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일면(南一面) 신천리(新川里)
남일면의 서쪽에 위치해서 서북쪽에는 산악지대이고 남쪽과 동쪽으로는 비교적 들이 많은 지역이 신천리이다. 동쪽으로는 초현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남이면 구석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신동리, 음대리와 그리고 북쪽으로는 남이면 매곡리와 경계를 나눈다.
금산읍에서 남쪽으로 가는 지방도로가 동쪽을 스쳐가는 지형상 새내, 즉 봉황천이 흐르면서 들을 크게 조성하여 전답이 남쪽으로 많은 지역이다.
인류의 정착은 신라 이전으로 본다. 백제 때는 진내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진례군에 속했으며, 고려 때에도 그리 속해 내려오다가 제25대 충렬왕 31년 (1305)부터는 승격한 금주의 고을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했었다.
남쪽은 들이 많으나 북쪽은 산악지대여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웃과 왕래하기 위해서 조성해 놓은 고개도 많았었다. 즉 서쪽으로는 신천리에서 남이면 매곡리 매실로 넘어가는 매실재가 있는가 하면 서북쪽으로는 남이면 매곡리 탕건바위로 넘어가는 분박골고개가 있어서 산간벽지에 일찍부터 자리잡은 사람들이 다시 다른 정착지를 정하고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쪽에서 흘러와서는 뱀처럼 꾸불꾸불 남쪽을 적셔가는 봉황천은 동북쪽으로 흐르는 그 방향을 느긋하게 잡으면서 그 많은 풍우에 조화되면서 들을 조성하여 이곳에 넓은 전답지대를 깔아 놓았다.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일찍 정착하고 지금도 많이 세거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전라북도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서 봉황천, 즉 새내 가가 되므로 새내 또는 신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양대리와 남이면 매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신천리라 하고 전라북도 금산군 남이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청남도에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신천리가 되었다. 리의 면적은 4.9㎢이다.
자연부락(自然部落)
<돌독골, 새내, 양대부, 용실목>
돌독골
새내 서남쪽으로 산골에 있는 마을을 돌독골이라고 부른다. 또한 벌너머, 가치리, 가지라고도 부른다. 마을에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돌들기를 하였다는 돌이 있으므로 돌독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돌독골이라고 불었으며 양대부 들 건너에 마을이 있으므로 들건너라고도 부른다.
새내
신천(新川)이라고도 부른다. 양대부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내 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새내 또는 신천이라고 부른다.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많이 살고 밀양박씨(密陽朴氏)도 많이 사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펼쳐진 들을 옹인터라고 부르고 또한 날근터라고 부르는 들도 있다. 옹인터 아래쪽에 있는 들은 못박골이라고 부른다.
양대부
돌독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을 양대리 또는 양대부(陽大部)라고 부른다. 양지쪽으로 마을이 있다 해서 양대리 또는 양대부라고 부른다.
용실목
새내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을 용실목이라고 부른다. 마을 지형이 단지처럼 생겼다 해서 그리 부른다.
첫댓글 대장님 죄송합니다. 조금 수정이 필요합니다. 제가 사는 마을이 양대부 인데 양대부는 용수목과 본동 벌넘어가 있지요 용실목이라고 부르는 곳은 지형이 술을 거를때쓰는 용수를 닮았다하여 용수목이고요. 벌넘어는 말그대로 벌을 넘어서 있는 마을이라서 벌넘어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다른 자료에 보면 들독이 있어 들독골 이라고 되어있는데 들에 홀로라는 뜻으로 해석해 보면 어떨른지요? 벌넘어와 들독은 어딘지 모르게 맞지 않는다고 보아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