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현으로 유배된 정약용 / 박주병
1. 세로에 위험을 느끼고
동외곶(冬外串)이라 하면 잘 모르다가도 장기곶(長鬐串)이라 하면 다 안다. 그 아랫동아리에 옛 명칭으로는 장기현(長鬐縣) 마산리(馬山里), 지금 이름으로는 장기면 마현리(馬峴里)라는 마을이 있다. 어느 때의 명칭으로 하든 장기(長鬐)와 말[馬]를 합치면 ‘장기마’(長鬐馬) 곧 ‘갈기 긴 말’이 되기에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려 보아도 말 기르는 집은 보이지 않고 소 기르는 집만 더러 보인다.
장기 땅은 자주 유배지가 되었다. 조선조 때만 해도 여러 사람이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다고 한다. 정약용(丁若鏞)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약용이 회갑 년에 자신을 평해 이르길, “그 사람됨이 선을 즐기고 옛 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불렀으니 운명이다.”라고 했다.(「自撰墓誌銘, 壙中本」) 정약용은 정조 임금으로부터 기재(奇才)라는 칭을 들으며 지우를 받고 있었지만 정조가 정약용과 그의 중형 정약전을 두고 평하길, “형이 동생보다 낫다.”라고 매번 말했는가 하면 정약전이, “내 아우는 병통이 없지만 오직 국량이 작은 것이 흠이 된다.”라고 했다. 정조의 말은 이 국량을 두고 한 말인 것 같거니와 본디 재주가 발군한 데다가 국량이 작고 과단성이 지나치면 독선적이게 마련이다. 더구나 임금의 지우까지 받고 있었으니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환로며 정계에서 그의 앞날이 순탄치가 못할 것은 진작 예견되어 있었지 않았는가. 주위의 시기와 미움도 사고 탄핵도 받았던 것 같다. 고작 열흘 동안이긴 하지만 일찍이 귀양간 적도 있었다.
정약용은 연하고질(煙霞痼疾)의 천품을 타고났던 걸까, 어릴 적에 눈 덮인 들판을 뛰어다닐 때면 어른이 불러도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한다. 비록 환로에 들어서긴 했지만 금마옥당(金馬玉堂)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다가도 마음은 문득문득 고향 소내[牛川] 앞에 흐르는 소양수(북한강)에 노니는 한낱 어부요, 천생 일민(逸民)이었다.
곤곤히 흐르는 소양강 물
서남으로 광주를 지난다
늘 도연명의 전원시를 마음에 품고
사마상여가 객지로 떠돌 듯 한다(遊客梁旋歸蜀過臨邛:筆者注)
그림 속에 푸른 산봉우리를 옮겨놓고
말없이 흰 갈매기를 대한다
함께 숨을 사람 헤아려 보니
얼마쯤은 명사들이구나
袞袞昭陽水 西南度廣州 常懷元亮賦 猶作馬卿遊 有畵移靑嶂 無辭對白鷗 商量偕 隱者 多少是名流 ⎯⎯「懷江居二首次杜韻」제1수
교쾌한 시배(時輩)들의 미친 파도에 명주(溟洲)처럼 쓸리며 정약용은 불안했다. 서른아홉 살이 되자 세로(世路)에 더욱 위험을 느꼈다. 드디어 그해 음력(이하 음력) 유월에 처자를 이끌고 고향인 마재[馬峴]의 소내 곧 초천(苕川: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으로 돈연히 떠나갔다.(正祖 24, 庚申, 1800) 이 무렵을 전후해서 지은 걸로 추측되는 「고의」(古意)라는 시를 보기로 한다.
한강은 흘러 쉬지 않고
삼각산 드높아 끝이 없어도
산하는 그래도 변천이 있겠지만
떼거리 음흉한 놈들 파괴될 날이 없네
한 사람이 공작을 꾸미면
뭇 입들이 전하고 옮겨서
치우치고 삿된 것이 뜻을 얻으니
정직한 자 어찌 발붙일 것인가
외로운 난새는 깃털이 약해
가시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을
한 가닥 바람을 타고서
묘연히 서울을 떠나려 하네
방랑을 감히 좋아서가 아니야
머물러 봤댔자 무익함을 알아설세
대궐문은 호표가 지키고 있으니
무슨 수로 이내 충정 상달하리오
고인의 지극한 가르침이 있으니
향원(속인들 사이에서 의리를 지킨다고 칭찬 듣는 사람)은 덕의 도적이다[鄕原(愿)德之賊也―『論語』「陽貨」]
훗날의 유락을 읊조리듯 했으니 정약용의 운명은 시참(詩讖)이 되고 말았다 할까.
고향에 도착하자 그는 진작 세워 둔 비둔(肥遁)의 계획을 이제야 실천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약간의 돈으로 배 한 척을 사서 배 안에 어망 네댓 개와 낚싯대 한두 개를 두고 발 달린 솥(鐺鼎), 술잔, 반 등 여러 가지 양생에 필요한 기구를 갖추고서 방 한 칸을 만들고 온돌을 놓을 거다. 두 아들한테 집을 지키게 하고, 늙은 아내와 어린 아이와 어린 종 하나를 이끌고 부가범택(浮家汎宅:물에 떠다니면서 사는 배)으로 종산(鍾山)과 초수(苕水) 사이를 왕래하면서 오늘은 월계(粤溪)의 못에서 고기를 잡고, 내일은 석호(石湖)의 구석에서 낚시질하며, 또 그 다음날에는 문암(門巖)의 여울에서 고기를 잡는다. 바람을 먹고 물에 잠자며 물결 속 오리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며 때때로 짧은 노래 작은 시를 지어 기구하게 뒤섞인 심정을 스스로 펴 볼까 한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
고인 가운데 이렇게 한 사람이 있는데 (당나라 때) 은사 장지화(張志和)가 그랬다. 장지화는 본래 관각(館閣)의 학사(學士)로서 만년에 물러나 이렇게 하고 자호를 ‘연파조수’(煙波釣叟)라 하였다. 내가 그 풍취를 듣고 즐거워서 ‘초상연파조수지가.’(苕上煙波釣叟之家)라고 쓰고 이것을 공장(工匠)에게 시켜 나무에 새겨서 방(榜)을 만들어 그것을 간직해 온 지가 몇 해가 되었다. 이것은 장차 내 배의 방으로 한다. 가(家)는 곧 부가(浮家)를 말한 것이다.
경신년 초여름에 처자를 이끌고 초천의 별장에 이르러 막 부가를 지으려고 하던 차에 성상께서 내가 갔다는 말을 들으시고 내각에 명을 내려 나를 소환토록 하였으니 아, 내가 어찌하겠는가? 바로 다시 서울로 돌아갔는데 그 방을 꺼내어 유산(酉山)의 정자에 달아놓고 갔다. ⎯⎯「苕上煙波釣叟之家記」抄
정약용이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안 되어 정조는 유월 스무여드렛날에 갑자기 승하했다. 정약용은 다시 초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부가를 만들기에 앞서 우선 형제가 한데 모여 날마다 경전을 읽으며 지내고 있었다. 별장에는 ‘與猶堂’(여유당)이라는 편액을 달아 놓았다.「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集中本)에서는 “당호를 여유라 한 것은 겨울에 물을 건너고 이웃을 두려워하는 뜻을 취했다.”(堂號曰與猶取冬涉畏鄰之義也)라고 했고,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는 “노자가 말하기를,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老子之言曰與<豫>兮若冬涉川猶兮若畏四隣)라고도 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나아간 뒤에야 주저하려 하고 주위의 눈총을 받은 뒤에야 이웃을 조심하려 한 것이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2. 책농사건(冊籠事件)과 신유옥사(辛酉獄事)
정조가 승하하자 왕세자가 너무 어려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지난날 정순왕후와 결탁하여 사도세자 참사를 획책했던 노론 벽파(僻派)는, 정조의 비호 아래 사도세자 사건에 연민의 정을 가졌던 노론 시파(時派)를 제거했다.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반대 정치세력인 남인을 몰아내는 것을 급선무로 정했다. 그러던 차에 그 해 섣달에 남인 천주교도들(崔必悌, 吳玄遠, 趙東還, 李箕延 등)이 서울과 양근(陽根) 충주(忠州) 등지에서 잡혔다.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건 노론 벽파가 남인을 제거할 명분이 생겼다. 이듬해(純祖 1, 辛酉, 1801) 정월 열하룻날에 정순왕후 김씨의 “코를 베어 멸망시키겠다.”는 ‘사학금압하교’가 내려지고 천주교도들에 대한 수색이 더욱더 심해졌다. 다급한 남인 신도들은 증거를 숨겼으나 그 달 열아흐렛날에 한성의 포교가 붙잡은 어떤 사람의 농(籠) 속에서 천주교 교리서, 성구(聖具), 신부와의 교환 서찰, 대여섯 사람의 왕복 서찰들이 나왔다. 그 서찰 가운데는 정약용 집안의 서찰도 들어 있었다.
정약용은 이 책롱에 관한 일을 정월 그믐날에서야 이유수(李儒修) 윤지눌(尹持訥)이 서찰로 알려주었으므로 급히 말을 달려 도성으로 돌아와 명례방(明禮坊:지금의 명동 일대)의 자택에 머물면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해 이월 초여드렛날에 양사(兩司)가 계를 올려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을 국문하기를 청했다. 정약용은 그 이튿날 새벽에 체포되어 입옥되었다. 그의 두 형 정약전 정약종과 이기양 권철신 오석충 홍낙민 김건순 김백순 등이 차례로 옥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문서 더미 속에는 정약용이 정약종에게 보낸 서찰도 들어 있었는데, “화색(禍色)이 박두하였으니 사학(邪學)을 믿으라고 꾀는 자가 있으면 내가 손수 칼로 찌르겠습니다.”라는 것과 같은 정약용이 누명을 벗을 만한 증거가 많았으므로 곧 형틀을 벗고 일단 석방되어 금부 안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백방하기를 의논하는데 오직 서용보(徐龍輔) 혼자 불가하다고 고집했다. 이 책롱사건이 터지자 얼씨구나 하고 차제에 정약용만은 꼭 죽여 없애려고 한 것이 서용보의 심보였다. 이때 악당들은 흩어진 문서 더미 가운데서 ‘삼구(三仇)의 설’(西敎에서 착한 일을 못하게 방해하는 육신, 세속, 마귀의 세 가지를 원수에 비겨 이르는 말.)을 찾아내어 억지로 정(丁)씨 집 문서로 정하고 무함하여 드디어 정약종에게 극률을 가함으로써 정약용의 재기의 길을 막았다. 결국 정약용은 장기현으로, 정약전은 신지도(薪智島)로, 이기양은 단천(端川)으로, 오석충은 임자도(荏子島)로 정배(定配)되었지만 정약종과 나머지 사람들은 중형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신유옥사(辛酉獄事/辛酉邪獄)다.
정약용은 체포된 지 십구 일 만인 이월 스무이렛날에 출옥하여 이튿날 귀양길에 들어섰다. 숭례문 남쪽 가까운 데 있는 석우촌(石隅村) 세 갈래 길에서 두 마리 말이 서로 장난치며 울고 있었다. 한 마리에는 정약전이 다른 한 마리에는 정약용이 타고 하나는 남으로 하나는 동으로 갈리며 제부(諸父) 제형(諸兄)들과 가물가물 멀어질 때까지 서로서로 손은 흔들었다. 한강 남쪽의 사평리(沙平里)에서 가족과 이별할 때 표정이야 비록 씩씩한 체했어도 마음이야 그라고 다르지 않았단다. 그믐날엔 죽산(竹山)에서 유숙하고, 삼월 초하룻날에는 가흥(嘉興)에서 유숙하고, 이튿날에는 충주 서쪽 이십 리허의 하담(荷潭)에 당도했다. 가문이 다 무너지고 죽느냐 사느냐 지금 이렇게 되었으니 이 세상 사람들이 아들 낳는 것 축하하지 않게 만들었다며 부모 무덤 앞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탄금대에서는 임란 때 신립(申砬)이 한신만큼 지략이 있었던들 왜군이 충주를 함락치 못했을 거라며 신립을 일으켜 책언하고 싶었다. 연풍현 북쪽에 있는 무교(蕪橋)를 건넜는데, 계곡은 돌고 돌아 합치고 종일토록 건너도 하나의 물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가파른 산을 오르니 다리가 시고 아프건만 임란 때 순변사 이일(李鎰)이 왜군의 호접진에 걸려들어 군대를 버리고 도망칠 때에는 이 길도 평평하기가 숫돌 같았을 거라며 깊은 산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새재를 넘으며 지형을 살펴보고 임란 때 이 천혜의 요새를 버린 멍청이 같은 작전계획에 또 한 번 탄식했다. 죽 벌여 있는 칠십 고을의 관약(管籥:關鍵)이 되어 깊이깊이 싸고 있는 문경 고을 남쪽 토천(兎遷:串岬遷의 異稱). 그 지리를 차지한 것이야말로 계림이 삼국을 통일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함창현의 공골피(空骨陂) 못을 바라보며 천연적인 아름다움은 훌륭한데도 앉은 자리가 좋지 않아 아름답게 꾸민 사람이 없고 다만 벼 이삭에 물만 대 준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러구러 장기에 도착한 날이 삼월 초아흐레였다. 그 이튿날 이곳 마산리의 늙은 장교(將校) 성선봉(成善封)의 집에 거주하게 되었다. 지금의 장기초등학교 자리가 그 집터라고 추정할 뿐 확실한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3. 저 멀리 내 고향 소내의 달은
장기초등학교. 설을 쇠었지만 학교는 아직 겨울 방학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운동장에는 아이들 네댓이 공을 차고 있을 뿐 호젓하기 그지없다. 어디쯤이 정약용이 머물렀던 그 집터란 말인가. 은행나무에서 새들만 뭐라고 조잘대다가 만다. 한쪽에 자리 펴고 누워 볼거나.
정약용은 귀양을 오자마자 삼월에 지은 「홀로 앉아」라는 시에서 스스로를 늙은이라 했다. 갓 마흔 살에 얼마나 낙탁했다 싶었으면 그리 말했을까. 귀골이 궁벽한 해우(海隅)에서 불편하고 갑갑하고 무료했겠지. 집 생각은 얼마나 났을까. 더구나 그 봄날은 내내 병치레를 했다지 않는가. 달팽이의 두 뿔 위에서 만씨와 촉씨가 싸운다는 칠원리(漆園吏)의 가설 곧 만촉지쟁(蠻觸之爭) 같은 당파 싸움 생각하다가 울기도 했다.
쓸쓸한 여관에 홀로 앉아 있을 때면
대 그늘도 끄덕 않고 어찌 그리 해는 긴지
고향 생각이 일면 곧바로 눌러 버리고
시구가 원숙해지면 끝까지 밀고 나간다
녹음방초 향해 눈길은 가지만
마음은 마른 나무 식은 재와 진배없다
나를 풀어놓아 집으로 돌아가게 하더라도
한낱 이 같은 한 늙은이일 뿐이리 ⎯⎯「獨坐」抄〈1801. 3월〉
산에 칡덩굴 푸르고 대추 잎 돋아나고
장기성 밖은 바로 작은 바다
돌로 눌러도 시름은 다시 일고
꿈길은 연기처럼 언제나 희미하다
극에 닿는 온갖 생각 모두가 부질없고
하늘은 어찌하여 내게 칠정을 주었을까 ⎯⎯「愁」抄〈1801〉
병상에서 일어나니 봄바람은 간곳없고
시름이 많으니 여름밤이 길다
잠깐 대자리에 누워 있는 사이에도
문득문득 고향 집이 그리워져
불을 붙이니 솔 그을음이 침침하고
문을 여니 대 기운이 서늘하다
저 멀리 내 고향 소내의 달은
흐르는 그림자를 서쪽 담에 비추리 ⎯⎯「夜」〈1801. 여름〉
만촉 싸움 분분하여 각각 한쪽으로 치우치고
객창에서 깊이 생각하니 눈물이 흐른다
산하는 옹색하여 고작 삼천린데
비바람 서로 싸워 이백 년이다
길 잃고 슬퍼한 영웅 한없이 많고
밭을 두고 싸우는 형제 언제나 부끄러움을 알까
하 넓은 은하수 퍼내어 씻어 내리면
밝은 해 밝은 빛이 온 누리에 비치리 ⎯⎯「遣興」〈1801〉
‘천주쟁이’로 몰린 그에게 말벗인들 있었을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가까이 하길 꺼렸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하더니 마침내 요란스레 떼 지어 떠든다.”고 했다.(「惜志賦」)
차차 길잡이라도 생겼던가. 더러는 울울한 심정을 달래며 여기저기로 나다니기도 했다. 경주의 성산포며 계림까지도 나가보고, 장기읍성에 올라 해돋이를 보면서 햇살이 퍼졌다가 사라졌다 하는 것을 어가를 호위했다가 해산했다가 하는 것에 빗대어 보기도 했다. 소동파를 배우느라 바둑 못 배운 걸 후회하면서 기껏 이웃 영감과 장기나 두고, 일본산 자기 잔에 보리숭늉을 마시기도 했다. 해구신(海狗腎) 값이 올라서 서울의 재상들이 서신을 보낸다는 말도 있고 꽃게의 엄지발이 참으로 유명하건만 언감생심이지. 아침마다 국이라곤 가자미 국뿐인 데다가 개구리 알, 밀즉(蜜喞:쥐새끼를 꿀에 넣어 둔 것) 같은 것도 서로 권하는데 홀로 귀골 티를 내랴? 꾹 참고 먹었것다. 그래설까. 봄을 나자 습증이 중풍으로 변해 왼쪽 다리에 늘 마비 증세가 왔다. 스스로 이르길, 북녘 태생이 남녘 음식에 적응을 못해서라고 했지만 차차 병이 깊어져 한평생 절름거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창출 술이 특효가 있는 줄을 번히 알지만 약 솥 들고 종은 와서 고향만 물었다. 신명나게 보리타작을 하는 광경을 보고는 사람들은 왜 고향 땅을 떠나 풍진객이 되느냐고 했고, 남가일몽(南柯一夢)은 다시는 꾸지 않고 강가에서 낚시꾼이나 되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느릅나무 숲길을 비틀거리며 “이 몸이 있는 곳이 우리집이지.”라고 자위했지만 가을이 되자 처자가 더 그리워졌던 모양이다.
어미 제비가 새끼한테 멀리 날게 연습시켜
고향에 돌아가려고 검정 옷을 입힌다
비비배배 그 수다가 모두가 헛소리지
가을바람 불어오면 날 버리고 돌아갈 거면서 ⎯⎯「秋懷」제2수〈1801. 가을〉
정약용은 자신이 비색(否塞)한 처지가 된 것은 자신의 마음 세움(立心)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재주가 적어서라고 했다.
진흙 모래가 땅에 가득한데 갈기 늦게 흔들었고
그물이 하늘에 가득한데 가벼이 날개 폈다
맑은 시절에는 괴로워라 활에 다친 새였더니
남은 목숨도 다를 게 없구나 그물에 걸린 고기라네
천년을 두고선들 어느 누가 나의 비색을 알랴
마음 세움이 굽어서가 아니라 재주 적어설세
늘그막에 나의 탕목읍이 장기현이 그란 말인가
고난을 겪어겪어 상전벽해라 머리 짧은 늙은일세
뜬 이름 사방에 떨쳤어도 이미 묵은 자취일 뿐
몸밖에는 한 가지로 비었고 대머리만 남았다 ⎯⎯「自笑」抄〈1801〉
마음 세움이 굽지 않았건만 살을 맞기도 하고 그물에 걸리기도 했던 정약용이었다는 것은 천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많다. 왜 그런가? 그런 화살이며 그물이 한 번도 우리 곁에 없었던 적이 없었기에 그렇다. 장기현이 자신의 탕목읍(湯沐邑) 곧 채지(采地:食邑)라 한 것은 새겨들으면 눈물을 머금은 냉소요, 대머리가 되었다는 말은 얼른 들어도 세상을 버린 사람의 자조가 아닌가. 대머리에 상투 틀기도 어려웠을 터.
정약용은 좁다란 방에서 빈대며 지네 같은 것에 시달렸다.
빈대가 살 깨물어 잠을 이룰 수 없고
지네가 벽에 다녀 또 다시 놀란다
작은 벌레 이빨도 내 푼수가 아닌 줄을 알지니
이렇게 생각하고 기꺼이 세상 물정에 따르리 ⎯⎯「鬐城雜詩」제23수〈1801〉
그를 옭아맨 악당들은 차라리 빈대며 지네라고나 할까. 빈대며 지네가 득실거리는 조정이며 관아. 조세와 부역이 무겁고 관리는 멋대로 잔악한 짓을 하여 백성은 편히 살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수박조차 심지를 않았을까.
호박은 새로이 떡잎이 나더니
밤사이 덩굴이 사립문에 얽혀 있다
평생토록 수박은 심지 않을 테야
못된 아전 놈들 시비 걸라
新吐南瓜兩葉肥
夜來抽蔓絡柴扉
平生不種西瓜子
剛怕官奴惹是非⎯⎯「長鬐農歌」제4장〈1801〉
한나절을 장기초등학교 근방에서 어정거리다가 동쪽으로 한 오리는 실히 걸었을까. 장기천을 따라 신창리 바닷가로 나왔다. 내내 속이 더부룩하더니 여기 오니 좀 트이고 배고픈 줄도 알겠다. 정약용도 그랬을 거다. ‘아아, 묘하도다! 저 작은 바위섬들.’ 정약용의 탄성이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서남해 바다 물빛 금릉과 인접해서
장삿배가 여기 동쪽까지 오는 것은 며칠이면 된다네
경뢰(瓊雷:중국의 瓊州海峽)가 보인다는 말 아직 믿지 못하노니
빽빽하게 모인 섬들 푸르고 험하구나 ⎯⎯「鬐城雜詩」제26수〈1801〉
정약용은 오징어와 백로를 두고 우화시를 지어 시대상을 풍자하기도 하고 해녀를 바라보며 「아가사」라는 시를 지었는데 ‘아가’란 말을 여기 와서 처음 들었던지, 지방 사람들이 자기 며느리를 가리켜 아가라 부른다고 말했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아가가
짠 바다 들락날락 맑은 연못 같다
꽁무니 높이 들고 대번에 물로 들어가서
오리처럼 의연히 잔물결을 희롱한다
돌던 물결 슬며시 합하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박 한 통만 두둥실 물 위에 떠다닌다
홀연히 머리 내밀어 물쥐와 같더니
휘파람 한 번에 몸이 따라 솟구친다
아홉 구멍 전복은 손바닥 같아
귀한 분 술상에 안주로 올린다
때로는 바위틈에서 방휼이 붙는데
헤엄에 능한 자도 여기선 죽고 만다
슬프다 아가 죽음 어찌 족히 말하랴
벼슬길의 열띤 객들도 모두가 헤엄치는 사람이리 ⎯⎯「兒哥詞」〈1801〉
방합과 도요새가 서로 물고 놓지 않고 싸우다가 둘 다 어부한테 잡히고 만다는 방휼지쟁(蚌鷸之爭)이란 말이 있듯이 위태롭기 그지없는 바위틈에서 해녀 끼리 붙어 다투다가 종당에는 죽고 만다. 벼슬길에서 열을 올리는 무리들 또한 보자기와 무엇이 다른가.
4. 황사영 백서사건(帛書事件)
정약용이 장기로 유배된 뒤에도 이른바 신유옥사는 그치지 않았다. 밀입국해서 포교하던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그 해 삼월에 자수했다가 처형당했고, 구월에는 주문모를 도왔던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이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구베아 교주에게 비단에 쓴 편지를 몰래 보내려다가 도중에 발각되어 또 한바탕 피바람이 일었다. 꽤 긴 이 편지에는 노론 벽파에 의한 노론 시파와 남인의 퇴출 기타 조선의 정치 정세, 신도들의 소개, 주문모 신부가 처형당한 과정 그 밖의 천주교 박해 상황,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책으로 청나라 황제의 조선 내정 간섭과 많은 서양 함대와 병사를 요청하는 내용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서양함대를 불러들이려 하다니, 땅벌집을 쑤셔 놓은 거다. 조정은 발칵 뒤집혀 분노가 하늘에 닿았다. 황사영은 체포되어 대역죄로 극형에 처해졌고 귀양갔던 사람들도 다시 추국을 받게 되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백형 정약현(丁若鉉)의 사위였으니 악당들은 옳거니 하고 정약용을 얽어매려 했다.
신유옥사가 벌어지던 지난 봄 사이의 대계(臺啓)는 거의가 홍희운(洪羲運: 洪樂安의 變名) 이기경(李基慶)이 종용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이번에도 온갖 계책으로 조정을 위협하여 스스로 대관(臺官)의 벼슬자리에 들어가길 요구하고, 계(啓)를 올려 정약용과 그 외 여러 사람들을 다시 추국하기를 청했다. 정약용만은 꼭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이 그들의 심보였다. 한편 정약용은 사년 전 서른여섯 살 때(正祖 21, 丁巳, 1797) 곡산부사(谷山府使)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었는데 때마침 정일환(鄭日煥)이 해서(海西:황해도)에서 돌아와 극력 말하기를, 해서에는 정약용이 그 곳을 떠나고 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해서 만약 정약용을 죽인다면 반드시 옥사를 함부로 했다고 비방하는 여론이 일어날 것이라 하고, 또 황사영의 공초(供招) 곧 진술에 정약용이 관련된 내용이 없었던지, “진술조서[招辭〈供辭〉]에 나오지 않으면 체포[發捕]하는 법이 없다.”라고 하고 영상 심환지(沈煥之)에게 홍낙안 이기경이 올린 계에 대해 움직이지 말 것을 권했다. 그러나 심환지는 이들을 추국할 것을 대왕대비에게 청하니 대왕대비는 윤허했다. 이에 정약용 정약전 이치훈 이관기 이학규 신여권 등이 체포되어 옥에 들어갔다. 위관(委官:죄인을 推鞫할 때 議政大臣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 임명하는 재판관)이 정약용에게 ‘황사영백서’를 보이면서 말하길, “반역의 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조정에서 또 어떤 생각인들 하지 않겠소. 무릇 서양 서적을 한 자라도 본 사람은 죽어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을 추국해 보니 모두 황사영 일당에 관여한 정상이 없었고 또 여러 대신들도 문서 가운데 정약용이 장기에서 지은 예설(禮說), 이아설(爾雅說), 시율(詩律)을 보았으나 모두 안한(安閒)하고 정밀할 뿐 황사영 무리들과 내통한 흔적이 없었다. 이에 측은하게 여기고 어전에 들어가 무죄함을 고했다. 대왕대비도 그것이 모함이라는 것을 살피고 여섯 사람(정약전 정약용 이치훈 이관기 이학규 신여권)을 아울러 참작하여 석방하라 하고, 호남에 근심이 남아 있으니 정약용을 강진현으로 이배(移配)하여 진정시키라 했다. 근심이란 물론 서교에 대한 근심이다. 정약용을 그 후미진 지역에 유배하여 본때를 보임으로써 그 지방 사람들에게 일벌백계로 삼겠다는 심산이었다.
정약용이 추국을 당하고 있을 때 교리 윤영희(尹永僖)가 정약용의 생사를 탐지하려고 대사간 박장설(朴長卨)을 찾아가 옥사의 사정을 물었다. 마침 홍낙안이 오는지라 그는 옆방으로 피했다. 홍낙안이 말에서 내려 방에 들어가더니 발끈 성을 내어 말하기를, “천 사람을 죽이더라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죽이지 않는 것만 못한데 공은 어찌 힘써 다투지 않았소?”라고 하니, 박장설은 “그 사람이 스스로 죽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죽이겠소.”라고 했다. 홍낙안이 나간 뒤에 박장설이 말하길, “답답한 사람이다. 죽일 수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꾀하여 두 번이나 큰 옥사를 일으키고서 또 나더러 다투지 않았다고 책망하니 답답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동짓달에 정약용과 정약전이 같이 출옥하여 나주의 율정점(栗亭店)이라는 한 주막거리에 이르러 형은 현산(玆山:흑산도)으로 아우는 강진으로 갈렸다. 이 율정의 이별이 이승에서 그들 형제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5. 인생의 비태에 정명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약전은 적거(謫居) 십육 년 만에 흑산도에서 세상을 뜨고(59세, 純祖 16, 丙子, 1816, 6. 6), 정약용은 그로부터 이태 뒤인 쉰일곱 살에 해배되어 고향 소내로 돌아가긴 했지만,(純祖 18, 戊寅, 1818. 9. 15〈14〉) 지병은 낫지 않았고 살림은 곤궁했다. 향리에 돌아와 보니 그를 죽이려 했던 서용보가 서쪽 이웃에 물러나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람을 보내어 정약용을 위로하고 친절한 뜻을 표했다. 그러나 그런 말이 겉으로만 인정을 베푸는 척하는 이른바 허덕색(虛德色)인 줄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듬해(純祖 19, 己卯, 1819) 겨울에 조정에서 경전(經田)하는 일에 정약용을 쓰려는 논의가 이미 결정이 되었는데도 서용보가 나서서 극력 저지하는 바람에 허사가 됐다. 서용보는 무슨 억하심정이었을까?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된 지 삼 년(純祖 3, 癸亥, 1803) 겨울에 대왕대비가 특명으로 정약용과 채홍원을 석방하려 했을 때에도 상신(相臣)이었던 서용보가 저지했었다. 이런 일을 겪어 오면서 정약용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시대와 사물의 추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의 말을 들어 본다.
당초 신유 년(순조 1, 1801) 봄 옥중에 있을 때 하루는 시름에 겨워 있는데 꿈에 한 노부(老父)가 꾸짖기를 “소무(蘇武)는 십구 년을 인내했는데 지금 그대는 십구 일의 고통을 못 참는가?”라고 하였다. 출옥하여 헤아려 보니 옥에 있은 지 십구 일이었고 또 향리로 돌아와서(純祖 18, 戊寅, 1818. 9. 15) 헤아려 보니 경신년(正祖 24, 1800)의 유락으로부터 또 십구 년이었다. 인생의 비태(否泰)에 정명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人生否泰可曰無定命乎])⎯⎯「自撰墓誌銘 集中本」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정약용은 정명을 믿었을 뿐 알지는 못한 것 같다. 그의 저술 어디를 살펴봐도 명리를 알고 있는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나아가고 물러남이 시지즉지(時止則止) 시행즉행(時行則行)이라 할 수 없고 지지지지(知止止之) 지종종지(知終終之)를 못했기 때문이다. “두 소씨(漢의 疏廣과 疏受)는 기미를 보고 인끈을 푸니(벼슬을 버리니) 누가 핍박하랴!”(兩疏見機 解組誰逼)라는 『천자문』의 이 말을, 그 뜻은 삼척동자도 알만 하지만 천하의 숙유(宿儒)로서도 이를 몸소 실행하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그를 조선조 제일의 학자로 인정하는 견해에 전혀 이의를 갖지 않으면서도 그에 대해 마음 한 구석에 늘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낙천지명이란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다.
정약용은 본디 전원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현실 참여를 기구했던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유배 중에 쓴 「두 아들에게 보이는 가계」[示二子家誡](嘉慶庚午, 純祖 10, 1810. 首秋書于茶山東菴)라는 글에서 “나는 지금 이름이 죄적(罪籍)에 있으므로 너희들을 시골에서 숨어 살도록 했지만 장차의 계획은 오직 왕성(王城)의 십리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하루아침의 분노를 못 이겨 발끈해서 먼 시골로 이사해 버리는 사람은 천한 무지렁이(甿隸)로 끝나고 말 것이다.”라고 한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국제간의 문물 교류가 신속하지 못했던 시대라 도성 가까이에 살아야 선진 문물을 일찍 접할 수 있다는 것이 표면적 취지였지만 그 취지란 결국 현실 참여의 정신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본다. 해배 후 그는 다짐하길, 은거하면서 경서에 잠심할 거라고 했지만(『歸田詩抄』) 그의 은일은 번번이 좌절을 당한 뒤의 선택이요, 체념이 아니었던가. 부가를 타고 북한강을 오르내리며 오리처럼 살리라던 그 꿈 또한 이런 맥락으로 나는 이해한다.
6. 뜻은 한계와 곡운 사이에 있었다
부가를 타고 북한강을 소요하리라던 그 꿈은 진갑이 되던 해(純祖 23, 癸未, 1823)에 이루어졌다. 진갑(6월 16일)을 두 달 앞두고 그 해 사월 십오일에 장남 학연이 그 아들 정대림(정약용의 장손)을 데리고 춘천으로 납채를 하러 갈 때 동행한 것이지만 정약용은 “뜻은 한계와 곡운 사이에 있었다.”(意在寒溪谷雲之間也)라고 토로했듯이 정작 사월 십구일의 납채례에는 참석치 않았다.
정약용은 아들과는 따로 넓은 어선 한 척을 구하여 지붕 있는 집으로 꾸몄다. 문설주에는 ‘산수록재’(山水綠齋)라는 편액을 손수 쓰고 좌우의 기둥에는 “장지화가 초계와 삽계에 노닐던 취향이요, 예원진이 호수와 묘수에서 노닐던 정취라.”(張志和苕霅之趣 倪元鎭湖泖之情)는 대련(對聯)을 강 건너 은거하던 신작(申綽)에게 청하여 예서체로 써서 붙였다. 정학연의 배에는 “황효수와 녹효수 사이에 노닌다.”(游於黃驍綠驍之間)라 쓰고 기둥에는 “물에 떠다니면서 사는 배.”(浮家汎宅)라는 글과 “물에서 자고 바람을 먹는다.”(水宿風餐)라는 글을 써 붙였다. 그리고 병풍, 휘장, 담요, 이불 등의 장구와 붓, 벼루, 서적 등에서부터 약탕기, 다관(茶罐), 반상기, 국솥 따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갖추었다. 화공도 데리고 가서 “물이 궁하고 구름이 이는 땅이며 버들이 어둑하고 꽃이 환한 마을.”(水窮雲起之地 柳暗花明之村)과 같은 경승지를 만나면 제목을 정하고 그림을 그릴 계획이었으나 초빙해 온 화공 방우탁(方禹度)이 한질(寒疾)이 나는 바람에 동행치 못했다. 이때 해배되기 사년 전(純祖 14, 甲戌, 1814)부터 사단(四端)을 놓고 그와 일곱 차례나 격론을 벌였던 성리학자 이재의(李載毅)도 함께 배를 탔다. 사월 보름날 아침에 소내의 사라담(䤬羅潭)에서 출범하여 열이레에 소양정 아래에 정박하고, 엿새 동안에 걸쳐 소양정 부근과 곡운(谷雲)의 아홉 골짜기를 돌아보고, 스무나흘 아침에 소양정 아래에서 귀범 길에 올라 스무닷샛날에 사라담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기록에 나오는 부가 유람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汕行日記」)
이때 당색과 학풍이 그와 다른 신작에게 배에 달 영련(楹聯)의 글씨를 청한 것이라든가 논쟁자 이재의와 열흘 동안이나 한 배에서 침식을 같이 한 것을 보면, 경계를 긋지 않는 그의 실사구시의 정신이 번득이고 당파성을 떠나려 한 그의 금도(襟度)며 국량이 대인답다. 국량이 작다고 한 형의 젊은 날의 충고를 형이 세상을 뜬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가슴 깊이 새겨 두고 외로이 늙어 가는 아우의 만절(晩節)이 너무나 아름답다.
오늘 어디 갔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답은 않고 멀거니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만, 장기에서 지은 정약용의 시 한 수를 읊을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이 마음 좁아질까 봐
바다 쪽 사립문에 우두커니 서 있네
窮途只怕胸懷窄
臨海柴門竚立遲 ⎯⎯「自笑」抄〈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