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북송대(北宋代)에 편찬된 조정사원(祖庭事苑) 제3에서는 거사(居士)가 갖추어야할 조건을 ①관리가 되어 출세하려고 하지 않을 것, ②욕심이 적어 덕을 쌓을 것, ③재산을 소유하여 크게 부유할 것, ④도를 지켜 스스로 깨달을 것 등 4덕(四德)으로 통칭하여 들고 있다.
거사는 원래 인도에서 4성 계급중 상공업에 종사하는 바이샤종족을 의미했으나 불교에서는 출가하지 않고 가정에 있으면서 불문(佛門)에 귀의한 자로 쓰고 있다. 인도의 유마(維麻), 현호(賢護), 선재(善財), 중국의 부대사( 大士), 유겸지(劉謙之), 이통현(李通玄), 안현(安玄), 지겸(支謙), 승원(承遠), 사령운( 靈雲), 숙자량( 子良), 양무제(梁武帝), 왕유(王維), 백거이(白居易), 한국의 부설(浮雪), 이자현(李資玄), 이규보(李奎報), 일본의 성덕태자(聖德太子) 등이 유명한 거사이다. 대승불교의 경전인 유마경. 화엄경. 승만경에서는 이들이 승려도 깨치지 못하는 진리를 깨달은 모습으로, 중국에서는 주로 불경의 번역불사에 종사하는 모습으로, 한국에서는 깨달음과 참선운동에 일생을 바치는 모습으로, 일본에서는 불교를 처음 시작하는 모습 등으로 종종 투영되고 있다.
고려 현종(顯宗) 이후 사회적으로는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문벌 귀족세력이 대두하고, 불교 교단에서는 그동안 대세를 이루어왔던 화엄종(華嚴宗)과 선종(禪宗)의 이원체제에서 법상종(法相宗)이 융성하므로써 교단이 세력 판도가 화엄종, 법상종, 선종의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 화엄조의 승려였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중국에 건너가 천태종지(天台宗旨)를 배워와 천태종을 개창하므로써 선종이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으로 나눠지게 되어 4대 종단의 체제로 무인정권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불교교단의 주역으로서 수행과 교화, 연구활동을 전개해온 승려와는 달리 교단의 보조역할로서의 위치밖에 가질 수 없었던 재가불자(在家佛子)들이 개인적인 출신성분과 수행. 교화활동을 통해 그 활약이 두드러진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문인관료나 일반 유학자(儒學者)들도 거의 모두가 불교와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거사로서 일생을 보내거나 아예 출가한 사람도 많았다. 고려 중기의 유명한 거사로는 이 글의 주인공인 이 자현을 비롯해 이 이(李 :1050-1110), 윤언이(尹彦 :1090-1149), 이규보(李奎報:1168-1241) 등을 들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이 자현은 전형적인 인물로서 당대 최대의 문벌귀족가문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출신이면서도 일찍이 벼슬을 버리고 청평(淸平)의 보현원(普賢院) 문수원(文殊院)에 거주하면서 청평거사라 자호(自 )하고 불교교리의 연구와 참선 수행으로 일생을 보냈다.
경전상의 대표적 거사인 유마(維摩)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위시한 부처님의 모든 제자들이 들어(聲聞)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해 그 한계성을 '우레와 같은 침묵'으로써 깨우쳐 주고 있다. 그러나, 고려의 청평거사는 당시의 선사(禪師)들이 깨달음에 집착한 나머지 그 교리적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능엄선(楞嚴禪)을 주창하므로써 선교일치(禪敎一致).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그를 감히 인도의 유마거사에 견주어보면서 그의 생애와 사상 및 한국불교사상에 끼친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2. 생애(生涯)와 저술(著述)
이 자현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김 부식의 막내 동생인 김 부철(金富轍: ? -1136)이 찬술한 <청평산문수원기(淸平山文殊院記)>, 인종(仁宗)때의 고승이며 대각국사의 제자인 혜소(惠素)가 찬술한 <제청평산거사진락공지문(祭淸平山居士眞樂公之文)>, <고려사(高麗史)>권 95 이자연전부(李子淵傳附) 이자현전(李資玄傳), 고려 명종때 학자인 이인노(李仁老)의 설하문학집인 <파한집(破閑集)> 권 중 진락공(眞樂公) 이자현조(李子玄條),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이(天 )이 1293년에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권 하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자료에 의해 청평거사 이 자현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자현은 당대 제일의 문벌귀족인 인주이씨 출신으로 중서공(中書公) 자연(子淵)의 손자이며 이( )의 아들이다. 字는 진정(眞精)이며 는 식암(息庵) 또는 희이자(希 子)로 인천사람이다. 문종15년인 1060년에 태어나, 문종37년(1983)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이 때 뒤에 좋은 친구가 된 곽여(郭輿)도 함께 급제하였다. 급제한 4년 뒤인 선종4년(1087)에 대악선승(大樂署丞)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는 벼슬에 뜻이 없어 항상 자연에 늘 마음이 있었으며 친구인 은원충(殷元忠)에게 몰래 숨어 살만한 승지강산(勝地江山)이 어디 있는 지를 물었다. 이에 은공이 '양자강 가에 청산 한 굽이가 있는데 참으로 세상을 피할 만한 곳이다.' 하자 그것을 듣고 항상 관심을 가졌다 한다.
여기서 고려의 양자강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이 강은 지금의 소양강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가 소양강을 건너 보현원에 이르고 여기서 거의 평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한편, 나이 27세에 대악서승이 되었으나 부인을 잃게 되어 속세를 하직하고 아주 숨으려고 청평산에 들어가 보현원(普賢院)을 수리하여 문수원(文殊院)으로 이름을 고치고 거주하였다. 여기서 그의 청평산에 거주한 연기가 나오는데 단순히 부인을 잃은 상처 때문일까에 의문이 남는다.
그는 인주이씨의 문벌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권력에는 뜻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4촌 형제들은 할아버지인 중서령(中書令) 이자연의 영향을 받은 이자겸. 이자의는 권력에 병적이리만큼 집착을 보이고 형제중에 이자현과 이자덕은 별 관심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에 집착한 자겸. 자의 두 형제는 그들의 딸과 조카를 내세워 권력을 잡으려다 결국 실패하여 패가 망신하게 된다. 이자현이 청평산에 숨으려할 때는 바로 이들이 권력을 잡고 더 큰 권력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을 때이다. 또한 불교계는 왕실을 배경으로 한 화엄종(華嚴宗) 흥왕사(興王寺)의 의천(義天)과 인주이씨를 배경으로 한 법상종(法相宗) 현화사(玄化寺) 소현(韶顯)을 중심으로 한 대립이 한창이었다. 의천은 중국에 유학하고 천태종을 수입하여 그 본산격인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그를 둘러싼 세력다툼이 잦았던 때이었다.
따라서 이자현은 사회적으로나 불교적으로 다툼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수신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한다.
춘천의 청평산은 원래 경운산(慶雲山)이었는데 이곳에 처음으로 절을 지은이는 신라 말기에서 고려초기에 활약한 선승(禪僧) 영현(永玄)이었다. 그는 당세 유학갔다가 태조18년(935)에 귀국, 광종24년(973)에 절을 창건하고 백암선원(白巖禪院)이라 했다. 그 뒤 폐사된 이 절을 이자현의 아버지인 이이가 개창하고 보현원이라 했다. 이 보현원이 크게 중수되는 것은 바로 그의 아들인 이자현에 의해서 이다.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온 것도 선종6년(1089)인데 이후 인종3년(1125)까지 무려 37년간을 거주하였다. 그는 이 산에 오자 산 이름을 청평산이라 고치고 두 번이나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의 명응(冥應)이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문수원으로 바꾸고 다시 수리하였다.
여기서 문수원의 이름에 나타난 이자현의 사상으로 보현원의 실천성에서 문수원의 고답성, 개별성, 은둔성이라는 측면으로의 전환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려는 연구 경향이 있는데 반드시 이를 수긍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수보살은 지혜를 그 상징으로 하는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모든 보살이 그러하듯이 부처님이 기본적으로 향유한 실천덕목인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이념을 버리지 아니한 보살이기 때문에 실천을 게을리하고 사회와 떨어져 개발적, 은둔적 수도생활만을 지도하는 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천성에다 행자들이 잊기 쉬운 지혜(智慧)를 갖추기 위해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에서 보현원도 좋지만 문수원으로 바꾼 것으로 이해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는 당시 불교계가 선종의 융성에 의해 -법안종(法眼宗)의 영향에 의해 교선일치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를 배제한 참선 일변도의 수행에 머무르고 있었고, 이자현은 이의 단점을 시정하고자 능엄경(楞嚴經)을 사상적 근간으로 하는 능엄선(楞嚴禪)을 주창한 데서도 능히 알 수 있다고 본다.
문수원을 중수한 데 이어, 절밖에 있는 다른 동네에 거처하는 짐을 지어 암자(庵子), 불당(佛堂), 정자(亭子) 등이 모두 10여개나 되었다 한다. 그리고 불당은 문성(聞性), 암자는 견성(見性), 선동(仙洞), 식암(息庵) 등으로 각각 그 이름을 붙였다.
그는 문수원에서 "날마다 이 속에서 생활하는데 어떤 때는 홀로 앉아서 밤이 깊도록 자지 아니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반석위에 앉아서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견성암에 입정하였다가 7일만에 돌아오기도 하였는데(淸平山文殊院記)" 이렇게 참선을 공부하던중 <설봉어록(雪峯語錄)>을 일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설봉의존은(雪峯義存:821-908)은 당나라때 선사로 덕산선감(德山宣鑑)의 제자이며 '설봉견성(雪峯見性)' '설봉반두(雪峯飯頭)' 는 화두(話頭)로 유명하다. 그의 사호(賜號)는 진각(眞覺)이다. 설봉어록은 상당시중어(上堂示衆語). 기연문답(機緣問答). 게송(偈頌). 규칙(規則). 유계(遺誡). 년보(年譜). 비기문(碑記文). 이십사경시(二十四景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한 눈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살폈는데 어느 곳을 향해 쭈그리고 않겠는가 (盡乾坤是箇眼 汝向甚處 坐)"라 한 곳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하며 그 이후 불조의 말씀에 막히는 데가 다시없었다
(於此言下 豁然自悟 從此以後 於佛祖言敎更無疑滯)고 한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더욱 선을 좋아하여 학자가 찾아오면 그들과 함께 그윽한 방에 들어가 날이 다 가도록 꿇어앉아 말을 잊었다가 때때로 옛 고덕의 종지를 들어 토론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옛 고승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설봉어록을 읽고 깨달음은 바가 크다고 했음을 미루어보아 설봉의존의 가르침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 후 이자현은 우리 나라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옛 성현의 유적을 탐방한 뒤 다시 돌아와 혜소(조)국사(慧炤(照)國師)가 머물던 인근의 화악사(華岳寺)에 왕래하면서 선리(禪理)를 자문하기도 하는 것 빼놓고는 문수원을 나가지 않았다. 예종(睿宗) 이 두 번이나 내신을 보내 차와 향 그리고 금으로 수놓은 비단을 특별히 내리고 대궐로 불렀다. 그러나, 이자현도 "강을 건널 때 처음 먹었던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고 표문을 올려 사양했다.
한편, 이 즈음해서 이자현은 당시의 선가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수능엄경(首楞嚴經)을 선수행에 활용하므로써 그의 사상뿐 아니라 고려 불교계에 일대 전환을 이룩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예종은 남경에 행차했을 때 (1117) 이자현의 아우인 이자덕을 보내어 행재소로 초청하였다. 이자현은 이에 응하여 예종과 담론하고 이어 삼각산 청평사로 옮겨 예종에게 선학의 교리를 설하고 <심요(心要)> 한 권을 저술하여 바쳤다. 그리고, 공 문수원으로 돌아왔는데 이 때 예종과 왕비. 공주 등 왕실의 두터운 귀의를 받았다. 그 뒤에도 왕실의 후원은 계속되어 예종16년(1121)에 아우 이자덕을 보내어 산중에서 특별히 능엄강회(楞嚴講會)를 개최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인종이 즉위하자 사신으로 이봉원을 보내 위문하였고, 이종3년(1125)에는 이자현이 병들자 국의를 보내 위문하였다. 이해 4월 마침내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종8년(1130) 진락공(眞樂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의 저서는 한 권도 전하지 않으나 목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추화백약공낙도시(追和百藥公樂道詩) 1권
선기어록(禪機語錄) 1권
가송(歌頌) 1권
포대송(布袋頌) 1권
심요(心要) 1권
3. 선승(禪僧). 거사(居士)와의 교류(交流)
그는 선종6년 문수원에 온 이래 명산을 유람하고, 화악사. 행재소. 청량사에 다녀온 것을 빼고는 64살로 생을 마칠때까지 문수원을 나서지 않고 선수행에만 열중하였음은 생애에서 살펴본 바 있다. 파한집에 의하면 "때때로 옛 고승의 종지를 들어 토론하니 이로 말미암아 선법이 해동에 유포되어 혜조국사(慧照國師). 대감국사(大鑑國師)가 모두 그 문에서 놀았다"고 하여 당시의 고승 2명이 나오고, 역시 파한집에 그와 친했던 거사 곽여(郭輿:1059-1130). 권적(權適:1094-1146), 은원충(殷元忠)등의 이름이 나온다. 이에 의해서 그와 교류한 사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혜소(조)국사(慧炤(照)國師)
그는 개경의 광명사(廣明寺), 춘천의 화악사(華岳寺), 승주의 정혜사(定慧寺)등에 머물렀는데, 정혜사는 국사 자신이 직접 창건한 사찰로 뒷날 수선사(修禪社)의 승려들 특히 6세 충지(庶止)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또한 송에 유학, 설문종(雪門宗)의 정인도진(淨因道臻)의 법을 받아오고, 귀국시 요본 대장경 3부와 송 불교계의 의궤(儀軌), 배발(排鉢) 등을 전해와서 종합 수행도량인 총림회(叢林會)의 의식을 바꾸어 놓으므로써 고려 불교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파한집에서는 혜소국사가 이자현의 문하에서 놀았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이자현 중심의 기술이라고 볼 때 혜소국사가 춘천의 백운산 황악사에 머물고 있었을 즈음 이자현이 왕래하면서 서로 선리(禪理)를 토론하였던 것이 아니가 한다.
그의 문하에 탄연(坦然), 관승(貫乘), 영보(英甫), 지인(之印) 등의 수제자가 있었으며 탄연에게는 연담(淵湛), 영보에게는 조응(祖應) 등이 배출되어 예종∼명종 대에 걸쳐 선종이 주류를 이루었다.
2) 탄연국사(坦然國師)
19세때 광명사(廣明寺)에 가서 혜소국사에게 수업하고 심인(心因)을 전수받았다. 그 후 숙종9년 대선에 급제한 뒤 여러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면서 승제가 올라 예종15년에 선사, 인종9년에는 대선사가 되었다. 보제사(普濟寺). 외제석원(外帝釋院). 광명사(廣明寺) 등엥 머물면서 인종에게 선리를 자문하였으며, 인종23년에 왕사가 되어 불교 교단을 이끌면서 문도가 번성하게 되어 '동국의 선문을 중흥하였다'는 평가를 들었다.
<보한집(補閑集)>에 의하면 탄연은 필법이 정묘하고 시격이 고담하여 쓰고 읊은 것이 많다고 하였는데, 일찍이 그가 지은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어구(上堂語句)>를 송의 아육왕산(阿育王山) 광리사(廣利寺)의 개심(介諶)에게 보내어 인가를 받고 개심의 제자인 도응(道應), 계환(戒環) 등과도 서신을 통하여 교류함으로써 당시의 새로운 선 특히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波)의 가풍을 수입한 것은 한국 선종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탄연의 탑비인<단속사대감국사비문(斷俗寺大鑑國師碑文)>에서는 이자현과의 관계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으나 혜소국사가 그와 가깝게 지내고, <파한집>에서 혜소. 탄연 두 국사가 이자현의 문에서 놀았다고 했으며, <청평산문수원기> ,<제청평산거사진락공지문>은 모두 탄연이 글씨를 써서 비석에 새긴 것인데 비문에 "<문인정국안화사주특전법사문탙연서(門人靖國安和寺住特傳法沙門坦然書)>"라 하여 문인이며 전법사문이라 칭한 것 등을 종합해 볼 때 이자현과의 관계가 훈화를 입을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3) 곽여(郭與)
그는 문종33년(1083) 이자현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이래 끝까지 가장 가깝게 지낸 동년우였다. 청주곽씨 출신으로 내시부에 속했다가 합문기후(閤門祇候)를 거쳐 한주(漢州의) 목민관(牧民官)이 되었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사직한 후 전주의 초당(草堂)에 은거하였다.
예종이 즉위한 후 동궁에 있었을 때의 인연으로 궁중의 순복전(純福殿)에 있으면서 왕의 스승으로 담론(談論)에 응했다.
항상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학별의(鶴 衣)를 입고 궁중에 출입하여 당시의 사람들에게 금문우객(金門羽客)이라 불렸다. 둘다 벼슬을 버리고 은퇴한 수 처사(處士) 가 되어 사람들은 처사방(處士榜)이라 불렀을 정도로 같이 보았다. 또 곽. 여가 관동지방 안찰사로 갔을 때 청평 문수원에 찾아가 교환한 시가 <동문선(東門選)>,
<파한집(破閑集)>,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등에 실려있어 그들의 관계를 짐작케 해준다.
4) 권적(權適)
안동부의 향리 출신으로 젊어서 문수원에 가서 이자현을 만나 수업하며 평생 도우(道友)로 허락을 받았다. 일찍이 밀실에서 이자현에게 선결(禪訣)을 받고 여러 승려들과 선리를 담론하여 모두 굴복시켰다. 그 뒤 20세때 북원의 개선사(開善寺)에 가서 그 별사에 머물면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읽었는데 읽기를 마치기도 전에 감읍(感泣)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예종10년(1115) 송에 유학가서 유교의 5경을 수입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명서을 떨쳤고, 예종12년(1117) 송에서 돌아올 때 송 휘종( 宗) 앞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외우고 관음보살상과 법화서탑(法華書塔)의 족자를 선물로 받아와 자손에게 전하고, 그의 아들 5형제중 2명이 출가하였다. 시문에 능해 <동문선(東文選)>, <보한집(補閑集)> 등에 여러 편의 시문이 전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지리산영정사기(智異山永精社記)>는 불교사료로서도 중요한 것이다.
5) 은원충(殷元忠). 조원(組遠). 지원(知遠)
이자현이 젊어서 한림원(翰林院)에 있었을 때에 몰래 숨을 만한 승지강산(勝地江山)을 물어 양자강가에 좋은 곳이 있다는 대답을 듣고는 늘 관심을 가졌고, 이에 의해 이자현이 청평산 문수원에 은거하게 되었으므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으나 거사라기 보다는 술사(術士)로서 생활하여 그 이후의 교류관계는 분명치 않다.
이자현은 문수원에 든 후 37년간을 거의 세상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바깥 세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었으나 문도 양성에는 열심이어서 <문수원기> 등에 나오는 이 만도 여러명이다. 이 중 조원은 수제자로 전법계주(傳法繼住)의 부촉을 받고 이자현의 뒤를 이어 문수원에서 살았다. 지원은 이자현의 비석을 새긴 사람이다.
4. 사상(思想)
1) 능엄선 사상(楞嚴禪思想)
그는 27세에 벼슬이 대악서령에 있었으나 부인을 사별한 후 청평산에 들어가 문수원을 수리하고 거기서 살면서 '더욱 선열(禪悅)을 즐겨하고 학자가 오면 곧 그와 더불어 깊은 방에 들어가 날이 다 가도록 단정히 앉아서 사색에 잠기었다가 때때로 더불어 고덕의 종지를 깊이 논의하였다. 이에 심법이 우리 나라에 널리퍼지니 혜조와 대감의 두 국사가 그 문에서 놀았다.'고 <파한집>에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선사이다.
그가 깨달음을 얻게된 동기는 <설봉어록>을 읽으면서 인데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와 <선문보장록>에 의하면 "일찍이 <설봉어록>을 읽고 그 가운데 '한 눈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살폈는데 너는 어느 곳을 향해 쭈그리고 앉겠는가' 라는 데에서 가슴이 확 트이듯 깨달았다. 이로부터 불조의 말씀에 막히는 데가 다시 없었다. <嘗讀雪峯語錄 云盡乾坤是箇眼 汝向甚處 坐 於此言下 豁然自悟 從此以後 於佛祖言敎 更無疑滯>고 했다.
그런데 당시에 유행하던 이교입선(離敎入禪)의 사상에 의심을 갖고 바람직한 선의 방향에 관해 고민하던 중 그 해결책을 능엄경에서 찾았다.
일찍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힘써 불경을 읽고 여러 책을 두루 살폈는데
<수능엄경>이 선중에 꼭 맞고, 긴요한 이치를 밝혀낸 것이었으나, 선학인들은 아직 그것을 읽은 자가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고 하여 제자들에게 <수능엄경>에
대한 공부를 권작하여 학자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고 한다.
능엄경은 <大佛頂經>, (大佛頂首楞嚴經>,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 首楞嚴經>이라고도 하며 당대에 중천축 사문인 반자밀제(般刺蜜帝)가 번역하였으며,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19편에 수록된 70권짜리 책이다.
이 경은 아난이 마등가녀(摩登伽女)의 마술에 걸려 계체(戒 )를 잃게될 즈음에 부처님이 문수보살을 보내 선주(神呪)로 마술을 깨고, 아난과 마등가녀가 함께 예배하자 설하신 내용이다. 주요 법문은 원해(圓蟹), 원행(圓行), 원위(圓位), 칠취이판음마(七趣以瓣陰魔), 삼마제법(三摩提法), 근진동원(根塵同源), 박탈무이(縛脫無二) 등이다.
수능엄은 부처님이 얻은 삼매의 이름이요, 만행의 총칭이다. 이 경의 종지는 '근진동원박탈막이지리(根塵同源縛脫無二之理)'이다. 삼매법과 능엄의 계차를 해설한 것이다. 이중에서 이자현이 관심을 갖고 보았을 것은 수선(修禪), 이근원통(耳根圓通), 오온마경(五蘊魔境) 등을 다룬 내용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눈, 귀 코, 혀, 몸 뜻의 감각 기관(根)이 감각의 대상(塵)인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대해 어떻게 인식(識) 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삶의 지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감각기관인 근(根)과 감각대상인 진(塵)을 한뿌리(同根)로 보고 수행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가지 근간(五蘊)인 色, 受, 想, 行, 識이 각각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마경이 다가올 수도 있고 불경이 다가올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 그의 마음을 크게 깨eke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점은 그가 보고 크게 깨달아 다시는 불조의 말씀에 의심나거나 막히지 않았다고 하는 설봉어록의 내용 중에서도 단편적이기는 하나 짐작할 수 있다. 즉, "한 눈으로 이 세상을 살폈는데 어느 곳을 향해 쭈그리고 앉겠는가" 한 곳에서 가슴이 확 트이듯 깨달았다고 한 내용이 바로 능엄경의 내용과 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설봉어록을 읽고 트인 마음이 수능엄경을 읽고 더욱 확실해져 제자들에게 강력히 권유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자현은 스승이 없이 자오(自悟)했으며,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접근해보지도 못했던 수능엄경을 특히 더더욱 확신을 가져 능엄선을 발전시켜 간 것이다.
그런데 이자현 이전의 고려 불교계에서는 수능엄경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중국 선종에서는 송대의 장수자준(長水子 )이 이 경전에 의해 교선일치설을 내세워 주석집을 낸 이래 <원각경(圓覺經)>과 함께 선종의 소의경전으로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이자현에 의해서 그 중요성이 인식된 능엄경은 그 이후 꾸준히 읽혀졌다.
예종도 이경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상서(尙書)이며 이자현의 동기간인 이자덕을 문수원에 보내 능엄경산림을 개설하여 여러 곳에서 배우는 자가 모였었다고 한다.
또한 혜소국사의 간접적 감화를 받은 원지국사 승향도 능엄경을 주목하고 d이에 대한 강회를 열어 문인들에게 감화를 주었는데, 그가 능엄경에 심취하게된 계기를 보경사 원진국사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또 청평산에 가서 진락공의 유적을 방문하고 문수원기에 '진락공이 문인에게 수능엄경은 심종의 요체이고 긴요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고 한 것' 이 쓰여 있음을 보고 마음 깊이 감동되었다. 문성암의 주지가 되자 능엄경을 통득하고 제상(諸相)의 환상을 꿰뚫었고, 자심의 광대함을 확인하였다. 비로소 오묘한 뜻을 믿게되어 오래전부터 습득한 것과 같았다. 일찍이 발원하여 자주 교법을 드날렸으나 반드시 능엄경으로써 머리를 삼았으니, 이러한 경향이 세상에 성행하기는 대사에서 비롯되었다."
위와 같이 승향(1187-1221)은 이자현보다 약 1세기후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흠모하고 능엄경을 중시하여 선의 경지를 다졌다. 승향은 1221년에 능엄경을 강의하고 몇 달 후에 입적할 정도로 능엄경에 열중이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지은 이규보도 또한 능엄경을 좋아하여 송(頌)을 남기고, 유가대사(瑜伽大士) 경조(景照)의 자(字)가 공공(空空)이라는 의미를 능엄경에 의해서 풀이 명지경조이자왈공공(名之景照而字曰空空) 즉여능엄경(則如楞嚴經) 소위정극광통달적조함허공자시이(所謂淨極光通達寂照含虛空者是已) 유시관지(由是觀之) 이토각공공(以兎角空空) 려지어조(麗之於照) 시기이공재(是豈 空哉)하고 있을 정도 이었다.
이렇게 이자현은 독자적으로 능엄경의 중요성을 천양하여 당시로서는 새로운 선풍을 다지고 혜조국사와 대감국사 등 선사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이후를 주도하게 하므로써 당시 선종계에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2) 자연주의 사상(自然主義 思想)
이자현은 당시 사회적으로나 불교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왕비를 다수 배출신킨 대표적 외척인 인주이씨 출신이었고, 불교적으로도 사회적 배경과 함께 법상종을 이끌어가는 소현 등의 영향아래 좋은 위치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늘 숨어 살만한 좋은 곳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상처한 후로는 관심에 두었던 춘천의 문수원에 들어가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또 절밖에 있는 다른 동네에 사사로이 거쳐하는 집을 지었는데, 그 암자. 블당. 정자 등이 모두 10여개소나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당은 개성(開性), 암자는 견성(見性), 선동식암(仙洞息庵) 등으로 지어 자연스럽게 어느곳에서나 마음을 쉬고 정신을 수양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그의 이러한 성격을 강하게 표현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의 인격에 흠모의 정을 갖고 있던 예종이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대궐로 불렀으나 모두 거절한 사실이 그것이다. 이는
<파한집(破閑集)>에서
"당우(唐虞)의 시절에 요순(堯舜)의 신하로서 정룡(정龍)은 조정의 모책(謀策)을 바치었고 소부(巢父)와 허유(許由)는 산림의 지조(志操)를 굽히지 않았나이다. 새를 새로 길러 거의 종고(種鼓)의 근심이 없게 하고, 고기를 보고 고기로 알아서 강호(江湖)의 성을 이루게 하소서"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장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본인의 자연에 살고 싶음을 강렬히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지은 글에서도 그의 이러한 사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지은 저술은 생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6권이 확인되었으나 전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제목으로 보아 <禪機語錄>, <心要>를 빼고는 모두 저술이 그의 자연주의적인 사상을 잘 나타내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추화백약공낙도시(追和百藥公樂道詩)>는 백약공(百藥公)의 낙도시(樂道詩)에 대해 뒤에 화답한 시이며, <남유시(南遊詩)>는 그가 문수원에서 나온 단 한번의 자연 외유인 전국의 명산순례 때 지은 것이라 추측된다. 또한 <포대송(布袋頌)>도 그가 읊고 있는 대상이 포대화상(布袋和尙)인 것으로 보아 이러한 범주에 더욱 가깝게 묘사되어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자연주의 사상은 그에게 예종이 청했을 때 <심요> 1권을 지은 것과 <선기어록>을 빼 놓고는 모두 가(歌), 송(頌), 시(詩) 들로 이루어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字)가 진정(眞精)으로 호(號)가 희이자(希 子)이거나, 그가 지은 암자의 아름이 선동식암(仙同息庵)이며, 한 때 은원충에게 숨을 만한 곳을 물었다 하여 그의 사상을 전적으로 도가(道家)의 영향을 입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은가 한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행적에서는 거의 도가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은원충을 가까이한 기록이 안 보이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또한, 사회적. 불교교단적 다툼에 휩싸이고 싶지 않아서 중앙정치무대를 뒤로 한 것일 뿐 사회와 교단에 대한 애정을 늘 가지고 있었음이 그의 문도 양성에 대한 열의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그의 이러한 열의와 노력이 당시의 선종에 능엄선을 도입하여 지적참선(知的參禪)의 시대를 열게 했으며, 그후 결사불교시대(結社佛敎時代)에 이르기까지 뿐만 아니라 결사불교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5. 마침말
이자현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이므로 체계성이 미흡한 점은 차후에 시정하기로 하고, 이자현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보아야 할 것은 첫째, 그가 살았던 문수원은 은둔적. 고답적 도피사상의 발로에서 기인한 명칭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및 불교계에 필요한 지혜를 중장 시켜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 둘째, 그가 능엄경을 선수행에 도입하여 능엄선을 주창하고 문도 들에게 적극 권유하며 그 이후 불교계 특히 선종계의 활력소를 불어넣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수선사(修禪社)와 백련사(白蓮社)의 결사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었다. 그래서 그가 당시의 불교계에서 두 사람의 국사를 문인으로 삼아 가르침을 베풀고 사회에서도 또 수십년이 지난 이후에도 그 존경의 도가 더해 승. 속을 막론하고 귀감을 샀다는 점에서 감히 그를 한국의 유마라고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