 뿐이다. 이젠 정말 배가 고프다. 조금만 더 가면 헬기장이 있다고 거기서들 식사한다니 따를수밖에.
점심후에 나른함은 새섬봉을 오르면서 싹 달아난다. 와룡산에서 누운 용의 머리가 민재봉이라면 용의 뿔은 새섬봉이 될 듯 싶다. 그림에서는 용의 눈이 포인트겠지만 산에서 용의 핵심은 뿔의 지점이지 않을까? 밧줄과 꺽쇠디딤으로 가파르고 경사진 암벽을 오르기 좋게 해 놓았다지만 여자들은 겁 먹기에 좋은 곳이다. 그 동안 밋밋하게 왔던 산행에서 갑자기 난이도가 높아져 한편 스릴도 있고 또 한 편 긴장감도 느끼게 한다. 올라서면 사방을 시원하게, 특히 바다가 보이기에 그 장쾌함은 더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이 많아 좁은 곳에서 오래 독점할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미리 말했지만 이 봉우리가 제 위치를 찾음으로써 와룡산의 격이 한 단계 더 높아 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700미터대 산에서 와룡산은 이제 800미터산의 준봉에 들어 간 것이다. 어지간한 국립공원의 산들 중에 800미터대 이하높이의 산들이 꽤 많다. 월출산 계룡산 주왕산 북한산 내장산등등
새섬봉의 기암괴석은 와룡의 상징이다. 설악의 용의 어금니인 용아장성만은 못해도 용을 거론할만하다.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정도가 꽤 심상찮다. 세찬 바람과 아찔한 높이의 체감이 쉽사리 이 산을 볼 수 없게 만듬이다. 와룡은 이 새섬봉으로 인해 그 이름의 과분을 가뿐하게 해소하고 나름 인상 깊은 산으로 남게 만든다. 사진은 주인공만은 찍기가 쉽지않다. 많은 인원이 한정된 좁은 공간에서 한 번씩 주인공과 같이한 사진을 바라기에 순서를 기다리려면 나처럼 성미 급한 사람은 쉬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내려 오는 길은 반이지만 할 말도 찍을 거리도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산이 그랬다. 주왕산처럼 코스를 그렇게 정하지 않음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어쩜 인생과 너무 닮았다. 부지런히 안전히 내려 오는 것만이 최종 목표가 된다. 큰 산이면 내림도 길고 가파르고 얕으막한 산은 평탄하고 무난하게 하산하듯이 인생도 그와 같다. 설악처럼 큰 산의 하산은 지긋지긋한 경험이었듯이 큰 인물의 내리막이 평이한 경우는 드문 것 같은건 나만의 생각인가. 결국 산도 내게 수준이 맞아야 편하고 홀가분하고 재미나고 가벼운 법이다. 내게 맞지 않은 부담스런 크기를 경계해야만 할터.
와룡산은 이상하게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광경이 정말 많았다 소름 끼칠만한 데쟈뷰를 겪는 것 같았는데 마지막 다 하산하는 길에 있는 남양저수지를 보자 아~~여긴 와 본 곳이구나 하는 확신이 든다. 작년 비슬산도 그랬는데. 사진과 글이 없는 경험은 때론 지워진 추억이 되는구나.
좋은 산은 틀림없고 이름 값 하는 산도 틀림없다. 너무 한 쪽 끝에 있어 많은 사람이 보지 못함이 실체에 비해 박한 명성을 얻게한 연유가 아닐까 싶다. 구경하기엔 인연도 작용하는데 해 뜬 날씨처럼 지극히 평범한 조건 이었지만 근 십여일이상 찌뿌드듯한 날씨사이에 반짝 햇빛과 햇볕을 만끽해 이 산과는 인연이 두터워진 느낌이다. 하긴 이 많은 산 중에 두 번이나 오기가 그리 쉽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