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꼬(이세은)가 두한(안재모)을 찾아가 종로에서 계속 영업할 의사를 밝히며 원한다면 보호금 명목으로 세금을 바치겠다고 말하자 두한은 일본 사람의 세금은 필요 없다고 거절한다. 카페로 돌아온 나미꼬가 두한과 마주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며 관심을 보이자 시바루(이세창)는 사적인 감정을 경계하라고 충고한다. 두한은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박인애(정소영) 일행이 불량학생들에게 괴롭힘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두한은 여러 명이 한 사람을 괴롭히는 건 비겁한 일이라고 간섭하다 원치 않는 싸움에 휘말린다. 결국 두한의 도움으로 세 명은 목숨을 구하게 되고, 다음날 박인애의 오빠는 두한을 찾아와 신세를 갚고 싶다며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말한다. 한편 두한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던 할머니(정영숙)와 큰어머니(이덕희)는 형사 오무라(김성수)를 통해 두한이 종로의 주먹패가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실망한 할머니는 아버지 기일에 맞춰 집에 온 두한을 문전박대하는데….
씬 1 그 까페(은하수)
지난 회와 연결된다. 나미고는 두한을 향해 그렇게 미소짓고 있다.
나미꼬-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김두한 오야붕과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김영태-.........(두한을보며)..........?
두한 그렇게 하십쇼.
김영태와 시바루는 좀 떨어진 자리에 앉는다. 시바루는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시바루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는 김영태의 눈이 날카롭다.
나미꼬-그렇게 서있지 말고 앉으세요.
두한-....(앉으면)
나미꼬-(창밖을 보며) 날씨가 참 좋네요. 그렇죠?
두한-..........만나자고 한 용건이 뭐요?
나미꼬-(미소).... 얼마 전에 우미관 앞에서 구마적 오야붕과 싸우는 것을 봤어요.
참 대단하더군요.(슬쩍 두한의 손을 넘겨다 보며) 그렇게 예쁜 손에서 어떻게 그런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죠?
두한-..............
종업원-(다가와) 주문 하시겠습니까?
나미꼬-저는.........
두한-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다. 부를 때까지 기다려.
종업원-예.(간다)
두한-만나자고 했을 땐 이유가 있을 것이오? 나는 바쁜 사람이니 어서 용건이나 말하시오.
나미꼬-우선 차부터 마시는 게 어때요?
두한-용건을 말하라고 했소.
나미꼬-성격이 급하시군요.
두한-우리의 경고를 받았을 텐데... 종로를 떠나라는 경고 말이오.
나미꼬-.........
두한-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요. 하루 빨리 우리 구역에서 나가시오.
나미꼬-섭섭하군요. 저같은 미인을 앞에 두고 겨우 그런 이야기 밖에 하실 말씀이 없으신가요?
두한-....... 사내들 일에 여자를 끼어넣다니, 내가 잘못 보았군. 나는 그래도 하야시가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나미꼬-아뇨.. 잘 보신 거예요. 형부는 아주 남자다운 분이세요.
두한-..........형부?
씬 2-1 그 한 쪽
김영태는 두한과 나미꼬쪽을 보다가 시바루를 본다. 시바루는 여전히 꼼짝않고 나미꼬 쪽을 보고 있다. 마치 석상처럼....
김영태-이보게, 우리도 차 한 잔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시바루-..... (댓구도 없다)
김영태-차 한잔 안 하겠는가?
시바루-생각 없소.
시바루의 시선은 여전히 나미꼬쪽이다. 김영태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차 한잔 가져오라는 시늉을 한다.
종업원이 대답하며 차를 준비한다.
씬 2-2 두한과 나미꼬쪽
두한이 정색을 하며 다시 묻는다.
두한-지금 하야시 오야붕이 형부라고 하였소?
나미꼬-네. 뭐가 잘못 되었나요?
두한-잘못 되었소. 종로 영업장에 관한 이야기는 여자와 나눌 이야기가 아니오.
나미꼬-여성을... 상당히 무시하시는군요?
두한-사내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소. 이번 일은 당신과 나눌 이야기가 아닌것 같소.
나미꼬-오해하지 마세요. 이곳에 나온 건 순전히 제 의사 였어요.
두한-..............?
나미꼬-나는 형부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여자가 아니에요. 내가 여기 온 것은 내 나름대로 김두한씨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죠.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말이에요. 나는 우리끼리 나눌 이야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한-.........글쎄... 나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는데.. 여자를 상대로 나와바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 사회에선 부끄러운 일이오. 내 뜻은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사이) 가서 하야시 오야붕에게 전하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종로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거라고 말이오.
그럼 난 이만 일어나야겠소.
나미꼬-김두한씨... 나도 분명히 말해둘 게 있어요. 미안하지만 나는... 종로를 떠나지 않아요.
두한-........?
나미꼬-우린 법이 정한대로 정당하게 장사를 하고 있어요. 김두한씨가 그걸 막을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그 쪽에서 원한다면 예전에 구마적 오야붕에게 했던 것처럼 보호금 명목으로 세금을 바칠 수는 있어요.
두한-일본 사람의 세금 따윈 필요없소.
나미꼬-종로에서 장사하는 일본인이 우리들만은 아닐텐데요?
두한-다시 말해두지만 이건 당신 같은 여자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오. 다시는 부딪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겠소.
두한이 일어서면 김영태도 차를 마시다 말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시바루를 본다.
시바루는 표정없이 나미꼬 곁으로 걸어가 선다. 두한이 잠시 나미꼬를 본다. 나미꼬는 여전히 미소를 띄우고 있다.
두한-가겠소.
나미꼬-또 뵐 거에요. 우린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요. 안 그래요?
그렇게 웃는 나미꼬를 보다가 두한은 영태와 함께 밖으로 나간다. 나미꼬는 그렇게 웃고 있다. 매우 자신있는 표정이다.
씬 3 동 밖
두한과 영태가 그 곳에서 나와 거리로 나선다.
김영태-사쿠라의 사장이 여자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만..
두한-하야시를 형부라고 부르더군요.
김영태-그래? 그렇다면...
두한-여자치고는 굉장히 대담하다 했습니다.
김영태-무슨 이야기를 하던가?
두한-종로를 떠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한번 경고를 했습니다.
김영태-그것뿐이었나? 꽤 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는데, 다른 말은 없었고...?
두한-쓸 데 없는 이야기를 좀 하더군요.
김영태-쓸 데 없는 이야기라니?
두한-그냥 그렇고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 말입니다.
김영태-시시한 이야기들이라니? 그게 뭔데...?
그러나 두한은 말없이 앞서 걸어간다. 김영태는 뭘까 고개를 외로 꼬고...
씬 4 그 까페(수정)
나미꼬가 창밖 저 멀리로 사라져 가는 김두한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옆으로 선 시바루의 얼굴이 무표정하다.
나미꼬-시바루상은 어때요? 저 김두한이라는 사내말이예요.
시바루-.........?
나미꼬-강하고 거친 사내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의외였어요. 눈칩이 아주 맑았어요.
시바루-.............
나미꼬-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여도 마음은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죠.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잖아요. 눈빛을 속일 수는 없죠.
시바루-나미꼬상, 제가 감히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사적인 감정은 이번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미꼬-.........? (미소) 시바루상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나요?
시바루-죄송합니다만...그랬습니다.
나미꼬-역시 난 감정을 잘 감추지 못하나봐요.
시바루-..............
나미꼬-맞아요. 잘 봤어요. 저 김두한이라는 사내와 마주한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어요.
구름 위를 걷다온 것 같아요.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이예요.
꿈을 꾸는 듯한 나미꼬.. 그러나 시바루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다.
씬 5 권번 전경
창을 연습하는 기생들의 소리가 높다.
씬 6 어느 방
애란과 설향이 한복을 잘 개서 한쪽으로 쌓아놓는다.
애란-설향이 너 요즘 얼굴이 활짝 피는구나. 하긴 서방님께서 종로를 주름잡는 오야붕이 되셨으니 얼마나 좋을꼬....
설향-또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서...?
애란-아이구 누구는 춘삼월 봄바람을 만났는데 어떤년은 팔자는 고사하고 칠자도 보이질 않으니....
설향-그만 하고 이거나 좀 받아.
애란-(한복을 구석에 밀쳐 놓고) 그런데 왜 두한 오라버니는 통 소식이 없다니? 너 이제부터 잘 해야돼.
잘못하다간 다된 밥에 재 뿌리는 수가 있어.
설향-.............?
애란-생각 좀 해봐. 우미관 오야붕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니? 한다하는 기생이며 여급들이 주위에 들끓을 거 아니야?
설향-(다시 한복 속곳을 끌어오며) 그렇겠지...
애란-어머, 얘 말하는 것좀 보게. 그렇겠지가 뭐야? 그렇겠지가?
설향-난 그런 거 상관하지 않아. 애초부터 두한씨는 나같은 거 안중에도 없었던 걸 뭐.
애란-점점 더 기가 막히는 소리만 골라서 하네, 얘가? 그럴 거면 여태까지 그런 지극정성은 왜 쏟았어?
설향-그냥 내가 좋아서 한 일이야. 그저 두한씨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나를 버리지만 않으면 난 그걸로 족해.
애란-아이구... 열녀 났네. 열녀 났어. 이 답답한 것아 제발 속 터지는 소리 그만 하구 내 말대로 해.
남자는 밥풀대기 마냥 딱 붙어서 안 떨어져야 내 사람이 되는 거라구. 알았어?
설향-.............
애란-내 말 듣는 거야 마는 거야?
설향-귀청 떨어지겠다.
애란-차라리 내가 벽을 보고 얘길 하는 게 낫지.
설향-그러는 넌 영철씨하고 잘 되가는 거니?
애란-...(시무룩해진다)
설향-혼인까지 약속했다면서 어쩔 작정이야?
애란-그러기야 했지만... 뭐 뾰족한 수가 있어야지. 우리 영철씨가 두한 오라버니처럼 대단한 것도 아니구.
설향-저번에 두한씨가 빚도 다 갚아줬잖아.
애란-빚만 갚으면 뭘해? 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한 걸.... 아버지 약값도 수월치 않게 들어가구.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딱 집 한 칸 마련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설향-....(딱하다는 듯)
애란-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다더니 그게 딱 나지뭐야. 영철씨가 날 데려갈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말이야.(한숨)
설향-...........
그때 밖에서 권번 선생의 소리가 들려온다.
권번선생-설향이 안에 있느냐?
설향-예, 어머니...
권번 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권번선생-나갈 채비하거라. 명월관에서 어떤 손님이 너를 찾는다는구나.
설향-저를요?
애란-이 대낮에요? 아니 어떤 정신나간 작자가 낮부터 술을 퍼마신대요?
권번선생 어허. 손님에게 작자라니....!
애란-..............
권번선생-인력거를 불러놨으니 빨리 준비하고 나오거라.
설향-..........예.........
권번선생이 분을 닫고 나가면,
애란-하여간 요 주둥이. 요 주둥이가 꼭 말썽이라니깐....
설향-..........?
설향은 의문이 가득한 눈이다. 그모습에서...
씬 7 마포 포구
그 부산한 포구의 모습들 사이로 문영철이 개코와 부하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
개코는 포구의 풍경이 마냥 신기한 듯 산만하게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다.
개코ㅡ이거봐....생선이 아직도 펄펄 살아서 움직여.
문영철 ㅡ 포구엔 처음 와봤어?
개코ㅡ 헤헤헤. 사실 사대문 밖으로 나가본 적도 별로 없거든.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문영철 ㅡ 지금 호랑이 굴을 찾아가는 중이야.
개코ㅡ.............?
문영철 ㅡ마포의 용식이하면 이곳에선 아이들도 울음을 멈출 정도니까 정신 바짝 차려.
원래 포구 근처의 주먹 패거리들은 뱃사람 기질이 있어서 여간 거친게 아니야.
개코-(겁먹은) 우릴....때리지는 않겠지?
문영철-그건 장담 못해. 경우에 따라선 우리도 위험해질 수 있어.
개코-.........!(걸음을 멈춘다)
문영철-안 오고 뭐해?
개코-가... 갈게. 가야지.
문영철-그렇다고 너무 겁먹을 건 없어. 근데.. 너 싸움은 좀 해봣어?
개코-엉?
문영철-짜식하고는... 이 겁먹은 눈 좀 봐라. 가자, 임마. 저기야.
용식들이 있는 시장통 사무실이 보여온다. 그들 그쪽으로 가면..
씬 8 마포 시장 사무실
용식을 중심으로 마포 패거리들이 모여 앉아 있다. 상하이도 그 안에 있다.
상하이-용식이 형님? 일이 아주 우습게 되었습니다. 종로가 개판이 되어 버렸단 말이오.
용식-소문은 들었어. 하지만 믿어지지가 않아. 기라성같은 주먹들이 즐비한 종로야. 다들 뭐했다는 거야.
상하이-더럽게 됐습니다. 아주 운이 나빴다고요...
용식-글쎄... 그게 운이라고만 할 수 있나...?구마적 형님이 그렇게 된 것은 운만 탓하기는 그래.
김두한이라...? 허, 그것참...
상하이-마포에서 힘을 좀 써줘야겠어요. 그놈을 다시 몰아내야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심각하게 의논하는데, 똘마니로 보이는 사내가 들어와 꾸벅하고는 말한다.
사내-형님...종로에서 사람이 와 있습니다.
용식-종로에서?
상하이-.......?
사내-우미관의 김두한 오야붕이 보냈다고 합니다만....
상하이-그냥 보내지 마쇼, 형님... 혼을 내서 보내십쇼.
용식-들여보내라.
사내-예
문영철과 개코가 들어온다. 용식은 거만한 태도로 두 사람을 맞는다.
문영철과 개코는 야비하게 시선을 굴리고 있는 상하이를 본다. 용식이 묻는다.
용식-종로에서 왔다구?
문영철-그렇습니다.문영철이라고 합니다.
용식-종로에서 무슨 일이야?
문영철-저희 큰형님께서 오야붕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모두들-............?
용식-무슨 회의....?
문영철-오야붕 회의입니다.형님께서도 꼭 참석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용식-오야붕 회의? 하하하.... 그 어린 아이가 회의를 소집했단 말이지.
모두들-... (웃음을 터트린다)
문영철-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형님.
용식-뭐야....?
모두들-... (금방 험악해 진다)
상하이-야, 임마. 뭐가 지나치다는 거야?
패거리들 사이에서 보고있던 상하이가 일어난다.
문영철-.....
상하이-오랜만이구나, 문영철. 그래 두한이는 잘 있겠지?
문영철-아직 경성을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상하이-경성을 떠나야 할 놈은 두한이야. 곧 그렇게 될 거야.
문영철-형님이 낄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상하이-이 새끼..
용식-아아...
상하이-..........좋아.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건방질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문영철-어떻게 하시겠습니까,형님. 참석하시겠습니까?
용식이 대답대신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켜 문영철과 개코를 본다.
손에 깍지를 끼며 누르면 손마디 소리가 위협적으로 두두둑 댄다.
일종의 압박이다. 그러나 문영철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용식-야, 꼬마야... 우린 말이야.두한이를 오야붕으로 인정한 적이 없어.
문영철-..........?
용식-그러니까 그 오야붕회읜지 뭔지에는 갈 이유가 없는거야. (사이) 알았냐? 가서 두한이라는 놈에게 그렇게 전해.
문영철-다시 한 번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용식-(험악해지며) 야, 임마 여긴 종로가 아니라 마포야. 병신 되기 싫으면 잔말 말고 썩 꺼져. 어서!
문영철-.............알겠습니다.(나가려는데)
상하이-야, 문영철... 두한이 한테 가서 내 말을 전해. 밤길에 뒤통수 조심하라고 말이야...알았어?
문영철과 개코, 잠시 그렇게 서서보다가는 용식에게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간다.
상하이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비열하게 웃는다.
씬 11 명월관 외경(첨가)
낮이라 한산하다. 설향이 안으로 들어오면 기다리고 있던 지배인이 맞는다.
지배인-어 그래.. 어서 와라.. 아주 귀한 손님이시니까 잘 모셔야 한다. 알았지? 자 이 쪽으로...
설향-...........?
씬 12 어느 손님 방
정운경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잠시 후 지배인의 소리가 들려온다.
지배인-손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정운경-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지배인과 설향이 들어온다. 정운경을 보고 설향은 약간 놀라는 눈치다.
지배인-부르신 기생을 대령했습니다.
지배인이 눈치를 주면 설향이 다가가 정운경 옆에 다소곳이 앉는다. 지배인이 인사를 하고 나가고 나면...
정운경-낮에 불러내 폐가 됐는지 모르겠구려?
설향-아닙니다. 종종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한 잔 올리겠습니다.
정운경-아니오.. 술은 됐소. 기다리기가 무료해 잠시 입술만 적셨을 뿐이오.
설향-............?
정운경-실은 그대의 가야금 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서 왔소. 이상하게도 그 날 이후 그 소리가 잊여지지가 않지 뭐요?
허허허.. 대낮부터 염치 없는 부탁이지만 한 곡조 들려주실 수 있겠소?
설향-..........(미소) 어려운 부탁이 아니십니다. 아직 덜 익은 제 가야금 소리를 그리 생각해 주시니
부끄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한 곡조 올리겠습니다.
설향이 가야금 쪽으로 다가가 앉는다. 그리고 가녀린 손이 현을 타기 시작하면...
정운경은 그윽한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본다. 설향의 가야금은 한동안 계속되고,
정운경은 점점 설향에게로 빠져든다. 그들의 그 모습에서......
씬 13 우미관 앞
최동열이 우미관을 향해 오고있다. 저희들끼리 잡담을 나누던 기도가 그 앞을 가로막는다.
기도-표 좀 주십시오.
최동열-영화를 보러 온 게 아닐세. 여기 김두한이라고 있지?
기도-예?저희 김두한 형님 말씀이십니까?
최동열-그래. 두한이를 만나러 왔네.
기도-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지금 형님들하고 회의중이신데 제가 가서 말씀 전해 올리겠습니다.
최동열-아닐세. 뭐, 그럴 거까지 없구. 일 끝나면 저 아래 비너스라는 까페로 오라고 해주게.
최동열이라고 하면 알거야.
기도-예, 그러겠습니다.
최동열이 기도의 인사를 받고 막 골목길로 접어든다. 기도들이 누굴까 하고 갸우뚱하며 최동열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씬 14 그 극장 골목길
최동열이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박인애와 함께 오던 자신의 사촌동생이 최동열을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사촌동생-오라버니........?
최동열-오...? 숙향이 아니냐? 아니, 여긴 웬 일이냐?
사촌동생-웬일은요? 친구와 극장 구경 가는 길이죠.
최동열-그래...? 내가 워낙 바쁘다 보니 겨우 이런데서 보게 되는구나.
사촌동생-그래서 가까운 이웃이 사촌보다 낫다고들 하잖아요. 안 그래요.오라버니...?
최동열-허허, 그래 그래... 내가 좀 바쁘다 보니 그랬구나. 친구인 모양이구나?
사촌동생-네. 참, 인애야. 내가 언젠가 얘기한 적 있지. 신문기자로 계시는 사촌오라버니 말이야. 바로 이 분이야.
박인애-안녕하세요, 숙향이 친구 박인애라고 합니다.
최동열-.....(미소).....아, 그래?
사촌동생-그리고 이 쪽은 인애 오라버니예요.
미스터박-처음 뵙겠습니다.
최동열-반갑네...
사촌동생-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세요? 혼자서 영화를 보러 오셨어요?
최동열-아니다. 누굴 좀 만나러 왔어. 어서 가렴. 시간 늦겠다.
사촌동생-예. 그럼 다음에 찾아뵐게요.
박인애들이 인사를 하고 그렇게 우미관으로 들어간다. 최동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씬 15 동 우미관 사무실
김무옥과 번개가 분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씩씩대고 있다. 반면 김영태와 두한은 차분하게 앉아 있다.
김무옥-짐작은 했었지만서두 막상당해본께 울화통이 터져서 말이지라우....
아니 사람이 온 줄 알면서두 세 시간이나 문밖에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답디여?
두한-.....................
김영태-그래서 만나 보긴 했나?
번개-만나보긴요.. 오야붕들은 콧배기도 안 보이고 똘마니 새끼들만 나와서 설치더라구요.
내 참 더러워서..
김영태-어쨌거나 수고했다.
김무옥-수고는 무슨 수고요. 시구문으로 해서 동대문까지 발이 아프도록 돌아온 보람이 아무 것도 없구만이라우...
번개-그러게 말입니다.
두한-형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영태-예상보다 더 심각한 것 같군.
그때 영철과 개코가 안으로 들어온다.
문영철-다녀왔습니다.
김영태-어서와라. (그들 앉으면_ 그쪽 반응은 어땠어?
문영철-영등포 쪽은 탐탁치는 않지만 그래도 수긍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문제는 마폰데요....
김영태-용식이 말인가?
문영철-용식이 형님도 그렇지만... 그곳에서 상하이를 만났습니다.
두한-..........?
김영태-상하이가 거기에 있어?
문영철-예. 이미 마포와 한통속이 되어 있더군요.
김영태-너무 조용하다 싶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
문영철-두한이한테 앙심이 대단하더군요. 밤길 조심하라고 어쩌구 하는게 독기를 품은 게 분명합니다.
아무래도 당분가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두한아.
두한-...............
씬 16 종로서 고등계(첨가)
미와가 자리에 앉아 서류들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미와-세월만큼 빠른것이 없다더니 정말 그렇구만.. 김좌진이 죽은지도 벌써 7년이나 지났어..
아마 지하에서 통곡을 하고 있을 게야. 아들 놈이라고 하나 있는게 거리의 불량배가 되어버렸으니 말이야.
하하하..(일어서며) 이봐, 오무라.
오무라-예,경부님..
미와-김좌진의 가족들 말이야... 긴또깡이 저리 된 걸 알고 있겠지?
오무라-글세요..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한 가족인데요.
미와-(끄덕이며) 그래.. 지금까지 모를 리가 없지.. 모르긴 해도 그 노인네 실망이 대단했을 게야..
자존심이 무척이나 센 노인네가 아니었는가?
오무라-예,그랬습죠.
미와-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있겠지, 오무라 형사?
오무라-예?
미와-이런... 쯧쯧.. 아니 김좌진의 가족들을 감시하는 사람이 김좌진의 제삿날도 모른단 말인가?
오무라-아 그렇습니까?
미와-누가 다녀가는지 잘 감시하도록 해.. 의외로 그런 데서 뜻하지 않은 수확을 거둘 수도 있는 거니까. 알겠나?
오무라-하이, 경부님..
그 때 급히 김태서와 문달영이 안으로 들어온다.
문달영-경부님, 드디어 놈의 소재가 파악됐습니다. 공산당 재건그룹 총책 이재유 말입니다.
미와-그래? 그게 어딘가? 어디에 숨어 있었어?
김태서-창동 일대에서 측량기사 일을 하며 버젓이 지냈다고 합니다. 실은 어젯밤 비밀
헌병대원들이 놈의 은신처를 급습했는데.. 아깝게 놓쳤다고 합니다.
미와-뭐, 놓쳐? 이런 머저리 같은....
문달영-하지만 이재유로 추정되는 사내가 동숭동 일대로 잠입했다는 첩보가 입수됐습니다.
헌병대가 그 일대를 철저히 검문 검색 중에 있으니 곧 뭔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미와-.........다잡은 대어를 눈앞에서 놓치다니... 내가 살피지 않으면 도대체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단 말이야.
되는 일이...(사이) 문형사.
문달영-예, 경부님..
미와-김형사와 함께 지금 즉시 현장으로 가라. 가서 수시로 현장 상황을 보고 하도록 해..
문, 김-하이, 경부님..
그들 그렇게 나가고, 미와의 잔뜩 구겨진 표정에서....
씬 17 극장 외경 (밤)
상영이 끝난 듯 사람들이 우 빠져나오고 있다.
씬 18 동 극장 로비
관객들 대부분이 빠져나가는 그 뒤로 박인애들이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때 두한들이 그 뒤로
다른 쪽 계단을 내려온다.
씬 19 극장 앞
두한들이 나오면 기도들이 인사를 한다.
개코-두한아... 기분도 그런데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어때?
김영태-그러지. 애들 고생도 했는데...
두한-좋습니다. 가시죠.
두한들 막 가려는데 기도중 한 아이가 다가온다.
기도-저... 두한 형님.
두한-.......?
기도-한참 전에 어떤 신사 분이 형님을 찾아 왔는데요. 최... 뭐라고 했는데..
두한-.......그래?
기도-그런데 아마 가셨을 겁니다. 영화 시작하기도 전이었거든요. 말로는 저 아래 비너스라는 까페에서 기다리신다고 했는데........
두한-알았다. (김영태에게)먼저 종로 회관에 가 계시죠.
김영태-혹시 모르니까 애들을 몇 데려가게.
두한-아닙니다. 요 앞이에요.
두한이 골목 쪽으로 가면 김영태들도 발길을 돌린다.
씬 20 골목길
두한이 모퉁이를 돌아 골목길로 들어선다. 두한이 그렇게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다급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두한이 가다가 말고 귀를 기울인다.
사촌동생-(소리) 도대체 왜들 이러세요....?
씬 21 그 일각
대여섯 명의 불량 학생들이 미스터박과 두 여학생을 둘러싸고 희롱하고 있다.
박인애와 최동열의 사촌동생은 구석에 몰려 어쩔 줄 모르며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학생1-야, 박동수? 너 아주 대단하다? 여학생을 둘씩이나 끌고 다니고 말이야?
미스터박-아니야.. 얘는 내 동생이고.. 여기는 내 동생 친구라니까...
학생2-야, 야 이 공부벌레야. 너만 재미보지 말고 우리도 소개 좀 시켜 달라고...응>?
저쪽으로 가서 얘기 좀 합시다.... 응?
박인애-왜들 이러세요.... 비키세요.
학생1-어쭈, 세게 나오는데...? 이야... 되게 이쁘게 생겼네.. 우리 저기 가서 이야기나 좀 하고 갑시다.
나머지 학생들은 와 웃고 학생1,2는 박인애와 사촌동생을 잡아끈다.
학생2-아, 왜 이렇게 빼시나, 빼시기는....? 이름이 뭐요? 저쪽으로 가서 얘기 좀 하자니까...?가서 얘기 좀 하자구요.
학생2가 마치 키스라도 하려는 듯 박인애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가면 박인애가 비명을 지른다.
박인애-왜 이러세요, 놓으세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미스터박-야, 너희들 왜 그래..? 왜 그러냐고...? 그러지마...
그 때다. 학생패들이 동시에 두한을 향해 달려든다.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도 두한은 태연하다.
박인애와 사촌동생은 다시 비명을 지르려는데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번개처럼 빠른 두한의 공격에 대여섯 명의 학생들은 제각기 휘청거리며 나뒹군다.
게중에는 각목과 돌멩이를 들어 다시 앞과 뒤에서 공격하려다가 또 몇 방을 거듭 맞으며 널부러진다.
그 놀라운 상황을 보며 박인애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미스터박-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두한-.....뭘요? 자, 그만들 어서 가보세요.
미스터박-이거 어떻게 사례를 해야할지.
두한-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자, 저는 그만...
미스터박-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러지 마시고 제가 나중에라도 찾아 뵐 수 있게 계신 곳을 좀 알려 주십쇼. 존함두요..
사촌동생-네 그렇게 해주세요. 이렇게 가시면 저희들이 너무 죄송하잖아요.
두한-됐습니다. 늦었는데 어서들 들어가 보세요.
미스터박-안됩니다. 제발 저희의 성의를 무시하지 마십쇼.
박인애-저... 그렇게 해주세요. 이렇게 가시면 안됩니다.
두한-.............?
두한은 아주 잠시동안 박인애의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박인애-그냥 가시면 저희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예요.
두한-정 그러시면... 우미관에 와서 김두한을 찾으십시오.
미스터박-우미관이요? 아, 그럼 극장 일을 하시나보죠? 알겠습니다. 꼭 찾아뵙겠습니다.
두한-조심히들 가십시오.
두한은 그렇게 간다. 두어 걸음 가다말고 다시 돌아본다. 박인애도 보고 있었다.
미스터박-정말 엄청난 사람이야. 혼자서 일곱이나 되는 놈들을 다 때려 놉혔어.
들 봤지..? 마치 펄펄 날아다니는 것 같았어. 이야, 처음 봤어. 나는 이러거 처음 봤다고.. 이야..
박인애-................
박인애는 두한의 사라진 쪽만 보고 있다.
씬 22 비너스(수정)
최동열과 김이수가 마주해 있다.
김이수-두한이가 오지 못하는 모양이구만.. 종로의 주먹왕을 가까이서 보게 되나 싶었는데 아쉽구만.. 허허허
최동열-올 때가 되면 오겠지..
그 때 두한이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살핀다. 김이수가 먼저 보았다.
김이수-오, 저기 왔구만... 이보게 여길세. 여기야..
두한이 그 쪽으로 다가온다.
최동열-어서 오너라.
두한-..........(고개를 숙인다)....
김이수-반갑네, 반가워.. 자넨 날 모르겠지만 난 자네를 잘 알고 있네.. 이렇게 보니 꽤나 미남자일세 그려.. 허허허..
자자 앉게.. 그럼 얘기들 나누시게..
두한이 김이수가 일어난 자리에 앉는다.
두한-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최동열-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약속도 없이 찾아온 내가 잘못이지. 요즘은 바쁠 것도 없다.
근황도 궁금하고 해서 겸사겸사 들렸다.
두한-예전에 의사 친구라는 분께 아저씨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신문사가 폐간 되었다구요....
최동열-그렇게 되었지. 지금은 조그만 잡지사를 하고 있다.
두한-예...여전히 글을 쓰시는군요.
최동열-손에서 펜을 놓는 순간 나는 죽은 거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지 않느냐. 헌데 두한이 너는 잘 지내고 있는 거냐?
두한-...........
최동열-대답을 해 보거라.
두한-그냥 제 방식대로 살고 있습니다.
최동열-네 방식대로 산다?(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 언젠가 그렇게 말했었지.
너는 네가 알아서 길을 찾아가겠다고 말이야. 사실은 얼마 전에 우미관 앞에서 싸우는 것을 봤다.
두한-..........
최동열-그 자리에 나도 있었다. 굉장하더구나. 이제까지 알고 있던 너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만주에서 엄청난 용력을 발휘하셨던 장군님의 모습이기도 했다.
두한-................
최동열-하지만 말이다, 두한아... 장군님께서는 그 힘을 바른 곳에 쓰셨다. 일본군을 상대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두한이 너는 한낱 주먹패들을 상대하는데 그 힘을 쓰고 있었어. 마지막으로 또 한번 묻고 싶구나.
정녕 그것이 너의 길이냐?
두한-......예, 제 결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최동열-그래.... 그렇다면 이제는 어쩔 수가 없겠구나.
두한-.........
최동열-내가 오늘 여기 온 것은 내일이 장군님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혹시 알고 있었니?
두한-예, 알고 있었습니다.
최동열-고맙구나. 그렇다면 내일 나와 함께 가자꾸나. 할머님과 어머님께서는 네가 지금 만주에 있는 줄 알고 계실 것이다.
이쯤 되었으니 어쨌든 경성에 있다는 것만은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겠냐? 약도를 알려줄 테니 내일 잡지사에 좀 들리거라.
응...?
두한-예.
최동열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는 두한의 모습을 허전한 듯 바라본다.
씬 23 삼청동 두한의 집 외경(낮)
씬 24 동 집 마루
조모와 오씨가 마루에서 나물을 다듬고 있다. 오씨는 가끔씩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쉰다.
조모-웬 한숨을 그렇게 쉬느냐?
오씨-....아, 아닙니다, 어머님..
조모-(알만하다) 그래도 이만한상이라도 차릴 수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이냐.
왜놈들 등쌀에 조선 백성들은 끼니를 거르는 형편이 아니더냐.
나물 몇 가지가 전부지만 제수를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오씨-예....(그러나 여전히 표정은 어둡다)
조모-무슨 걱정이 더 있느냐?
오씨-아무래도 우리 두한이가..... 마음에 걸려서요.
조모-놔두거라. 알 때가 되면 소식이 오겠지.
오씨-...........
조모-어서 제수나 준비를 하자. 혹 손님이 오실지도 모르느니라.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오씨와 조모 의아한 얼굴로 마당 쪽을 보는데 종로서 오무라가 대문 안으로 고개를 내민다.
오씨-누구십니까?
오무라-음.... 생각보단 조용하구만....
오씨-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오무라-일면식이 있을텐데.... 나 모르시겠습니까? 종로서 고등계 오무라 형사요.
조모-(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돌아앉는다)
오씨-여긴 무슨 일로 찾아 오셨소?
오무라-무슨 일은....? 당신들은 요시찰 인물이 아닌가? 항상 고등계 감시의 대상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조모-아무 일 없으니 그만 나가거라.
오무라-오늘이 김좌진의 제삿날이라고 해서 기대를 좀 했더니,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구만....
조모-나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오무라-흐흐흐. 저 노인네 성깔은 여전하구만. (집안을 돌아보며) 하긴 더 둘러볼 것도 없겠어. 집안꼴이 아주 엉망이로구만.
오씨-볼 것 보았으면 그만 나가시오.
오무라-아아 알았소. (조모를 향해) 그래도 제사상이라고 차리는 걸 보니 긴또깡이 돈푼이나 가져다 주는 모양이군요.
조모-..........뭐라?
오무라-왜? 너무 딱 맞추었나..? 헤헤헤... 하긴 긴또깡이 요즘 종로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인물이지.
재미있어.. 그 아버지라는 작자는 불량선인이고 아들은 종로주먹패 건달이라...? 이거야말로 불한당 집안이 아니고
뭔가 말이야. 하하하...
조모-네, 이놈.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게냐? 우리 두한이가 뭐가 어째..? 주먹패라고...?
오무라-에잉....몰라서 묻는게요? 긴또깡, 긴또깡은 바로 요 근처에 있지않소? 종로 주먹패 말이요.
거기서 이거요, 이거. (엄지를 내보인다) 알아주는 건달이지. 대단해요.
오씨-..........?
조모-그게 사실이냐? 그 아이가 거기에 있다고..? 건달...? 그 아이가 건달...?
오무라-수고하시오. 또 오리다.
오무라는 그렇게 나가고 조모와 오씨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보고 있다.
조모-두한이가... 두한이가..........?
씬 25 우미관 외경 (낮)
조모와 오씨가 막 그 앞으로 오고있다. 두 사람이 잠시 서서 그렇게 숨을 고르는데,
저만큼 두한들이 우미관으로 들이닥치고 있다. 극장 앞에 줄지어 있던 기도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머리를 숙인다.
기도들-형님, 오셨습니까?
오늘따라 두한을 맞는 부하들의 인사는 요란스러움을 넘어 극성맞다.
그것을 지켜보는 조모의 얼굴은 아연실색한 표정이 된다. 사실이구나... 그런 표정이다.
오씨도 아찔한 듯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친다. 조모가 싸늘하게 돌아서며 말한다.
조모-가자.
오씨-어머님...?
조모-어서 가자.
조모는 돌아섰고 당황한 오씨의 표정에서...
씬 26 종로거리
조모는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오씨-어머니.... 제발 고정 하세요. 두한이는 아무 생각 없이 저럴 아이가 아닙니다.
어머님과 제가 모르는 무언가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김영태-일단은 내일 열리게 될 지역 오야붕 모임을 지켜보고 결정해야 할 걸세.
영철이의 말이 맞다면 영등포나 노량진쪽은 회의에 참석할 수도 있으니까.
두한-좀 더 구체적인 형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김영태-..........?
두한-회의에 오지 않는 오야붕들에 대한 처리 말입니다.
김영태-우선 채찍을 먼저 사용해야겠지.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밟아 놓아야해.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야.
김무옥-고곳이 뭔 말씀이시다요?
김영태-우미관을 차지함으로서 우리의 영토 전쟁은 끝났다는 이야기야. 두한이는 황제가 되었으니 이제 그
권위만 보여주면 되는 것이지. 말하자면 각 오야붕은 지방의 제후들에 불과하다는 것이야.
두한-..................
김영태-지금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그들이 자네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야.
개코-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냥 오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본때를 보여주자구요.
김영태-..........(웃는다)
두한-그건 안돼, 개코. 영태 형님 말씀대로 그들 역시 우리 식구나 마찬가지야. 계속해 주십시오, 형님.
김영태-그들이 일단 자네를 인정하면 당근을 써야하지. 세금을 줄여주고 각 지역 오야붕들을 높이 치켜주는 걸세.
그렇게만 된다면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자네를 도울 걸세. 구마적이
그들의 도뭉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은 너무 자신의 욕심을 내세웠기 때문이야.
두한-옳은 말씀입니다.
김영태-그런데... 사쿠라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미 통보도 해 놓았는데 이대로 가만히 있다는건 좀...
두한-생각 중입니다.
김무옥-그게 무슨 말이여. 생각중이라니...?
두한-사쿠라의 사장은 여자야. 나미꼬라고 하던가? 하야시의 처제라고 하더라.
번개-하야시의 처제요?
모두들-...........
두한-여자와 싸운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아. 그들을 내쫒는다고 해도 웃음거리만 될 뿐이지.
김영태-일이 아주 목잡하게 됐구만...
두한-...............
씬 28 사쿠라 외경
주위로 야쿠자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서있다. 곧 자가용 한대가 다가와 문앞에 선다.
경계를 서던 야쿠자 한명이 자가용 문을 열어준다. 나미꼬가 차에서 내려 그 야쿠자들을 본다.
나미꼬-당신들은 뭐예요?
야쿠자1-오늘부로 이곳 영업장에 배치되었습니다.
나미꼬-그게 무슨 소리에요? 사장인 나의 지시도 없이 말인가요?
야쿠자1-예. 가미소리 오야붕께서 조치하셨습니다.
나미꼬-필요 없으니 당장 돌아가요.
야쿠자1-...........?
나미꼬-내 말 듣지 못했어요?
야쿠자1-죄송합니다. 저희는 오야붕의 지시가 있어야..........
나미꼬-시바루상은 어디에 있지요?
야쿠자-안에 계십니다.
나미꼬가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들어간다.
씬 29 동 안
시바루가 나미꼬를 향해 인사를 한다.
나미꼬-시바루상 당신이 요청한 건가요? 저 밖에 있는 사람들 말이에요.
시바루-.............
나미꼬-당신이 그런 거군요.누가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라고 했어요?
시바루-저는 사장님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미꼬-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걸 모르겠어요?
시바루-..............
나미꼬-당장 돌려보내세요. 어서요.
시바루-........알겠습니다. (가려는데)
나미꼬-나를 위해 한 일이란건 알겠어요. 하지만 앞으론 허락을 맡도록 하세요.
시바루-..........
나미꼬-내가 이곳에 있는 한 김두한 그 사람은 절대로 여길 치지 않아요. 그렇게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다면
내가 먼저 손을 썼을 거에요. 그 사람은 결코 힘을 앞세우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에요.
시바루-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나미꼬-그렇게 하세요.
시바루가 조용히 나간다.
씬 30 혼마찌깡 거실
하야시가 가미소리, 미우라와 앉아있다. 웃고 있는 하야시.
하야시-그래서 사쿠라에 배치됐던 아이들이 모두 되돌아 왔단 말이지? 허허허..
하여간 처제는 도무지 겁이 없단 말이야..
가미소리-대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잘못하다간 큰 봉변을 당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야시-일단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이미 전권을 주지 않았나? 그렇게 자신이 있어하니 믿어보자고..
가미소리-하지만...
하야시-그 보다도... 김두한이 경성의 각 지역 오야붕에게 소집령을 내렸다고 했나?
미우라-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역 오야붕들이 모일지는 지금으로서는 미지수입니다.
대다수의 오야붕들이 김두한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소문입니다.
하야시-그럴 테지.. 너무도 갑작스런 등극이 아니었나? 충격들이 크겠지.. 아무튼 김두한이 골치가 아프겠구만..
막상 우미관에 들어앉았지만 경성의 진정한 오야붕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꽤나 시일이 걸릴 게야..
그 과정에서 주저 앉을 수도 있겠고.. 그 일 때문에라도 사쿠라는 당분간 괜찮을 게야.. 조금 더 두고 보자고...
하야시의 그 모습에서..
씬 31 우미관 앞
미스터박이 우미관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다. 기도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의아해하다가 그에게 다가간다.
기도-이봐.
미스터박-예?
기도-왜 여기서 얼쩡거리는 거야? 우리한테 뭐 볼 일이라도 있어?
미스터박-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기도-아니면 뭐야?
미스터박-저... 전 그냥 사람을 만나러 왔습니다. 김두한씨라고.. 극장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기도-뭐? 누구?
미스터박-김두한씨요. 오늘 찾아뵙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 두한들이 기도들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온다. 미스터박 눈이 휘둥그레지며 두한을 가리킨다.
미스터박-바로 저 분이세요. 어쨋거나 고맙습니다. (두한에게 다가가) 안녕하십니까?
두한-..............?
미스터박-저 모르시겠어요? 어제 밤에 저희들을 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개코-(경계하듯)누구야, 두한아?
두한-(떠올리며) 아... 미안합니다. (개코에게) 아는 사람이야. 괜찮아.
미스터박-이제야 기억하시는군요.
두한-정말로 찾아오실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미스터박-아, 아닙니다. 어제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저 급한 일이 없으시면 어디 가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두한-아닙니다. 이렇게 와주신 것만으로도 되었습니다.
미스터박-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두한-...... 그럼 요 앞에서 차나 한 잔 하시죠.
미스터박-예.......가시죠.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씬 32 찻집
분위기가 편안한 찻집이다. 미스터박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계속 떠들어댄다.
미스터박-어제 저를 때린 학생들은 사실 얼굴만 알고 있는 제 중학 동창들이었습니다.
우연히 마주쳤는데 건방지게 계집을 둘씩이나 끼고 다닌다면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두한-....................
미스터박-그 여학생들은 제 여동생과 친구였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말을 해도 믿지를 않질 뭡니까?
두한-..........(고개를 끄덕인다) 그랬군요.
미스터박-어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정말이지 큰 봉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두한-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쁩니다. (시계를 보며)그런데 어쩌지요.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미스터박-괜찮습니다. 아까 극장앞에서 보니까 굉장히 높으신 분 같던데요?
두한-.............
미스터박-그 앞에 서있던 건달 같은 친구들도 선생님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더군요.
두한-아, 예.. 그럼 일어서시죠.
미스터박-예. 예.
두한이 먼저 일어나 찻값을 계산한다.
미스터박-(다가와) 아닙니다. 계산은 제가 해야죠.
두한-됐습니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미스터박-하지만 이거....저 그 대신 제가 선생을 저희 집으로 초대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두한-............?
미스터박-제 여동생도 선생을 꼬 한 번 다시 만나뵙고 싶어하구요.
두한-예......?
미스터박-어제 보았던 제 여동생 말입니다. 오신다고 약속을 해주십시오.
저한테도 신세를 갚을 기회를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두한-(웃으며)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스터박-약속하신 겁니다?
두한-..............(미소만)
씬 33 박인애의 방 (첨가)
박인애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그러나 책을 본다기 보다는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 하다.
그녀의 그런 표정 위로 어젯밤 보았던 두한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그렇게 회상에서 돌아오는 박인애의 표정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박인애의 어머니가 다과를 들고 들어온다.
인애모-공부하고 있니?
박인애-네....
인애모-자 이것 좀 들고 하거라..
박인애-네..
그들 모녀가 그렇게 다과를 앞에 두고 마주하는데...
인애모-공부도 좋지만... 어서 좋은 자리가 나야 하는데 말이다..
박인애-....?
인애모-여자는 뭐니뭐니 해도 좋은 집안으로 시집가는게 제일이야..
박인애-어머니두 참..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는데요. 그리고 오라버니두 있는데...
인애모-네 오래비야 천천히해두 되지. 하지만 넌 여자야.. 이 꽃다운 시적을 놓치면 안된다구..
박인애-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어머니 대하고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구요.
인애모-달라져 봤자지.. 나라구 신여성이니 뭐니 하는거 모르는 줄 아니? 하지만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자야.
그저 서방님 잘 만나서 편하게 사는게 제일이야.
박인애-하지만 전... 어머니 세대 같은 그런 결혼 싫어요.. 전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거에요.
인애모-어이구.. 그래도 시집가기 싫다는 소리는 안하네... 그래.. 자유연애두 좋으니까 어디서 번듯한 신랑감만 데려와 봐.
박인애-....(미소).....
씬 34 잡지사 외경 (밤)
씬 35 동 잡지사 안
최동열이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홀로 앉아 원고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때 두한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선다.
두한-아저씨...
최동열-어, 그래.. 왔구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조금만 기다리게.
최동열이 원고 뭉치들을 정리한다.
씬 36 언덕길
두한과 최동열이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 두한의 손에는 정종 한 병이 들려져 있다.
최동열-네 아버님이 가신지도 어언 7년이나 지났구나. 속절없는 것이 세월이라더니.....
두한-...............
최동열-두한아........
두한-예, 아저씨.
최동열-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건 바로 장군님께도 떳떳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인가,
하는 것과도 같은 얘기다. 너는 이미 홀로 섰다.
두한-................
최동열-언제든 어디서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말이다.
(사이) 이제 다 와 가는 구나.
두한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린다.
씬 37 삼청동 조모의 집 앞
최동열이 열려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선다. 막 부엌일을 하고 나오던 오씨가 최동열을 보며 반색한다.
오씨-아니, 최기자님 아니세요?
최동열-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이 장군님의 기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두한이와 함께 왔습니다.
오씨-두한이요....?(보고) 두한아...
두한-큰어머님..
조모-(나오며) 누가 오셨느냐?
두한-할머님..... 두한입니다.
툇마루에 선 조모는 노기를 띈채 두한을 보고있다. 그리고 차갑게 말한다.
조모-저 아인 누구냐?
오씨-어머님....?
최동열-..........?
두한-할머님 접니다. 두한이에요.
조모-두한이라고...? 나는 너 같은 손자를 둔 적이 없다. 썩 내 집에서 물러가거라!
두한-..............?
오씨-어머님...?
조모-냉큼 나가지 못할꼬!
두한-할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