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 黨爭과 파벌, 불법 탈세 갑오혁명과 닮은꼴 / 굶주려 죽고 빚에 채여 자살한 서민들 이야기로 가득 / 유수선진국 ‘FTA와 영토분쟁’ 자국 실리 챙기기 혈안 / 조선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삼정문란’ 철종에 최고조 / 탐관오리, 가혹하게 세금 징수 무리하게 재물 빼앗아 / ‘절규하는 민초들’ 삼남지방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
▲ 전봉준 장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올해로 120돌이 되었다. 120년이란 성상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것 하나라도 하루가 다르게 치열하게 변해왔고, 이 변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다보면 변한 건 껍데기일 뿐 실질은 1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인간 중심에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작금의 세태에 돋보기를 들이대 보자. 세계 선진국들은 FTA다 영토분쟁이다 하여 자국의 실리 챙기기에 혈안이 돼 있고,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들의 실리 찾기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국내 사정도 갑오년이나 별반 다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눈 뜨면 들리는 게 당쟁과 파벌싸움에 부패한 관리 이야기이거나, 불법과 편법을 수시로 넘나들며 축재와 탈세를 일삼는 부호들이거나, 굶주려 죽고 빚에 채여 자살한 서민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자칫 신경줄을 놓았다간 지금 쓰고 있는 문장 속에서도 갑오년식 용어들, 일테면 서구 열강, 문호개방, 영토 확장, 당파싸움, 탐관오리, 부정축재, 탈세, 농민운동, 시위 등이 거침없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데, 딴은 이러한 용어로 문장을 서술해도 별 거리낌이 없을 것 같다.
당시에 비해 먹는 거 입는 거 잠자는 것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차원이 다른 세상에서 사는 건 결코 아닐 터이니. 그러고 보면 120년 전에 비해 지금은 시간만 조금 이동한 셈이라고 할까.
▲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올해로 120돌이 되었다.
● 부친 전창혁 장독(杖毒)으로 죽어
차제에 120년 전 그 시대를 돌아보도록 하자. 기왕이면 동학의 중심사상인 인내천(人乃天)과 동학농민혁명의 총대장으로 세간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전봉준도 만나보기로 하자.
전봉준은 1855년에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철종이 즉위한지 6년이고 청나라는 문종(文宗) 5년이며 일본은 안정(安政) 2년이던 해였다. 청과 일본의 묘호와 연호를 함께 쓴 것은 조선의 상황이 양국과 피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고부군 향교에서 장의(掌議, 향교의 재임(齋任) 가운데 으뜸자리를 이르던 말)를 지낸 향반(鄕班)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섯 살 때부터 한문 공부를 시작한 그는 제법 영민했던지 열세 살 때 갈매기에 빗대어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읊은 백구시(白驅詩)를 지었으며,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다.
그럼 여기서 잠깐 그의 부친을 만나보고 가기로 하자. 그의 부친 전창혁(全彰赫, 1827~1893)은 앞서 설명한 대로 향교에서 장의를 지낸 적이 있는데, 성정이 꼿꼿한 선비정신을 가진 이였다고 전한다. 그는 군수의 학정에 항거, 소(訴)를 제기했다가 구속되어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장독(杖毒)으로 죽었다고 한다.
한성에 있는 큰 의원을 찾아가 보면 차도가 있으려나 생각은 했지만 당장 끼니가 걱정인 마당에 어림도 없는 주책이었다. 예로부터 민간에 전해오기를 장독에는 똥물이 특효약이라 했다. 합수통(당시 시골 화장실) 깊숙이 파묻은 조그만 옹기에서 받아 낸 곰삭은 똥물은 향기롭기까지 했다.
이 정도는 돼야 최고로 쳐주었지만 구하기가 어려웠다. 모두들 제 집 합수통에 단지 하나씩을 들여놓았을 테지만 자신들에게도 언제 비상으로 써야 할 일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데 전창혁의 장독 앞에서는 달랐다.
믿고 따르던 훈장님이 시난고난 앓고 있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이 귀한 똥물을 들고 온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지극하고 정성은 갸륵했다. 하지만 깊어진 장독은 똥물에도 효험이 없었고, 전창혁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삼정(三政) 문란의 극심한 대혼돈기
▲ 순조 때부터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삼정문란은 철종 때 최고조에 달한다.
알고 있는 것처럼, 순조 때부터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삼정문란은 철종 때 최고조에 달한다. 삼정(三政)이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또는 환곡)의 국가 재정행정을 말하는데, 이 제도는 정당하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흉년에는 백성에게 저리의 양곡을 대여하는 등 백성을 이롭게 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왕조실록에도 홍수나 한해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계가 곤란해지면 정부에서 ‘휼전(恤典)’을 내어 이재민을 구제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를 운용하는 지방관아의 관리들에게 달려 있었다.
‘전정(田政)’이란 농지에 부과된 모든 세금을 말한다. 자본주의나 지주제 사회에서 농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엄연히 조세제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규정보다 과다하게 징수하거나, 지주의 부담을 땅을 빌어 부쳐 먹는 소작농에게 부과하는 데서 기인한다.
‘군정(軍政)’은 양인의 군역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제정된 제도로써 징수하던 군포를 감면해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따랐다. 양반과 부자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수령에게 뇌물을 상납하였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들에게 떠넘겨졌다는 사실이다.
이미 죽어 백골(白骨)이 된 자를 살아 있는 것처럼 허위로 꾸며 이른바 ‘백골징포(白骨徵布)’를 징수하는가 하면, 군역 대상이 아닌, 과세대상으로는 아직 어린 16세가 안된 자들에게도 이른바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 하여 징수하였다. 어떤 집에서는 이미 죽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 3대가 군역을 부담하기도 했다.
구휼의 취지에서 제정된 ‘환정(還政)’은 재해나 가뭄으로 흉년이 들게 되면 양인(良人, 조선 시대, 양반과 천민 사이의 중간 계층을 이르던 말)이 관에서 양곡을 빌려 위기를 넘기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이 역시 당초 저렴한 이자에 과다한 웃돈을 얹어 고리를 붙여먹거나, 필요치 않은 곡식을 일부러 떠맡겨서는 이자를 뜯어내는 데서 폐단이 생겼던 것이다.
이처럼 부패한 관리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민란이 발생하곤 했다. 조선 팔도에 크고 작은 민란이 하루도 끊일 날이 없었다. 그 이유는 어수선한 정세를 비웃듯 세금을 착복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는 관리들이 그만큼 득실거렸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조정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정을 살피게 하였지만 이미 병들어버린 사회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호랑이 탄 양반도둑! 아마 조선조 시인 정수동이 50년만 더 살았더라면 ‘호랑이 탄 양반도둑’ 중에서 으뜸이라며 조롱하지 않았을까.
이쯤이면 전봉준이 어떻게 농투산이(농부를 낮잡아 이르는 충남 방언)가 되었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학정에 항거하다가 장독으로 죽은 아버지로 하여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잔반(殘班, 조선시대 정치에서 몰락하여 농민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된 양반 계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호구지책으로 농투산이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억울함을 호소한들 어수선한 세태에 들어줄 이가 없으며, 되레 몰매를 맞기 일쑤이니 스스로 자구책을 찾지 않으면 목숨을 연명할 방법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기실 민란이 아니어도 조정은 조정대로 골치가 아픈 게 사실이었다. 세도정치(勢道政治) 와 삼정문란에서 비롯된 국가의 혼란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구 열강의 압박 또한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세도정치는 왕실의 근친이나 신하가 강력한 권세를 잡고 온갖 정사(政事)를 마음대로 하는 정치. 조선 정조 때 홍국영에서 비롯하여 순조ㆍ헌종ㆍ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왕의 외척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가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 전봉준 장군이 동학혁명을 일으킬 당시 거주하였던 집.
● 청나라도 일본도 열강에 속수무책
이웃 나라 일본이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 즉 日․美 화친조약을 체결한데 이어 영국과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소식이 바다를 건너 조선 조정에 전해져 왔다.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 영국 등 강대국들이 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영토를 드나들며 괴롭혔는데 미국이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는 소문이었다.
그 결과 일본은 200여 년간 굳게 닫힌 문을 열고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지만, 의무를 한쪽에서만 지는 ‘편무적’이고 일방적인 조약을 체결한 데 대해 땅을 치고 후회를 했다는 말이 곧 뒤따라 왔는데, 사람을 보내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았더니 요즘 흔히 말하는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일본이 ‘을’이 돼버렸다 거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국인 청(淸)마저 서구 열강에 손을 들고 말았다는 소식이었다. 조선으로서는 대박(大舶, 대형 선박)을 앞세워 출몰하는 열강이 도대체 어떤 힘을 가졌기에 대국의 빗장을 열게 하였는지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청(淸) 역시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징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더니 홍콩을 영국에 넘겼다지를 않나, 1860년에는 베이징조약을 체결하여 주룽(九龍)반도까지 넘겼다지를 않나, 조선으로서는 한없이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구 열강은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영국 군함과 프랑스 군함이 동해에서 측량을 해간 데 이어, 이번에는 쿠릴해류를 따라 남하한 러시아 함대가 남쪽 항구 영일만에 출몰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서구 열강에 된통 드잡이질(서로 머리채나 멱살을 움켜잡고 싸우는 짓)을 당한 청과 일본까지 조선을 압박하고 나섰다. 조정 밖에서 수군대는 소문으로는 원산 등 항․포구에서는 이양선이 싣고 온 물건들을 거래하는 시전이 수시로 열린다는 말도 있었다.
● 말이나 돼지 거세도 가엾다 하거늘
부패한 관리들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주변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조정에서 지방관아까지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는 걸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할 지역을 무주공산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뜯어낸 고리로 부당이득을 취하고, 틈만 나면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음주가무를 일삼았을 터이니, 이리 채이고 저리 밟히면서 골로 가는 것은 결국 백성들뿐이었다.
백성들은 울분을 달랠 길이 따로 없었다. 가난은 조상 대대로 대물림 되어 온 것이었다. 개천에서 용 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그렇다고 부모를 원망할 것인가. 다 팔자소관, 잘못 태어난 자신에게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자식 낳은 것을 한탄하던 농부가 다시는 자식을 보지 않으려고 자신의 양기를 싹둑 잘랐겠는가?
일찍이 가난을 한탄하며 죄 없는 자신의 양기를 잘라버린 한 필부의 소식을 접한 조선의 석학 다산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애절양(哀絶陽)
갈대밭의 젊은 아낙 울음소리도 길구려 관문(官門) 향해 울부짖고 하늘보고도 통곡하네. 출정나간 남편이 다시 못옴은 그럴법도 하지만 옛날이래 사내가 양(陽) 자른단 말 들어보지 못했네. 시아버지 삼년상이 벌써 지났고 간난아이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삼대(三代)의 이름 군적에 실렸구료. 가서 호소한들 관문의 문지기가 호랑이와 같고 이정(里正)이 으르렁대며 진즉 소를 끌어 가버려, 칼 갈아 방에 드니 흘린 피 자리에 흥건하고 스스로 한탄하길 애낳은 죄로 이런 액운 당한다오.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던 형벌도 잘한 일 아니고 옛중국에서 거세풍습도 역시 비통한 일이었소이다. 자식 낳고 살아가는 이치, 하늘이 주시는 일인지라 천도(天道)는 아들 만들고 땅의 곤도(坤道)가 딸을 낳아 말이나 돼지 거세도 가엾다 말하거늘 하물며 우리 백성 자손 잇는 길임에랴 하늘의 뜻이오. 부호가(富豪家)엔 일년내내 풍악 울려 즐기지만 쌀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이 없네 구려. 너나 나나 한 백성인데 어찌하여 후하고 박한 거냐 객창(客窓)에 우두커니 앉아 거듭 시구(鳲鳩)편을 외우네.
▲ 정약용은 19세기 말의 동학혁명을 예언한듯 탐관오리의 부패를 통렬히 한탄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시작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것은 1803년의 계해년(癸亥年) 가을, 전남 강진에 있을 때 지은 것이다.
그때 갈밭마을에 사는 어떤 아녀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이정(里正, 조선시대 지방행정조직의 최말단 단위인 이(里)의 책임자)이 3일 만에 군적에 올렸다. 아직 어린 아이기에 군포를 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정은 군포 명목으로 소를 끌고 가버렸다.
남편은 칼을 갈아 자기 양경(남자 생식기)을 잘라 버렸다. 아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양경을 주워들고는, 관청을 찾아가서 하소연을 하였으나 문지기는 도리어 호통을 치면서 쫓아 버렸다고 한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 부득이 이 몸 일으켜 세우나니
조정에서는 중신들을 모아놓고 개방 압력에 대해 밤새도록 의논을 하였다. 그러나 의견은 수렴되지 못했고, 보수와 개혁 사이에서 중론은 지리멸렬되었다. 외세의 압박에 대처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봉건 말기의 위기적 상황은 더욱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사회불안과 질병(콜레라)으로부터 오는 위기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군중 속으로 모여들었다. 동학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도 봉건제도의 탈피와 불안감 해소가 궁극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표현하는 인내천의 원리가 딱 맞아떨어졌을 터이므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춰 동학은 백성들에게 쉽게 스며들었으며, 삼남지방(三南地方, 전남북, 충남북, 경삼남북도)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전봉준은 1890년 무렵 동학에 입교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쯤이었다.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최시형에 의해 고부지방 접주(接主)로 임명된 전봉준. 그리고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접주는 동학(東學)에서 교구 또는 포교소(布敎所), 즉 접(接)의 책임자. 포주(包主)·장주(帳主)라고도 한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가 포교를 시작한 지 3,4년 만에 급격히 교세가 확장되자, 포교소로서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거기에 책임자인 접주를 두었다. 그 지방 교도들의 관할과 새로운 교인에 대한 강도(講道) 및 포교활동 등을 담당하였다.
조병갑은 부임하자마자 ‘만석보 수세’(萬石洑 水稅, 조병갑은 만석보가 설치된 곳의 물을 받는 논에 처음 해에는 수세를 물리기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약속을 어기다.)를 징수하여 착복하였으며, 죄목을 만들어 무고한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1893년, 전봉준은 농민들과 함께 혹세무민한 고부군수에게 부당한 세금 등 시정을 진정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포하여 가두거나 매질을 할 뿐이었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과 일천여 명의 농민들은 재차 관아를 습격할 계획을 세운다. 군집한 농민들 앞에 선 그의 의지는 결연했다.
▲ 농민들의 자치기구 집강소
거사를 앞두고 전봉준은 홰에 불을 당기며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조용히 읊조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명심보감에 이르기를,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아니하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헛된 것 없고 나름대로 다 소용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 소설가 박응순
나는 조선의 백성입니다. 머리는 상투를 틀어 올리고, 흰 무명바지에 저고리를 입은 백의민족의 후손입니다. 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열매 맺기를 사천년, 나는 조상 대대로 꽃과 열매처럼 이 강토 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습니다. 모두 다 하늘의 베풂이고 나랏님의 은전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백성들의 원망소리가 하늘을 찌릅니다. 해마다 거듭되는 수해와 한해, 창궐하는 질병, 게다가 탐관오리들의 탐학은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며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아 갑니다.
비위에 거슬리면 태형이나 장형을 수시로 써서 인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하여 조선 팔도 그 어디에서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부황 든 백성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나랏님이시여! 장차 이를 어찌 하오리까. 부득이 이 몸 일으켜 세우나니, 굽어 살피소서.
원하옵건대, 국가를 수호하는데 모든 백성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고, 백성들이 내는 세금을 불법적으로 징수할 수 없게 하여 주시옵고, 지방 관아의 시찰을 단단히 하여 관리들의 직권남용을 제한하여 주시옵고, 인재 등용의 폭을 넓혀 어린 백성들에게도 기회를 주시옵고,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이 땅에서 백성들의 한숨소리가 사라지고, 노랫소리가 널리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선정을 베풀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