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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樂 1 완전한 自由와 지극한 행복(至福)만이 존재하는 無爲의 삶은 무엇인가?
天下有至樂无有哉 有可以活身者无有哉 今奚爲奚據 奚避奚處 奚就奚去 奚樂奚惡
夫天下之所尊者 富貴壽善也 所樂者 身安厚味美服好色音聲也 所下者 貧賤夭惡也 所苦者 身不得安逸 口不得厚味 形不得美服 目不得好色 耳不得音聲 若不得者 則大憂以懼 其爲形也 亦愚哉
夫富者 若身疾作 多積財而不得盡用 其爲形也亦外矣 夫貴者 夜以繼日 思慮善否 其爲形也亦疏矣 人之生也 與憂俱生 壽者惛惛 久憂不死 何故也 其爲形也亦遠矣 烈士爲天下見善矣 未足以活身 吾未知善之誠善邪 誠不善邪 若以爲善矣 不足活身 以爲不善矣 足以活人 故曰 忠諫不聽 蹲循勿爭 故父子胥爭之以殘其形 不爭 名亦不成 誠有善无有哉
今俗之所爲與其所樂 吾又未知樂之果樂邪 果不樂邪 吾觀夫俗之所樂 擧群趣者誙誙然如將不得已 而皆曰樂者 吾未知之樂也 亦未知之不樂也 果有樂无有哉 吾以无爲誠樂矣 又俗之所大苦也 故曰 至樂无樂 至譽无譽
天下是非果未可定也 雖然 无爲可以定是非 至樂活身 唯无爲幾存 請嘗試言之 天无爲以之淸 地无爲以之寧 故兩无爲相合 萬物皆化生 芒乎芴乎 而无從出乎 芴乎芒乎 而无有象乎 萬物職職 皆從无爲殖 故曰天地无爲也而无不爲也 人也孰能得无爲哉
飜譯
세상에 지극한 즐거움이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자기 몸을 잘 살리는 길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의지하여야 하나? 무엇을 피하고, 어디에 처해야 하나?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버려야 하나?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하나?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부귀와 장수, 그리고 명예일 것이다. 세상에서 즐겁게 여기는 것은 몸의 안락함과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과 좋은 색 및 음악 같은 것들이다.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은 가난과 천함, 일찍 죽는 것과 비난 받는 것들이다. 세상에서 괴롭게 여기는 것은 몸이 편안하지 않은 것과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하는 것과 몸이 아름다운 옷을 입지 못하는 것과 눈이 좋은 색을 보지 못하는 것과 귀가 좋은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것들을 얻지 못하게 되면 크게 걱정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이는 자신의 육신만을 위하는 것이니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보통 부자라는 사람들이 만약 자신의 몸을 괴롭히면서 애써 일해 많은 재물을 쌓아놓고도 다 쓰지 못한다면 이는 그들의 육신만을 위한 것이니 道에서 벗어난 것이다. 고귀한 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하여 옳고 그름을 생각한다는 것 또한 자신의 육신을 위한 것을 뿐 道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근심과 더불어 함께 태어나는 것이니 오래 살아봐야 혼미한 정신으로 오래도록 근심하며 죽지 않는 것이니 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이 역시 그의 육신을 위한 것이니 道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烈士들은 세상의 칭찬을 얻지만, 그것으로 육신을 살리지는 못한다. 나는 그런 훌륭함이 진정 훌륭한 것인지, 아니면 진정 훌륭한 것이 아닌지 알지 못한다. 훌륭한 것이라 여기면서도 자신의 몸을 살리지 못하고, 훌륭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남을 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충성스런 간언을 해도 듣지 않을 때에는 조용히 물러나 다투지 말라.’라고 한 것이다. 오자서(伍子胥)는 임금과 다투다 그 육신을 잃게 되었지만, 그가 다투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훌륭한 것이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지금 세속에서 하는 짓과 즐기는 것을 보아도 나는 그 즐거움이 과연 즐거움인지 즐거움이 아닌지를 모르겠다. 내가 보건대 세속에서 즐기는 것이란 떼를 지어 몰려가서는 죽어도 그만둘 수 없다는 듯이 모두가 즐겁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것이 즐거운 것인지 즐겁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과연 즐거움이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나는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를 진실한 즐거움이라 여기고 있지만 세속에서는 그것을 크게 괴로운 것이라 여기고 있다. 그런 까닭에 ‘지극한 즐거움이란 즐거움을 초월하는 것이고, 지극한 명예란 그 명예를 초월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의 옳고 그름이란 진정으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만은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있다. 지극한 즐거움과 몸을 살려주는 것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에서만 존재한다. 시험 삼아 그것을 논해 보기로 하자. 하늘은 無爲하기에 맑고, 땅은 無爲하기에 안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이라는 自然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함으로 해서 서로 합쳐져 만물 모두가 변화하고 생성되는 것이다. 아득하고 홀연하도다.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지 알 수가 없도다! 홀연하고 망망하도다. 그 형체를 알 수가 없도다! 만물이 번성하는 것은 모두가 無爲로부터 증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自然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서도(無爲)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無不爲).’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으로 그 누가 능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할 수 있겠는가?
紬繹
세상에 지극한 즐거움이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그것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지극한 즐거움만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자기 몸을 잘 살리는 길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그것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몸을 잘 살리는 길을 갈 수 있는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의지하여야 하나? 무엇을 피하고, 어디에 처해야 하나?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버려야 하나?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하나? 모든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질문을 莊子는 제시하고 있다. 이제 그 해답을 莊子에게서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부귀와 장수, 그리고 명예일 것이다. 세상에서 즐겁게 여기는 것은 몸의 안락함과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과 좋은 색 및 음악 같은 것들이다.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은 가난과 천함, 일찍 죽는 것과 비난 받는 것들이다. 세상에서 괴롭게 여기는 것은 몸이 편안하지 않은 것과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하는 것과 몸이 아름다운 옷을 입지 못하는 것과 눈이 좋은 색을 보지 못하는 것과 귀가 좋은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것들을 얻지 못하게 되면 크게 걱정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이는 자신의 육신만을 위하는 것이니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존귀하게 여기고, 즐겁다고 여기며, 좋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육신만을 위하는 것이니 이같이 어리석은 것이 또 없다고 한다. 그러한 것들은 지금 세상에서 얻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하여도 고통스러운 노력을 해야만 하고, 설상 운 좋게 그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완전한 自由와 지극한 행복(至福)만이 존재하는 삶은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莊子는 완전한 自由와 지극한 행복(至福)만이 존재하는 우리 삶의 답을 외부조건이 아닌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삶의 답을 우리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莊子를 끝까지 따라가 보자.
보통 부자라는 사람들이 만약 자신의 몸을 괴롭히면서 애써 일해 많은 재물을 쌓아놓고도 다 쓰지 못한다면 이는 그들의 육신만을 위한 것이니 道에서 벗어난 것이다. 몸이 고달프도록 그 많은 돈을 벌어놓고 자신의 후손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미 그 수고로움으로 죽게 되었는데 내가 죽으면 그 많은 돈도, 나의 자손도 나 자신은 알 수 없는 것일 뿐인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후손들이 나를 위하여 제사를 차려준다 한들 나는 죽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 제사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莊子는 이러한 삶을 거꾸로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렇듯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고 거꾸로 사는 삶을 살고 있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근심과 더불어 함께 태어나는 것이니 오래 살아봐야 혼미한 정신으로 오래도록 근심하며 죽지 않는 것이니 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이 역시 그의 육신을 위한 것이니 道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예수와 붓다 그리고 老子와 莊子는 지금 즉시 아무런 근심 없이 완전한 自由와 지극한 행복(至福)만이 존재하는 天國의 삶을 살 수 있는데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자신의 조그만 행복을 자신의 외부에서 찾으려고만 하니 근심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고,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이 혼미한 정신으로 오래도록 근심만 하며 죽지 않는 것이니 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이 또한 우리 삶의 답을 외부에서 찾는 것일 뿐이고, 우리 삶의 답을 외부에서 아무리 찾아봐야 그것은 우리의 몸만 괴롭히는 것일 뿐 진정한 답이 아닌 것이다.
‘烈士들은 세상의 칭찬을 얻지만, 그것으로 육신을 살리지는 못한다. 나는 그런 훌륭함이 진정 훌륭한 것인지, 아니면 진정 훌륭한 것이 아닌지 알지 못한다. 훌륭한 것이라 여기면서도 자신의 몸을 살리지 못하고, 훌륭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남을 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충성스런 간언을 해도 듣지 않을 때에는 조용히 물러나 다투지 말라.’라고 한 것이다. 오자서(伍子胥)는 임금과 다투다 그 육신을 잃게 되었지만, 그가 다투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훌륭한 것이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죽음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烈士들은 자신이 옳다는 信念과 理念이 매우 강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로 똑같다는 본질로 접근하면 세상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없게 된다. 烈士가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은데 자신의 강한 信念과 理念으로 자신의 몸을 죽이면 그 烈士가 세상의 문제를 풀 수 있는 기회는 모두 사라지고 말뿐이다. 우리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옳은 것인지, 우리 자신이 훌륭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우리가 진정 알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이 옳고 훌륭하다고 주장한다면 남들도 자신들이 옳고 훌륭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 옳고 훌륭한 것인가? 자신이 옳고 훌륭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자신의 몸을 희생시킨다면 그것은 아무런 이미가 없는 짓일 뿐이다. 세상에는 옳고 훌륭함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옳고 훌륭하다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생각만으로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고 또한 남을 희생시킨다면 人爲的인 거짓(僞)에 불과한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듯 인간은 사랑이라고 하는 宗敎로, 자신이 옳다고 하는 理念으로, 권력이라는 욕심의 國家로 수 천년 동안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수많은 인간이 수많은 인간을 죽이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해 왔다. 이제는 인간도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나를 스스로 깨달아 앞으로 인간 사회에서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적다. 이런 까닭에 ‘충성스런 간언을 해도 듣지 않을 때에는 조용히 물러나 다투지 말라.’라고 한 것이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 상대방도 옳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진정 옳은 것인가?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데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옳지 않은 것이 된다. 우리가 거기에서 멈추면 우리의 생각이 다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烈士들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헤쳐 나오지 못한 지극히 어리석은 자들에 불과하다. 오자서(伍子胥)는 임금과 다투다 그 육신을 잃게 되었지만, 그가 다투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伍子胥가 죽임을 당했는데 그 뒤에 남겨진 그의 명성이 伍子胥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한 伍子胥가 옳다고 주장한 것은 진정 훌륭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역사는 이렇게 그 실정과 실질을 알지 못한 채 죽음과 전쟁이라는 극단의 선택이라는 포장된 결과일 뿐이고, 승리한 자가 왜곡한 결과를 우리는 또한 소중히 여기고 있으니 인간의 삶이 어떻게 나아질 수 있겠는가? 다행히 인간은 수많은 왜곡을 경험하여 이제는 의식수준이 다소 높아졌으니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세상에서 동호회니, 동창회에 참가해서 수다를 떨고, 운동경기를 보면서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과연 진정한 즐거움인지 즐거움이 아닌지를 모르겠다. 그런 것들을 찾아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자신들의 삶이 즐겁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그런 것들을 찾아 헤매도 진정한 즐거움은 찾을 수 없다. 莊子가 보기엔 지금 세상에서 하는 짓과 즐기는 것을 보아도 그것이 과연 즐거움인지 즐거움이 아닌지를 모른다고 한다. 莊子가 보건대 지금 이 세상에서 즐기는 것이란 떼를 지어 몰려가서는 죽어도 그만둘 수 없다는 듯이 모두가 즐겁다고 말하지만 莊子는 아직도 그것이 즐거운 것인지 즐겁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과연 즐거움이란 있는 것인 것, 없는 것인가? 莊子는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를 가장 큰 즐거움이라 여기고 있지만 세상에서는 그것을 크게 괴로운 것이라 여기고 있다. 세상에 즐거움이 존재하는 까닭은 괴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괴로움이 없다면 즐거움을 찾지도 않게 된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다면 우리에게는 平穩만이 남는다 텅 비어 고요한(虛靜) 마음의 平穩! 그것보다도 더 큰 즐거움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莊子는 우리 삶의 즐거움에 대한 결론을 말해 준다. ‘지극한 즐거움이란 즐거움을 초월하는 것이고, 지극한 명예란 그 명예를 초월하는 것이다.’
세상에 옳고 그름이란 진정으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信念과 理念으로 아무리 옳다고 주장하여도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진정한 사랑을 내세우는 宗敎인 이슬람과 기독교가 여전히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면서 살인을 일삼고 있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인가? 그러한 전쟁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그렇지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만은 옳고 그름이 없다. 우리 자신이 무엇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얻고, 쟁취하고자 하는 것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無爲) 이 세상에는 전쟁도, 국가도, 종교도, 미움도, 갈등도, 모순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 세상은 원래 평화롭기 그지 없는 것인데 우리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信念과 理念이 평화를 깨트리는 것이다. 지극한 즐거움과 몸을 살려주는 것, 즉 완전한 自由와 지극한 행복(至福)만이 존재하는 삶은 오직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에서만 존재한다. 시험 삼아 그것이 왜 그런지 한번 살펴보자. 하늘은 無爲하기에 맑고, 땅은 無爲하기에 안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이라는 自然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함으로 해서 서로 합쳐져 만물 모두가 변화하고 생성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自然에서는 그 어떤 모순도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거짓(僞)에 불과한 人爲的인 마음만이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온갖 모순과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그런 모순과 갈등은 사랑과 평화를 외치면서도 살인과 전쟁을 서슴지 않는다.
‘아득하고 홀연하도다.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지 알 수가 없도다! 홀연하고 망망하도다. 그 형체를 알 수가 없도다! 만물이 번성하는 것은 모두가 無爲로부터 증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自然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서도(無爲)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無不爲).’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으로 그 누가 능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할 수 있겠는가?’ 莊子는 우리가 완전한 自由와 지극한 행복(至福)만이 존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有爲의 삶을 삶을 살고 있는데 이 세상 그 누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의 삶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쌓아온 모든 마음(觀念, 自我, ego)을 모두 버리면 완전한 自由와 지극한 행복(至福)만이 존재하는 無爲의 삶을 살게 된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아득하고 홀연하고 망망하게 느껴지지만 그런 無爲의 삶은 너무나도 쉬운 것이다. 지금 바로 우리의 모든 마음(觀念, 自我, ego)를 버리면 우리가 그렇게 갈구하던 완전한 自由와 지극한 행복(至福)만이 존재하는 삶은 바로 우리에게 찾아온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無爲의 삶에서는 우리가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無不爲). 그 까닭은 우리 자신이 지금 이 순간만을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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