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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은 명량대첩비를 찾아온 소식을 듣고
일본의 대마도를 바라보고 서있다는 진도군 벽파리의 이충무공 벽파진대첩비.
이 벽파진 대첩비는 어떻게 조성되었을까? 사실 이곳에 벽파진 대첩비가 조성된 이유는 정확히 전하지는 않지만 광복후 명량대첩비를 찾아온 우수영 주민들의 이야기, 이은상의 난중일기 번역과 그시대의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광복후 명량대첩비가 돌아왔단 소식을 들은 호남신문사 사장이었던 노산 이은상은 우리에게 '가고파'란 가곡의 작사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여러 논란이 일고 있지만, 광복후 호남신문사의 사장 재직시 호남신문을 순 우리말 제호로 바꾸고, 대한민국 신문 사상 최초로 순한글 가로쓰기 신문을 발행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발행 또한 여러 논란이 일었지만 순한글 가로쓰기 신문은 대한한국 신문사에 길이 남을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는 호남신문에 재직시, 일제가 경복궁 근정전에 감춘 명량대첩비를 우수영의 유지들이 찾아왔단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대첩비를 조성할 공사비가 턱없이 부족하단 말에 신문사 주관으로 자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8천원의 성금을 모금해 문내면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에 기탁했다.
노산은 이러한 인연으로 1959년부터 충무공 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과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등을 맡아보았다.
이 무렵 노산은 난중일기를 100번 가까이 읽으며 번역작업에 몰두한다. 이어 난중일기의 번역본(오기에 대한 논란이 있음)을 내놓게 되는데, 이때 난중일기를 번역하며 원균의 칠천량 해전 이후 이손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돼 남도 천리길을 돌며 의병과 병장기,군량등을 직접 모아 전남 서남부의 민초들과 함께 명량해전을 임하게 된 걸 알게 된다.
또, 장흥 회령포에서 12척의 배를 찾아 해남군 북평 이진성(이때는 13척)과 송지 어란진(어란진 해전) 그리고 진도 벽파진(벽파진 해전)으로 수군진영을 옮기며 울돌목(명량)으로 왜 수군을 유인해 1597년(음)9월16일 왜 수군을 격파시킨 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그러며 임진왜란 당시 진도 지역예선에선 이천귀,김수생,김성진,하수평,박현,박희령,박후령과 그의 아들 인복 또 양응지와 그의 조카 계원 그리고 조탁, 조응량과 그의 아들 명신등 많은 의사들이 참전해 숭고한 뜻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벽파진 해전과 명량 해전의 승리를 기리기 위한 `벽파진이충무공 전첩비` 건립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은상은 "벽파진 푸른바다여,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의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고작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중략)공은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적은 배로써 330척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길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라는 글을 짓고 글씨는 추사이래 최고의 서예가로 손꼽히는 소전 손재형에게 부탁했다.
소전은 1903년 진도 교동리에 출생했고 한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옥전 손병익 선생의 손자이며 중국에서는 서법 일본에서는 서도 한국에서는 서예라는 말을 처음 쓰게 한 이다.
1956년 진도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벽파진 이충무공 전첩비를 건립하게 됐는데, 비의 몸돌인 비신은 화강암으로써 전북 고창군 성송면 추월산에서, 머릿돌은 고군면 내산리 뒤쪽 구렁골에서, 거북무늬 자대는 현지의 자연암반을 떨어내어 장대한 거북을 조형했고 대해로 나아가라며 아주 작지만 연못도 조성해 봤다. 또 목을 앞으로 쭉 뼏고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다문 사실적 형상으로 박력과 중후함이 넘치는데, 직접 본다면 그 웅장함에 입을 다물기 힘들다.
광역신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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