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대 한(포스코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새벽녘 이불자락 사이로 아물아물 스며드는 한기에 몸이 움츠러든다. 아들놈은 작은 손 내밀어 이불 당겨 보지만 사립문 우는 소리에 그마저 놓쳐버렸다. 낙엽이불 곱게 덮은 마당엔 밤새 서리꽃 피었고, 쇠죽 끓이려 가마목 향하던 걸음새 아래론 뽀득뽀득 생채기가 남는다.
먹성 좋은 누렁이는 부뚜막 앞에 앉은 어머닐 채근하고, 가마솥 구수하게 퍼지는 여물 삶는 내음과 함께 섣달 아침이 밝아 온다.
이 땅의 외국건축, 그리고 그 역사
사전적 의미로서의 근대는 현대와 오래된 과거 사이를 일컫는 말로, 우리나라는 1876년부터 1945년 이전의 시간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역사는 시간적 흐름과 함께 공간적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때론 문화재로 남기도 하지만, 민중들의 소박한 생활공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의미의 신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건축 양식이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하지만 신건축 양식의 수입은 우리 스스로 도입해 온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강요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특히 조선 태종(太宗, 1401~1418) 7년, 처음 설치된 이래 일본의 조선 침략 때 까지 존속했던 왜관(倭館)은 일본식 건축양식에 의해 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관․유곽․신사와 같은 이질적인 문화를 함께 가져왔다.
일본은 1879년 초량왜관 자리에 영사관을 세웠는데, 이후 각 개항장에 의양풍(擬洋風) 목조 2층 공관건물들을 세웠으며, 이후 조선 전역에 신축된 일본식 건물들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와 규모를 따르게 되었다.
1880년대 이후 신․구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배재학당 당사(堂舍)와 기숙사(1887년)․천주교 명동 주교관(1889년)․러시아 영사관(1885년) 등이 서구 르네상스와 고딕풍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서양건축은 건축기술자가 자국의 기술과 자재를 직접 가져 왔으며, 우리는 이것을 이양(異樣)건축 이라고 부른다.
이양건축은 설립주체 역시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종교계 혹은 외국정부가 주를 이루었는데 병원․학교․교회 등 생소한 서구문화가 함께 들어왔다. 전통적으로 평지에 가옥을 건축했던 조선과 달리, 언덕 위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돌과 벽돌을 이용한 건축의 등장은 조선민중에게 있어 경외의 대상이었다.
상처받은 역사의 흔적, 근대 건축물

과메기 거리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구룡포는, 한때 동해안 최대의 어업전진 기지였었다. 1920년대 초 한적한 어항이었던 이곳에 현대식 방파제 공사가 끝나자 대형어선을 이끈 일본인 선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만선 깃발과 함께 구룡포에는 사람들로 넘쳐 났고, 시간이 지나자 이들을 상대로 한 유곽․옷가게․철공소 등이 들어섰다.
현재 구룡포 읍내 장안마을은 당시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곳으로, '선창가' 혹은 '종로거리'로 불렸었다. 10여 년 전 드라마 촬영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던 곳인데, 좁은 마을길을 따라 100여 미터 걷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역류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좁은 골목 좌우로 퇴락한 2층 목조가옥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게 중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들려오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구멍 난 유리창 위로 먼지만 덮여 있다.
마을 중앙에는 언덕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남아있다. 볕 좋은 날이면 앞 바다에서 잡아온 물고기를 말리거나 노인 몇이 자식 자랑으로 시끌벅적하기도 한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좌우로 돌기둥이 서 있는데 선주나 유지였을 법한 사람들의 이름이 돋으라지게 새겨져 있다.
언덕 위에 위치한 아담한 공원에는 해방 전 일본인들의 신사(神社)와 선원들의 무사고를 기원했던 용왕당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아래를 시선을 돌리면 구룡포 읍내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계단 아래로는 과메기가 해풍에 말라가고, 그 사이로 군데군데 2층 목조가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사진1은 골목 초입에 위치한 가옥으로, 아직까지도 주민이 거주하면서 비교적 관리가 잘되어 있다. 하늘색 대문과 마당에 서 있는 향나무 한 그루가 인상적인 집으로 피천득의 인연에 나오는 '아사꼬'가 튀어나올법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한동안 망각 속에 빠져있던 구룡포 적산가옥이 새롭게 기지개를 펴고 있다. 주민들 스스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가옥 16채를 등록문화재로 신청해 놓았기 때문이다. 포항시 역시 주민들의 노력에 부응하여 일본식 가옥을 구입하기로 하였으며, 옛 일본거리를 복원하여 관광자원화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해방 이후 격변의 시대를 줄곧 살아왔다. 무관심과 한국전쟁 그리고 천재지변에 의해 수많은 건축물들이 헐려 나갔고, 이제는 개발이라는 삽날 아래 몇 남지 않은 역사 속의 공간들이 두터운 흙더미 아래 덮여가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근대건축물들이 도시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어 날로 치솟는 땅값에 연유되어 헐리는 경우가 많다. 이데올로기는 정치로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조국 근대화가 화두였던 70년대를 거쳐 모든 것이 혁신의 대상이 되어 버린 2007년 겨울, 지금 이 순간에도 옛 사람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역사의 편린이 한 꺼풀씩 사라지고 있다. 새롭게 단장될 ‘종로거리’의 청사진을 그려 보며 부정해도 지울 수 없는 것이 역사라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 본다.
사진캡션
1. 2층 창문과 일본식 목조대문이 인상적인 주택
2. 목재판재로 건축한 일본식 가옥거리
3. 공원에서 바라본 구룡포 전경, 계단 좌우로 유지들의 이름이 남아있다.
4. 현재 교통장애협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1940년대 상가건물
첫댓글 나 여기 가봤어요 .. ^^ 고미워요 늘 ..
저도 좀 가까이서 봐야겠어요.. 얼핏 지나기만 했답니다.
감사드려요. 무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