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의 전원생활.그중에서도 여름밤을 소재로한 순수하고 꾸밈없는 시골아이들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이야기. (재미있게 읽으세요!)
(최균희 창작동화)
호박꽃 초롱
"오늘밤엔 적어도 열 마리는 넘게 잡는 거다. 알았지? 여자들은 책임지고 호박꽃 열 개다!"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힘차게 버티어 선 병수의 명령입니다.
"아니. 그렇게나? 그러다가 영구네 하나씨라도 나옴 어쩔 라고야?"
효순이가 열 개는 너무 많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떠들지 말고 가만가만 기어가서 조심조심 하라는 게 아니냐?
자, 그럼 모두 헤쳐! "
"와아!"
비교적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남자아이들은 동네 앞 들판으로 신이 나서 뛰어 갑니다.
"뜸뜸. 뜸뜸. 뜸물 주께 갈앉아라."
"뜸물 주께 까랑까랑 나뭇잎에 붙어라."
아이들은 나름대로 한 마리씩 점을 찍어 놓고 반딧불을 좇아서 달려갑니다.
너무나 멀리 도망치는 놈은 포기를 하고 또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놈을 따라 다름질 칩니다.
"뜸뜸 뜸뜸!"
"뜸뜸 뜸뜸!"
"아얏!"
서로 반대 방향에서 열심히 달려오던 상호와 명식이가 딱! 하고 부딪쳤기 때문입니다.
"야, 임마, 아이고 머리야."
"이 자식아, 왜 사람한테는 갑자기 달려드는 거냐?"
"이게, 난 저 개똥불을 잡으러 가는 판인데?"
"뭐라고, 아니 저건 내가 저 쪽 논두렁에서부터 몰고 온 거야!"
"뭐 니꺼라고?"
"정말 한 번 해 볼 참이냐?"
"이 억지쟁이, 그래 뛰자."
명식이가 팔을 올려 걷고 막 상호한테로 달려들려는 순간, 또 다른 반딧불 한 마리가 휙! 하고 둘 사이를 지니 갑니다.
"잡자!"
둘이는 약속이나 한 듯이 어느새 똑같은 방향으로 뛰어갑니다.
"야, 그런데 병수 새끼는 가만히 앉아서 놀고 있잖냐?"
"그러게 말이야. 지가 뭐 대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영구네 수수깡 울타리 밑에 쪼그리고 모여 앉은 여자 아이들입니다.
"근데, 왜 영구는 저녁마다 한 번도 안 나오지?"
"으응, 그건 저그 하나씨 때문일 꺼다. 우리 동네에서 지금도 상투 꼽은 사람은 영구네 하나씨 하나뿐이니까."
"하하하하!"
모두 함께 까르르 웃었습니다.
"나는 그 무서운 하나씨 상투만 보면 어떻게나 신기한지 먹 따라감서 보고 싶더라. 그 속에 아주 재미난 얘기들이 많이 들어 있을 것 같거든!"
"하하하하, 그만 웃겨줘라."
복자가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머리에 쌓아 올리고는 몇 걸음을 휘청휘청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구부정거리고 걷는 모양이 너무도 우스워서 배를 움켜잡고 땅바닥에서 뒹구는 아이도 있습니다.
"쉿! 빨리 호박꽃을 따야지. 싱싱한 것으로 한 사람 앞에 두 개씩만 따!"
미영이가 서두릅니다.
"울타리에 붙어 있는 것이 어디로 도망 가냐? 우리들이 지금 따 갖고 가면 머슴애들은 한 사람도 안왔을끼다. 그럼 병수가 가만 있겠느냐?"
"암. 우리들 보고도 반딧불 사냥 가라 쫒아낼 텐데ㅡ"
"그래도 난 반딧불 잡는게 더 재미나더라!"
인자가 깡총 뛰며, 효순이 어깨를 꽉 붙듭니다.
"아이구머니나, 내가 반딧불이냐? 이 가시내는 꼭 머스마 같다잉."
"하여튼 빨리 시작하자."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반달이 나오자, 여자아이들은 호박덩굴을 죽죽 잡아당기며 호박꽃을 찾느나 야단입니다.
"얘들아 꽃대를 좀 길게 끊어. 그래야 가지고 놀기 좋으니까."
미영이가 어른스럽게 또 타이릅니다.
"그런데 말이야, 올해는 집집마다 울타리를 시멘트로 쌓아 버리니까 호박꽃 있는 집이 귀하지야?"
"그러니께 맨날 영구네 호박꽃이지."
동희도 좀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호박잎을 제쳐 갑니다.
"참, 성순이 너네집은 날마다 동네 어른들하고 싸움질하며 그 거지같은 울타리는 왜 안부순데?"
"모르는 소리 마. 우리는 그 울타리가 좋아서 그런다냐? 영구네 하나씨 때문미지."
"옳지, 그집이 영구네 작은집서 살던 집이라 아직도 영구네 맘대로구나?"
"참말이지, 우리 엄마도 날마다 속상해서 죽을라 안하시냐?"
"하하하, 어쨋든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하고 제일 가난한 집 하고만 수수깡 울타리니까 그것도 재미있제잉!"
"글쎄다. 하하하하."
복자의 능청스런 말 때문에 아이들은 또 한바탕 웃어 댑니다.
"그러니까 영구네 하고 성순네 하고는 해와 달이냐, 해님과 해바라기냐?"
"아하하하."
인자의 익살에 아이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듣기 싫어, 난 다시는 밤에 안나올란다. 이런 시간있음 공부나 열심히 해야겠어."
성순이가 뾰로통해가지고 막 뛰어가버리자 여자애들은 모두 어이 없다는 듯 잠잠해집니다.
그 때 마침, 영구네 대문이 삐그덕하고 열렸습니다.
"영구네 하나씬가보다. 도망쳐. 빨리 빨리!"
여자애들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병수가 기다리고 있는 회실 앞마당으로 달려왔습니다.
"아이구 숨차! 나는 오늘밤 꼭 죽는 줄만 알았다."
"말도 말아. 난 고무신이 자꾸자꾸 벗겨져서 정말 혼났다구."
"왜 그렇게 가시내들은 항상 시끄럽다냐?"
헉헉거리며 모여든 여자애들을 향하여 병수가 소리쳤습니다.
"뭐야? 병수 저건 학교 공부는 꼴등 가람 서운타할것이 동네 오면 대장 노릇이더라."
"저게? 그냥 안 둘테다."
병수가 달려와 복자의 팔을 비틀려고 합니다
"아서라. 호박꽃 따오느라 진땀 뺐다. 어서 시간이나 보거라."
미영이의 점잖은 말에 병수는 제면쩍은 듯 머리를 박박 긁으며 시계도 차지 않은 왼팔을 눈앞에 바짝 갖다 댑니다.
"어어. 한 시간이 넘었나본데? 얘들아, 그만 집합이다. 집합!"
병수가 두손을 입에 모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남자애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들 모였습니다.
"야 그놈의 개똥불들이 모두 논이나 산 있는데로만 도망쳐 버리니까 어디 따라 갈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난 두 마리나 잡았다!"
연욱이가 고무신짝 두 개를 포개어 들고 빈 털털이로 돌아온 성태에게 자랑을 합니다.
"어? 이놈은 너무 꽉 쥐어서 죽어 버렸나?"
아이들이 우루루 상호한테로 모여듭니다. 시꺼먼 벌레가 상호의 손바닥에서 느릿느릿 기어 다녔습니다.
"에게게나! 그거 고자리 아니냐? 버려라 버려!"
효순이가 질겁을 하며 소리칩니다.
"그건 풀숲에서 잡아 왔구나. 느림보 같으니라고. 아직 어른이 못 된 갓난이라 그렇지."
병수는 안봐도 안다는 듯 여전히 한쪽에 서서 위엄을 보이며 말했습니다.
"그럼 어디 니껏 좀 보자."
인자가 연욱이의 고무신짝을 딱 치면서 대듭니다.
"어라? 내껀 전부 날개가 달린 어른들이야. 잘못하면 날아가 버린께 빨리 호박꽃들이나 대여!"
"나는 영구네 하나씨가 귀신같이 따라오는 줄 알고 호박꽃이고 뭣이고 다 내뱅이 치고 도망 왔은께."
복자가 태연하게 뒷짐을 끼고 서서 이야기하자 남자애들은 화가 난 듯 여자쪽을 잔뜩 노려봅니다.
"자. 난 여기 잘 모시고 왔습니다. 여기 담으시오."
"여기도 있습니다."
동희가 먼저 호박꽃을 내밀자 여자애들은 뒤로 감춰 둔 꽃들을 하나씩 둘씩 내보입니다.
호박꽃 초롱이 겨우 일곱 개 만들어졌습니다.
"별수 없군. 어제보다 하나 불었다."
"자 그럼 시작이다. 씩씩한 우리 꼬마 용사들, 횃불을 높이 들고 동네를 지키자!"
호박꽃 초롱 일곱 개를 긴 간대에다 매어 달고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발을 맞춰 걷기 시잡합니다.
"노래 시이작!"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마을마다 직장마다 드높은 사기!"
아이들은 나란히 한줄로 서서 한 손으로는 간대를 잡고 다른 손은 힘차게 휘돌리며 박자를 맞춥니다.
저녁마다 동네가 떠나가라는 듯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도 어른들은 누구 하나 시끄럽다고 나무라는 일이 없었습니다.
"총을 들고 건설하며 보람에 산다. 우리는 대한의 향토 예비군!"
동네 안길을 빠져나와 한길 가로 나섰습니다.
"얘들아 여기가 성순네 고구마 밭이다. 이 밭에 것은 모두 달걀 고구마야. 쪄놓으면 꼭 달걀 노른자 같고 말야, 얼마나 달고 맛이 있는지 옆에서 한사람 죽어도 모른단 말 있지?"
노래 일절이 끝나자 마자 복자가 새로운 뉴스를 흥미롭게 제공한 것입니다.
"야, 그것 입맛 나는데! 우리 어떠냐?"
병수가 발걸음을 멈추고 동의를 구하자 아이들은 찬성이라고 떠들어 댔습니다 . 어느새 아이들은 고구마 밭이랑으로 달려가 앉아 있습니다.
"얘들아, 하지만 이 고구마는 성순이 엄마가 날마다 시장으로 이고 나가 길가에 앉아서 파는 것 아니냐?"
미영이가 그만 두자고 했습니다.
"아니다. 이건 영구네 밭이야. 성순이 네가 나누어 먹기로 짓는 거지."
영구란 말이 나오자 아이들은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고구마 넝쿨을 마구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영구란 놈, 학교에선 급장이지만, 동네에선 어림없다, 지가 뭐길래 한번을 안나온다냐?"
아이들은 열 손가락을 갈퀴 모양으로 해가지고는 모래흙을 파헤친 뒤 아직 여물지도 않은 작은 고구마들을 캐어 호주머니 속에다 계속 쑤셔 넣었습니다.
"이게 낮에 보면 껍질이 아주 빨갛다!"
"그래, 나도 한 번 먹어 봤어."
인자와 효순이는 신이 나서 흙이 다 떨어지지도 않은 고구마를 치맛폭 속에 열심히 감추어 넣습니다.
"야, 이놈들아, 거기서 물얼 하는 거냐?"
"아이구, 큰일났다, 영구네 하나씨다!"
아이들은 모두 겁이 나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다가 건너편 수수밭 사이로 해서 줄달음쳐 도망칩니다.
"자식들도 먹고 싶음 낮에 우리집에 와서 우리 엄마한테 좀 달라지 않고"
일부러 할아버지 목소리를 내어 아이들을 쫒아 버리고는 싱겁게 웃고 있는 것은 영구입니다
"어라? 바보들 힘들여 만들은 호박 꽃 초롱을 이렇게 버리고 가다니?
한길 옆 풀숲에서 일곱 개의 호박꽃 초롱이 형광등처럼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영구는 호박꽃 초롱이 매어달린 간대를 어깨에 매고 휘바람을 불면서 동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동네 회실 담모퉁이에서는 도망쳐 온 아이들이 모여 앉아 저만치서 호박꽃 초롱을 매고 오는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려고 숨을 죽이며 지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박꽃 초롱은 회실 가까이 오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건너편 쪽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영구네 집은 분명히 회관 앞을 지나야 할 텐데?"
아이들은 모를 일이라고 서로서로 얼굴들을 마주 봅니다.
"얘 성순아. 성순이 공부하냐?"
"누군데 그러느냐? 성순이는 안 나가겠단다. 숙제가 좀 많은가 보다."
성순이 엄마의 목소리였습니다
"아니어요. 저 영구라요. 성순이 한테 숙제 한가지 물어볼라구요."
이윽고 성순이가 싸립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웬일이냐? 너하고 한반도 아닌데?"
"자, 여기 호박꽃 초롱 임자들이 다 도망가고 없어서 가져 온 거야."
"뭐야? 누가 그런걸 갖는다 했더냐?"
성순이는 정말로 화가 나서 홱 돌아서 버립니다.
"얘 성순아, 괜히 나 멀리 하지 마! 그럼 나 여기다 걸어 놓고 간다!"
영구는 다시휘파람으로 향토 예비군 노래를 부르며 회실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일제히 "후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짜아식. 괜히 사람 간탔지 뭐냐?"
명식이가 희미해진 반달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립니다.
"영구는 절대로 어른들한테 이를 아이는 아니야. 내일 학교에 가서 잘못했다고 빌면 되겠지 뭐!"
상호가 안심한 듯 아이들에게 말하며 서서히 일어섭니다.
"그럼, 아까부터 영구가 우릴 따라 온 게 아니냐?"
효순이의 말에 여자애들은 똑같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럼 잘들가라. 손발 씻는거 잊지 말고."
명수가 또 명령같으면서도 선생님처럼 의젓한 말을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소리쳐 웃으며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영구네 울타리도 무너진대. 대신 벽돌담이 높이 세워질거래."
"그럼 성순네 울타리도?"
"그렇다나 봐 어쨋든 오늘밤부터 다 글렀다. 호박꽃을 어디서 구하지?"
"별 수 있냐? 이젠 내년 여름이나 기다릴 수 밖에. 또 다른 놀이를 생각해 내야지."
다음 날, 학교길에 모여선 아이들의 중요한 화제거리입니다.
그렇게도 고집센 영구네 할아버지가 울타리를 부수고 동네길을 넓히라고 땅을 내 준다니 어른들에겐 정말 기쁜 소식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풀죽은 동네 아이들은 호박넝쿨이 다닥다닥 올라붙은 영구네 울타리 쪽을 돌아보고 돌아보며 학교갈 생각들도 하지 않습니다.
동네를 지키는 꼬마 향토 예비군들의 시무룩해진 얼굴에는 무언가 아쉬운 듯한 표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보니 영구네 할아버지는 여지껏 아이들의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끝)
첫댓글 최교장님 이 글이 좋아서 내가 좀 가져 갑니다. 정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