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령군인 박창열이 맹인 김진후의 따님인 멜라니아(보진, 보익, 매괴, 화녀)등으로 불린 지나친 미인인 할머니를 속인 것으로 엄귀비의 어머니인 엄*순과 함께 은평구 진관외동에서 살다가 여주로 가서 자신의 딸을 다시 만난 진령군 장주기요셉성인의 따님으로 강완숙복녀의 외손녀인 진령군이 박중규와 강말순의 따님이 왕후로 간택되는 것을 방해하고, 영숙옹주를 일본으로 보내는데 성공한다. 신정왕후가 여우같은 범숙의로도 불린 조귀인이 흥선대원군의 애인인 점을 이용해 밭소리에서 살던 백인양이의 아들인 고종을 왕으로 만들 어 주었으나 신정왕후는 친척인 진령군의 딸을 낙점해 준다. 민비이다. 장주기요셉성인의 외손녀인 민비는 이번에는 어머니를 시켜 후궁으로 박중규의 다른 딸인 박씨를 고종의 후궁으로 보내는데 고종은 딸을 낳는다. 한성*로 또 정씨 집에 시집보내게 된다. 박중규의 손녀인 박성삼의 딸을 고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딸을 낳는다, 이딸이 이준열사 한분의 어머니로 나합양씨도 함께 보내버린다. 강말순도 고종의 후궁으로 강성삼신부님의 어머니이다. 강말순은 처음엔 박중규의 아내로 논산시 운현궁에서 딸을 낳아 고종의 왕비로 간택에서 낙점되자 육씨집안으로 시집보낸다. 옥천육씨는 김추기경님과 같은 성씨이다.
민극가성인의 후손인 성주이씨 이나 옥천육씨로 간 뒤 아들인 초우당 주인을 낳고 그의 따님이 육*수여사님이다.
심지어 박중규와 강말순의 따님을 고종의 비로 간택에 실패하게 되자 박중규는 자신의 손녀인 박성삼의 누이를 민비대신 들여보낸다. 딸을 낳는다. 한성실이다. 아산 정모회장의 어머니이고. 누이 박씨는 함흥으로 간다. 박성삼의 딸이 이준열사의 어머니이고, 누이 박씨는 윤익서의 어머니이다. 윤익서인 나의 할머니 강진댁과 육영수여사는 4촌간이 된다.
진령군은 강진으로 내쫒기 위한 꾀임에 두번이나 걸려 든 멜라니아 할머니와 박성삼이 세번째 걸려든 때가 민비가 환궁하던 때이고, 이번엔 멜라니아 할머니를 이정식복자의 자손이 살고 있는 순화궁에 보내서 살게 하고 순화궁에서 사시던 박**신부님의 조상을 내쫒는다.
이리하여 강말순의 친척들 모두를 내쫒게 되는데, 엄귀비의 친정 아버지 엄진삼이 해남 우수영까지 와서 강말순의 오라비인 강진현감 강동기와 수원에서 살다가 내려간 강영옥에게 세례를 주던 해는 1882년이다.
1884년에 증조부이신 박성*은 조카인 윤익서(윤주교님과 윤봉길의사의 할아버지)와 도일하려고 사초리에서 의논을 하게 되나 느닷없는 바느질 이야기에 그만 당시 현감이던 강동기베드로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고 만다. 부산에서 탄 배에 김홍집일행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인 대성양반에게 전해들었다.
도일해서 영숙옹주를 만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엔 강원도 철산까지 자손을 불러들인 진령군 할머니가 자신의 딸인 민비를 위한 계략에 빠져든다. 윤익서가 자기 조카인 선산김씨에게 순천에서 군산에 이르는 토지 전부를 주고 장귀인와 어머니와 오빠들을 순천으로 불러 들인다. 그리하여 순천에 장귀인의 오라비들의 묘소가 있다. 일본의 작위를 받은 인물이라고 한다.
엄귀비는 내쳐진 상태이나 밭소리에서 예조판서 김문현은 순원왕후의 아드님이고, 박중 仲규의 손녀인 영숙옹주가 조선의 국모인 민비를 시해하기 위한 일을 꾸미게 된다. 염씨의 아들인 김문현이 진령군과 더 까우나 전봉준장군을 안 잡은 이유로 거제도로 유배되는데
진령군은 엄귀비의 아버지인 엄진삼이 해남 우수영까지 와서 강씨와 박씨와 더 까운 사이가 된 일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듯 하고, 박중규를 대구 감영에서 1886년 2월 3일에 처형한다.
박중仲규가 영숙옹주의 할아버지이다. 순원왕후의 아드님으로 밭소리 칠항댁이 몽주를 사산하고 돌아간 집터이다. 원래 밭소리는 하나의 집이었다.
그 뒤 진령군의 사망연도는 1905년경으로 추정되고, 철종의 후궁인 박숙의가 철종의 아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간다. 이분이 이규*이다.
박숙의도 박성삼의 따님이었다.
진령군과 멜라니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묻어준 곳이 매괴여상근방이고,
민비의 시해가 있고, 엄비가 들어올 때에 강원도로 멜라니아 할머니와 박성삼을 불러들인 진녕군은 그의 전답과 세개의 궁중 용흥궁은 사위가 가져갔으니 이*승백작이 외손자인 박성*증조 할아버지의 재산
진령군의 민비에 대한 집념은 자신이 왕비가 되려는 대리만족은 아니었을까
진령군이 김창열을 낳는데 김창열은 장주기요셉성인의 아들이고, 박창열이다. 정철염가타리나성녀가 따님이다.
천주교신자이던 진령군이 무당이 되어 이렇게 주변 사람들을 모두 망쳐놓았다.
그러나 엄귀비는 프란치스카인 영세명을 가지고 있었고, 엄귀비의 자손인 영친왕도 영세명이 있었다. 사생활은 민비의 어머니 진령군의 꾀임으로 복잡했으나. 시신은 고요했고 아드님도 그의 자손들인 고종임금외의 남편들인 진령군의 자손들과 낳은 자손들도 무탈했다.
부언컨데 무당을 즐겨찾던 왕비들의 최후를 보면 문종의 빈이던 세자빈 봉씨와 김씨등은 내쳐지고, 혜빈 양씨는 지나체게 불도를 숭상하여 석불이 장마에 떠내려 가자 석불을 궁에 들여오는 등 승려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가 단종을 보육했다는 이유로 시신이 포천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이 석불은 무당이 굿하던 석불이다.
폐비 윤씬 윤기무인 화의군의 따님으로 궁에서 굿을 하기 위해 금을 그어 놓기도 하는 등 무속인이었다.
인조의 후궁인 조귀인은 나주나씨로 나숙의의 묘소로 해서 묘가 진관외동에 있었기는 하나 그의 사돈인 김자점의 몰락을 보게 된다. 그녀 역시 무속인을 지나치게 가까이 한 인물이다.
명성왕후 김씨는 무녀의 말을 듣고 찬물에 목욕을 겨울에 하고 감기가 걸려 죽었다. 성주이씨 장희빈과 전주이씨 장희빈은 둘다 사사 된다.
민비는 시해되기에 이르고 시신은 없다.
영감이 발달한 인물도 있긴 하나 예측으로만 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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