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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예수님과 교회 이야기
1. 사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
구약성경 말라기로부터 신구약 중간시대 400년을 지난 후 바로 연결되는 책들이 사복음서이다. 사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에 따라 기록에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며 히브리식 정신을 가지고 기록했다.
마가복음- 여호와의 종으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며 로마식 정신을 가지고 기록했다.
누가복음- 사람의 아들로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며 헬라식 정신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신성)를 나타내고 예수님에 대한 깊은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기록했다.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복음서를 읽을 때 팔레스틴의 지도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3년 반 동안의 예수님의 활동은 주로 팔레스틴 북부 갈릴리와 남쪽으로는 유대(예루살렘과 성전)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달력의 첫 해를 알리는 유월절(아빕월 14일)을 깃점으로 삼는다.
마태복음
저자는 세리(세금을 거두는 자) 마태가 기록했다. 마태는 유대인이었다. 로마가 유대 땅을 지배하던 당시 세리들은 유대인으로서 로마제국을 위하여 세금 거두는 일을 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마태는 레위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었다.(눅5:27, 막2:14) 그는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이다.
마태복음은 맨 먼저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하고 두번째는 갈릴리 사역, 세번째는 유대지방을 중심으로 한 사역을 소개한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기사부터 비유와 가르침들, 기사와 이적을 행하신 일 등을 번갈아 기록하며 조직적이고도 주의 깊게 복음서를 구성했다.
마태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내용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 이사야나 예레미야등 예언서의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오리라한 메시야,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스라엘 왕임을 강조한다. 산상수훈과 같은 탁월한 교훈과 비유의 말씀도 많이 나온다.
또한 예수님의 수난기사와 부활 후 주님이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는 명령을 기록하는 데까지 복음서를 완벽하게 마무리 하고 있다. 공무원으로서 그의 지적인 면이 엿보인다. 주로 유대인 독자들을 겨냥하여 쓴 글이다.
마가복음
저자는 마가요한이라 불리워진 마가가 기록했다고 본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학자들은 마가복음을 주후 60-70년대 사이 기록된 것으로 사복음서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간주한다. 마태나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을 주된 기초자료로 차용한 듯하다. 다른 공관복음서처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계보가 없고 탄생기록도 없으며 곧 바로 복음의 선포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행적과 사역 위주로 빠르게 진행하면서도 주님의 감정까지 세세하게 묘사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주면서까지 사람들을 섬기러 오신 분임을 강조한다.(막10:45)
누가복음
저자 누가는 헬라인이며 의사로서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행16:10) 때 드로아에서 합류했던 바울의 동역자이다.(행16:6-10, 문장의 주어가 그들에서 우리로 바뀜) 바울의 편지 중 많은 것들이 누가의 손에 의해 쓰여졌으며 사도행전도 누가의 기록이다.
누가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방인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이나 사역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한 후에 데오빌로라는 로마총독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누가복음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자세하고 생생하게 다루었으며, 누가복음서에는 주님과 관련된 일화와 독특한 비유들이 가득하다.
누가는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한다.
예수님은 창3:15절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으로 마리아를 통하여 오신다.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할 때,유대인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반면, 헬라인 누가는 마리아의 아버지를 거슬러 올라가 온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 이르고, 또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까지 그 족보에 기록함으로써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했으며 온 인류가 다 예수님과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이 이해하기 쉽고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복음서이다.
누가는 예수님을 인자로서 소개하며, 자비와 긍휼이 풍성한 분임을 나타낸다. 특히 소외계층의 사람들, 이방인들, 여인들, 죄인들에 대하여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자세하게 기록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요한복음
마태.마가.누가복음을 ‘공관복음서’라고 말한다. 공관복음이란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하여 공통된 기록이 많음을 의미한다. 이에 비하여 열두사도 중 나이가 가장 어렸고 예수님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요한은 이 세 복음서들이 다루지 못한 영적인 부분을 심도 있게 다룬다. 특히 예수님의 신성과 영적 진리들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깊은 묵상에서 나온 통찰력을 가지고 기록한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사역을 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려는데 있었다.(요20:30-31)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약 20-30년 후에 기록되었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팔레스틴 주변 세계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문화와 학문, 그리고 언어와 사상들은 헬라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로마의 귀족들 중에는 그리스인을 가정교사나 멘토로서 집안에 두는 이들이 많았고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헬라문화가 환영받고 있었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은 활발하게 이방인의 세계로 확산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헬라철학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우주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었다. 형상과 그 형상을 존재케하는 근본원인(이데아)을 구별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고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은 물질적 세계와 영적세계를 구분하여 영적 세계는 물리적인 세계에서 아주 멀리 있으며, 영적인 세계만이 참 실제이며 물질적인 세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구원은 악하고 무익한 육체로부터 영혼이 탈출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의 육체를 부정함으로 영적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육체를 엄격하게 절제하는 금욕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육체를 방임하는 쾌락주의, 양 극단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러한 헬라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악하고 무익한 육신의 옷을 입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Logos)으로 우주만물을 만드셨지만,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먼 곳에 계시면서 마치 리모콘으로 텔레비전 채널를 조종하듯이 말씀(Logos)으로 이 조그만 지구를 조종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당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어지럽히던 영지주의나 니골라당이 바로 그런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단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신앙과 삶의 괴리를 가져왔다.
로마제국에 이런 플라톤적 사고가 팽만해 있을 때, 사도요한은 그들을 위하여 이전의 복음서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음서를 저술한다. 그는 헬라철학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로고스(Logos)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시니라 이 말씀(Logos)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Logos)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그 영광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말한다.(요1:14)
다시 말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육체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기록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17:21-22)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기도를 이루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천국으로 가셨지만, 이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을 아주 먼 곳에 계신 분으로 생각했던 헬라인들에게 이 사실은 매우 놀라운 소식이었다. 사실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관념적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기독교가 힘을 잃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3장)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소개한다.
구원은 육체를 부정함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며 영생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또 예수님은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아니며, 이제 하나님은 어디서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 거하실 것이라고 한다.
요한은 계속하여 이렇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는 어떤 분인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들을 기록한다.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는 물을 가지고 질 좋은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한 후에는 바로 이어 예수가 생명의 떡이라고 함으로 예수님이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용서하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죄에서 자유하게 하는 분’임을 보여준다. 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통하여 ‘죽음도 이기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능력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또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주님처럼 우리도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심으로 연약한 제자자들을 위로하신다.
요한복음에는 ‘나는…이다’( I am ,,,)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과 생명 그리고 길.진리.생명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어려운 영적진리들을 자세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묘사한다. 우리가 요한복음의 단어 하나 하나를 깊이 묵상하며 읽게 된다면 영적이해가 훨씬 깊고 풍부해질 것이다. 요한복음의 말씀들이 진실로 믿어진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주님으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웠던 요한은 예수님을 만난 뒤, 요한 1.2.3서를 기록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가장 오래(약 80세) 살았으며, 로마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거기서 세상의 마지막 때에 대한 환상을 보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뒤 순교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사도행전
누가복음의 후속 편에 해당하는 책으로 서문이나 수신자가 누가복음과 일치하는 점이나 누가가 바울의 제 2차 선교여행부터 로마 감옥 이후까지도 계속 동행한 것(골4:10-14, 빌1:24, 딤후4:11)으로 보아 누가의 기록임이 분명한 것 같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혹은 ‘선교행전’이라 불리기도 하며 성령의 역사와 사역을 강조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셨던 것처럼 사도행전에서는 이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그들에게 내렸던 지상명령,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전1:8)는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가지고 세계로 나아가는 성령과 사도들의 선교행전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 시작한다. 그들도 주님처럼 병든자들을 고치며, 귀신들을 쫒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셨던 새 언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마지 못해 의무적으로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이 아니라, 새 언약(렘31:31-33) 즉 은혜의 언약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심령에 새겨지자 그들은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처럼 힘있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구약시대 약 이천 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여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통하여 전 세계로 빠르게 확장되기 시작한다.
사도행전은 초창기 기독교가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방의 로마까지 전파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는지를 보여주며,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인도하심을 따라 갈등을 극복해 나가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누가는 기독교가 정체된 전통이 아니며, 유대교의 기원에 뿌리를 둔 초기 기독교의 연장인 동시에 새로운 문화적 맥락에 맞춰 변화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우리는 다양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전파되고 받아들여지는 복음의 능력을 사도행전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예루살렘 회의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말씀으로 해석하며 새로운 비젼 속으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교회공동체의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은 공동체의 영성을 추구하며, 주요 테마는 ‘교회 형성’에 있다.
공동체의 영성은 기도를 통해 생성되고 유지된다. 누가는 기도를 교회 영적 성장의 토대로 이해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았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여 주기 위함이지 베드로나 바울등 어느 개인의 영웅담을 들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이 교회를 인도하시며 또한 성령의 뜻대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했을 때 성령께서는 보다 먼 유럽과 그리스 지역(아가야 지방)까지 전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아시아로 가려던 바울의 길을 막으시고 환상을 통하여 마케도냐(유럽)로 인도하신다.
1)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사도행전 1-12장까지는 예루살렘 교회와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역이 소개된다.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후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그외 온 땅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된다.(행8:1, 9:31) 9장에서는 사울이 회심하여 바울이되고 12장에서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 투옥사건이 일어난다.
13-28장까지는 안디옥(이방인)교회에서 출발하여 세계선교로 나아가는 바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중심인물이지만 그렇다고 바울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울에게는 그를 돕는 충실한 동역자들이 늘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회심(행7:58-8:3, 9:1-31)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바울(사울)은 다소출신으로 바리새인이었으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이었다. 그는 로마 정부로부터 권세를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며 옥에 가두는 등,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현장에도 그가 증인으로 입회해 있었다. 그런데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던 중 시리아의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다. 그리고 바로 복음의 증인이 되어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특별히 그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로 부르셨고, 바울은 거기에 순종하여 지중해 지역을 지나 로마까지 가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을 양육한다. 누가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 헬라지역에서 만나 양육한 이방인 제자이다.
누가는 바울의 생애말기까지 바울을 도우며 거의 그와 함께 지냈다.
바울의 서신서들은 대부분 감옥이나 선교지에 머무는 동안 기록되었으므로, 그의 선교여행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서들을 연결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특별히 바울은 지중해에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에베소와 그리스 지역의 고린도를 복음전도의 거점도시로 정하고 양 쪽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제자들을 양육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에 편지들을 보내어 주의 몸된 교회들이 복음위에 바로 서도록 양육한다.
l 바울의 1차 선교여행(13:4-14:28)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함으로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이 시작된다.(13:2-3) 안디옥(본부)-실루기아-살라미(구브로섬)-바보-버가-안디옥(비시디아) - 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까지 갔다가 갔던 길로 버가까지 돌아와서 버가에서 구브로섬을 지나쳐 안디옥(본부)에 돌아옴으로 1차 선교여행이 끝난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가장 먼저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다
그 때 소수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말씀이 그러한가 하며 경청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대적한다. 바울은 오히려 다수의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안디옥에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는 교인들에게 선교 보고를 하며, 유대인들 보다도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며 주께 돌아왔다고 말한다.
1차 여행 후, 안디옥(본부)교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몇몇 유대인들이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에게 변론을 제기한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보내고,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장로들의 회의가 소집된다. 베드로가 일어나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신 것(고넬료사건)을 증언하고 바울 일행도 선교여행 중에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증언한다. 최종적으로 야고보(예수님 부활후 회심한 예수님의 동생)가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예언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확고히 공포한다.(행15:1-21)
l 바울의 2차 선교여행( 15:36-18:22)-데살로니가전.후서 기록.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후 1차 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지역을 돌아볼 목적으로 2차 선교여행을 계획한다. 마가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 쪽으로 떠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 쪽으로 떠난다.
바울의 2차 선교여행 경로는 안디옥-다소-더베, 이고니온, 루스드라(이곳에서 디모데를 만남) -비시디아 안디옥-무시아-바울은 무시아에서 소아시아의 중심도시인 에베소로 가고자 했으나 성령이 막으셔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지방을 다니다가 다시 무시아로 돌아와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 또 성령께서 막으셔서 드로아로 가게 된다. 드로아-여기서 헬라인 의사 누가가 동역자로 합류하고, 바울은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그곳(유럽)으로 향한다.(행16:9-10)-마게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베뢰아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소동을 피우자 실라와 디모데는 거기 남고 바울은 먼저 아덴으로 떠난다-아가야(그리스반도-아덴, 고린도, 겐그레아) 지방까지 갔다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며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다. 이때, 바울은 천막짓는 일의 동업자이자 복음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난다.
데살로니가 전.후서 고린도에서 기록함.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두 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이다. 바울이 믿음으로 박해를 견디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격려하고, 또 그릇된 종말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의 재림을 바르게 이해시키고 종말의 때를 성실하게 대비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쓴 편지이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에서 양육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데리고 드디어 에베소에 도착한다. 그러나 거기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브리스가와 아굴라만 에베소에 남겨두고 배타고 안디옥 본부로 돌아온다. 2차여행에서 바울의 목표는 소아시아의 중심도시 에베소까지였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멀리 유럽과 그리스 지역(고린도)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고린도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동서가 만나는 항구 도시이며, 동방의 종교와 사상이 소개되는 곳으로 굳건한 유대교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많은 도시이며, 의를 추구하는 자와 의를 배반하는 자들이 뒤범벅이 된 도시’라고 고린도를 묘사한다. 고린도는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있는 도시이며, 로마나 다른 도시들로부터의 이동인구가 많아서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기지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바울의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이 성 중에 나의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18:9-10)
2차 여행 중에 바울은 평생의 동역자를 여럿 얻었다. 디모데, 누가, 그리고 브리스가와 아굴라부부를 선교지에서 만나 말씀으로 양육시킨 후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보낸다.
l 바울의 3차 선교여행(18:23-21:17)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기록
다시 본부 안디옥교회를 출발하여- 다소-이고니온-에베소(고린도전서 기록)-미둘레네-앗소- 드로아-(배타고)-빌립보(고린도후서 기록)-데살로니가-베뢰아-고린도(3개월 겨울을 지내며 로마서 기록)까지 갔다가 다시 베뢰아-데살로니가- 빌립보(배타고)-드로아-앗소-미둘레네(배타고 기오, 사모를 지나)-밀레도-바다라-두로-가이사랴-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에베소에서 바울의 집중사역(약2년 3개월간)-
바울이 2차 여행 때에 복음 전파의 목적지로 에베소를 정했으나 성령께서는 바울을 고린도로 인도하여 거기서 1년 반동안 집중사역을 하도록 이끄셨다. 그래서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 고린도에서 양육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데리고 에베소를 지나오면서 에베소에 잠시 머물렀다가 그 두 사람을 에베소에 두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에베소에 왔을 때,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를 만난다. 그는 이미 구약성경을 근거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요한의 침례만 알았을 뿐 성령을 알지는 못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복음을 자세하게 가르치고 그를 고린도 교회의 목회자로 보낸다.
아볼로는 당시 지성의 센터로 알려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구약성경 70인역이 헬라어로 번역되고 유명한 도서관이 있었던 도시)라는 도시에서 온 사람으로 구약 성경에 능통한 학자였다. 아마도 후에 아볼로가 히브리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지성인 아볼로가 천막짓는 일로 생업을 삼고 있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새로운 복음을 배우고 그들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말씀을 배우는 일에 얼마나 겸손하며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진리의 음성은 박학다식한 학자에게서도 들을 수 있지만 어린아이를 통해서도 들려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항상 겸손하게 마음을 열어 둘 필요가 있다.
바울이 3차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요한의 침례만 알았던 것으로 보아 그들은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한 뒤 곧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를 바울에게 맡기고 로마로 교회를 개척하러 떠난 것 같다.(롬16:3)
바울은 3차 여행 중 에베소에 머물러 처음 3개월 동안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친다. 유대인들 중에는 바울을 비방하는 무리들과 말씀을 경청하는 두 부류가 생겨났다. 그래서 두란노(주로 철학자들의 강연장소)로 장소를 옮겨 2년 동안 집중적으로 제자들을 양육한다.
갈라디아서 에베소에서 기록함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중, 2차 선교여행 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던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의 문제에 대해 소식을 듣는다. 그것은 유대 율법주의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들 안에 들어와 바울의 사도직에 의혹을 제기하고 바울의 복음을 반대하며,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교리를 반박하며 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밝히고 또한 자신이 전한 복음을 확증한다. 갈라디아서는 사람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율법적인 행위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고린도 전.후서 에베소에서 기록함.
또 에베소 사역 기간 중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기록한다. 바울은 2차여행 때, 처음 고린도에 방문하여 1년 6개월을 머물며 심혈을 기울여 제자들을 양육하고 교회를 세웠었다. 그 뒤 아볼로가 거기서 목회를 하다가 에베소로 다시 왔고 아볼로가 떠난 뒤 유대교에서 개종한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도 들어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고린도 교회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여러 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다는 소식과 그 외에도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몇가지 문제를 가지고 바울을 만나러 왔다. 거기에 대해 답변을 한 것이 고린도 전서이다.
바울이 답장을 써서 교회 안에서 음행하는 자와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하여 엄히 징계할 것을 명하자 고린도 교회 안에서 세력을 갖고 있었던 그들이 바울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바울이 답장을 써서 보낸 뒤 어떤 시급한 문제로 인하여 에베소 사역 중에 급히 고린도를 다녀올 일이 있었다.(고후2:1, 12:3) 그 때, 바울을 교회 안에서 공공연히 모함하던 자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운운하며 바울의 면전에서 그를 모욕했다.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눈물로 쓴 편지’라고 불리우는 서신을 디도 편에 보내면서 영적인 아버지로서 고린도 교인들을 엄히 꾸짖는다. 그 편지에 대한 반응과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에베소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바울을 체포하려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에게 답장을 가져오고 있는 디도를 만나러 마게도냐를 향하여 출발한다. 드로아에 이르러 거기서 바울에게 복음의 문이 크게 열렸으나 고린도 교회로 인하여 마음이 편치 못한 그는 드로아를 떠나 디도를 만나러 마게도냐로 향하고, 마게도냐의 빌립보 교회에서 디도를 만난다. 바울은 디도로부터 고린도 교회가 그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사도들과, 죄를 범하고도 교만하게 말했던 자들을 엄히 징계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피땀 흘려 세운 교회가 이렇게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마음의 고통 가운데 눈물과 기도와 편지로서 영적 자녀들을 바로잡는다.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난 바울은 이제 기쁨 가운데 고린도 후서를 쓴다. 그리고 디도 편에 그 편지를 먼저 보내며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부탁해 두었던 연보를 준비해 둘 것을 권한다. 고린도 후서는 복음에 투철한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면(연약함과 두려움, 분노등)을 가장 잘 드러낸 서신이다.
로마서 고린도에서 기록함
3차 여행 중 바울은 이제 마게도냐를 지나 마침내 고린도에 도착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얼마나 감개무량한 만남이 되었을지 아마도 제자들과 부등켜 안고 울지 않았을까?
이제 바울은 편안한 마음으로 고린도에서 겨울을 지내기 위해 3개월 정도 머무는 동안 로마서를 집필한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를 지나 로마에 가고 싶었지만, 그동안 선교지를 돌며 물질로 어려움을 당하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위해 헌금을 모금했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3차 선교여행이 끝날 무렵 그는 고린도에서 로마 방문 계획을 세우며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쓴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로마에는 그가 아는 동역자들과 제자들이 이미 사역(롬16:1-15)을 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 교회의 후원을 받아서 서바나(스페인)로 갈 계획이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복음을 잘 이해하여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잘 화합할 수 있도록 편지를 쓴다. 그는 구약성경에 대한 해박하고도 통찰력 있는 지식을 가지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확증한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각자 자기의 죄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을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의 길을 마련해 놓으셨는데,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누구든지 예수 믿는 자들은 영원한 삶을 얻게 되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바울의 복음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또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히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구원은 한 순간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천국행 티켓을 따고, 이후에는 내 멋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 생애에 걸쳐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매 삶의 고백은 바울처럼 다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고린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울은 성령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배타고 고린도를 떠나 밀레도에 도착하여, 에베소의 장로들을 그곳으로 부른다. 그들에게 에베소 교회를 잘 돌볼 것을 부탁하며 작별인사를 나누는 동안,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받을 고난을 예견하며 유명한 구절을 남긴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초자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중에 바울의 제자들과 몇몇 선지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며 만류하지만 그는 그것을 뿌리친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21:12-13)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에 가면 갇히거나 죽을지도 모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늘 순교자의 자세로 살아온 그이기에 복음 전파 외에 죽거나 사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l 예루살렘에서 체포- 로마까지(21:17-끝)
예언대로 바울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고소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다.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죄목으로 법정 판결도 없이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는데 그 소식을 듣고 로마 천부장이 달려와 바울을 체포해서 그의 목숨을 구한다. 그는 성전을 범하지도 않았고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그가 예루살렘에서 이방인과 같이 있는 것을 본 자들이 착각을 한 것이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미결수로 있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 갖은 간계를 꾸민다. 무죄로 석방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라도 로마로 가기 위해 로마황제에게 상소를 요청한다. 구금 중에도 기회만 있으면 왕이나 총독 앞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간증을 했다. 마침내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우여곡절 끝에 가고 싶었던 로마에 들어간다. 그는 로마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로마의 형제들과 복음 안에서 자유로이 교제할 수 있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로마 선교까지를 기록하며 미완성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지금도 계속 쓰여지고 있다.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저와 여러분에 의하여 계속 쓰여지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과 수많은 제자들에 의하여 앞으로도 계속 쓰여질 것이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생애 말기에 여러분의 ‘선교행전’을 기록으로 남기길 바란다.
2) 사도행전 이후 바울의 행적
바울은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그리고 빌레몬에게 권면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 그 네 편의 편지를 일컬어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이라고 한다.
에베소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온 인류의 구속과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대하여 말한다. 이제 온 인류는 인종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듯이 우리 모두가 인종과 언어를 초월하여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대로 다른 지체들을 섬기며,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도록 성품이 자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옥중에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이다. 빌립보 교회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첫 도시로서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거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기도하면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와 함께 세운 교회이다.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혀있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필요한 물품들과 함께 에바브라디도를 보내어 바울을 섬기게 했는데, 그가 중병에 걸렸다가 회복된다. 바울은 에바브라디도의 건강 문제로 인해 근심하고 있었던 빌립보 교인들을 안심시키고 또 그들이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하기 위해 편지와 함께 에바브라디도를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낸다. 그는 또한 율법주의자들과 반 도덕주의자들이 빌립보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그리스도에게 촛점을 맞추어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골로새서는 바울이 얼굴로는 한번도 보지 못한 골로새 교인들에게 옥중에서 쓴 편지이다. 골로새 지방은 에베소에서 약 10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양육받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1:7) 바울은 이 편지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며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완전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고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교훈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당시 골로새 교회에 침투해 있었던 율법주의와 천사숭배 사상을 배격하도록 엄히 권면한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는 참 자유를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합당히 행할 것을 권면한다.
빌레몬서는 골로새에서 가정교회를 하고 있는 빌레몬에게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낳은 영적인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 쓴 편지이다. 본래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는 물건을 훔치고 주인에게서 도망쳤다가 잡혀서 바울이 있었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바울은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복음으로 양육하여 편지와 함께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그를 영접해 주기를 부탁한다.
l 바울의 4차 선교여행
4편의 옥중서신을 쓰고 난 뒤 바울은 2년 동안의 구금상태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4-5년간 디모데, 디도와 함께 복음을 전한다.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바울은 4차 여행 중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목회하도록 에베소에 남겨두고 떠난다(딤전1:3). 그리고 그레데 섬에 갔을때, 거기에 디도를 목회자로 남겨두고 온다.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는 바울이 선교여행 중에 현지에 남겨두고 온 젊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목회 사역을 격려하고 교묘한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잘 지킬 것을 권면하는 편지이다.
l 바울의 2차 감옥생활(66-67)- 바울의 마지막 편지
디모데 후서
주후 64년, 미친 네로 황제가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고 화제의 원인을 기독교인에게 돌려 기독교인들을 크게 박해한 사건이 일어난다. 바울이 이때 또 투옥되었는데 두번째 감옥은 처음보다는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이 다시 투옥되자, 그동안 바울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그를 떠난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지금도 그렇듯이 사람들은 잘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가난하며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은 피하려고 한다. 바울이 기적을 행하며 힘있게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많은 제자들이 이제 늙고 감옥에 갇힌 바울을 버리고 떠나간다.
누가와 디모데, 디도,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등 소수의 충실한 제자들만 마지막까지 바울 곁에 남아 있는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떠났던 것처럼 임종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외로워하는 바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본다.
딤후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일을 네가 아나니,,,)
딤후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느니라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에게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가 있어서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이제 바울은 떠나지만 믿음의 아들에게 세계 선교의 바톤을 넘겨주고(딤후2:2) 주님의 부르심을 기다린다.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기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
제자훈련을 하는 자들 혹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큰 건물이나 어떤 화려한 업적이 아니라 ‘잘 키워 놓은 제자들’이다. 사역 현장에서 충실한 제자들을 얻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쁨이고 축복이 아닐런지,, 내가 떠나더라도 누군가 나의 뒤를 이어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해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디모데 보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디모데는 그 자체로 바울의 기쁨이요 자랑이며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서신서 중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 많은 편지들이 복음에 대해 중요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깊이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특히 로마서 같은 경우는 여러 번 정독해야 내용이 이해가 될 것이다.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약의 인물과 사건들을 은유적으로 비유하며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서들은 단순한 편지들이 아니라 초대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새로운 신약적인 진리들을 계시로 받아 적은 것들이므로 신.구약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이해한 뒤 자세히 정독하며 연구하기를 권한다.
4. 일반 서신과 요한 계시록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13권 외에도 공동서신이라고 하는 일반서신 8권(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이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초대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혹 자는 바울이나 아볼로로 추측하기도 하는데, 바울은 히브리서를 쓸 수 있을 만큼 구약과 예수님에 대해 영적지혜가 깊지만, 자신이 그동안 기록한 모든 편지들의 서두에서 자기의 이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닌 것 같다. 아볼로는 복음을 정확히 알기 전부터 구약과 예수님을 연결하여 설교할 만한 영적 통찰력과 구약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로서 아볼로가 유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아볼로는 자신이 유명한 사도이거나 장로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서는 천사와 모세보다도 더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주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인간의 죄를 속하신 것과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은 구약의 제사보다 우월하여 단 한번의 제사를 통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 그리고 인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말하고 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친동생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행15장)였던 야고보가 기록한 것이다. 야고보서는 환난과 시험에 처한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며, 바울 서신서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오해하여 방종으로 흐르는 사람들의 거짓 믿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참 믿음은 결과로서 행위가 나타남을 강조 함으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다룬다.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도록 격려하는 서신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와 온유함으로 감당하도록 권면한다.
베드로후서는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덕목을 제시한다. 또한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을 주의하며 주님의 재림 때 심판이 있을 것이므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도록 권한다.
요한1.2.3서는 사도 요한의 편지이다. 요한 1서는 잘못된 교리로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영지주의 이단을 경계하도록 권면하며, 또한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성도들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한다. 요한 2서는 요한일서의 축소판으로 형제들이 사랑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거짓교사나 이단을 사귀지 말 것을 명한다. 요한 3서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가이오의 신실한 사랑을 칭찬한 후, 그와는 반대로 으뜸되기를 좋아하고 순회 전도자들을 접대하지 않는 디오드레베를 고발한다.
요한계시록은 주후 95년경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때,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들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한 책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나 어떤 관점이 전혀 들어 있지 않고 오직 듣고 본 바를 기록한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먼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대한 책망과 칭찬을 언급한 후 심판, 대 환난, 재림, 천년왕국등 종말의 때에 되어 질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록 목적은 첫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장래 소망을 품고 믿음을 지키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온 교회에 전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반드시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셋째는 택함받은 자들이 거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음을 알고 소망을 가지라는 메시지이다.
요한 계시록을 읽을 때 주의 할 점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듯이 계시록의 내용들을 시간적 흐름을 따라 사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계시록은 영적인 목적에 따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건들을 동일선상의 다른 방면에 배치해 놓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l 에필로그
태초에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는 세밀한 계획 가운데 천지를 창조하셨다. 시대마다 각 역할분담도 달리 하셨다. 구약이 성부시대라면 신약은 예수님시대, 그리고 사도행전 이후 지금까지는 성령하나님 시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성부 하나님이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오실 성자 하나님을 증거하셨다.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성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셨고 자신의 성품과 사역을 통하여 항상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셨다. 성자 하나님의 시대가 가고 성령 하나님이 오셨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며,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있게 살도록 돕는 보혜사 성령님이다. 이렇게 시대적인 특징에 따라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은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시면서, 동시에 각 시대의 필요에 따라 삼위일체로서 협력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한 중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사랑(예수. 구원)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에는 계속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가 동전의 양면처럼 나온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중심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거룩함)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흙 먼지에 불과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게 만드신 것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이요 말할 수 없이 큰 사랑이었다.
창세기 2-3장의 선악과 사건만 없었다면 우리는 인간 역사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알뿐, 저주나 심판은 알지 못했을 것이며, 성경도 이렇게 길게 기록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 조차 하나님이 왜 그런 저주의 선악과를 만드셨는지 은근히 원망하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고 살아간다. 어쩌면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진실이다.
신.구약성서 읽기를 마무리 하면서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 그런 의문이 사라졌는지 질문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선악과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적인 목표를 어디에 두셨을까?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사람을 하나님처럼 영화로운 존재로 만드셨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한가지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것이 순종의 시험(선악과)이다.
그러나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선악과를 먹은 우리의 조상 아담을 원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아담은 이 시험에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 누가 아담이 되었어도 그 시험을 통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리라는 것을 아시고,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인간의 약함을 담당해 줄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낼 계획을 갖고 계셨다.(엡1:3-4, 3:9,11) 사탄은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알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선악과만 범하면 영원히 자기 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탄의 생각을 모르실리 없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는 선악과 언약의 깨어짐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세상에 보낼 발판을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다. 모든 인류가 육체적으로는 아담의 후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비밀스런 계획이 이미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선악과의 존재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의 사랑을 의심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그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지옥불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 아래 팔렸던 온 인류를 구원하셨을 뿐아니라 우리와 같이 연약한 몸을 입고 얼마 동안 이 땅에 사시면서 우리에게 삶의 본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사는 동안 나타내셨던 사랑, 인내, 너그러움, 겸손 그리고 불의에 대한 분노등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셨던 권세와 능력도 행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이것은 죄로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맏형으로서 우리를 형제로 받기 위해 기꺼이 죽으셨다. 동생들을 단지 영원한 지옥에서 건져주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화로운 존재, 즉 예수님 자신의 신분과 동등한 위치로 다시 빚어주신 것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함을 입는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2:11)
또한 주님은 친히 연약한 육신의 삶을 사셨기에 우리의 모든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자애로운 큰 오빠(형)이다. 이것은 얼마나 기이하고 놀라운 사실인가?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장차 더 영화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그 앞에 선악과 시험를 두신 것이었다. 만일 선악과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프로그램화된 로보트처럼 세상에서 단순하고 지루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선악과 시험은 지금 우리의 삶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선악과의 본질은 사람이 피조물된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교만)이다.
이것은 내 삶에서 창조주(주인)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서 내 뜻대로 살려는 마음, 즉 자아이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경험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이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 것이다. 계속 삶의 주도권 문제로 하나님과 갈등을 일으키며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생을 전폭적으로 맡기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있다.
왠지 하나님께 삶을 다 맡기면 즐기고 싶은 것들 다 버려야 하고 재미없고 손해 볼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친 아버지이다. 그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아버지께서 아까워할 것들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문제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면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사셨던 그 자체가 고난이셨듯이 우리가 연약한 육신으로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 또한 고난이다. 평범한 우리의 삶에는 드라마틱한 순교나 영웅주의 같은 것은 없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겪는 고뇌와 삶의 과정들 또한 순교못지 않게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살면서 믿음을 잘 지키고 선악과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여러가지 상급과 면류관을 받을 것이며, 또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저 천국에서 영화로운 몸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 올림픽에서 받을 썩어질 영광(금메달)을 위해서 밤낮 쉬지 않고 훈련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세상나라들이 주는 금 면류관만 못하겠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아무 칭찬과 영광을 받지 못하고 살지라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영광 그 자체만으로도 소망이며 기쁨이지 않은가? 사람이 육체로 살아가는 기간은 사실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상받기 위한 기회로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들이다. 믿음을 지키고 환란과 시험을 잘 통과하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실 상급은 우리의 상상과 이해를 초월할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하게 다가올 영원한 나라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겪려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계시의 책이다.
계2: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2:10-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거나 시험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주를 배반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계21: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 불못은 불지옥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전투하는 자이다. 자기 죄와의 싸움도 있고, 공동체의 부패를 막기위한 싸움도 있으며, 사탄의 불화살에 대항해야 하는 싸움도 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 때의 형편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모든 성도들에게 악과 맞서 싸울 것을 궘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싸움을 포기하는 것은 이미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거짓 복음을 대적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이것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은 영생을 얻지만 듣지 않아서 모르거나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은 분명히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사도 요한이 본 에덴동산(천국, 새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선악과 나무는 없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강가에는 오직 생명나무만이 있다. 그러므로 천국은 이 땅에서 선악과의 시험을 거쳐 승리한 자들이 가는 곳이다. 아담은 마귀의 시험으로 넘어졌으나 우리 주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과 십자가 시험을 통과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의 길이 아니라 시험에서 승리한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사28:16) 천국에는 더 이상의 시험이나 저주가 없다. 우리는 거기서 영광스런 우리 아버지의 나라, 태초에 아버지께서 소원하셨던 거룩한 가족 공동체의 완성된 모습을 마침내 보게 될 것이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참고도서
1. 노우호저, “쉽게 이해되는 신구약 중간사”, 도서출판 하나.
2. 이애실저, “어? 성경이 읽어지네”, 두란노 출판사.
3. 레노바레(Renovaré) 성경
부록:
1. 성경지도
2. 성경통독세미나 안내장
첫댓글 사복음서의 설명과 배경이 좀 더 설명되면 좋겠습니다. 왜 복음서들의 기술이 그렇게 다른지, 그럴수 밖에 없게 된 역사적 배경들을 좀 설명해 준다면 복음서의 내용들을 보다 근거있게 이해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실 이 자료는 처음부터 강의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설명이 많이 부족합니다. 설명을 조금씩 덧붙이다보니 본래 80페이지 였던 것이 110페이지를 넘어버리고 말았어요. 길어질수록 나중에 번역이 힘들지 않을까?ㅠㅠ